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이유 (6)
[골로새서 1장 1-8절]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4-6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과 디모데가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는 이유를 4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바로 골로새 교회의 신실한 성도들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 때문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였습니다[(골1:4상)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 현대인의 성경 번역으로 말한다면, 바울과 디모데가 감사한 첫 번째 이유는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을 잘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잘 믿고 있었다는 말은 골로새 교회의 신실한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굳게 서 있었다는 말입니다(견고한 믿음). 우리가 믿음에 굳게 서서 우리가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은 믿음(신앙) 생활을 하려면(1:23) 우리는 예수님 안에 깊이 뿌리를 박아야 합니다(2:7).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 인생의 기초로 삼아야 합니다(고전3:11).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그 결과 우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질 수 있길 기원합니다(살전1:8).
둘째로, 사도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의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4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현대인의 성경) “모든 성도를 사랑한다는 말을 우리가 들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녀를 사랑하는 우리 부모님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자녀들이 주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볼 때에 감사하고 기쁘지 않습니까? 교회로 말하자면, 장로님과 제가 여러분 성도들이 주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볼 때 주님께 감사하며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이미 요한일서 편지에서 묵상한 말씀처럼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요일3:23-24).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죽음에서 벗어나 이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3:14, 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이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들인 천국 시민권자답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도 받았습니다(빌3:2). 여기서 천국 시민권자답게 산다는 것은 천국의 계명인 예수님의 이중계명대로 우리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 우리의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한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임을 배웠습니다(마22:37-39). 특히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함에 있어서 적어도 3가지로 우리에게도 말씀해 주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배웠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자는 (1)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요일3:16). (2) 재물을 가지고 궁핍한 형제를 도와줍니다(17절). (3)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합니다(18절).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인 것처럼(약2:14, 17, 20, 26) 행함이 없는 사랑은 죽은 사랑입니다. 주님의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 (요일3:11)에 불순종하고 있으면서 “말로만 사랑”하고 있다는 것(18절)은 죽은 사랑입니다. 순종이 없는 믿음은 거짓된 믿음인 것처럼 순종이 없는 사랑은 거짓된 사랑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요 거짓된 믿음인 것처럼, 행함이 없는 사랑은 죽은 사랑이요 거짓된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4절 하반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 신실한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 왜 하나님께 감사한지 그 두 번째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기 때문입니다[(현대인의 성경) “모든 성도를 사랑한다는 말을 우리가 들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처럼 진정으로 예수님을 잘 믿고 있다면(4절, 현대인의 성경) 분명히 우리는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서로 사랑하고 있을 것입니다. 좀 반대로 생각한다면, 만일 우리가 주님의 계명에 불순종하여 서로 사랑하지 않고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잘 믿고 있는게 아닙니다. 그 이유는 사랑은 믿음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Love is the evidence of
faith)(요13:35; 15:12; 갈5:6; 약2:14-20, 요일3:14)(KJV 성경 주석).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했던 두 번째 이유가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3-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데 바울은 “에바브라”를 통해 그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기쁜 소식을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종이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배웠습니다. …”(7절상, 현대인의 성경). 이 에바브라 하는 사람은 바울과 디모데와 함께 하나님의 종인 된 사람이요 바울과 디모데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7절) 주석가들은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회를 개척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죤 맥아더 목사님에 의하면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간 사역하고 있었을 때(행19장) 시작이 되었고, 골로새서 2장 1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골로새 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얼굴을 보지 못한 사람들로서 에바브라(1:5-7) 골로새 교회를 시작한 것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MacArthur).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4장 12절에 가서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에바브라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여러분에게서 온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 에바브라가 문안합니다. 그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고 굳게 서서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게 해 달라고 언제나 열심히 기도하고 있습니다”(현대인의 성경). 이 말씀을 보면 에바브라도 사도 바울과 디모데처럼(1:3)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는데 그 기도 내용이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고 굳게 서서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4:12, 현대인의 성경). 이 얼마나 중요하고 귀한 기도입니까? 성도들이 (1) 하나님의 뜻을 알 뿐만 아니라 확신하는 것과 (2) 믿음에 굳게 서 있는 것과 (3)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 이 세 가지 기도 제목이 얼마나 우리에게도 중요한 기도 제목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서 바울에게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보면 에바브라 하는 예수님의 종이 골로새 교회 성도들의 상황을 바울에게 전달해 준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달해 준 내용 중에 하나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잘 믿고 모든 성도를 사랑한다는 말”이었습니다(1:4, 현대인의 성경). 사도 바울이 에바브라를 통해 또 들은 소식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성령님 안에서” 그들이 “사랑으로 생활한다는 소식”입니다: (8절, 현대인의 성경)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현대인의 성경) “성령님 안에서 여러분이 사랑으로 생활한다는 소식을 우리에게 전해 준 사람입니다”]. 여기 골로새서 1장 8절에서 사도 바울은 “성령님 안에서”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사랑으로 생활한다는 에바브라를 통해 들은 소식을 말했는데 2장 2절에 가서는 그들이 “사랑 안에서 연합하”길 원한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성령님 안에서”란 말과 “사랑 안에서”란 말씀에 관심을 갖게 되어 묵상할 때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이러한 생각의 근거는 갈라디아서 5장 22절 상반절의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 제가 볼 때 골로새 교회의 신실한 성도들은 예수님을 잘 믿고 있었기에 성령님 안에서 사랑으로 생활하므로 사랑 안에서 (잘) 연합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장 14절에 가서는 이렇게 편지를 썼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사랑은 그 모든 것을 완전히 하나로 묶어 주는 띠와 같은 것입니다”(현대인의 성경).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지난 주 화요일 암투병중인 심수은 사모님이 선배 사모님을 통해 사모님을 위하여 기도하는 카톡방에 마음의 글을 나눴습니다. 그 글의 일부분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여전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제 자신을 보며 눈물만 흘리고 또 흘리고 있습니다. 한참 울다보니 당연한 듯 항암치료는 시작되었고 아무 이유도, 반항도 없이 이 독한 약을 제 몸에 넣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이 상황에서, 이 아픔에서부터 도망치고 싶습니다. "하나님~ 제가 지금 지쳤나봐요. 아프지도 않고, 슬프거나 외롭지도 않게 쉬고 싶어요. 주님 품에 안겨 편히 쉬고 싶어요." 쉼이 필요할 때 우리에게 편한 안식처가 되어주시는 주님, 지금 저에게 가장 따뜻하고 편한 안식처가 되어주시길 기도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더 주님의 넓고 따뜻한 품에 안겨 쉬길 바랍니다. 지치거나 낙심하지 않고 슬픔에 잠겨 하염없이 울지 않도록, 이 시간을 잘 보내고 어린아이처럼 주님 품에 안겨 찬양 부르며 기쁨과 감사함으로 예배 드릴 수 있도록 힘주시길 기도합니다. ...” 저는 제 자신도 왜 그러는지 잘 모르게 제 마음이 좀 무겁고 우울까지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주 지난 주 목요일 아침에 에베소서 6장 말씀을 묵상하면서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제 자신이 완전 무장해야 할 하나님의 무기 중에 마귀의 불 화살을 막을 수 있는 믿음의 방패를 가져야 한다는 것(엡 6:11, 16, 현대인의 성경)을 좀 더 많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제 마음에 사랑하는 투병 중에 있는 지체들의 고통을 생각하게 만들어 그들의 죽음까지 생각하게 만들므로 제 마음을 우울하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수요기도회 때 원로 목사님의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말씀 (6)"(요 19:28-30) 설교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죽음의 권세를 잡은 마귀를 멸망시키시고 일생 동안 죽음의 공포에서 종살이하는 모든 사람들을 해방시키셨다는 진리(히2:14-15, 현대인의 성경)로 제 우울한 마음을 붙들어 주시고 도와주심으로 말미암아(16절) 제 우울한 마음을 소성케 되고 힘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 이 영적 싸움에 승리하면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저는 오늘 밤 비행기로 주님의 인도하심 따라 한국에 나아갑니다. 그 이유는 사랑하는 심수은 사모님과 가족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또한 4월 20일이 다섯 번째 심장 수술을 앞둔 이종미 자매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덩달아 인터넷 사역을 감당하고자 나아가려고 합니다. 제가 다음 주일과 고난 주간을 지나서 부활주일 전날 토요일에 다시 돌아오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과 함께 종려주일과 고난주간과 성금요일 기도회 등 함께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와 기도를 드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특히 고난주간을 생각할 때 매년 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권면한 것처럼 고난 주간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할 뿐만 아니라 reach out(다가가길) 또 다시 미리 권면합니다. 비록 우리 교회는 고난 주간 특별 새벽기도회는 없고 성금요일 기도회와 토요 새벽기도회 밖에 없지만 기도하면서 실제로 행동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조금이나마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 수 있길 기원합니다. 제 생각엔 우리가 그럴 수만 있다면 주님 보시기에 의미 있는 고난 주간이라 생각합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억하고 기념을 하면서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되 특히 고통 중에 있는 지체들을 사랑하므로 근심 걱정 물러가고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경험하길 기원합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이 우리 각자 마음속에서 충만하게 비취므로 우리가 가서 주님의 사랑을 비취므로 주님이 주시는 화평함과 기쁨을 충만하길 기원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주님 중심된 가정 공동체와 교회 공동체를 추구하는,
제임스 김 나눔
(2022년 4월 3일, 주님이 세우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예수님의 이중계명을 성령 안에서 신실하게 순종하길 기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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