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성탄 계절에 사도 바울은 두기로를 특별히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보냈다(골4:8)하는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gave)(요3:16)는 말씀과 더불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주"셨다(gave up)(롬8:32)는 말씀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셨다(gave Himself up)(엡5:2)는 말씀을 연관해서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마27:46)라는 말씀도 생각났습니다.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버리시기까지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도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우리 목숨을 잃을 수 있길 기원합니다(막8:35). https://youtu.be/amBwOJJrKxs?si=B6DoBllFE_Il7U-p
"복음은 평생 더 깊이 깨닫는 과정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전도 방법 두 번째, 복음 깨달음입니다. 복음 깨달음입니다. 요나 2장 끝에서 요나가 바다 밑바닥에서 물고기의 뱃속에 있을 때 그는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 기도 제일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욘 2:9)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늘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라는 요나 2장 9절 말씀은 성경의 중심 구절이라고요. 이 구절에 성경 전체가 요약되어 있습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더 이상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구원은 은혜라는 말입니다.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항상 요나 2장 9절을 인용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습니다 여호와께 속하였습니다” 그는 항상 반복했습니다. 요나는 왜 바다 밑바닥에 있는 물고기의 뱃속에서 선지자인 요나는 왜 구원은 여호와께 속한다고 했을까요? 마치 이것이 그에게 새로운 생각인 것처럼 말이죠. 그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지 않았나요? 대답은 그는 알았지만 알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는 알았지만 알지 못했습니다. 에드먼드 클리우니가 전달하고자 했던 건 복음을 정말로 이해한다고 생각한다면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복음을 이해하기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복음을 이해한다는 겁니다. 복음 신학화만으로는 세상을 바꾸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경이로움을 점점 더 깊이 깨닫는 평생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겁니다. 종교는 “내가 순종하기 때문에 내가 받아들여진다”는 것이고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일로 인해 내가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내가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종교는 우리에게 통제권을 주는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인기가 있는 거죠. 몇 년 전 제가 복음을 전하려고 한 여자분이 한 말이 기억이 납니다. 그녀는 복음이 무섭다고 말했습니다. 모두가 순전히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하는데 그것이 무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