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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은 기회입니다. (6)

"고난의 유익은 그 고난을 통하여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그릇행하였다는 것을 깨닫는 것과 하나님의 법을 배우게 된 것과 이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시 119:67, 71). 이러한 깨달음(나의 죄)과 배움(하나님의 말씀)과 지킴( 말씀 순종)이 없는 고난은 무익합니다." 1. 깨달음: 교만함(시119:69), 그릇 행함(67절), 마음의 살찜과 기름덩이(70절) [마음에 지방을 제거하라!: https://blog.naver.com/kdicaprio74/150112959844] 2. 배움: 자녀들의 위기를 통해 저는 선하신 주님께서(68절) 저를 선대하사(65절) 가르쳐주신(68절) 시편 63편 3절 말씀과 베드로전서 5장 10절 말씀을 배우게 되었습니다(71절). [20년 전 이 아빠의 품에 잠든 사랑하는 첫째 아기 주영이를 추모하면서 ... : https://blog.naver.com/kdicaprio74/221262767368] [금년 2019년 한 해를 영원히 과거로 보내기에 앞서 ...: https://blog.naver.com/kdicaprio74/221756284213] 3. 지킴: https://youtu.be/i6TfokavYN4?si=P1E4vvk_bnPOvabx

"예배 지각, 대수롭지 않다?"

 https://www.gospelandcity.org/news/articleView.html?idxno=31612


"예배 지각, 대수롭지 않다?

© Illustration: J. Ehle; Images: iStock.com/:Deagreez/dit:ferrantraite/homeworks255
© Illustration: J. Ehle; Images: iStock.com/:Deagreez/dit:ferrantraite/homeworks255

넥타이 안 매는 목사? 나는 반대했다. 찬송가 대신에 가스펠? 정말 끔찍하게도 싫었다. 교회에서 커피를? 이단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제는 예전에 내가 그토록 열렬히 옹호했던 "옛날 방식"으로 돌아가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예배에 늦는 교인들이 점점 꾸준하게 늘어나는 게 신경 쓰이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내 괴팍한 전통주의 집착이 문제가 아닌지 가장 먼저 자문했다.

집착 때문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단지 내 취향이 아니라 더 깊은 문제이다.

이 문제로 고민하는 목사는 나 하나가 아니다. 지난여름, 서밋 교회의 담임목사이자 TGC 위원회 위원인 J. D. 그리어 목사가 설교에서 이 문제를 언급했다. 입소문을 탄 그 설교에서 그리어 목사는 예배에 늦게 참석하거나 예배가 끝나기 5분 전에 떠나는 교인들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단지 교인들이 예배 순서의 일부를 놓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우려했던 진짜 이유는 그런 행동이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교인들이 근본적인 오해를 하고 있음을 드러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지금 교회를 내가 속한 따뜻한 가족이 아니라 마치 종교 행사처럼 대하고 있다."

교회를 "종교 행사"처럼 대한다는 그리어의 지적은 문제의 핵심을 짚어내며, 우리가 공동 예배를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 습관적으로 예배에 늦는 교인의 경우에, 그 사실이 우리가 교회에 모이는 목적의 본질과 중요성에 대해서 전하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 

우리가 만든 문제

교인들을 오케스트라라고 상상해 보자. 매주 교인들이 모여서 연주하고, 그 음악을 듣는 청중은 하나님이다. 지휘자가 지휘봉을 들어 음악을 시작하는데, 연주자 4분의 1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1악장이 연주되는 동안 바이올리니스트 세 명이 다른 연주자들을 제치고 자기 자리로 가려고 애쓰고, 목관악기 연주자들은 박자를 맞추려고 애쓰는 타악기 연주자들에게 “안녕!” 하면서 인사를 건네더니 자기 자리로 간다.

이런 행동이 보여주는 바는 무엇일까? 함께 연주하는 동료 연주자들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모두가 다 함께 연주하는 콘서트에 대해서까지 말이다.

콘서트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 터무니없겠지만, 이건 많은 교회에서 매주일 아침마다 벌어지는 상황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예시이다.

물론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 늦는 경우도 있다. 부모가 아이들을 제 시간에 준비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고, 평소보다 심한 교통 체증, 또는 스케줄을 지키지 못한 대중교통 등등이 다 가능한 이야기이다. 인생에서는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기 마련이고, 그럼에도 은혜는 항상 풍성하게 흘러야 한다.

하지만 예배가 시작될 때가 되어서야 교인들이 모이기 시작하는 것은 개인적인 시급성 때문이 아니라 교회 문화의 문제이다. 단지 교인들이 정시에 도착하는지 아닌지의 문제가 아니다. 많은 교인들이 꼭 몇 분 늦게 도착한다. 어떤 교인들은 마치 예배의 처음 15분을 영화의 예고편처럼 생각하기도 하다. 본편을 감상하는 데에 필수적이지 않은, 선택이 가능한 부분으로 여기는 것 같다.

여기에는 불편한 진실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 목사들이 예배의 첫 부분은 중요하지 않으니 늦게 와도 괜찮다는 식의, 전혀 의도치 않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건 아닐까?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 온 사람들 중 일부가 교인이 되고, 그들은 "그냥 늘 여기는 이런 식이니까“ 하고 생각하면서 예배에 항상 조금씩 늦는 건 아닐까? 우리가 알게 모르게 다 함께 힘을 모아서 예배의 목적을 저해하는 문화를 만들어 왔던 건 아닐까? 

공동 예배란 무엇인가

계속해서 늦게 예배에 참석한다면, 그건 주일 아침을 하나님의 백성이 다 함께 공동체로 참여하는 모임이 아니라 개인적인 관람객 행사로 여기는 것이다.

공동체로 예배하려면 모두가 같은 장소에 다 함께 모여 있어야 한다. 찬양과 기도와 설교는 회중의 참여에 달려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혼자 은밀하게 예배하는 것보다 함께 모여서 예배하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같은 장소에 함께 있다는 것(embodied presence)은 단지 나타나는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모이는 것을 요구한다.

언제 어디서 모일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모일 시간과 장소를 정한다. 하지만 단순히 함께 모일 시간만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모일 시간을 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8:20에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하셨다. 우리는 매주일 아침 서로 만나고 또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함께 모이겠다는 약속을 달력에 적어 놓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인들이 하나님과 교회를 기다리게 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참여의 신학

예배의 주된 목적이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에 있다면, 즉 감동을 주는 찬양, 힘을 주는 설교, 그리고 교제라고 믿는다면, 늦게 도착하는 것은 당연하다. 어쨌든 우리는 여전히 이 모든 "좋은 것들"을 대부분 접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공동 예배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내가 꼭 함께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창조주께 드리는 우리의 공동 찬양으로 이해한다면, 늦게 도착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건 단지 늦게 도착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가 진짜 놓치는 것은 주님께서 나를 그분의 백성으로 양육하기 위해 계획하신 일에 온전히 참여할 기회이다.

우리가 시작 찬송을 단지 빠져도 되는 워밍업 활동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그 목적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 찬송들은 단지 "영적인 분위기" 조성을 위한 오락이 아니다. 우리는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의 가치를 다 함께 하나된 목소리로 선포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모든 목소리가 중요하다. 모두의 참여가 중요하다.

기존 교인들이 시간을 엄수하지 않는 건 방문객과 새 신자들에게도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 제 시간에 온 방문객의 눈에 늦게 오는 교인들이 어떻게 보일까? 그들에게 우선순위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공동 예배의 중요성에 대해, 서로와 하나님에 대한 존중에 대해서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까?

우리가 말로는 삶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이 공동의 관행, 즉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이는 것이 제 시간에 나타날 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셈이다. 그건 결코 우리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아니지만, 현실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바로 그것이다. 

함께 앞으로 나아가자

공동 예배가 신앙의 중요한 표현이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우리가 진심으로 믿는다면, 무엇보다 우리의 행동이 그 믿음을 반영해야 한다. 이는 율법주의나 부담을 주는 게 아니다. 신학과 실천을 일치시키자는 것이다.

다행히도 이 문제는 우리가 만들어낸 문제이기에 우리 스스로 해결이 가능하다. 그 시작은 우리 각자가 공동 예배와 서로에 대한 헌신의 표현으로 시간 엄수를 우선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우주의 하나님께서 매주일 우리와 만나시겠다고 시간을 정해 놓으셨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은 시간에 맞춰 나타나는 것이다. 

출처: Why Being Late to Church Matters"

https://www.thegospelcoalition.org/article/late-church-mat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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