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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내 안에 계신 주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   오직 내 안에 계신 주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         “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 요한복음 5:30).     (1) 저는 “ 예수를 믿게 하는 증언 ” 이란 제목 아래 요한복음 5 장 30-47 절 전체를 한국 성경으로만 다 읽은 후 계속해서 제 마음은 30 절 한절만 묵상하고 싶은 충동이 있어 오늘은 30 절 한절만 우선 묵상하려고 합니다 .   묵상하되 저는 “ 내 심판 ” 즉 , 주님의 심판에 초점을 맞추어 묵상하면서 요한계시록 20 장 11-15 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 백보좌 ( 크고 휜 보좌 ) 심판 ” 과도 함께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     (a) 첫째로 , 저는 예수님께서 “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ο ὐ δύναμαι ἐ γ ὼ ποιε ῖ ν ἀ π ᾽ ἐ μαυτο ῦ ο ὐ δέν ( 우 뒤나마이 에고 포이에인 아프 에마우투 우덴 )]( 요 5:30) 하신 말씀을 묵상하고 싶습니다 .   이 예수님의 말씀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 " 행할 수 없다 / 내가 / 행하는 것을 / 내 자신으로부터 / 아무것도 "( 나는 내 자신으로부터는 그 어떤 것도 스스로 행할 수 없다 ).   여기서 저는 “ 스스로 ” 라는 한국어 성경 말씀을 묵상할 때 19 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 “…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ο ὐ δύναται ὁ υ ἱὸ ς ποιε ῖ ν ἀ φ ᾽ ἑ αυτο ῦ ο ὐ δ ὲ ν ἐὰ ν μή τι βλέπ ῃ τ ὸ ν πατέρα ποιο ῦ ν...

바울의 마지막 문안 인사 (26)

  바울의 마지막 문안 인사 (26)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 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 계 3:14-16).   그 당시 라오디 게아 사람들은 이 비유를 듣자마자 자신들의 일상과 연결 지어 이해할 수 있었 습니다 .   그 이유는 라오디게아는 자체 적인 수원이 없어서 주변 도시로부터 수로를 통해 물을 끌어와야 했습니다 .   히에라볼리에서는 뜨거운 온천수가 흘러왔지만 , 라오디게아에 도착할 때쯤이면 다 식어서 미지근하고 석회 가 가득한 역겨운 물이 되었습니다 .   이 물을 마시면 구토를 유발했습니다 .   인근 골로새에서는 산에서 내려오는 차가운 생수가 흘러왔지만 , 라오디게아에 오면 미지근해져 청량감을 잃었습니다 .   주님은 그들이 매일 마시며 불평했던 마시면 토할 것 같은 미지근한 물을 가져와 , 그들의 영적 상태가 그 물처럼 쓸모없고 역겹다는 것을 책망하신 것입니 다 .   그 교회는 영적인 열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 주변을 시원하게 해주는 선한 영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   그래서 주님은 영 적인 열정으로 사람을 살리든지 , 순전함으로 사람을 시원하게 하든 지 하라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   미지근한 상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

바울의 마지막 문안 인사 (25)

  바울의 마지막 문안 인사 (25)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 ” ( 골 4:15) 에 관하여 : (1) 풍요 속의 결핍과 외주화 : 사우디가 엄청난 오일머니로 무기를 사고 지상전을 외국인 용병에게 맡겼다가 전투 의지를 상실 한 것처럼 , 라오디게아는 교통과 금융의 중심지로서 엄청난 부를 누렸지만 정작 생존에 가장 중요한 물 ( 수자원 ) 이 나오지 않아 외부에서 관을 통해 물을 끌어와야 ( 외주화 ) 했습니 다 .   라오디게아는 부유함 속에 치명적인 결핍을 외부 의존으로 해결하려다 영적 미지근함에 빠졌습니다 .   (2) 내부 구조적 무능과 자만 :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의 물질적 풍요가 곧 영적 우월함이라 착각하는 자만에 빠졌습니다 [( 계 3:17) "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   그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안약과 특산품인 검은 양모로 만든 옷으로 유명했지만 , 영적으로는 정작 본인들이 눈멀고 벌거벗은 상태 ( 무능과 부패 ) 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   (3) 영적 종이호랑이 ( 싸울 의지의 상실 ) :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상태로 영적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한 ' 종이호랑이 ' 성도들이었습니다 .   세상의 부와 타협하느라 복음을 위해 싸울 의지도 , 핍박을 견딜 신앙의 야성도 사라진 상태였 습니다 .                            

바울의 마지막 문안 인사 (24)

바울의 마지막 문안 인사 (24)         데마와 같은 영적 변질을 막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선 (1) 매일 마음의 중심을 지켜야 합니다 .   성경은 "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 잠 4:23) 고 경고합니다 .   바울은 변질되지 않으려면 "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 골 3:2) 고 권면합니다 .   (2) 깨어 기도하며 자신을 쳐 복종시켜야합니다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 마 26:41) 라고 하셨습니다 .   바 울은 "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 "( 고전 9:27) 고 고백했습니다 .   (3) 영적 공동체 안에서 서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   "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하라 "( 히 3: 13).   데마가 변질될 때 주변의 영적 권면을 수용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믿음의 공동체 안에 머물러야 안전합니다 (10:24-25).   (4) 고난을 이상히 여기지 말고 상급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   바울은 "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 딤후 2:3) 고 명령합니다 .   변질을 이기는 강력한 힘은 장차 받을 상급인 의의 면류관 ( 딤후 4: 8) 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

바울의 마지막 문안 인사 (23)

바울의 마지막 문안 인사 (23)       데마의 이탈이 주는 핵심 영적 교훈은 크게 4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 인터넷 ): (1) 과거의 헌신이 미래의 신앙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누구나 변질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 고전 10:12).   (2) 중간 지대는 없다는 것입니다 .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 ( 세상 ) 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명확히 선언하셨습니다 ( 마 6:24).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 약 4:4).   마음의 중심을 세상에 조금이라도 내어주는 타협은 결국 신앙의 완전한 파선으로 이어집니다 .   (3) 고난의 때에 진짜 신앙이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   십자가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는 반드시 십자가 ( 고난 ) 가 동반됩니다 .   고난과 손해 , 위기의 순간은 우리의 신앙이 ' 참된 보석 ' 인지 ' 가짜 모조품 ' 인지 판가름하는 영적 시험대입니다 .   (4) 사명의 자리에서 이탈하는 것은 ' 영적 영양실조 ' 의 결과입니다 .   데마가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간 반면 , 바울은 끝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쳤습니다 ( 딤후 4:7).   차이는 ' 무엇을 바라보았는가 ' 에 있습니다 .   바울은 ' 의의 면류관 '( 오는 세대의 영광 ) 을 보았고 , 데마는 ' 데살로니가의 풍요 '( 현재 세대의 안락함 ) 를 보았습니다 .   우리의 시선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하늘의 상급에서 멀어지고 당장 눈앞의 안락함 , 재정적 안정 , 세상의 인정에 고정되기 시작할 때 , 그것이 바로 사명의 자리에서 이탈하기 시작하는 전조 증상입니다 .

바울의 마지막 문안인사 (19)

바울의 마지막 문안인사 (19)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회 성도들들 위하여 항상 애써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많이 수고한 이유는 그 세 도시에 영적 배경 때문입니다 : (1) 골로새 :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천사를 숭배하는 신비주의 및 세상 철학이 뒤섞인 혼합주의 이단 사상이 교회에 들어와 복음을 왜곡하고 교회를 분열시킬 위험이 생겼습니다 ( 변질된 이단 사상 ).   (2) 히에라볼리 : 로마의 신들과 온천수의 치유성분이 있다고 믿음으로 신성시하는 이방 신전들이 가득했습니다 ( 우상숭배 ).   성도들은 육체의질병을 고치기 위해 우상숭배와 타협하라는 강한 유혹을 받았습니다 .   (3) 라오디게아 : 부족함이 없다보니 영적인 절박함이 사라졌습니다 . 히에라볼리의 뜨거운 온천수와 골로새의 차가운 생수가 라오디게아로 흘러 들어오는 과정에서 미지근한 물이 되었듯 , 그들의 신앙도 타성에 젖어 있었습니다 ( 영적 나태함 )( 인터넷 ).  

주님이 세우시는 승리장로교회

주님이 세우시는 승리장로교회       “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 마 16:18).   첫째로 , 주님께서 주님의 교회를 세우심에 있어서 승리장로교회를 여기까지 도우셨습니다 .   진정 때를 따라 ( 주님이 보시기에 가장 완벽한 순간에 ) 돕는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께서 우리 교회를 도와주셨기에 오늘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   그래서 우리의 고백은 “ 엘리에셀 ”, 즉 “ 나의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 ” 입니다 .   이 엘리에셀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여기까지 도우셨기에 우리 마음에는 “ 에벤에셀 ” ( “ 그 도움의 돌 ”) 이라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   둘째로 , 주님께서 주님의 교회인 승리장로교회를 계속해서 세워나아 가실 것입니다 .   교회를 세우고 성장시키며 유지하는 주체는 인간의 프로그램이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   주님께서는 이 약속의 말씀 그대로 지난 46 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풍파 속에서도 승리장로교회를 무너뜨리지 않으시고 친히 든든히 세워오셨습니다 .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리스도 중심된 꿈을 까진 일꾼들을 세우셔서 각 나라 선교지로 보내서서 영혼들을 구원하시고자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서 사역 및 선교케 하셨고 지금도 그리하고 계십니다 .   셋째로 , 주님이 세우시는 우리 승리장로교회는 예수님처럼 소외된 자들의 공동체 , 고난의 공동체로 가야 합니다 .   성도의 참된 제자도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 세상의 가장 자리에 버려진 이들을 향해 일부러 발걸음을 옮기는 불편한 순종에서 시작됨을 보여줍니다 .   그래서 우리 교회는 이번 달 (7 월 ) 마지막 주일부터 매달 넷째 주일에 우리 교회에서 가까이 있는 양로원을 방문하여 어르신들과 함께 ...

바울의 마지막 문안 인사 (18)

바울의 마지막 문안 인사 (18)     첫째로 , 에바브라는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고 굳게서서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게 해 달라고 언제나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   골 로새서 4 장 12 절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 ”   여기서 기도를 " 항상 " 한다 함은 , 그 기도하는 제목이 한결같이 떠나지 않고 그 중심에 있어 , 무언 중에도 기도가 계속될 뿐 아니라 , 일정한 규례를 따라 밀실 혹은 집회석에서 기도함을 의미합니다 .   그리고 " 애써 기도 " 한다함은 ,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까지 기도에 노력함인데 여기서 “애써”라는 단어는 ‘고뇌하다’라는 의미로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사용하신 단어와 같습니다 : “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 ( 눅 22:44).   이 헬라어 단어는 운동선수들이 운동에 온전히 헌신하는 모습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   오늘날 교회 성도들이 각자 좋아하는 운동에 쏟았던 만큼 기도에 관심과 열정을 쏟는다면 , 우리는 부흥을 경험할 것입니다 !( 주석 )    

바울의 마지막 문안 인사 (15)

바울의 마지막 문안 인사 (15)     하나님은 시간과 고난뿐만 아니라 심지어 죄도 허비하지 않으십니다 .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툰 죄도 허비않으셨습니다 .   그들이 심히 다툰 이유는 마가란 인물 때문이었습니다 .   바나바는 계속해서 자기의 생질인 마가를 데리고 2 차 전도여행을 떠나자고 말한 반면에 바울은 계속해서 1 차 전도여행 초기에 이탈하여 집으로 돌아가 버린 무책임한 태도를 보인 마가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않다고 말한 것입니다 ( 행 15:37-38).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의 1 차 전도 여행에서 그들을 돕는 조력자였지만 여행이 끝날 때까지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     마가는 밤빌리아에서 선교를 계속하는 것을 포기하고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팀을 이탈했습니다 .   아마도 그 이유는 마가는 구브로에서의 선교가 거의 열매를 맺지 못했던 시기 이후로 그들을 떠났던 것으 로 보입니다 .     구브로에서의 선교는 오직 한 사람의 개종만이 기록되어 있고 , 그 과정에서 마귀가 강하게 방해했기 때문입니다 .   결국 바울과 마가는 심한 말다툼 끝에 서로 갈라 져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배를 타고 구브로로 갔고 바울은 따로 실라를 택하여 신자들의 축복을 받고 안디옥을 떠나 시리아와 길리기아를 거쳐 가면서 여러 교회를 격려하였습 니다 .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서로 화목하지 않고 서로 심히 다툰 바울과 바나바의 죄도 허비하지 않으시고 사용하시사 두 개로 나눠진 선교팀 ( 바나바와 마가 한 팀과 바울과 실라 한 팀 ) 을 각각 다른 지역에서 주님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

예수님을 따르는 가정

예수님을 따르는 가정         우리 가정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선 (1) 주님의 음성만 들어야 합니다 ( 요 10:3-5).   예수님을 따르는 가정은 주님의 음성을 즉각적으로 알아챕니다 .   그리고 타인의 음성에 대하여서는 자기 목자의 음성이 아니라는 이질감을 직관적으로 느끼고 생명의 위협을 받아 즉시 도망칩니다 .   (2)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 막 8:34).   예수님을 따르는 가정은 모든 식구가 자기 자신을 도무지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자기 자신과 상관없는 자로 계속해서 부인하는 삶을 사는 공동체입니다 .   먼저 가정의 가장인 남편이 아내 앞에서 자기 자신의 권리를 도무지 알지 못하는 자처럼 행합니다 .   억울함이나 자존심이 상하는 순간에 내 자아의 요구를 부인하고 ,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죽기까지 자신을 부인하셨듯 배우자를 먼저 섬기는 자리로 내려갑니다 .   가정이 서로를 향해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만 인정하는 가정이야말로 주님을 따르는 가정입니다 .   (3) 자기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34 절 ).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우리의 명예와 평판을 다 버리고 , 매일 죽으러 가는 사형수처럼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   (4) 가정의 공동 목적이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야 합니다 (35 절 ).   예수님을 따르는 가정은 " 나와 복음을 위하 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 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기에 , 주님 때문에 당하는 손해와 희생을 실패가 아닌 ' 영광스러운 십자가의 흔적 ' 으로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

자녀에 관하여

자녀에 관하여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 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 잠 22:6).   여기서 “마땅히 행할 길”을 ' 그의 길을 따라 ' 입니다 .   성경 주석과 학자들은 이 ' 길 ' 을 3 가지로 설명합니다 ( 인터넷 ): (1) 하나님 경외 : 지혜의 근본인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   (2) 복음과 말씀 :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정확히 이해하고 , 성경 말씀을 삶의 척도로 삼는 훈련입니다 .   (3) 바른 가치관 : 재물보다 명예와 은총을 귀하게 여기고 ,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태도입니다 ( 저는 “바른 가치관”외에도 “뚜렷한 목적관”와 “영원한 인생관”을 우리 자녀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함 ).   또한 여기서 “가르치라”는 히브리어 단어 “하노크”는 3 가지 실 제적인 행동을 담고 있습니다 : (1) " 입맛을 들이다 " 입니다 .   아이에게 "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가 이렇게 달콤하고 좋은 것이구나 !" 라는 맛을 보게하여 스스로 찾게 만드는 교육을 뜻합니다 .   (2) " 봉헌하다 " 입니다 .   자녀교육의 시작부터 " 이 아이의 인생은 하나님의 것입 니다 " 라고 구별하여 드리는 마음가짐을 의미합니다 .   (3) " 길을 들이다 " 입니다 .   “ 가르치라 ” 는 아이가 가야 할 길에 대해 처음으로 방향을 잡아주고 습관화시키는 과정을 말합니다 .   억지로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 아이가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자연스럽게 그 길로 걸어갈 수 있도록 삶의 기초 체력 을 길러주는 것입니다 .   “ 가르치라 ” 는 " 아이가 선한 것에 맛을 들이도록 돕고 ,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가르쳐서 올바른 습관을 잡아주는 것입니다 ( 인터넷 ).    

바울의 마지막 문안 인사 (14)

바울의 마지막 문안 인사 (14)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마지막 문안 인사를하면서 아리스다고를 “나와 함께 갇힌” 자라고 말하였습니다 ( 골 4:10).   이 헬라어 단어는 문자적으로 “나의 동료 포로”를 의미하며 , 아마도 우리는 그는 실제로 바울과 함께 감옥에 있었다고 이해해야 할 것입 니다 .   “나와 함께 갇힌” 자라는 이 명칭은 빌레몬서 1 장 23 절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 ) 와 로마서 16 장 7 절 (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 에도 나옵니다 . 여기서 아리스다고와 에바브라와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의 공통점은 영적 전쟁인 복음 사역을 위해 바울과 함께 고난을 겪으며 결박된 진정한 전우라는 것입니다 .   바울이 사 용한 헬라어 “ 쉬나이크말로토스 ” 는 신약성경에 단 세 번만 사용된 특별한 칭호로서 바울은 수많은 동역자 중에서도 복음을 위해 실질적인 신체적 자유를 포기하고 고난의 현장에 끝까지 함께한 이 네 사람에게만 이 특별한 호칭을 부여했습니다 ( 인터넷 ).    

바울의 마지막 문안 인사 (10)

바울의 마지막 문안 인사 (10)       두기고와 오네시모는 3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   첫번째로 , 두기고와 오네시모는 ‘ 사랑 ( 을 ) 받는 형제’입니다 ( 골 4:7, 9).   두번째 공통점은 , 그들은 ‘ 신실한 형제’ 또는 ‘ 신실한 일꾼’이라는 것입니다 (7, 9 절 ). 여기서 “ 신실”이란 “’ 하나님의 비밀’곧 , 복음을 맡은 사역자의 유일한 자격”임이다 .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 장 1-2 절에서 “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 ( 신실 ) 이니라 " 고 말씀하였습니다 . 주님의 일군의 신실은 적어도 3 가지라로 호크마는 말하고 있습니다 : (1) “ 복음에 신실함이니 ,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복음을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보수하여 전함이고 ( 고후 2:17), (2) 인격 생활에 있어서 진실하여 거짓이 없는 것이고 ( 고후 1:18-20), (3)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다가 고통과 난관을 당하여도 변절하지 않는 진실입니다 ( 엡 6:24).    

바울의 마지막 문안 인사 (5)

바울의 마지막 문안 인사 (5)         오늘 본문 골로새서 4 장 7-18 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끝맺으면서 손수 마지막 인사말을 써서 문안하는 모습을 우리는 봅니다 (18 절 , 현대인의 성경 ).   저는 이 바울의 마지막 문안 인사의 말씀을 한 8 가지로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   첫째로 , 바울이 마지막 문안 인사에서 언급한 두기고와 오네시모란 인물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   ( 골 4:7-9)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 내가 그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내는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 현대인의 성경 ) “두기고가 나에 관한 모든 소식을 여러분에게 말해 줄 것입니다 . 그는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이며 신실한 일꾼이요 나와 함께 주님의 종이 된 사람입니다 .   내가 특별히 그를 여러분에게 보내는 것은 여러분에게 우리 사정을 알게 하여 여러분을 격려하기 위해서입니다 .   그리고 우리의 사랑을 받는 신실한 형제 오네시모도 함께 보냅니다 .   그는 여러분과 함께 있던 사람입니다 . 그들이 이 곳 사정을 모두 여러분에게 말해 줄 것입니다” ].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 편지를 끝맺으면서 마지막 문안 인사를 했을 때 제일 첫번째로 언급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