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의 두 번째 복: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하나님의 구원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누가복음 6:21상반절)하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저는 팔복의 두 번째 복인 누가복음
6장 21절 상반절 말씀을 마태복음
5장 6절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하는 말씀과 연관해서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a)
여기서 “주린 자”란 헬라어 단어인 “πεινῶντες”(페이논테)는 현재 분사로 사용되어 일시적인 주림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항상 주리고 있는 지속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육체적인 주림을 마태복음
5장 6절에서는 영적인 의미로 좀 바꿔서 “의에 주리고”라고 기록되 있는데 여기서 ‘주림’(πεινῶντες)과 ‘목마름’(διψῶντες)의 목적은 “의”(δικαιοσύνην”)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호크마).
(i)
이러한 육체적 갈망(주림과 목마름)은 이 땅위에 사는 모든 인생이 겪는 육적인 기갈(starvation)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겪는 심각한 영적 기근을 가리킵니다(시42:2;
63:1; 107:9; 암8:11-14). 이러한 굶주림과 목마름은 영으로 거듭난 자들이(요3:3, 5) 체험하는 새 생명의 영적 욕구입니다(Alford,
호크마).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리고 목마른 나그네가 음식과 물을 찾는 것과 같은 절박함(urgency)을 가지고 새 생명의 영적 욕구인 의(righteousness)를 추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참고: 인터넷).
·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시편
42편 1-2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
그리고 저는 이 사슴의 “갈급함”과 시편 기자의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묵상할 때 제가 쓴 책 “마음이 상한 자”에서 쓴 이 글을 다시금 읽게 되었습니다:
“절망이란 주님을 갈망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 뿐만 아니라 결국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주님만 바라보며 소망할 수 있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입니다.” 그리고 제가 “절망”과 “갈망”과 “소망”에 관하여 쓴 이러한 글들도 다시금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n
“우리는 실망할 필요가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절망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을 갈망하며 소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n
우리가 말할 수 없는 어려움으로 인해 매우 위축되어 절망하고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을 더욱더 갈망하고 소망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갈 길을 아시는 분은 주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참고: 시편 142:3,
6, 현대인의 성경).
n
“자기들의 죄 때문에 시들어 가는 서로의 비참함 모습을 보면서 절망할 때에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자 십자가에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갈망하며 주님께만 소망을 두길 기원합니다(에스겔 3:17; 베드로전서
2:24, 시편 39:7, 62:5,
119:166, 174, 현대인의 성경).”
n
“낙망과 심지어 절망 가운데서도 오히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만 갈망하므로 소망 중에 즐거워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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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자신으로 인하여 낙망하는 가운데서도 저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심지어 절망 가운데서도 저는 주님을 소망합니다. 주님을 갈망할 때에 내 영혼을 소성케 하시사 다시금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며 주님을 나의 소망을 삼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저는 오늘도 소망의 나라를 향하여 믿음으로 나아가렵니다.
(ii)
그러면 우리가 절박함(urgency)과 갈급함 심령으로 갈망해야할 새 생명의 영적 욕구인 “의”(righteousness)(마 5:6)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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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의”란 단어는 구약에500번 그리고 신약에는
225번 나온다고 합니다(Achtemeier). 그리고 이 “의”란 단어는 크게 한
3가지 의미가 있습니다(Swanson):
-
첫번째 의미는,
“(정)의”(righteousness),
“옳은것”(what
is right), “공의”(justice)입니다. 마태복음
5장10절 말씀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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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의미는,
“누군가과 옳은 관계에 두다/있다”(be put
right with, be in a right relationship with)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 말씀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세번째 의미는,
종교에서 요구하는 법이나 의식을 행하는 것입니다(religious
observances such as practices required by a religion). 마태복음
6장 1절 말씀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6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는 첫번째 의미로서 “정의” 또는 “공의”를 의미합니다.
·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였던 바리새인들이 추구했던 “의’는 바로 “자기 의”(self-righteousness)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다 지키므로 이 율법의 의인 자기 의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의 가장 큰 특징인 자기 의(self-righteousness)입니다. 여기서 “자기 의”란 자기의 종교적인 행실을 의지하며하나님 앞에 서고자 하는 자세를 말합니다(인터넷). 이것을 성경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의”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켜 행하므로자기가 의롭다고 굳게 믿었습니다(눅18:9). 그리고 그들은 자기 의로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얻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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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로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얻어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 로마서
3장 20절은 이렇게 분명하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갈라디아서
2장 16절 말씀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사람은 율법의 행위로 결코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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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마태복음
5장 6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란 바리새인들이 믿고 추구했던 “자기 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율법을 지켜(선을) 행하므로 얻는 “자기 의”는 결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사람의 의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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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장 21-22절 말씀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의”(the
righteousness of God)란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란 구약 성경이 증거하는 것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을 근거로한 하나님의 의입니다.
여기서 “속량”이란 예수님 당시 노예를 살 때 노예의 몸 값을 지불하였는데 “속량”이란 말은 ‘값을 지불했다’ 또는 ‘대가를 치렀다’는 의미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이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시므로 우리 죄인들을 대신하여 자기 생명으로 값을 지불하시사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을 근거로 해서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을 값 없이 의롭다 하셨다는 것입니다(24절).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의 피(25절)를 근거로 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사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행13:38).
n
그러므로 우리는 바리새인들처럼 아무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27절). 그 이유는 우리가 행한 어떠한 근거로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은게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주님을 자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주님께서 하나님의 의로 우리에게 덧 입혀 주시사 우리를 의롭다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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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바로 복있는 자요 그가 누릴 복은 바로 배부를 것이요 또는 만족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6절에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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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찬송가
526장 “목마른 자들아”란 찬송이 생각납니다:
(1절) “목마른 자들아 다 이로오라 이곳에 좋은 샘 흐르도다 힘쓰고 애씀이 없을지라도 이 샘에 오면 다 마시겠네”;
(4절) “이 생의 이름은 생명의 샘물 저 수정 빛 같이 늘 맑도다 어린양 보좌가 근원이 되어 생명수 샘이 늘 그치잖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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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찬송가를 생각할 때 또한 이사야
55장 1-2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iii)
이렇게 우리가 절박함과 갈급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의를 갈망할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눅6:21; 참고: 마5:6)하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묵상할 때 누가복음
1장 53절 상반절 말씀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
·
이 말씀은 아기 예수님의 어머님인 마리아의 노래의 일부로,
그녀가 하나님 그녀의 구주를 기뻐하는 마음(47절)으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찬양하는 내용 중 하나로서 “긍휼(54절)의 하나님께서 “그의 여종(마리아)의 비천함을 돌보”시사(48절)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베불리셨”다(53절)라고 노래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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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좋은 것”이란 헬라어는 “ἀγαθῶν”(아가톤)은 단순히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하나님이 굶주리고 가난한 자들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
넘치는 구원의 은혜,
영적 만족,
그리고 그들의 삶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의미하며,
특히 굶주린 자를 배불리시고 부자를 텅 비어 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구원 사역을 상징합니다(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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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좋은 것”[“ἀγαθῶν”(아가톤)]이란 단어가 우리가 아는 로마서
8장 28절[“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ἀγαθόν”)을 이루느니라”]과 빌립보서
1장 6절[“너희 안에서 착한(ἀγαθὸν)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에도 나옵니다.
# 여기서 “좋은 것”이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구원’을 이룬다’(롬8:28)는 의미와 ‘너의 안에 구원의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재림)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한다’(빌1:6)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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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좋은 것”(“ἀγαθῶν”)이란 단어는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ἀγαθοῦ”) 하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ἀγαθός”) 이가 없느니라”(마19:17; 막10:18; 눅18:19)하는 말씀에도 두 번이나 나옵니다.
# 여기서 “좋은 것”이란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하시는 분이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요나 선지자는 이렇게 신앙 고백하였습니다:
“… 구원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것입니다”(욘2:9, 현대인의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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