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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하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입니다!

  https://youtu.be/acEErnKv54s?si=116LU792C82JifSe

"타투와 세례: 내 몸에 새길까, 내 삶에 새길까?"

 https://www.gospelandcity.org/news/articleView.html?idxno=31687


"타투와 세례: 내 몸에 새길까, 내 삶에 새길까?

© koyu/Stock
© koyu/Stock

자기표현의 시대, 그 가장 강력한 통로 중 하나는 ‘타투’가 아닐까? 자신에게 잊지 못할 중요했던 사건을 몸에 기록하고, 잊지 말아야 할 메시지를 새기며, ‘고유한 나다움의 미학을 몸에 그려 넣는 일’ 말이다.

전통 교회와 신학적 가르침은 단순하다. (1) 레위기 19:28의 “너희 살에 상처를 내지 말며 몸에 무늬를 새기지 말라”는 말씀과, 몸을 성령의 전(고전 6:19-20)이라 여겨 훼손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이유로 금지하거나, (2) 존 파이퍼 목사와 같은 복음주의 신학자들 중 일부는 타투의 의도나 동기가 자기과시나 속된 욕망과 연결되어 있지는 않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온화한 제안을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서 타투는 보통의 문화가 되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만 해도 타투가 범죄 조직이나 비행 청소년의 전유물처럼 여겨졌지만, 이제는 목사들도 타투를 하고 페이스북에 인증샷을 올리고 있으며, 대중의 뜨거운 사랑을 받는 찬양그룹 멤버들은 타투가 없으면 (그 음악이 재즈이든, 힙합이든, 락이든, EDM이든) 음악의 스피릿을 온전히 나타낼 수 없다고 믿는 것 같다. 그리고 이 변화의 속도감은 굉장하다. 7년 전 서울의 한 신학교에서 ‘예배음악’을 강의할 당시 ‘유명한 찬양 팀의 타투 여부’는 매우 흥미로운 토론 주제였지만, 작년에 한국을 대표하는 교회음악과 학생들과의 수업에서는 (그들은 이미 타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토론이 아예 불가능했다.

타투를 한 신앙인을 비난하거나 판단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타투는 예술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영구히 표현하는 행위이며, 극심한 고통을 극복한 자신만의 위대한 흔적이고, 숭고한 사랑과 신념을 기념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은 대체로 성경문구나 십자가를 새기는 경우가 많고, 타투가 일상인 타문화권 젊은 세대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교의 의도로 문신을 해야 하는 일도 생긴다고 한다.

(1) 한 청년은 이렇게 말했다. “성령의 전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이 왜 죄인가요? 타투는 몸이라는 성전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꾸미는 것입니다.” (2) 힐송교회 뉴욕캠퍼스 담당목사였던 칼 렌츠(Carl Lentz)는 두 팔 빼곡한 문신으로 유명했는데, 한 인터뷰에서 “레위기 19:28에 나오는 문신 금지 구절은 현대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구약 규정은 폐지되었다” 단언했다. (3) 2022년 4월 26일에 인스타그램에 한 사진이 올라왔는데, 미국에서 신학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남침례교단 초대형교회(The Village Church) 담임목사 매트 챈들러(Matt Chandler)가 성 게오르기우스와 용 그림과 그 아래 “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 문구를 팔에 새긴 사진이었다. 게시물에 대한 답글의 내용과 ‘좋아요’ 하트 숫자를 보니, 그의 타투는 수많은 타투 신앙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있다. (4) 한창 타투에 대한 신학적 고민을 했을 무렵,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분이 개인적인 대화 중 이런 결론을 주셨다. “’예쁜 그림으로 문신하라’고 가르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문신하는 것이 ‘죄’라고 판단할 대법원장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라는 것을 안다. 주위에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타투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수많은 훌륭한 교회 리더들이 지지하고 때로는 선동하는 문화를 말로 설득해 이길 재간도 없다. 실제로 존경심이 차오르는 열정의 신앙인들도 타투를 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저 오지랖이 넓어 참견하고 싶은 욕구가 아니라, 시대에 맞지 않는 고리타분한 다음의 질문들을 더는 억누를 수가 없었을 뿐이다.

자아가 죽고 그리스도로부터 새 자아를 받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단이 세례나 침례 외에 더 필요한가?

수단이 절실하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성경 저자들을 통해 ‘인자와 진리를 마음에 새기고 목에 걸라(잠3:3)’고 하셨지, ‘666을 의미하는 몸의 표식(계13:16-18)’ 문양처럼 몸에 새기라고 하지 않으셨는가?

자신을 표현하는 어제의 흔적이라면, ‘속사람이 날마다 새롭게 되는(고후 4:16) 성장의 변화를 겪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타투를 통해 ‘이전 사상을 고착시키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타투의 의미가 ‘미래를 선하게 여는 것’이라 한다면, 미래의 불확실성을 외부의 상징으로 확정하려는 시도의 일종인 ‘타로카드점’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상징의 타투는 복음 안에서 새롭게 읽히고, 미래 상징의 타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새롭게 열린다고 말한다면, 굳이 자신의 이야기로 그 상징을 확정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실존에서 시작하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의 표상이 아닌가?

인도하는 찬양 팀, 교회 목사, 기독교 공동체 리더들이 타투를 해서 그 문화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공적 책임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는 없는 것일까? 타투가 그들 자신의 미학적으로 참을 수 없는 본능이었다면, 절제할 필요가 없을 만큼 신학적으로 선동하고 추구해야 하는 선한 행위인가?

타투가 매력적인 이유는 분명하다. 영원성 때문이다. 변함없이 사랑할 이의 이름, 깨지고 싶지 않은 우정, 평생 간직할 삶의 좌우명을 몸에 새기면서 “이것이 변하지 않는 나다”라고 선언하는 행위이며 확고한 기록이다. 만약 타투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을 기록하는 것’이라고 반론한다면, 이렇게 질문하고 싶다. 세례의 강력한 각인으로 부족한 것인가? 그리스도는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다(요 20:29)’고 말씀하셨다.

타투 때문에 처음으로 한국 장로교단 유아세례 제도에 대해 깊은 생각에 잠겼었다. 많은 모태신앙인들이 옛 자아를 완전히 죽이고 그리스도로부터 완전한 새 자아를 받아본 절대적 순간의 기억이 매우 희미하거나 없다는 것에 대한 슬픔이었다.

‘세례’는 지울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흔적’이다. 세례를 통해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며(롬 6:3-6), 즉 ‘이전에 살던 자신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 주권 속으로 들어가며’ 새 정체성을 얻는 표식이다. 사도 바울은 이 강렬한 표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노라”(갈 6:17). 그의 고백에 따르면 세례는 단순한 의례나 상징이 아니라 그 어떤 잉크보다 더 강력하고 영원한 새김이다.

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의 고전, 죄 죽이기(Mortification of Sin)는 이 문제에 독특한 빛을 비춘다. 오웬은 청교도 신학자들 중에서도 인간의 내적인 영적 상태를 가장 날카롭게 통찰한 인물이었는데, 그의 가르침은 ‘세례와 회심, 그리고 죄 죽임의 삶’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설명한다. 오웬의 신학을 바탕으로 타투에 대해 성찰하는 과정은 굉장히 흥미로웠다. 단순한 도덕적 판단의 문제가 아닌,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는다’는 복음의 핵심은 타투와 무관하지 않다.

세례를 통해 새 자아로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자아가 자신의 것이 아니다. 옛사람은 자기가 주인이 되어 살며 그 의미를 오랫동안 애써 찾아도 자신이 누구인지 찾을 수 없는 운명에 처했지만, 그리스도인은 성령 안에서 진짜 자아를 찾은 사람이 된다. 모든 것을 잃은 듯 하나, 사실은 나를 넘은 엄청난 것을 얻게 되는 이 신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진정한 자기됨의 비밀은 단순한 철학적 사유나 자아탐구의 여정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다’(갈 2:20)는 연합 속에서만 드러나며, 이렇게 ‘옛 자아를 내려놓을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와 충만이 열리는 복음의 법칙’은 인간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계시’임을 말해줄 뿐이다. 다음은 C. S. 루이스가 인생을 걸고 확신한 내용이다. “자신을 포기하십시오. 그러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버리십시오. 그러면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 그리스도를 찾으면 그를 만날 것이며, 그와 함께 모든 것을 얻을 것입니다”(순전한 기독교)

세례의 사건은 회심의 사건이다. 회심은 이야기를 고착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십자가 밑에 태워버리고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새로운 소망을 받는 사건이다. 오웬은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성령으로 죄를 죽이지 않으면 죄가 너희를 죽일 것이다(Be killing sin, or it will be killing you).” 세례는 죄에 대해 우리가 죽었음을 선포하지만, “이미 그러나 아직”(롬 8 :23) 완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성령으로 죄를 죽이는 실천’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즉, 이러한 ‘죄 죽임’은 그리스도인에게 단회적인 사건이 될 수 없으며, 단번에 새겨지며 지워지지 않는 타투와는 달리, 평생 동안 날마다 실천해야 하는 싸움이라는 것이다.

이 끝없는 고단하고 영광스러운 싸움에서 붙잡아야 할 것은 ‘영원한 승리를 약속하신 하나님의 표식’인 세례다. 당신 앞에 다가올 미지의 모험과 전투에서 ‘끝끝내 이길 것’이라는 진정한 확신과 평안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눈에 보이는 표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 새겨지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온다(잠 3:3; 신 6:6; 사 40:8).

당신은 어떤 표식을 따라 사는가? 타투보다 강한 흔적이 있다. 세례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스러운 모든 것을 우리 마음에 새겨 넣으신 찬란한 각인이다. 당신은 영원을 몸에 새길 것인가? 그리스도인의 빛나는 삶에 새길 것인가?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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