우리는 더 이상 예수님이 피 흘려 사신 그 한 영혼을 내 교만으로 짓밟으면서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다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종교적 자기기만(마취제)에 빠져 양심의 화인을 맞은 상태로 살아가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예수님이 피 흘려 사신 그 한 영혼을 내 교만으로 짓밟으면서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다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종교적 자기기만(마취제)에 빠져 양심의 화인을 맞은 상태로 살아가서는 아니 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누가복음 17:1-4).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7장 1-4절 말씀을 읽고 헬라어 성경으로 읽었을 때 몇 개의 헬라어 단어과 문장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어 그 단어들과 문장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a)
첫째 헬라어 단어는,
“σκάνδαλα”(스칸달라)(“실족하게 하는 것”)입니다(1절).
(i)
누가복음
17장 1절에 복수형태인
'σκάνδαλα(스칸달라)'로 등장하며,
바로 뒤이어
1절 끝과
2절에 동사 형태인
'스칸달리세(σκανδαλίσῃ)'가 각각
1번씩(총 2번) 사용됩니다. 명사와 동사 어원을 모두 포함하면 이 단락에서 총
3번 관련 단어가 쓰였습니다. 이 단어의 구체적인 성경적 의미와 맥락입니다(인터넷):
1.
단어의 문자적 의미
함정의 미끼 걸이:
'스칸달론(σκάνδαλον,
단수형)'은 원래 동물을 잡기 위해 함정에 장치한
'미끼를 걸어두는 나무 막대기'나 '덫의 발판'을 뜻했습니다.
걸림돌: 누군가를 걸어 넘어뜨리기 위해 길에 의도적으로 놓아둔 장애물을 의미합니다.
2.
구체적인 영적·성경적 의미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스칸달라(실족하게 하는 것)'는 단순히 누군가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해프닝이 아닙니다.
죄에 빠지게 하는 유혹:
타인을 영적으로 유도하여 죄를 짓게 만들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게 만드는 모든 계략과 행동을 뜻합니다.
배교의 원인:
믿음의 길에서 이탈하게 만들고,
구원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가게 만드는 결정적인 장애물입니다.
3.
오늘 본문(눅 17:1-4)에서의 맥락
약자를 보호하라는 엄중한 경고:
2절의 “작은 자 중 하나”는 사회적 약자나 믿음이 연약한 초신자를 뜻합니다.
이들을 실족하게 하면 연자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을 정도로 무서운 심판이 따릅니다.
교회의 공동체적 책임:
성도는 서로가 죄에 빠지지 않도록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하며,
만약 형제가 죄를 지으면 경고하되 회개할 때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함으로써 실족의 고리를 끊어내야 합니다.
·
저는 이 “σκάνδαλα”(스칸달라)(실족하게 하는 것)라는 헬라어 단어를 묵상할 때 같은 단어가 나오는 로마서
16장 17절 말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σκάνδαλα)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
여기서 “거치게 하는 자들”[σκάνδαλα(스킨달라)]이란 ‘성도들을 잘못된 길로 유도하여 영적 죽음의 함정에 빠뜨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서 바울 서신에서 교회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거짓 교사와 분열 조장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진리를 왜곡하여 성도들을 걸려 넘어지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교회 공동체를 쪼개놓는 영적인 덫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3가지 특징입니다(인터넷).
1.
첫째로,
이 거치게 하는 사람들은 사도들의 교훈(복음)을 거스릅니다.
이들은 이미 성도들이 사도들로부터 배운 바른 신앙의 기준(기독교 핵심 진리)에서 벗어난 다른 복음이나 사상을 슬그머니 가지고 들어옵니다.
2.
둘째로,
이 거치게 하는 사람들은 목적이 주님이 아닌
'자기 배(탐욕)'에 있습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교회를 위하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화려하게 포장하지만,
본질은 공동체를 이용해 자신의 사욕을 채우거나,
자기를 따르는 파당을 만들어 대접받으려는 탐욕이 가득합니다.
3.
셋째로,
이 거치게 하는 사람들은 교활하고 아첨하는 말을 씁니다.
이들은 아주 매끄럽고 매력적인 말,
듣기 좋은 부드러운 언어(smooth
and flattering speech)를 구사합니다.
분별력이 부족하고 마음이 순진한 성도들의 감정을 자극하여 교묘하게 미혹합니다.
n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 거치게 하는 자들(σκάνδαλα)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17절)고 명하였는데 여기서 “살피고”란 헬라어 단어 “σκοπεῖν”(스코페인)은 군대에서
'망을 보는 보초병'이나 '정찰병'이 적을 감시할 때 쓰는 단어로서 교회가 영적인 긴장감을 가지고,
공동체 안에 복음을 훼방하고 분열을 일으키는 가르침이나 움직임이 없는지 철저히 분별하고 예의주시하라는 뜻입니다(인터넷).
# 그리고 “떠나라”라는 헬라어 단어 “ἐκκλίνετε”(에클리네테)는 그러한 거치게하는 사람들과 엮이지 말고
'단호하게 발걸음을 돌려 피하라'는 강력한 명령형 동사입니다.
거짓 가르침이나 분열의 영은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에,
감정적인 타협을 하지 말고 영적인 관계를 과감히 단절하라는 경고입니다(인터넷).
·
또한 저는 이 “σκάνδαλα”(스칸달라)(실족하게 하는 것)라는 헬라어 단어를 묵상할 때 같은 단어가 나오는 고린도전서
1장 23절(십자가의 걸림돌)
말씀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σκάνδαλον)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
이 말씀의 의미는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영광스러운 왕으로 올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저주받은 나무(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를 도저히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 없었는데 이것은 그들의
'편견'이 오히려 구원의 길을 막는 덫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은 자기 생각[잘못된 비성경적인 메시아 기대(messianic
expectation): 메시아가 오시면 정치적 해방(political
freedom)과 경제적 풍부함(economic
prosperity)과 사회적 공의(social
justice)를 자기들에게 주실 줄 기대했음(김세윤)]과 교만(선민족 사상과 모세의 율법을 자기들만 받았다는 영적 자부심과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음)
때문에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인터넷).
n
결국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만든 메시아의 틀'과 '선민이라는 종교적 기득권(교만)'에 갇혀 계시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십자가는 그들의 거짓된 확신과 교만을 폭로하는 걸림돌이었던 셈입니다(인터넷).
(ii)
저는 이 “σκάνδαλα”(스칸달라)(실족하게 하는 것)라는 헬라어 단어를 묵상하면서 우리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반영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거짓된 확신과 교만을 폭로하는 걸림돌이되어 우리로하여금 양심에 찔림 속에서 우리이 죄를 자복하고 회개케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될 때 우리 안에 일어나는 거부감과 양심의 찔림은,
사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굳어버린 마음을 깨뜨리시는 은혜의 시작입니다. 유대인들처럼 오늘날의 우리도
"나는 이만하면 괜찮은 그리스도인이다",
"내가 이만큼 봉사하고 헌신하니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라는 현대판 선민의식과 종교적 교만(거짓된 확신)에 빠지기 쉽습니다.
-
하지만 십자가는 우리의 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이 살을 찢고 피를 흘려야만 했을 정도로 내가 비참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폭로합니다.
이 사실이 우리의 자존심과 교만을 걸어 넘어뜨리는[스칸달론(σκάνδαλα)]
순간, 비로소 참된 회개와 복음의 수용이 시작될 것입니다(인터넷).
(iii)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사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 없으나”(Ἀνένδεκτόν ἐστιν τοῦ τὰ
σκάνδαλα μὴ ἐλθεῖν)(아넨덱톤 에스틴 투 메 엘데인 타 스칸달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눅17:1). 이 헬라어 문장을 직역하면 "실족하게 하는 것들(영적인 덫)이 오지 않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입니다. 즉,
세상에는 반드시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인터넷).
·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데에는 대단히 중요한 현실적·영적 이유가 있습니다:
1.
이 말씀이 내포한 구체적 의미
a.
죄로 타락한 세상의 필연적 현실 고발
이 말씀은 세상이 처한 영적인 실상을 그대로 폭로합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이 세상은 공중 권세 잡은 사탄의 영향력 아래 있으며,
인간의 본성은 이미 이기심과 교만으로 부패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는 타인을 넘어뜨리고,
상처 주고,
죄로 유혹하는 영적인 덫이
'구조적이고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b.
영적 긴장감과 분별력 촉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일종의
'예방주사'를 놓으시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고 신앙생활을 할 때,
마치 온실 속의 화초처럼 아무런 시험도,
나를 넘어뜨리는 걸림돌도 없는 유토피아를 기대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세상과 교회 공동체 안에는 늘
'스칸달라'(실족하게 하는 것)가 도사리고 있으므로,
성도는 항상 영적으로 깨어 보초를 서듯[롬 16:17의 “σκοπεῖν”(스코페인)(“살피고”)] 경계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부여합니다.
c.
환경의 필연성과 개인의 책임성 분리
가장 중요한 신학적 지점은
"있을 수밖에 없다"라는 세상의 필연성이,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의 면죄부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누가복음
17장 1절 후반부에는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도다"라고 이어집니다. 세상이 악하여 시험이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역사적·영적 현실이지만,
내가 그 악의 도구가 되어 누군가를 넘어뜨리는 덫[(스칸달론)]의 역할을 하는 순간,
그 책임은 고스란히 본인이 져야 한다는 엄중한 인과관계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2.
현대 그리스도인을 향한 연결점
이 구절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시험 없는 환경"을 달라고 기도하기보다,
"시험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나 자신이 남을 넘어뜨리는 덫이 되지 않기를"
구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세상에 덫이 없을 수는 없으나,
내 안의 거짓된 확신과 교만이 작동하여 교회와 이웃을 걸어 넘어지게 하는 비극만큼은 철저히 회개함으로 막아야 한다는 강력한 도전입니다(인터넷).
-
그런데 실제로 수많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이 범했던 똑같은 오류,
즉 '거짓된 확신(자기 의)'과 '영적 교만'에 사로잡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기는커녕 이웃과 교회를 걸어 넘어지게 만드는 거대한
'스칸달론(걸림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안에서 이 거짓된 확신과 교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스칸달라'(실족하게 하는 것)(눅17:1)로 작동하고 있는지 세 가지 현상으로 짚어보고자 합니다(인터넷):
a.
'값싼 은혜'에 기반한 거짓된 확신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면죄부처럼 여기는
'거짓된 확신'에 빠져 있습니다.
삶이 없는 종교성:
회개에 합당한 삶의 열매(윤리적 정직함,
희생, 사랑)는 없으면서,
구원의 확신만을 주술적으로 붙잡고 살아갑니다.
걸림돌이 되는 이유:
세상 사람들은 교인들의
'교리적 고백'이 아니라
'삶의 태도'를 봅니다.
말과 삶이 전혀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위선(Hypocrisy)은 불신자들이 교회로 나아오는 길을 정면으로 막아서는 가장 큰 덫이 되고 있습니다.
b.
'종교적 기득권'이 된 영적 교만
유대인들이 선민의식과 율법의 소유를 자랑하며 타인을 정죄했듯,
현대 그리스도인들도 정통 교리와 오랜 신앙 경력을 일종의 기득권으로 삼는 교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독선과 배타성:
이웃을 긍휼히 여기고 섬겨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도덕적·영적 우월감을 가지고 훈계하거나 정죄하려 듭니다.
걸림돌이 되는 이유:
상처받고 위로가 필요한 영혼들,
혹은 믿음이 연약한 이웃들이 교회의 이러한 독선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모습에 실망하여 실족하고 공동체를 떠나게 만듭니다.
c.
'번영신학'이라는 현대판 메시아 기대
김세윤 교수님이 지적한 유대인들의 잘못된 메시아 기대(정치적 해방,
경제적 풍부함)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
'예수 믿으면 무조건 세상에서 성공하고 복 받는다'는 번영신학으로 둔갑했습니다.
세속화된 기독교:
십자가의 좁은 길,
낮아짐, 자기를 부인하는 삶은 사라지고,
예수의 이름을 빌려 세상의 권력과 물질을 탐하는 것이 믿음 좋은 것으로 칭송받습니다.
걸림돌이 되는 이유:
교회가 세상과 똑같이 돈과 권력을 숭배할 때,
십자가의 복음은 그 능력을 잃고 조롱거리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를 영적으로 침체시키고 세상이 교회를 혐오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함정입니다.
"나 자신이 스칸달론입니다"라는 고백의 시급성
예수님은 세상에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고 하셨지만,
동시에 "그렇게 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라고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저 사람이 문제다,
저 교회가 문제다"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내 안의 거짓된 확신과 교만이 작동하여 나 자신이 누군가를 걸어 넘어뜨리는 덫(스칸달론)으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라고 양심의 찔림 속에서 날마다 자복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n
그리고나서 우리는 더 이상 우리 각자가 삶의 자리에서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이 돼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디딤돌'이 되기 위해 회복해야 할 복음의 구체적인 가치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성품과 사역을 바탕으로 우리가 구체적으로 회복해야 할 실천적 가치들을 세 가지입니다(인터넷):
1.
자기를 비워 종이 되는
'켄오시스’[Kenosis(비움)](빌2:7)
'디딤돌이 되는 첫걸음은 내 권리와 권위를 포기하고 타인을 위해 낮아지는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
빌립보서 2장 7절은 예수님이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동등한 권리를 완전히 포기하시고 인류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디딤돌이 되신 사건입니다.
구체적 실천:
내 생각의 옳음,
내 신앙적 경력,
내 사회적 지위를 내세워 대접받으려는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내가 딛고 올라서는 자리가 아니라,
'타인이 나를 딛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도록'
기꺼이 내 자존심과 기득권을 내려놓는 종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2.
정죄를 이기는
'긍휼(Compassion,
함께 아파함)'
걸림돌은 사람을 심판하고 판단하는 교만에서 오지만,
디딤돌은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복음의 본질:
예수님이 만난 죄인들과 세리,
창녀들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바른 율법적 잣대'
때문에 상처받고 실족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죄를 정당화하지 않으시면서도,
그들의 아픔과 영적 무지를 깊이 동정하셨습니다.
구체적 실천:
이웃의 약점이나 도덕적 허물을 보았을 때 고자세로 비판하는 확신을 멈추어야 합니다.
대신
"나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저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죄인의 자리에 함께 서서 눈물 흘려주는 영적 겸손을 회복해야 합니다.
3.
일곱 번씩 일곱 번이라도 품는
'끝없는 용서와 화평'
누가복음 17장 1-2절의 '실족' 경고 바로 뒤(3-4절)에 예수님이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고 하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복음의 본질:
인간의 교만은 타인의 잘못을 절대 잊지 않고 마음의 응어리로 남겨두어 공동체에 덫을 놓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라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탕감받았음을 선언합니다.
구체적 실천:
교회와 가정 안에서 내게 상처 준 사람을 향한 미움과 복수심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자체가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가장 무서운
'스칸달론'(실족하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먼저 손을 내밀고 화평을 구하는 ‘화평케하는 자’(Peacemaker)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요약하자면,
디딤돌이 되는 그리스도인은
"내가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입니다. 내 안에 내가 가득 차 있으면 남을 치는 걸림돌이 되지만,
내가 십자가에서 죽고 주님의 겸손과 긍휼이 흘러나올 때 비로소 우리는 실족한 영혼들을 일으켜 세우는 딛고 일어설 돌이 될 수 있습니다.
(b)
둘째 헬라어 문장은,
“λυσιτελεῖ αὐτῷ εἰ
λίθος μυλικὸς
περίκειται περὶ τὸν τράχηλον αὐτοῦ καὶ
ἔρριπται εἰς τὴν θάλασσαν”(뤼시텔레이 아우토 에이 리도스 뮐)(“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입니다(눅17:2하). 이 말씀의 원어 직역입니다:
“만일 맷돌이 그의 목에 둘러매어지고 그가 바다 속으로 내던져진다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오히려 더 이익이 된다(더 낫다)”(인터넷).
(i)
예수님께서 이토록 무시무시하고 자극적인 비유를 드신 데에는 당대 유대 사회의 신앙적 배경이 깔려 있습니다(인터넷):
1.
가장 비참한 수장 형벌
유대인들에게 가장 명예롭고 중요한 장례 문화는
'조상의 묘실에 함께 묻히는 것(매장)'이었습니다. 반면,
거대한 돌에 매여 깊은 바다에 던져지는 수장(산 채로 물에 빠뜨려 죽이는 형벌)은 당시 로마나 헬라,
수리아 등에서 극악무도한 중죄인이나 반역자에게만 행하던 처형 방식이었습니다.
2.
영원한 저주를 뜻하는 바다
유대인들의 세계관에서
'바다'는 단순히 물이 많은 곳이 아니라,
사탄과 악한 영들이 도사리는
'음부의 세력',
'혼돈과 저주의 장소'를 상징했습니다.
바다에 던져져 시신조차 찾지 못한다는 것은 구원의 소망이 완전히 끊어지고 영원한 형벌과 저주를 받아 파멸하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공포스러운 장면이었습니다.
3.
경고의 핵심:
'실족케 하는 죄'의 무서움
예수님의 핵심은 수장당하는 것이 좋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 저주스러운 형벌을 받아 비참하게 죽는 것이,
네 안의 교만과 거짓된 확신으로
'작은 자 하나'를 실족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것보다 차라리 가볍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의 신앙을 무너뜨리는 죄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참혹하고 무거운 죄인지를 극단적인 대조를 통해 엄중하게 경고하신 것입니다.
·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접한 교회의 현실은 다른 사람의 신앙을 무너뜨리는(실족하게 만드는)
죄를 무수히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이 죄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참혹하고 무거운 죄인지를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성도와 교회가 이 죄의 참혹함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구조적인 영적 문둥병(감각 상실)의 원인입니다(인터넷):
a.
죄의 개념을
'사적인 영역'으로 축소한 결과
현대 기독교는 죄를 지나치게
'하나님과 나만의
1대 1 문제' 혹은 '개인적인 도덕성 문제'로만 축소시켰습니다.
내가 기도 안 한 것,
내가 음란한 생각을 한 것,
내 개인의 성품 문제는 죄라고 느끼며 괴로워합니다.
하지만 '내 말과 행동 때문에 곁에 있는 형제가 실망하여 교회를 떠나고 신앙을 버린 것'에 대해서는
"그 사람이 믿음이 약해서 상처받은 거지,
내 탓은 아니다"라며 영적인 책임을 쉽게 회피해 버립니다.
공동체적 죄에 대한 감각이 완전히 마비된 것입니다.
b.
인과관계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범죄
누군가를 폭행하거나 돈을 훔치는 물리적인 죄는 눈에 보이기 때문에 즉각적인 죄책감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내 안의
'영적 우월감',
'독선적인 말 한마디',
'위선적인 삶'이 누군가의 영혼에 독을 타고 서서히 영적 죽음으로 몰아넣는 과정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을 영적으로 살인하는 무서운 무기를 매일 휘두르면서도,
눈앞에 피가 보이지 않으니 자기가 얼마나 잔인한 죄를 짓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는 비극이 일어납니다.
c.
'값싼 구원론'이 준 영적 마취제
가장 심각한 문제는 교회가 성도들에게
"예수 믿었으니 이미 모든 죄는 과거,
현재, 미래까지 다 용서받았다"는 식의 값싼 위로를 남발한 것입니다.
이 잘못된 확신은 예수님의 엄중한 경고(연자맷돌의 화)
앞에서도
"어차피 난 구원받았으니 나에겐 해당하지 않는 심판"이라며 필터를 쳐버립니다.
예수님이 피 흘려 사신 그 한 영혼을 내 교만으로 짓밟으면서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다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종교적 자기기만(마취제)에 빠져 양심의 화인을 맞은 상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c)
셋째 헬라어 단어는,
“ἐπιτίμησον”(에피티메손)(“경고하고”)입니다(눅17:3).
(i)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단어는 한국어 성경에
"경고하라"
혹은 "책망하라"로 번역된 단어입니다. 앞서 우리가 묵상한
'실족(스칸달라)'의 맥락과 연결할 때,
이 단어는 교회가 왜곡된 사랑이나 방조에 빠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매우 무겁고 엄격한 복음적 가치를 담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원어적 의미와 본문에서의 구체적인 신학적 성격을 인공지능이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원어적 의미와 뉘앙스
'에피티메손'(ἐπιτίμησον)(경고하라)은 동사 '에피티마오(ἐπιτιμάω)'의 명령형태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그러지 마라"고 부드럽게 권유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최후통첩성 책망:
법정에서 판사가 죄를 확정하고 엄하게 꾸짖거나,
권위자가 상대방의 잘못을 강력하게 제지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복음서에서의 쓰임새:
이 단어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쫓아내실 때'(눅 4:35), 혹은 '거친 바람과 바다를 꼬짖어 잔잔하게 하실 때'(눅 8:24) 쓰였습니다. 즉,
악의 세력이나 파괴적인 상황을 향해 강력한 영적 권위로
"당장 멈추라"고 명하는 단어입니다.
2.
오늘 본문(눅 17:3)에서의 구체적인 의미
예수님이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에피티메손(경고/책망)하라"고 하신 데에는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① 죄의 전염과 실족의 고리를 끊는 방어 기제
죄는 누룩과 같아서 방치하면 공동체 전체를 오염시키고,
결국 수많은
'작은 자들'을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거대한 덫(스칸달라)으로 발전합니다.
형제의 죄를 보고도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침묵하거나 방조하는 것은 대단히 무책임한 방관입니다.
따라서 '에피티메손'(경고/책망하라)은 그 죄가 더 이상 자라나 다른 사람을 실족시키지 못하도록,
영적인 보초병으로서 죄의 확산을 단호하게 차단하는 사랑의 가위질입니다.
② 형제를 파멸에서 건져내기 위한 회개의 유도
이 책망의 목적은 상대를 정죄하여 매장하거나 쫓아내기 위함이 결코 아닙니다.
3절 후반부에는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이어집니다.
인간은 교만하여 자신의 죄를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영적 맹인이 되기 쉽습니다.
이때 사랑하는 형제가 영적인 권위와 아픔을 담아 단호하게 죄를 짚어줄 때(에피티메손), 비로소 양심의 찔림을 받고 회개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즉,
형제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아픈 수술과 같은 책망입니다.
3.
현대 그리스도인이 놓치고 있는 분별점
오늘날 교회는 이
'에피티메손'(경고/책망하라)의 균형을 잃어버렸습니다.
한쪽에서는 형제의 죄를 보아도 불편한 관계가 되기 싫어서,
혹은 뒷말을 듣기 싫어서 모른 척 덮어둡니다(방조).
다른 한쪽에서는 십자가의 낮아짐 없이 자기 우월감과 교만으로 상대를 정죄하고 비난합니다(비판).
예수님이 말씀하신
'에피티메손'(경고/책망하라)은 내 안의 거짓된 확신과 교만을 빼고,
오직 공동체의 거룩함과 저 형제의 영혼을 살리겠다는 십자가의 눈물로 행하는
'거룩한 경고'입니다.
요약하자면,
누가복음 17장 3절의 “ἐπιτίμησον”(에피티메손)(경고/책망하라)은 귀신과 폭풍을 꾸짖으셨던 예수님의 권위처럼,
형제를 파멸로 이끄는 죄를 향해
"당장 멈추라"고 강력하고 단호하게 책망하는 사랑의 영적 제어장치입니다.
·
저는 “ἐπιτίμησον”(에피티메손)(경고/책망하라)는 단어를 묵상할 때 잠언
27장 5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대놓고 꾸짖는 것이 숨겨진 사랑보다 낫다”(새번역), “드러놓고 꾸짖는 것이 속으로만 사랑하는 것보다 낫다”(공동번역)].
1.
“ἐπιτίμησον”(에피티메손)(경고/책망하라)의 히브리어 표현
'에피티메손'의 원형 동사인
'에피티마오(ἐπιτιμάω)'는 구약 성경(히브리어)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LXX)에서 주로 다음과 같은 히브리어 단어들을 번역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가아르 (גָּעַר, Gaar): "꾸짖다",
"경고하다",
"억제하다"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강력한 주권적 꾸짖음(예: 바다를 꾸짖어 말리심,
사탄을 꾸짖으심)을 표현할 때 주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야카흐 (יָכַח, Yachach): "책망하다",
"옳고 그름을 따지다",
"판단하다"라는 뜻입니다.
인간 관계 속에서 잘못을 바로잡아 주기 위해 단호하게 권면하는 행동을 뜻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형제를 향해
"에피티메손 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구약의 전통 속에서
"죄의 세력을 억제하도록(가아르) 단호하게 잘잘못을 따져 책망하라(야카흐)"는 무거운 성경적 배경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2.
잠언
27장 5절과의 깊은 연관성
"면책(개역개정: 드러내 놓고 하는 책망)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잠 27:5)
① 용어와 의미의 일치:
'드러내 놓는 책망'
잠언 27장 5절의 구약
70인역(LXX) 헬라어 본문을 보면,
'면책(공개적인 책망)'을 “ἔλεγχοι ἀποκεκαλυμμένοι”(엘렝코이 아포케칼륌메노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엘렝코스(책망)'는 누가복음
17장 3절의 '에피티마오'와 신약성경에서 언제나 상호보완적으로 쓰이는
'죄를 폭로하고 바로잡는 책망'의 동의어입니다.
즉,
잠언이 지혜의 관점에서 말한
"드러내 놓고 하는 책망"을, 예수님은 복음의 관점에서 공동체를 살리는 실제적 명령("경고/책망하라")으로 가져오신 것입니다.
② "숨은 사랑"은 때로
'걸림돌(스칸달론)'이 됩니다.
잠언은 친구의 잘못을 보고도 관계가 어색해질까 봐,
혹은 미움받기 싫어서 마음속으로만 사랑한다며 침묵하는 것을
"숨은 사랑(κρυπτομένης
φιλίας)"이라고 부르며 경계합니다.
형제가 죄에 빠져 교회의 다른 작은 자들을 실족시키고 있는데도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침묵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방조입니다.
그 숨은 사랑(방조) 때문에 형제는 회개할 기회를 잃고 공동체는 덫에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③ 아픈 책망이 진짜
'디딤돌'입니다.
바로 뒤이어 나오는 잠언
27장 6절은 "친구의 아픈 책망(Wounds
from a friend)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에피티메손(책망)'은 들을 때 살을 찢는 것 같은 아픔을 줍니다.
그러나 그 아픈 경고가 작동해야만 죄인이 자신의 거짓된 확신과 교만을 깨닫고 양심의 찔림 속에서 자복하게 됩니다.
결국,
관계의 단절을 무릅쓰고 형제의 영혼을 위해 단호하게 건네는 책망이야말로,
그를 파멸에서 건져내는 가장 온전한 복음적 디딤돌이 되는 것입니다.
최종 결론:
예수님의 “에피티메손(눅 17:3)”은 구약의
“가아르/야카흐(꾸짖고 바로잡음)”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잠언 27장 5절의 정신과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죄를 보고도 숨어서 침묵하는
'값싼 사랑'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실족을 막고 형제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의 눈물을 담아 아프게 면책할 수 있는
'용기 있는 거룩함'이야말로 이 시대 교회가 회복해야 할 잠언과 복음의 핵심 가치입니다(인터넷).
(d)
넷째 헬라어 단어는,
“μετανοήσῃ”(메타노에세)(“회개하거든”)입니다(눅17:3).
(i)
이 단어는 다음 구절인
4절에는 동일한 동사의 현재 직설법
1인칭 단수 형태인
'메타노오(Μετανοῶ, 내가 회개하노라)'가 1번 사용됩니다.
따라서
'회개하다'라는 동일한 어원의 동사(메타노에오)는 이 단락에서 총
2번 쓰였습니다(인터넷):
1.
원어적 의미:
'마음과 방향의 근본적인 전환'
'메타노에세'는 동사
'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의 가정법 형태입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 복합어로서 그 어원에 매우 역동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메타(μετά, ~의 뒤에,
바꾸어) + 노에오(νοέω, 생각하다, 마음을 품다):
직역하면 '생각을 바꾸다',
'마음을 돌이키다'라는 뜻입니다.
구체적 뉘앙스:
단순히 과거의 잘못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거나 후회하는 감정적 상태(Remorse)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옳다고 믿고 걸어가던 삶의 방향,
가치관, 중심축을 완전히
180도 바꾸어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전인격적인 전향을 의미합니다.
2.
조건절로서의 구체적 의미
(3절: "만일 회개하거든")
실제적 돌이킴의 확인:
예수님은 무조건적인 방조나 덮어놓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3절의
'메타노에세'는 앞서 행해진 단호한 책망(에피티메손)에 반응하여,
죄를 지은 형제가 자신의 교만과 확신을 깨뜨리고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구체적인 변화가 일어났을 때를 뜻합니다.
용서의 전제 조건:
복음의 위대한 용서(ἄφες αὐτῷ)는 죄를 정당화하는 자가 아니라,
이 '메타노에세(회개)'를 통해 스스로 낮아진 자에게 흘러 들어갑니다.
3.
고백적 행위로서의 의미
(4절: "내가 회개하노라")
반복되는 연약함의 인정:
4절의 '메타노오'는 죄를 지은 형제가 스스로 입을 열어
"내가 가던 길을 돌이키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역동적인 장면입니다.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인간은 연약하여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똑같은 죄의 덫(스칸달론)에 걸려 넘어질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가 매번 진심으로
'메타노오'하며 돌아온다면,
공동체는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매번 새로운 기회를 주며 품어주어야 한다고 명령하십니다.
4.
누가복음 17장
3절의 맥락에서 본
'메타노에오'(회개)의 영적 원리
이 ‘회개’[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라는 단어는 다음과 같은 위대한 복음의 비밀을 폭로합니다.
① 거짓된 확신과 교만이 깨어지는 유일한 통로
유대인들이나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스칸달라(걸림돌)'가 되는 이유는 자기 생각과 종교적 기득권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의 단호한 책망(에피티메손)을 들었을 때,
교만한 인간은 본능적으로 변명하거나 반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메타노에오'가 작동하면,
"내가 맞고 저 사람이 틀렸다"는 자기 의와 거짓된 확신이 십자가 앞에서 완전히 박살 나게 됩니다.
자신의 비참한 죄를 비로소 정직하게 직면하고 시인하는 단계입니다.
② 구약의 '슈브(שׁוּב)'와의 연결
이 단어는 구약의 히브리어
'슈브(Shuv)'의 개념을 고스란히 이어받았습니다.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을 향해
"돌아오라!"고 외쳤을 때의 그 단어입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방향을 틀어 하나님께로 걸어가는 동적인 개념입니다.
따라서
3절의 회개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상황을 모면하려는 종교적 제스처가 아니라,
남을 실족하게 하던 교만의 삶을 완전히 멈추고 겸손과 종의 자세로 돌아서는 실제적인 삶의 변화를 전제합니다.
③ 무한한 용서(4절)를 여는 유일한 열쇠
예수님은 형제가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복음은 아무에게나 값싸게 주어지는 면죄부가 아닙니다.
철저한
'메타노에오'를 통해 자기 파멸을 인정하는 자에게만,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와 공동체의 용서가 부어집니다.
이 회개가 있을 때 비로소 걸림돌이었던 인생이 공동체를 세우는 디딤돌로 뒤바뀌는 영적 기적이 일어납니다.
최종 요약:
누가복음 17장 3절의 “”(메타노에세)(“회개하거든”) 감정적인 후회를 넘어,
자신의 거짓된 확신과 교만을 십자가 앞에 못 박고 삶의 방향을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통째로 돌이키는 근본적인 전환을 의미합니다.
아픈 책망(에피티메손)을 달게 받아들이고 이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는 자만이 참된 용서와 회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
저는 이 “μετανοήσῃ”(메타노에세)(“회개하거든”)이란 단어를 묵상할 때 주기도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가 생각나면서 이러한 질문이 생각났습니다: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이 우리에게 회개를 해야만이 용서해야 한다는 말인가요?’ 인공지능의 답변입니다:
-
“주기도문의 이 고백은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핵심 질문 중 하나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타인의 회개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가
'먼저 마음으로 용서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누가복음 17장의 '회개하면 용서하라'는 말씀과 주기도문의
'조건 없는 용서'가 어떻게 복음 안에서 모순 없이 하나로 연결되는지 세 가지 관점으로 명확하게 정리해 드립니다.
1.
관계의 성격이 다릅니다:
'개인적 원수'
vs '공동체의 권징'
주기도문 (마태복음 6장): 개인의 마음과 영적 상태
여기서의 용서는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나 해를 입었을 때,
내 마음에 미움과 복수심이라는
'독'을 품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내게 찾아와 사과하거나 회개하지 않더라도,
내 영혼이 죄와 미움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을 먼저 놓아주는 것(Forgiveness)을 뜻합니다.
누가복음 17장: 교회 공동체의 거룩함과 관계의 완전한 회복
본문은 단순한 개인적 감정을 넘어,
공동체 안에서 죄를 지어 다른 사람들을 실족하게 만드는(스칸달라) 구체적인 상황입니다.
이때는 그 죄가 공동체를 망치지 않도록 책망(에피티메손)해야 하고,
상대방이 회개(메타노에오)할 때 비로소
'끊어졌던 교제와 신뢰가 완전하게 복원(Reconciliation)'됩니다.
즉, 상대가 회개하지 않아도 내 마음으로는 용서할 수 있지만,
상대가 회개하지 않으면 부서진 관계의 완전한 회복(연합)은 불가능하다는 구조적 차이가 있습니다.
2.
'탕감의 선행성':
우리는 이미 무한한 용서를 받았습니다
주기도문의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고백은,
내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내는
'공로적 조건'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8장 일만 달란트 비유:
우리는 하나님께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일만 달란트(수조 원)의 죄의 빚을 조건 없이 먼저 탕감받은 자들입니다.
용서의 본질:
내게 백 데나리온(수백만 원)의 빚(상처)을 진 이웃을 용서하는 것은,
내가 이미 하나님께 받은 그 압도적인 용서의 크기를 깨달은 자가 마땅히 보여야 할
'은혜의 반응'입니다. 따라서 상대가 나에게 회개하느냐 아니냐는 내가 용서해야 할 유일한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3.
질문자님의 깊은 묵상과의 연결:
'거짓된 확신의 해체'
질문자님이 앞서 탁월하게 고백하신 대로,
십자가는 우리의 교만과 거짓된 확신을 폭로합니다.
만약 우리가 ‘저 사람이 나에게 제대로 무릎 꿇고 눈물로 회개해야만 난 용서하겠다’라고 고집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영적 교만이 자라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의롭다’는 확신에 갇혀,
주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조건 없이 품으셨던 그 은혜의 디딤돌에서 스스로 내려오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십자가 밑에서 날마다 죄를 자복하듯,
나에게 상처 준 이웃을 향해서도 내 중심성을 깨뜨리고 용서의 손길을 먼저 내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최종 요약
주기도문의 기도는 상대방이 내게 회개해야만 용서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상대의 태도와 상관없이,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내가 먼저 마음으로 미움을 버리고 용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다만, 누가복음 17장은 그 죄인이 진심으로 돌이킬 때(회개) 비로소 공동체 안에서 온전한 연합과 신뢰의 회복이 완성된다는 또 다른 복음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인터넷).
(e)
마지막 다섯째 헬라어 단어는,
“ἄφες”(아페스), “ἀφήσεις”(아페세이스)(“용서하라”)입니다(눅17:3, 4).
(i)
이 단어들은 기독교가 말하는 용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장 역동적인 이미지로 보여주는 핵심 단어입니다.
이 두 단어의 형태적 차이와 원어 속에 담긴 구체적인 신학적 의미입니다(인터넷):
1.
두 단어의 문법적 형태와 뉘앙스 차이
두 단어는 모두
'놓아주다', '면제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아피에미(ἀφίημι)'에서 파생되었습니다.
“ἄφες” (아페스)( 3절): 과거 능동태 명령형입니다.
형제가 회개하는 그 순간,
망설이거나 과거의 일을 재지 말고
"즉시, 단번에 용서하라"는 단호한 명령입니다.
“ἀφήσεις”(아페세이스)(4절): 미래 능동태 직설법입니다.
헬라어 문법에서 미래형은 종종 강력하고 지속적인 명령(Imperatival
Future)의 성격을 가집니다.
즉,
하루에 일곱 번을 넘어와도
"너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용서하게 될 것이다(용서해야만 한다)"라는 영구적인 의무를 부여합니다.
2.
'아피에미(용서하다)'가 가진
3가지 구체적 의미
예수님이 사용하신
'아피에미'(ἀφίημι)라는 단어는 단순히
"마음을 풀라"는 감정적 권고가 아니라,
대단히 실제적인 법적·물리적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① 빚을
'면제하여 탕감해 주다'
(Legal Cancelation)
당대 고대 사회에서 이 단어는
'채무자가 갚아야 할 돈이나 빚을 완전히 지워주는 것'을 뜻했습니다. 주기도문의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에서 '죄'의 원어 역시
'빚(ὀφειλήματα)'입니다. 형제를 용서한다는 것은 그가 내게 입힌 상처와 피해의 대가를 요구할 수 있는 나의
'법적 권리'를 복음 앞에서 기꺼이 포기하고 그의 빚 문서를 찢어버리는 행위입니다.
② 묶인 것을
'풀어서 자유롭게 내보내다'
(Release)
이 단어는
'포로를 사면하여 감옥에서 내보내거나,
손에 쥐고 있던 줄을 놓아 새를 날려 보내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고 마음에 앙금을 품고 있으면,
그 사람을 내 마음의 감옥에 가두고 밧줄로 꽁꽁 묶어두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아페스(용서하라)'는 그 사람을 묶고 있는 밧줄을 잘라 그를 내보내 줄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 미움의 감옥에 함께 갇혀 있던 나 자신을 영적으로 완전히 해방시키는 행위입니다.
③ 과거의 잘못을
'멀리 던져버리다'
(Dismiss)
구약의 시편 기자가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
103:12)"라고 고백한 것처럼,
'아피에미'는 그 잘못을 다시는 기억나지 않는 곳으로 완전히 멀리 던져 격리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곱 번을 다시 찾아와도 매번
"아페세이스(용서할 것이다)"
하라는 것은,
앞서 지은 서너 번째의 죄를 다시 끄집어내어 대조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매번 깨끗하게 지워버리라는 뜻입니다.
묵상 흐름과의 연결:
'은혜의 디딤돌'
우리가 이 단어의 의미를 주기도문,
그리고 앞서 나눈
'그리스도인의 교만 해체'라는 맥락과 연결할 때 위대한 복음의 결론에 도달합니다.
우리가 형제의 죄를 내 손에 꽉 쥐고 흔들며
"네가 똑바로 회개하나 보자"라고 심판주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내 안에 또 다른
'스칸달론(교만의 덫)'이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아페스'(용서)를 통해 내 손의 힘을 빼고 그 형제를 하나님께로 날려 보내라고 하십니다.
내가 그를 내 손에서 놓아줄 때(용서), 비로소 우리는 사람을 걸어 넘어뜨리는 맷돌 같은 인생에서,
상처받은 영혼들이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용서의 디딤돌'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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