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말씀
김창세 선교사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말씀 (1)
[누가복음 23장 34-43절]
오늘부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군인들에게 붙잡혀
끌려가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거의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신 말씀들은 다 진리요 복음이었습니다(마26:34; 27:11; 막14:62; 15:2; 눅23:3,
28-31; 요18:20, 21, 23, 34, 36, 37; 19:11). 이
말씀 외에 예수님께서 고통이 심해서나 괴로우셔서 하신 말씀은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2명의 강도들이 골고다로 끌려갔었을 때 아마도 그들은 별의 별 말들을 다 했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53장 7절의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성경 이사야 53장 7절을 보십시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렇게 침묵하셨던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는 일곱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1) 첫 번째 말씀은 누가복음 23장 34절입니다: “…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
(2) 두 번째 말씀은 누가복음 23장 43절입니다: “…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말씀은 한편 강도에게 하신 말씀임).
(3) 세 번째 말씀은 요한복음 19장 26-27절입니다: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26절)(“자기 어머니”에게 하신 말씀임),
“… 보라 네 어머니라 …”(27절)(“사랑하시는 제자”에게 하신 말씀임). (4) 네
번째 말씀은 마태복음 27장 46절(막15:34)입니다: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 말씀의 뜻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임).
(5) 다섯 번째 말씀은 요한복음 19장 28절입니다: “… 내가 목마르다 ….” (6) 여섯 번째 말씀은 요한복음 19장 30절입니다: “… 다 이루었다 ….” (7) 마지막 일곱 번째 말씀은 누가복음 23장 46절입니다: “…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 이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의 일곱 말씀을 보면 마태복음(27:46)과 마가복음(15:34)은 똑같은 말씀으로서 예수님의 말씀이 한 번 나오고,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마태/마가/요한복음)에 나오지 않는 예수님의 말씀이 세 번 나오고,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세 번 나옵니다. 이렇게 사 복음(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일곱 말씀이 나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첫 번째 말씀인 누가복음 23장 34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을 귀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성경 누가복음 23장 34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현대인의 성경) “그때 예수님은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드린 말씀으로서 기도의 말씀입니다(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말씀을 나누는 기도를 드려야 함. 즉,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중심된 기도를 드려야 함). 이 예수님의 기도의 대상은 “아버지”이셨고,
기도의 내용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였습니다. 여기서 “저들”이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가리키지만, 넓게 보면 우리도 포함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알지 못해서(무지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참고: (새찬송가 144장, “예수 나를 위하여” 2절 가사) “십자가를 지심은 무슨 죄가 있나 저 무지한 사람들 메시야 죽였네”]. 우리가 죄를 많이 범하는데
알지 못하고 죄를 지을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예수님께서 하신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는 말씀(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말씀하신 것임)을 알지 못했다가 나중에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습니다(22절).
성경은 용서 받는 죄가 있고 또한 용서 받지 못하는 죄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 요한일서
5장 16-17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현대인의 성경)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보게 될 때 그것이 죽을 죄가 아니라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죽을
죄가 있습니다. 그것에 대하여 나는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의롭지
못한 모든 것이 죄이지만 죽지 않을 죄도 있습니다”]. 알지 못하고 범한 죄는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죄 용서를 구하신 기도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누가복음을 기록한 저자 누가가 쓴 사도행전을 보면 하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드리신 예수님의
기도를 응답하시사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신 수많은 이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아(행2:38) 구원을 받았습니다:
(행2: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행4: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행5:14)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행6:1, 7)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행21:20)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 지금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죄 용서를 구하신 기도는 응답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고 계십니다(롬8:34).
성경 히브리서 7장 2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기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언제나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해 중재의 기도를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직도 영원하신 영원히 살아 계신 예수님께서는(24절, 현대인의 성경) 자기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온전히 구원하시고자 그들을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25절, 현대인의
성경).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딤전2:4, 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버지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눅23:34)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간구하되 우리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사
하나님의 뜻대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는 말씀(롬8:26-27)과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는 말씀(34절)을 믿음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죄 사함을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례 요한처럼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해야 함(눅3:3). 전파하되
우리는 성령 충만한 사도 베드로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음으로 담대하게 전파해야 합니다(행2:14-36). 그리했을 때 우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라고 묻는 이들에게 우리는 “여러분, 모두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죄 사함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님의 선물을 받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들과 주 우리 하나님이 부르실 멀리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신 것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38-39절, 현대인의 성경). 또는 우리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해야 합니다(16:31). 그러므로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온
집안 식구도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33-34절). 그리할
때 허물과 죄로 영적으로 죽었던 자들이(엡2:1, 현대인의 성경)
다시 살아났으므로 우리가 마땅히 즐거워하고 기뻐할 것입니다(눅15:32,
현대인의 성경).
우리 다 같이 새찬송가 150장 “갈보리 산 위에” 가사를 우리의 기도 제목으로 삼고 찬양
드리십시다: (1절) 갈보리 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
표라 험한 십자가를 내가 사랑함은 주가 보혈을 흘림이라, (2절) 멸시
천대받은 주의 십자가에 나의 마음이 끌리도다 귀한 어린 양이 세상 죄를 지고 험한 십자가 지셨도다, (3절)
험한 십자가에 주가 흘린 피를 믿는 맘으로 바라보니 나를 용서하고 내 죄 사하시려 주가 흘리신 보혈이라,
(4절) 주님 예비하신 나의 본향 집에 나를 부르실 그 날에는 영광 중에 계신 우리
주와 함께 내가 죽도록 충성하리, (후렴)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우리 모두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님의 십자가를
사랑하십시다.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표요 주님께서 보혈을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의 죽음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결심”하십시다(고전2:2). 우리 모두 험한 십자가에 주님께서 흘리신 피를 믿는 맘으로 바라보십시다.
나를 용서하고 내 죄 사하시려 주님께서 흘리신 보혈입니다. 우리 모두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험한 십자가를 믿음으로 붙드십시다.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말씀 (2)
[누가복음 23장 34-43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두 번째 말씀입니다: “…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눅23:43).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네게”와
“네가”는 누구입니까?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는 바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행악자”(39절), “강도 둘”(마27:38)중에 한 명입니다. 그 한 명이 예수님의
오른편에 매달렸던 강도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왼편에 매달렸던 강도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눅23:33,
현대인의 성경). 그 당시 강도가 받을 형벌은 십자가형뿐 만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강도들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것을 보면 그들은 강도 중에 강도였음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이 두 강도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성경 마태복음 27장 44절을 보십시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여기서 “이와 같이”란 그 두 강도들도 앞서 대제사장들이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예수님의 희롱한 것과 같이 욕했다는 것입니다. 성경 마태복음 27장
41-43절을 보십시오: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현대인의 성경) “대제사장들도 율법학자들과 장로들과 함께 예수님을 조롱하며 남은 구원하면서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군.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자야,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그러면 우리도 믿겠다. 하나님을 믿고 또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으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이제 구원하실 테지.' 하였고”]. 이 두 강도들 중 한 명은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예수님을 모역했음(현대인의 성경)](눅22:39).
그 때 다른 강도 “하나”는 “그 사람”(강도)에게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예수님)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꾸짖었음[(현대인의 성경) “다른 죄수는 그를 꾸짖으며 '너는 똑같이
사형 선고를 받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우리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런 벌을 받아도 싸지만 이분은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하였다”](40-41절).
이렇게 말한 후 그 강도는 예수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42절). 여기서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는 예수님의 재림을 말씀합니다. 이 강도는 이 귀한 진리, 복음을 깨달았습니다. 성령님께서
그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사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예수님을 의지하도록 복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음(43절).
여기서 “낙원”이란 천국을 말씀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마태복음 27장 41-44절을 보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들이 예수님을 욕했을 때(44절)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이나 장로들처럼 예수님에게 “남은 구원하면서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
군.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자야,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그러면 우리도 믿겠다. 하나님을 믿고 또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으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이제 구원하실 테지”라고 말했을 텐데(41-43절, 현대인의
성경) 누가복음 23장 39-41절을 보면 그 두 강도들 중 한명만 “’당신이 그리스도가 아니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하시오’하며
예수님을 모욕”했고(39절, 현대인의 성경) 다른 한 강도는 그렇게 예수님을 모역한 강도를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40-41절). 어떻게 예수님을 욕했던 두 강도들 중 한 명은 “당신이 그리스도 아니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하시오”라고 예수님을 모욕(비방)한 반면에(39절) 다른 강도는 예수님을 모역한 그 강도를
꾸짖은 후 예수님에게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구했을까요?(42절)
예수님을 모욕(비방)한 강도가 말한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하시오”(39절, 현대인의 성경)란 말은 ‘진정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당신 자신과 우리(두 강도들)를 십자가에서 정죄를 받아 사형(형벌)을 당하지 않고(죽지 않고) 살게 하라’는 조롱이 섞인 비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강도를 꾸짖은 다른 강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렇게 사형 선고의 벌을 받아도 싸지만
예수님은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했습니다(40-41절, 현대인의
성경). 즉, 이 강도는 비록 예수님께서 자기와 다른 강도처럼 동일한
정죄를 받으셨지만 자신과 다른 강도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벌을 받아도 싸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할 죄를 지으시지
않으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강도가 예수님께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42절, 현대인의 성경)라고 말했을 때에는 예수님을 비방(모욕)한 다른 강도처럼
십자가에서 죽지 않는 육신의 구원(육신의 생명이 사는 것)을 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자신을 기억해 주시사 자기도 예수님과 함께 “낙원”(천국)에 들어가 영원히 사는 것(영생)을 원했다는 것입니다(42-43절).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구원의 은혜요 구원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원하시는 대로 이 강도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반면에
다른 강도는 완악하게 하셨습니다(롬9:15, 18).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아 구원을 받은 그 강도는 행악자요 죄를 지었기 때문이 십자가의 못 박혀 죽은 형벌을 받아도 싼 악인이었지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영생)을 받아 천국에 가게 된 것입니다.
새찬송가 87장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 찬양 가사처럼 시온성 보다 더 찬란한
저 천성 떠나서 이 세상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쓰라린 고통을 다 견디시고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끝까지 사랑”하시되(요13:1) 행악자 강도 한 사람까지 사랑하시므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눅23:43). 이렇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습니다(요14:6).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당신과 온 집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행16:31, 현대인의 성경).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말씀 (3)
[요한복음 19장 25-27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세 번째 말씀입니다: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 보라 네 어머니라 …”(요19:26-27).
오늘 본문 요한복음 19장 25-27절을 보십시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이 말씀을 보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4명의 여자들과 한명의 남자가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먼저 4명의 여자들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그 어머니”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말씀합니다. (2) “이모”는 예수님의 어머님인 마리아의 동생으로서 예수님의 12제자들 중 야고보와 요한의 아버지인 세베대의 아내(마27:56) “살로메”입니다(막15:40).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마태복음 27장 56절과 마가복음 15장 4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람들을 비교하면 됩니다: (마27:56) 막달라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 (막15:40)
막달라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3)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란 여인은 누구인지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성경 마태복음 10장 2-4절과 마가복음 3장 1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에서 알패오의 아들들이
글로바의 아들들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즉, 이름 “글로바”와 “알패오”가
동일한 인물이라는 설입니다. 사복음서들을 대조하여보면 작은 야고보와 요세가 글로바의 아들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데, 또 작은 야고보를 알패오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글로바의 다른 이름이 알패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인터넷). (4) “막달라 마리아”란 여인은 막달라 라는 지방에 사는 마리아로서 일곱 귀신이
들려서 고생을 많이 하다가 예수님께서 고쳐주셔서 예수님을 섬겼던 여인입니다. 성경 누가복음 8장 2절을 보십시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이 4명의 여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 곁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요19:25). 실제로 그녀들은 처음에는 멀리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막15:40). 이렇게 처음에는 멀리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던 이 4명의 여인들이 예수님께서 골고다에 가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그 많은 군중을 다 헤치고 지나서 예수님의 십자가 곁까지 가기까지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요한복음
19장 25-27절에 나오는 한 명의 남자는 누구일까요?
이 한 명의 남자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19:26)[여기서 “제자”란 단어는 단수임].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들 중에 특별히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사랑하셔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고(막5:37),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변형되셨을
때에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가셨으며(마17:1-2), 또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을 때에도 8명의 제자들은 동산 입구에 두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시고 동산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막14:33). 이 3명의 제자들 중 오늘 본문 요한복음 19장 2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요한”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사도 야고보는
이미 헤롯에게 죽임을 당했으므로(행12: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말씀하셔서 야고보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부양할 수가 없었고, 사도
베드로도 아닌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면 예수님께서 유월절 전에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셔서(요13:1)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면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21절)고도 말씀하셨는데 그 때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워있었을
때 누구를 가리켜 하신 말씀인지 물어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23-24절). 그러면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어디에 있었을까요? 성경을 보면 베드로는
오늘 본문 요한복음 19장 25절에 나오는 4명의 여인들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있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녀들처럼 멀리서라도 예수님을 바라보았다(막15:40)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 말은 사도 베드로는
아예 거기에 있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후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심히 통곡하였던
베드로는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예수님을 더욱더 가까이서 따라야 했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연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서 있나요? 아니면 적어도 예수님을 멀리서라도
바라보고 있어야 하지 않나요? 우리도 오늘 본문 요한복음 19장 25-26절 나오는 4명의 여인들과 한 명의 남자인 요한처럼 예수님을 가까이 따라가서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19장 26-27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박윤선 박사님은 여기서 3가지 뜻을 생각했습니다(박윤선): (1) “예수님은 그
최후까지 하나님에게 순종하심에 이어서도 인륜을 잊지 않으셨다. 그는 어머니에게 대하여 하실 바 책임을 다하셨다.
그는, 모친 부양의 책임을 그의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에게 맡기셨다.
(2) 그(예수님)는 자기 어머니를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맡기신 것은, 그의 보다 큰 사명, 곧, 영적 사명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자연에 속한 것들이
모두 다 영에 속한 것을 위하여 수종들어야 할 것을 가르치시는 중대한 교훈이다. (3) 예수님은 혈육보다
영적 가족을 더 귀히 여기셨다. 그래서 그가 자기 어머니를 동생들보다 사도 요한에게 맡기셨다.
영통은 영원한 것이며 하나님 중심한 것이니 만큼, 그것을 위주할수록 하나님이 가까와진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4명의 여인들인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 예수님의 이모인 살로메와 글로마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와 한 명의 남자인 사도 요한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0장 28절의 말씀처럼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고 오셔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려고(많은 사람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
보혈을 흘려 죽으셨습니다. 성경 로마서 8장 35-37절을 보십시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도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 예수님의 이모인 살로메와 글로마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와 사도 요한처럼
끝까지 예수님의 곁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죽음)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 영광의 옷 입고 문 열어 주실 때 우리 주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히 살아야 합니다(새찬송가 87장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 4절).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말씀 (4)
[마태복음 27장 45-49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네 번째 말씀입니다: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성경 마태복음 27장 46절을 보십시오: “제 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여기서 “제 구시쯤”이란 “오후 3시쯤”입니다(46절,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예수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라는 말씀은 큰 소리로 하나님 아버지께 부르짖으셨다는 의미로서 어떤 분은 예수님께서
‘절규’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절규’하셨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있는 힘을 다하여
절절하고 애타게 하나님 아버지께 부르짖으셨다는 말입니다.
약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그리스도)께서 입을 열지
않으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
이 예언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심문과 재판을 받으셨을 때에 잠잠하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인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두워졌을 때’(마27:45, 현대인의 성경) 잠잠하셨습니다.
여기서 “온 땅이 어두워졌다”(45절, 현대인의
성경)는 말씀을 생각할 때 우리는 출애굽기10장 21-23절 말씀과 연관해서 생각해봐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내밀어 애굽 땅 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 곧 더듬을 만한 흑암이리라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내밀매 캄캄한 흑암이 삼 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
그 동안은 사람들이 서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 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빛이 있었더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자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 중 이 9번째 재앙을 보면 애굽 온 땅 위에 “캄캄한 흑암”이 “3일 동안”(22절, 현대인의 성경) 있어서 사람들이 서로 알아볼 수도
없었고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23절, 현대인의 성경).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고센 땅에는 빛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23절). 여기서 하나님께서 애굽 온 땅에 위에 캄캄한 흑암을 3일 동안 내리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형벌을 내리셨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마27:45, 현대인의 성경) ‘3시간 동안’ 십자가에 못 박혀 계셨을
때 “온 땅에 어둠”만 임하였고(45절) 아무 빛도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형벌을 내리셨습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요9:5) 십자가상에서 3시간 동안 흑암의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마27:45).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계셨을 때 지나가는
자들이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을 모욕하고(마27:39-40),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예수님을 희롱하며(41-43절),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들도 이와 같이 예수님을 욕했을 때에도(44절)
입을 열지 않으시고 잠잠하셨습니다. 그렇게 3시간 동안이나 침묵하셨던 예수님께서 “오후 3시쯤에”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으셨던 것입니다. 그 뜻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입니다(마27:46, 현대인의 성경).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자 9번째 재앙인 캄캄한 흑암을 3일 동안 내리셨던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마음을 강퍅하게 한 애굽
왕 바로와 그의 백성들에게 마지막 10번째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성경
출애굽기 11장 5절 현대인의 성경입니다: “이집트에서 처음 난 것은 왕위에 앉은 바로의 장남으로부터 맷돌질하는 여종의 장남까지 모조리 죽을 것이며 또 짐승의 처음 난 것도
다 죽을 것이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밤중에 애굽 땅에서 처음 난 것 곧 왕위에 앉은 바로 왕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므로 그 날 밤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들과 이집트 백성들이 다 일어나고 이집트 전역에
대성통곡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이것은 초상을 당하지 않은 가정이 한 집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12:29-30). 이것은 애굽 왕 바로와 그의 백성들의 죄 값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의 죄가 가득 찼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러한 형벌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죄가 없으신데도 십자가에 못 박히시사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마27:45, 현대인의 성경) ‘3시간 동안’ 십자가에 못 박혀 계셨을 때 “온 땅에 어둠”이 임하였을 뿐만 아니라(45절)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받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46절).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가 없으신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후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에게 우리 죄를 대신 지우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게 의롭다는 인정을 받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벧전2: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현대인의 성경) “그리스도는 죄를 범하지 않으셨고 그 입에 거짓이 없는 분이십니다”], (요일3:5)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여러분도 알고 있는 대로 예수님은 죄를 없애려고 세상에 오셨으며 그분에게는
죄가 전혀 없습니다”]. 비록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33년 사시는 동안
많은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를 범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지은 경험이 전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뿐만 아니라 3시간 동안
온 땅에 어둠이 임하였고 또한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당하시는 영원한 형벌을 받으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자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받으시는 형벌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 가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캄캄한
흑암”이란 9번째 재앙을 “3일 동안” 내리셨는데(출10:22, 현대인의 성경) 불순종한 요나 선지자도
큰 물고기 뱃속에서 “밤낮 3일”을 있었고(욘1:17,
현대인의 성경),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3시간 동안 어둠 속에’ 계셨을 뿐만 아니라(마27:45) 결국에 가서는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계셨다는 것입니다(마12:40). 요나 선지자는 그 큰 물고기 뱃속을 “무덤과 같은 곳”(2:2, 현대인의 성경)
또는 “죽음의 땅”(6절, 현대인의 성경)이라고 표현했는데 예수님께서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12:40)고 말씀하신대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마치 요나 선지자가 큰 물고기 뱃속에 3일 동안 있었던 것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밤낮 3일 동안 땅 속에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한 요나 선지자를 밤낮 3일 동안 무덤과 같은 곳 또는 죽음의 땅인 큰 물고기 뱃속에 갇히게 하신 것처럼(욘2:2,
6, 현대인의 성경)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의 땅 속에 3일 동안 갇히게 하셨습니다[이 죽음의 땅 속에서의 3일을
영어 사도신경은 “he descended into hell”이라고 표현을 했음. 즉, 예수님께서는 진정으로 캄캄한 흑암인 지옥에서 3일
동안 지옥의 고통을 겪으신 것임]. 그 이유는 그 캄캄한 흑암인 지옥에서 영원히 있어야 할 우리를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불순종한 요나 선지자를 주님의 목전에서 쫓아내신(욘2:4) 하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신(빌2:8) 예수님을 땅 속까지 쫓아내신 이유는 영원한 지옥으로 쫓아낸바 될 수밖에 없는 하나님과
원수 된 죄인인 우리들을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낮아지고 낮아지시되 땅
속까지 내려가신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늘에 속한 자들”(고전15:48)로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성가 “그 때 그 무리들이”
1절 가사입니다: “그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 박았네 녹슨 세 개의 그 못으로
망치 소리 내 맘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과연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녹슨 3개의 그 못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그 망치 소리가 우리 마음에 들리고 있나요? 과연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라고 크게 소리 지르신 절규 소리가 우리
마음에 들리고 있나요?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사 이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의 네 번째
말씀인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46절)라는 절규 소리를 들을 수 있길 기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나님께 ‘그때 우리들이 예수님 못 박았네 녹슨 세 개의 그 못으로 (예수님의) 절규 소리 내 맘에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라고
있는 힘을 다하여 감사 찬양을 드릴 수 있길 기원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가복음 15장 33-36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네 번째 말씀입니다: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성경 마가복음 15장 34절을 보십시오: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우리가 지난 주 수요예배 때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 하신 이 네 번째 말씀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마태복음 27장 46절 말씀 중심으로 묵상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인 약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가 이사야 53장 7절에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잠잠하실 것을 예언했는데 이 예언대로 예수님께서는 잠잠하시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크게
소리를 지르셨습니다(마27:46).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신 데도 불구하고
우리 죄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받으셨기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크게 소리를 지르신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
하신 이 네 번째 말씀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오늘 본문 마가복음 15장 33-36절,
특히 34절 말씀 중심으로 묵상하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가 참고할 것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란 말씀은 아람어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아람어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크게 소리를 지르셨던 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람어도 사용을 했었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언제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버리셨는가’입니다. 오늘 본문 마가복음 15장 33-34절을 보십시오: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언제 예수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크게 소리를 지르셨냐면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인 안나스에게 심문 받을 때도 아니고, 가야바에게
심문 받을 때나 혹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을 받을 때도 아니고, 빌라도에게 심문 및 재판을 받을 때나 혹은
헤롯왕에게 심문 받을 때에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그 형벌을 받을 그 장소인 해골(골고다)에 가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도 아니고, 십자가에 못 박힐 때도 아니고, 또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3시간 동안 (오전 9시에서 오후 12시까지)에 말씀하신 것도 아니고,
또한 오후 12시부터 3시까지 캄캄할 때도
그런 말씀을 하신 것도 아니고, 그것이 다 끝날 지경인 오후 3시쯤
되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크게 소리를 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모든 일이 다 완성된
것을 아시고 성경 말씀을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내가 목마르다.’하고 말씀”(요19:28, 현대인의 성경)하시고는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셨는데(30절) 그 죽으시기 전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크게 소리를 지르신 것입니다(막15:34).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크게 소리를 지르셨는데 여기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지 한
3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공의로우시며 거룩하신 분이심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주기도문)을 보면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6:9; 눅11:2).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성경 하박국
1장 13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현대인의 성경) “주의 눈은 너무 정결하셔서 악을 보지 못하시며 비행을 용납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고 공의로우시기에 그분의 정결한 눈으로는 죄악을 차마 보지 못하십니다.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용납하실 수 없으시며,
반드시 죄에 대한 형벌을 가차 없이 내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형벌을
가차 없이 내리시되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마3:17)까지 십자가상에서 버리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죄의 값이 얼마나 무겁고 또한 무서운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즉, 예수님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죄의 값은 사망임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성경 창세기 2장 16-1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에덴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마음대로 먹을 수
있지만 단 한 가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만일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17절, 현대인의 성경).
그런데 아담은 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먹음으로(3:6) 죄의
형벌인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율법의 말씀을 주신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의 말씀 중 마태복음
5장 2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개역한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여기서 “한 푼”이란 예수님 당시에 로마 사람들의 화폐 중에 단위가 제일 낮은 것입니다.
개역한글에는 “호리”라고 말씀했는데 여기서 “호리”란 사분의 일 앗사리온(1 앗사리온은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데나리온의 1/16정도에 불과)에 해당하는 아주
작은 단위의 돈입니다(인터넷)[지금 미국으로 말하자면 1
센트(cent)임].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는 빚진 자가 다 갚고도 단 한 푼을 갚지 못하면 감옥에서 나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빚진 자가 마지막 빚 한 푼까지도 모두 지불한다는 것은 완전히 가망이 없는 것이기에 빚을 다 갚기까지 형벌을 면키 심히
어렵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즉, 마태복음 5장 26절의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한 최종적인 유죄 선고를 나타내 줍니다(인터넷). 이 세상에 많은 감옥에서는 빚을 갚고 또 갚고 다 갚다가 돈 1센트(cent)를 못 갚아서 감옥에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비록 이 세상의 법은 이렇지만 하나님의 법에서는 단 한 푼이라도 못 갚으면 영원한 형벌을 받아 영원한 감옥(지옥)에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정도로 하나님의 공의로우셔서
죄에 대하여 무섭게 형벌을 내리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1센트(cent)같은 죄라 할지라도, 그래서 우리 사람의 눈에는 그 죄가 보이지 않아 그 죄를 죄로 여기지도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서운 형벌을 내리시는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예를
들어, 머리털이 다 해결되었다 할지라도 머리털 끝 한 부분의 죄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용납될 수가 없고 숨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만큼 우리의 죄를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로 인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한 푼의 죄요 1 cent의 죄요, 머리털 끝 한 부분의 죄까지도 다
담당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 버리심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우리에게 예언의 성취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예언이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약 1,000년 전에 다윗이 예언한 시편 22편 1절 말씀을 가리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현대인의 성경) “(다윗의 시. 성가대 지휘자를 따라 '아침의 사슴' 이란 곡조에 맞춰 부른 노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어째서 나를 돕지 않으시고 내가 신음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십니까?”].
이 시편 22편의 표제(머리말)를 보면 “다윗의 시, 영장으로 아얠렛 샤할에 맞춘 노래”라고 쓰여 있는데 현대인의 성경은
“다윗의 시. 성가대 지휘자를 따라 ‘아침의 사슴’이란 곡조에 맞춰 보른 노래”라고 번역을 했습니다(1절,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이 시편 22편은 노래라기보다는 예언으로서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냐면 시편 22편 1절 말씀[“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란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15:34)라고 크게 소리 지르시므로 성취가 되었음] 외에도 또 한 예로 18절을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이 예언의 말씀은 요한복음 19장 23-24절에서
성취가 되었습니다: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이렇게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받으신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 즉 한 푼(1
센트)같은 죄나 보이지 않는 죄나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죄까지도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크게 소리 지르시기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당하시므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리셨습니다.
성경 이사야 53장 11절을 보십시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당하시는 영혼의 수고를
하신 것을 보시고 만족하게 여기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시고,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미리 예언하신 것을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 성취하셨기에 예수님께서는 만족히 여기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도 만족히 여기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만족케 하시고자 우리의 모든 죄(큰 죄뿐만 아니라 지극히 한 푼 같은 죄까지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까지
다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상에서 크게 소리를 지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믿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받으시므로(forsaken by God)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forgiven by God)는 이 놀라운 죄 사함의 은혜에
감사 찬양 경배를 평생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께 올려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전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말씀 (5)
[요한복음 19장 28-30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네 번째 말씀은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입니다(마27:46). 이 예수님의 말씀은 아람어로서 한국어 의미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입니다(46절). 이 네 번째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의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죄가 없으실 뿐만 아니라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죄, 우리의 죄, 우리의 모든 죄를 걸머지시고 우리의 죄 값으로 십자가에서 버리시므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또한 이 네 번째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의 말씀은 우리 죄의 값이 얼마나 무겁고 무서운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다윗왕의 구약 성경 시편 22편 1절
예언을 성취하심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크게 소리를 지르셨을 때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요일4:8, 16)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확실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 로마서 5장 8절 현대인의 성경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인데[(시51:5, 현대인의 성경) “나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었으며
우리 어머니가 나를 밴 순간부터 죄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대신하여 십자가상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받으시고[“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27:46)] 죽으시므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하게 나타내셨습니다. 성경 로마서 5장 10절을 보십시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가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상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받으시고[“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27:46)] 죽으시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롬5:10).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장 9-10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상에서 구체적으로 확실하게 어떻게 나타났는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난바 되었는지를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죄를 속하여 우리를 살리시려고 화목 제물로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32절에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독생자를 이 세상에 화목 제물로 보내시되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주시사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주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다섯 번째 말씀은 “내가 목마르다”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19장 28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여기서 “그 후에”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27:46; 막15:34)라고 크게 소리를 지르신 후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요19:28)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모든 일”이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실 것을 다 이루어진 줄 아심을 말씀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속하시고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하시는 이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셨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 요한복음 19장 28절에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성경”은 구약 성경 시편 69편 21절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현대인의 성경) “그들이 음식 대신에 나에게 쓸개를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 초를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크게 소리를 지르시기 전에 로마 군이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계신
예수님께 “쓸개 탄 포도주”(마27:34) 또는 “몰약을 탄 포도주”(막15:23)를 드려 마시게 하려고 했지만 예수님을 맛보시고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쓸개 탄 포도주”나 “몰약을 탄 포도주”는 마취제를 포도주에 탄 것으로 정신을 희미하게 하므로 고통을 덜 느낄
수가 있기에 예수님을 그 쓸개/몰약을 탄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크게 소리를 지르신 후에도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스펀지 같은 것)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마27:48; 막15:36)[해면을 우슬초 가지에 매달아(요19:29, 현대인의 성경)]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신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대었는데 그 때는 예수님께서 그 신포도주를 받으셨습니다(요19:29-30, 현대인의 성경). 여기서 “신 포도주”와
“쓸개 탄 포도주”나 “몰약을 탄 포도주”는 같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에 대한 설들 중 대부분 학자들은 같은 것이라고들 말하지만 소수의 학자들은
다른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은 “신 포도주”와 “쓸개 탄 포도주”나 “몰약을 탄 포도주”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3가지 입니다: (1)
“신 포도주”와 “쓸개 탄 포도주” 및 “몰약을 탄 포도주” 단어의 원어 헬라어가 다릅니다. (2) “쓸개 탄 포도주”나 “몰약을 탄 포도주”는 마취제 성분이 있지만 “신 포도주”는 식초를 탄 포도주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마취제 성분이 있는 “쓸개 탄 포도주”나 “몰약을 탄 포도주”는 받지 않으셨지만(마27:34; 막15:23), “신 포도주”는 받으셨습니다(요19:30). 예수님께서 “쓸개 탄 포도주”나 “몰약을 탄 포도주”를 받지 않으신 이유는
마취제 성분으로 인해 고통을 덜 느낄 것을 아셨기 때문이요, 식초를 탄 “신 포도주”는 받으신 이유는 고통을
더 느낄 줄 아셨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저의 생각의 근거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구하셨을
때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고난의 잔”을 받으시는 것으로 기도 응답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눅22:42)[참고: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셨음(마26:27-28; 막14:23-24)].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받으시는 고통을 받으신
후[“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27:46; 막15:34)] 식초를 탄 “신 포도주”를 받으시므로(요19:30) 결국 자신의 목마름[(28절)
“내가 목마르다”]을 해갈하려고 하셨다기보다 자기 자신을 해하시려고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즉, 예수님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엡2:1)
우리를 살리시려고(요일4:9)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시고자(3:16) 덜 고통을 느끼게 하는 마취제 성분이 있는 “쓸개 탄 포도주”나 “몰약을 탄
포도주”가 아닌 더 고통을 느끼게 하는 식초를 탄 “신 포도주”를 받으셨다고 생각합니다(요19:28).
새찬송가 311장 “내 너를 위하여” 가사를 보십시오: (1절)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2절) 아버지 보좌와 그 영광 떠나서 밤 같은 세상에 만백성 구하려 내 몸을 희생했건만
너 무엇하느냐 내 몸을 희생 했건만 너 무엇하느냐, (3절) 죄 중에
빠져서 영 죽을 인생을 구하여 주려고 나 피를 흘렸다 네 죄를 대속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네 죄를 대속 했건만 너 무엇 하려냐,
(4절) 한없는 용서와 참 사랑 가지고 세상에 내려와 값없이 주었다 이것이 귀중하건만
너 무엇 주느냐 이것이 귀중하건만 너 무엇 주느냐.” 하나님의 독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 죽을 인생인
우리를 위하여, 우리 죄를 속하여(대속하여) 값없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살길을 주시고자 이 세상에 내려와 십자가에 몸을 희생하시고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이 사랑의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널 위에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내 몸을 희생 했건만 너 무엇하느냐,” “네 죄를 대속 했건만 너 무엇하느냐,” “이것이 귀중하건만 너 무엇 주느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말씀 (6)
[요한복음 19장 28-30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다섯 번째 말씀입니다: “내가 목마르다”(요 19:28).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하나님께서 언약하신대로 다 순종하셔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 시편 69편 21절을 응하게 하시려고 “내가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28절). 그 때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스펀지 같은 것)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마27:48; 막15:36)[해면을 우슬초 가지에 매달아(요19:29,
현대인의 성경)]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신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대었는데 그 때는 예수님께서
그 신포도주를 받으셨습니다(요19:29-30, 현대인의 성경).
여기서 예수님을 받으신 “신 포도주”는 (식)초였습니다. 목마르셨던 예수님께서 (식)초를 받으셨다는 것은 더 목이 마르셨을 것이고, 더 힘드셨을 것이며, 더 죽음에 가까이 이르게 했을 것입니다. 죤 스토트(John Stott)란 학자는 예수님께서 이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 죽으셨을 때 몇 초(1분도 안 되서) 죽으셨다고 말했습니다(스토트).
그 정도로 신포도주가 독하고 해로운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여섯 번째 말씀입니다:
“다 이루었다”(요19:30). 성경 요한복음
19장 3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여기서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한국 성경을 보면 두 단어(“다” + “이루었다”)이지만 원어 헬라어는 한 단어입니다. 비록 이 말씀은 짧은 한 단어이지만 이 말씀에는 많은
뜻이 내포돼 있습니다. 아더 핑크(Arthur Pink)라는 학자는
그의 책 “십자가의 일곱 말씀 연구”에서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의 이 한 마디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복음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라고까지 말했습니다(그는 “또 이 말 속에는 신자들의 확신하는 바의 배경이 내포되어 있으며, 이 말 속에서 모든
기쁨이 발견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위로가 함축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했음). 그는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일곱 가지로 말했는데 첫 번째는 ‘메시아(그리스도)에 관하여
기록된바 예수 그리스도의 죽기 전에 이루어야 할 모든 예언들이 온전히 성취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성취된
모든 예언들 중 하나가 바로 원 복음(the original gospel)인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서 “여자의 후손”이란 메시야, 즉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자”인 처녀(동정녀)
마리아를 통해(눅1:34, 현대인의 성경)
성령님으로 잉태(마1:20)되어 태어나실 것(16절)을 예언한 것입니다[참고: (갈4:4,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때가 되어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보내 여자에게서 태어나게 하시고 율법의 지배를 받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 모든 사람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로
잉태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성령님으로 잉태되어 이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네 머리”, 즉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시작입니다. 여기서 사탄이 예수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예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고난당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과 사탄의 무리들을(권세를) 짓밟아 십자가로 승리하시사(골2:15,
현대인의 성경)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을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어 가두고 봉인하여 천 년의 기간이 끝날 때까지는 더 이상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했다가(계20:2-3)
결국 마지막에는 무저갱에서 유황이 타는 불 못에 던져져서 천 년이 아닌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게 하실 것(10절)을 예언한 것입니다. 비록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상에서 고난을 당하게 하여 예수님은 모든 고난을 당하시고 “다 이루었다” 말씀하신 후 죽으셨지만(요19:30),
예수님께서는3일만에 부활하시고, 40일 후에
승천하셔서 빛나고 높은 보좌에 앉아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성경 골로새서 2장 15절 현대인의 성경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의 권세를 짓밟아 십자가로 승리하셔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죽음의 권세를 잡은 마귀를 멸망시키시고 일생 동안 죽음의 공포에서 종살이하는 모든 사람들을
해방시키셨습니다(히2:14-15,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주님께서는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도와주십니다(16절).
그럼 누가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십자가에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사 승리케 하신다고 성경 창세기 3장 15절은 말씀하고 있습니까? 바로 “내가”라고 말씀하신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셨고,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께 순종하여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시고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후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하신 성령 하나님께서는 흠 없는 예수님을 성부 하나님께서 드린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고 계십니다(히9:14). 이렇게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사 우리를 새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죽기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와 같이 살과 피를 가지신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을 통해 죽음의 권세를 잡은 마귀를 멸망시키시고
일생 동안 죽음의 공포에서 종살이하는 우리들을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히2:14-15,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우리는 새찬송가 27장 “빛나고
높은 보좌와” 4절과 5절을 믿음으로 찬양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4절) 나 이제 생명 있음은 주님의 은혜요 저 사망 권세
이기니 큰 기쁨 넘치네 큰 기쁨 넘치네, (5절) 주님의 보좌 있는데
천한 몸 이르러 그 영광 몸소 뵈올 때 내 기쁨 넘치리 내 기쁨 넘치리. 아멘. 바라기는 이 소망 가운데서 우리 이 나그네 길을 걸어갈 때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요19:30)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신 것(골2:15, 현대인의 성경)을 믿음으로 우리도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님의 십자가를 사랑하며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를 붙드는(새찬송가 150장 “갈보리산 위에” 후렴)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말씀 (7)
[누가복음 23장 44-46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일곱 번째 말씀입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아더 핑크(Arthur Pink)라는
학자는 이 예수님의 일곱 번째 말씀을 ‘”만족의 말씀”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만족의 행동이요 믿음의
행동이요 신뢰의 행동이요 사랑의 행동이였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더 핑크는 이 만족의 말씀을 일곱으로 나눠서
자세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1) 여기서 우리는 아버지와의 교제로 다시 회복되신 구주를 봅니다.
(2) 여기서 우리는 한 의도적인 대조를 봅니다. (3)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그리스도의 완전한 복종을 봅니다. (4) 여기서 우리는 구주의 절대적인 유일무일성을 봅니다.
(5) 여기서 우리는 영원히 완전한 피난처를 봅니다. (6)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봅니다. (7) 여기서 우리는 마음의 참된 안식처를 봅니다. 오늘 이 일곱 개 중 첫 번째인 “여기서 우리는 아버지와의 교제로 다시 회복되신 구주를 봅니다”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독생성자이십니다. 성부 하나님과 독생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을 창조하기 전 영원한 세계에서도 교제를 이루셨습니다.
성경 요한복음 17장 5절을 보십시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하나님께 드렸던 이 기도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창세 전에 영원 세계에서도 하나님과
함꼐 영광을 누리시면서 교제를 누리셨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도 하나님과의 교제는 계속
이루어졌습니다. 성경 요한복음 18장 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하시고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가셨을 때 그 때에 베드로가 잡으러 온 무리들 중에 한 사람인 말고의 귀를 칼로 베처 버렸을 때(10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잔”은 “고난의 잔”입니다.
이 잔은 아버지의 저주의 잔임.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그 잔을 마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교제를 계속해 나아가셨습니다. 또 십자가상에서 예수님께서 3시간 혹은 6시간 달리시고도
계속해서 이 교제(관계)를 이어 나아가셨습니다. 그러다가 캄캄함이 다 지나갈 때에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뜻: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크게 소리를 지르셨습니다(막15:33-34).
하나님이 예수님을 버리셨음. 여기서 예수님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버리신 것입니까? 그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거룩하시며 정결하시므로 죄를 용납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벌하시고 멸하십니다. 성경 하박국 1장 1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도 못하시는 그러하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납하시 못하시는 분이신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나의 죄, 우리의 죄를 걸머지시고 죄 없는 죄인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성경 이사야 53장 4-6절을 보십시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죄 없으신 분이신데 우리의 모든 죄악을 걸머지시고 이렇게 대신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버림을 받으신 것임. 그리하여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도록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성경 로마서 5장 10절을 보십시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이렇게 우리로 화목케 하셨는데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성경 누가복음 23장 4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큰 소리로 부르시지 않으시고(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큰 소리를 부르셨음.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회복된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으시고 죽으심으로 끝나지 않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은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경 요한복음 20장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여기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내 아버지” 즉,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는 아버지와 아들(부자)
관계인데 “곧 너희 아버지”, 즉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자녀입니까?
로마서 8장 1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관계가
형성이 된 것입니다. 성경 로마서 8장 17절을 보십시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에 있어서 고난이 있습니다. 그 고난은 장차 우리가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18절)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십자가상에서 계속해서 침묵을 하시던 예수님께서는 두 번 크게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한 번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라고 크게 소리 지르셨고 또 다른 한 번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라고 크게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크게 두 번 소리 지르심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것을 상속받을 수 있는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 고난을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비할 수 없는 영광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고난에 영광을 바라보면서 소망 중에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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