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옷”과 “낡은 옷”,
“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
“새 부대”와 “낡은 가죽 부대”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누가복음 5:36-39)하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저는 오늘 누가복음
5장 36절부터 39절까지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두 개로 나눠서 묵상하는게 좋을 것 같아서 오늘은 누가복음
5장 36절만 묵상하고 내일 금요일에는
5장 47-39절 말씀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a)
저는 오늘 묵상할 누가복음
5장 36절 말씀을 읽은 후 먼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같은 말씀이 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마9: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낡은 옷에 새 천 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이것은 기운 것이 그 옷을 잡아당겨 더 많이 찢어지기 때문이다”(현대인의 성경)],
(막2: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낡은 옷에 새 천 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게 하면 새로 기운 것이 낡은 옷을 잡아당겨 더 많이 찢어진다”(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난 후 저는 이 세 성경 구절 말씀을 비교하면서 함께 묵상할 때 이 예수님의 비유를
2가지로 묵상합니다:
(i)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새 옷에서 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눅5:36상; 마9:16상; 막2:21상)(현대인의 성경).
·
여기서 “새 옷”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씀하고 있고,
“낡은 옷”은 유대주의를 가리키는 말로서 율법을 오해하여 가르친 유대주의와 그리스도의 복음이 하나로 합쳐질 수 없음을 나타냅니다(호크마).
-
저는 유대주의를 따르는 유대주의자들을 생각할 때 빌립보서
3장 2절 상반절 말씀을 다시금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개들을 삼가고”(beware
of the dogs).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개들”을 조심하라(주의하라)고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개들”은 누구입니까? 그 당시(1세기 AD) 개들은 사나우며 제멋대로 길거리를 돌아나니면서 먹을 것 등을 찾아 쓰레기 더미를 뒤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은 개들을 아주 더러운 동물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들처럼 여겼습니다. 즉,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아주 상종하지 못할 더러운 동물처럼 여겼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를 보면 사도 요한은 이렇게 기록하고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요4:9).
-
주후
1세기 그 당시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우월감을 가지고 이방 사람들을 사람으로 취급해 주지 않고 아예 그들을 개들로 여겼습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탈무드를 보면 옛날 유태인 남자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하나님께 하는 세 가지 감사기도 중에 제일 첫번째가 바로 “하나님,
내가 이방인이 아니라 유태인으로 태어난 것에 감사합니다”라는 기도였다고 합니다. 꼭 누가복음
18장 11절에 기록된 바리새인의 기도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감사하나이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들이 개들처럼 여겼던 이방인들을 주의(조심)하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개들을 주의하라”(빌3:2)고 말했을 때에는 유대인들,
특히 유대주의자들(Judaizers)를 염두해 둔 것입니다.
n
여기서 ‘유대주의자들’이란 누구입니까? 유대주의자들은 초기에 복음을 맹공격을 퍼부은 단체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들은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이방인들이 구약의 어떤 의식(특히 할례의식)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이 유대주의자들과 그들의 거짓된 복음을 이단으로 말하고있으며 심지어 저주까지 했습니다(갈라디아서). 그런데 문제는 유대주의자들은 교회 안에 있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진짜 신자로 인정받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 교회에서 그랬습니다(갈2:12). 그러나 정작 그들은 그 교회에서 복음의 명료성을 훼손하고,
복음을 심각하게 더럽혔으며 또한 이방 신자들을 혼란에 빠트렸습니다. 그 혼란에 원인을 간략하게 요약한다면 바울의 논리는 누군가가
(1) 먼저 그리스도를 믿고,
(2) 그런 다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고,
(3) 다음에 즉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준비를 한다고 말한 반면에 유대주의자들은 누군가가
(1) 그리스도를 믿고,
(2) 최선을 다해 율법을 지키고,
(3) 그리고는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말한 것입니다(그래샴 메이첸).
# 이 차이가 아주 미묘한 차이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큰 차이입니다. 그 차이란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반면에 유대주의 자들은 인간이 노력하여 율법을지켜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전파하였던 참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에 초점을 맞추지만(은혜), 유대주의자들이 주장한 거짓된 복음은 죄인인 사람들이 행하는 일에 초점을 맞춥니다(공로). 한 마디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유대주의자들은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거짓가르치는 유대주의자들을 가리켜 “개들”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들이 물질을 탐하여 스승으로 자처하고 돌아 다니는 까닭이었습니다(빌3:19). 그러므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 거짓된 복음(가르침)을 전하는 거짓 스승들인 유대주의자들이 위험하기에 그들을 주의(조심)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ii)
둘째로,
예수님께서 만일 새 옷에서 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대고 깁으면 새 옷도 못쓰게 되고 새 옷에서 찢어 낸 천 조각도 낡은 옷에 어울리지 않을뿐만 아니라(눅5:36 하, 현대인의 성경)
새로 기운 것이 낡은 옷을 잡아 당겨 더 많이 찢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막2:21하; 마9:16하)(현대인의 성경).
·
이 말씀은
3가지로 나눠서 묵상합니다. 만일 새 옷에서 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대고 깁으면 …
-
첫째로,
새 옷도 못쓰게 됩니다(눅5:36, 현대인의 성경).
n
결코 융화될 수 없는 “새 옷”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낡은 옷”인 유대주의를 융화해서 ‘섞인 복음’을 만들어 전한다면 그것은 ‘가짜 복음’이요 ‘거짓 복음’입니다!
-
둘째로,
새 옷에서 찢어 낸 천 조각도 낡은 옷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n
어떻게 “새 옷”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낡은 옷”인 유대주의가 어울릴 수가 있겠습니까? 결코 없습니다! 그리고 결코 어울려서도 아니됩니다. 그런데 어찌된 노릇입니까?? 어떻게 우리 목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유대주의와 혼합해서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까??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이 쓴 편지 내용을 보십시오:
“사실 다른 복음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어떤 사람들이 여러분을 혼란 가운데 빠뜨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갈1:7,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8-9절). 그런데 이게 어찌된 노릇입니까?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보십시오: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
셋째로,
새로 기운 것이 낡은 옷을 잡아 당겨 더 많이 찢어집니다.
n
원래 세탁된 적이 없는 새 옷은 빨면 줄어드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 새 옷에서 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대고 깁은 후 빨면 즐어드는 새 옷의 천 조각이 낡은 옷을 더 잡아 당겨 더 많이 찢어질 수밖에 없습니다(참고: 인터넷).
n
즉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옛 종교인 유대교 이식에 접붙여질 경우 유대교 의식은 마치 낡은 옷처럼 이 새로운 복음을 감당하지 못하고 허물어져 버리고 말 것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리새인들의 교리는 많은 금식과 금욕주의적 의식들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런 것들은 예수님의 새 복음과는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 예수님의 새 교리들과 바리새인들의 낡은 교리들을 비교하면 할수록 바리새인들의 교리는 점점 더 고립되고 악화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바 새로운 교훈과 은혜의 복음 및 생명의 진리는 아무리 작은 부분이라 하지만 형식적이고,
바리새주의적인 옛 율법주의와는 절대로 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Lenski). 오직 새로운 진리에는 새로운 가치관과 새로운 형식이요구될 뿐입니다(호크마).
(2)
어제 우리는 “결코 융화될 수 없는 “새 옷”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낡은 옷”인 유대주의를 융화해서 ‘섞인 복음’을 만들어 전한다면 그것은 ‘가짜 복음’이요 ‘거짓 복음’입니다!”란 제목 아래 누가복음
5장 36절 말씀을 묵상하였습니다. 오늘은 누가복음
5장 37-39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a)
이 누가복음
5장 37-39절 말씀은 마태복음
9장 17절과 마가복음
2장 22절에도 기록되 있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9: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막2:22). 저는 이 세 성경구절 말씀들을 비교하면서
3 가지로 나눠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i)
첫째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눅5:37상; 마9:17상; 막2:22상).
·
그 이유는 만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새 포도주가 낡은 가죽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그 낡은 가죽 부대도 못쓰게 되어 둘 다다 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눅5:37하; 마9:17중; 막2: 22중).
-
여기서 “낡은 가죽 부대와 ”에 관한 호크마 주석의 글입니다:
“고대 사람들은 동물의 가죽으로 부대를 만들어 그 속에 여러 가지 액체를 보관하였다. 이 가죽 부대는 동물을 잡은 후 머리 부분과 다리 부분을 잘라내고 그 가죽을 벗겨낸 다음 털이 나있는 쪽을 바깥쪽으로 하여 목 부분만을 제외하고 모든 구멍을 꿰맨 다음 가죽에서 기름기를 제거하고 일정 기간 손질하여 사용하였다. 이는 팔레스틴은 물론 유럽,
남미에서 최근까지도 사용되던 방법이다. 한편 이 가죽 부대는 오랫동안 사용하게 되면 주름이 잡히며 그 탄력성을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발효력이 강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게 되면 새 포도주가 발효하면서 발생하는 강하고 독한 가스가 가죽 부대를 부식시켜 그 부대를 이내 터뜨리고 만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항상 새 가죽 부대에 담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왜냐하면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을 경우 그 부대가 이내 터져 포도주도 버리고 가죽부대도 못쓰게 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호크마).
-
여기서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가르침,
복음,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키고,
“낡은 가죽 부대”는 유대교의 형식주의를 가리킵니다(호크마, 인터넷). 우리가 어제 누가복음
5장 36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새 옷”인 그리스도의 복음과 “낡은 옷”인 유대주의와는 결코 하나로 합쳐질 수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누가복음
5장 27절에서는 “새 포도주”인 예수님의 가르침”을 “낡은 가죽 부대”인 유대교의 형식주의에 “넣는 사람도 없다”(27절, 현대인의 성경)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n
여기서 “유대교의 형식주의”란 율법(토라)과 전통의 문자적,
외적 규범 준수에 치중하는 경향을 비판적으로 일컫는 말로,
종교적 본질과 내적 신앙,
영적 의미보다
'지키는 행위'
자체에 더 큰 무게를 두는 모습으로서 그 핵심 개념은 율법 준수(Halakha)입니다. 유대교의 핵심은 모세가 전한 율법(토라)을 지키는 것이며,
여기에는 식사 규정(카슈루트), 안식일(샤밧) 준수, 기도, 절기 준수 등 일상생활 전반의 세부 규범이 포함됩니다. 형식주의는 이러한 율법 준수가
'형식'에 그치고,
그 안에 담긴 하나님과의 관계,
정의, 자비 같은 내면적,
영적 가치를 놓치는 것을 비판합니다(인터넷).
n 이러한 유대교 형식주의에 관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 (마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 (마2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 (마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 (마23:25-26)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 (마23:27-28)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 (마23:29-3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 외식주의자들은 어떠한 자들입니까? 그들은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행하므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외식주의자들은 행위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자신들에게 전가되었다기 보다 그 하나님의 의를 자기 자신들의 노력과 공로로 얻고자 하는 자들이 바로 외식주의 자들입니다. 이들의 의는 자기의 노력과 공로를 인정하는 의요 자기 자신을스스로 높이는 의였습니다. 결국 이러한 의는 우리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외식주의자들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지혜는 결코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가 아니였습니다(약1:15).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는 온유함,
즉 겸손함이 있는데 외식주의자들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이는 교만함이 있었습니다.
# “예수님은 유대교의 형식주의를 비판하며,
율법의 본질인 사랑과 자비,
정의를 강조하셨습니다.
특히 마태복음
23장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위선적인 형식주의를 꾸짖으며,
“겉은 깨끗하나 속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 찼다”고 지적하고,
“율법의 더 중요한 문제인 정의와 자비와 신실을 버렸다”고 말씀하셨으며,
“잔의 겉만 깨끗하게 하고 속도 깨끗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을 넘어,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따르는 내면적이고 진실한 신앙을 요구하신 것입니다”(인터넷).
n
저는 2018년
7월 16일에 “외식(시편 50편)”이란 제목 아래 시편
50편 말씀을 묵상한 글 중 이 부분만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외식하는 우리의 형식주의를 경계하십니다. 오늘 본문 시편
50편 7절을 보십시오: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 라엘아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여기서 하나님은 외식하는 이스라엘에게 증거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외식,
곧 형식주의를 경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형식주의는 그 때 유대인들이 성전에 찾아 가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것으로만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줄 았았습니다(박윤선).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보다 외부적 의식을 거행하는데만 열중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
n
또한 저는
2019년 10월 18일에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8:21)”하는 제목 아래 쓴 짧은 말씀 묵상 글 중 이 부분을 다시금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경고를 듣고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처럼 형식주의 및 외식주의와 사두개인들처럼 세속주의 및 물질주의를 조심해야 합니다.”
(ii)
둘째로,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것입니다(눅5:38; 마9:17하; 막2:22하).
·
그 이유는 그래야 새 포도주와 새 부대 둘 다다 보전이 되기 때문입니다(마9:17하).
-
여기서 먼저 “새 포도주”에서 “새”는 시간적으로 새롭다는 뜻으로 가장 최근에 제조된 포도주임을 암시하고,
“새 부대”에서 “새”는 질적으로 새롭다는 의미로 가죽 상태가 전혀 훼손되지 않고 매우 양호함을 나타냅니다(호크마).
-
그러면 “새 포도주”인 예수님의 가르침,
복음, 하나님의 나라는 “낡은 가죽 부대”는 유대교의 형식주의가 아니라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새 부대”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n
호크마는 그 “새 부대”는 “근본적으로 변화된 새 심령과 새로운 신앙 형태” 또는 “실로 근본적으로 변화된 새 심령과 삶에 구약 율법의 완성이요,
형식적 율법주의를 능가하는 새 시대의 새 진리가 결합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호크마) 제 생각엔 그 “새 부대”란
(형식절 율법주의가 아닌)
본질적 계명주의로서 새 언약적인 계명이요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 계명인 예수님의 이중 계명을 지켜 행하는 새로운 신앙 형태를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이중 계명이란 마태복음
22장 37절과 39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 예수님께서는 “이 두 계명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은 이 두 계명에서 나온 것이다”(현대인의 성경)]하고 말씀하셨습니다(40절). 저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구약(옛 언약)에선 모세의
10계명을 제일 중요시했다면 신약(새 언약)에선 예수님께서는 그
10계명을 ‘하나님의 사랑’(모세의 10계명 중
1-4계명)과 ‘이웃 사랑’(모세의 10계명 중
5-10계명)의 계명(이중 계명)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이중 계명은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인 하나님의 하늘 나라(천국)의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저는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눅5:38; 마9:17하; 막2:22하)을 묵상할 때 “새 포도주”인 예수님의 가르침,
복음, 하나님의 나라를 “새 부대”인 본질적 계명주의로서 새 언약적인 계명이요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 계명인 예수님의 이중 계명을 지켜 행하는 새로운 신앙 형태에 넣어야 “새 포도주”와 “새 부대” 둘 다 보존된다고 믿습니다(마9:17하, 현대인의 성경).
(iii)
마지막 셋째로,
묵은 포도주를 마셔 본 사람은 새 포도주를 마시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눅5:39상, 현대인의 성경).
·
그 이유는 묵은 포도주를 마셔 본 사람들은 묵은 포도주가 더 좋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39절하, 현대인의 성경).
-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듣고 있었던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30절)은 “묵은 포도주”인 형식적인 유대주의를 “마셔 본 사람”들로서 그 형식적인 유대주의를 “더 좋다고 여기기 때문”에(39절하, 현대인의 성경)
“새 포도주”인 예수님의 가르침,
복음, 하나님의 나라를 “마시려 하지 않는다”(39절하, 현대인의 성경)는 것입니다.
n
이 말씀의 핵심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38절)는 예수님의 말씀과 연결되어
'낡은 형식적인 유대주의의 방식으로는 새로운 예수님의 복음이나 가르침을 담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참고: 인터넷). 그러므로 새로운 언약 시대(새 언약 시대)의 예수님의 가르침과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새 포도주”)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낡은 가죽 부대”나 “묵은 포도주”인 형식적인 유대주의를 버려야(회개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참고: 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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