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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힘은 기회입니다. (10)

  위기 가운데 있는 사랑하는 식구를 위해 그리도 간절히 기도하였는데 우리가 기대했던 구원(건짐)이 아니라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또 다른 위기로 하나님이 인도하셨다면,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은 구원이시라고 신앙 고백을 하나요? (시27:1; 사12:2; 참고: 15:2) https://youtu.be/QOJ40ziHAow?si=rIOZ98IS7PSOQ01r

팔복의 첫 번째 복: 하나님의 나라(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입니다!

팔복의 첫 번째 복: 하나님의 나라(천국)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입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누가복음 6:20)하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누가복음 6 20 말씀은 예수님께서 평지에서 제자들(20)에게 설교[“평지수훈”(Sermon of the Plain)로서 여덞 가지 축복(“팔복”) 번째 축복의 말씀입니다.  축복의 말씀은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예수님의 산상수훈”(: 위에서 가르침”)(Sermon of the Mount) 연관해서 묵상할 필요가 있기에 저는 마태복음 5 3절도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a)    첫째로, “복이 있나니 말씀입니다(6:20; 5:3).

 

(i)                      한국어 성경에는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니”(5:20)하고 말씀하고 있지만 원어인 헬라어 성경을 보면 “Μακάριοι”(마카리오스)”(복이 있나니”) 단어로 시작합니다.  단어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호의 아래 있는 상태, 환경적인 요인이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기쁨을 나타냅니다(This word identifies the state of being under the approving favor of God, a joy that springs from relationship with Him rather than from circumstances)(인터넷).

 

·       히브리 초기 유대교적 배경(Hebraic and Early-Jewish Background): 용어는 시편과 지혜 문학에 나오는 히브리어 단어 אַשְׁרֵי(’ashrē, " 있는, 행복한")에서 유래했습니다.  70인역 성경(the Septuagint)에서 마카리오스(makarios) 일반적으로 ’ashrē 번역하는 사용되었으며, 언약에 대한 신실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 여호와를 신뢰하고 경외하며 기다리는 자는 " 있는 "입니다.  1세기경에는 이러한 형태의 선언[an “asherism”(아셰리즘)] 유대교에서 흔한 문학적 장치로 자리 잡았고, 예수님의 팔복 선언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인터넷).

 

-            예수님의 선언 (Jesus’ Pronouncements of Blessedness): 산상수훈(5:3-11) 평지수훈( 6:20-23) 각각 세상적인 가치관을 뒤집는 일련의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 애통하는 , 온유한 , 박해받는 등이 있는 자로 불리는 이유는 그들이 이미 천국을 소유했거나 앞으로 상속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인터넷).

 

n  그리스도께서는 '복되다' 표현을 관계적인 맥락에서 사용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11:28).

 

n  또한 예수님은 인내하는 믿음에 복을 약속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11:6; 7:23).


n  종말론적 준비 자세를 가진 자가 복이 있습니다: "주인이 때에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24:46; 참고: 12:37-38, 43)(인터넷).


-            사도 바울은 로마서 4 7-8절에서 시편 32편을 인용하며 '복되다'(마카리오스)라는 단어를 칭의의 복음에 적용합니다(인터넷):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32:1-2)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n  그는 윤리적 자유에 책임을 더하여 강조합니다(인터넷):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14:22).

 

-            사도 베드로와 사도 야고보는 축복을 시련 속에서의 인내와 연결시킵니다(인터넷):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벧전3: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있는 자로다 영광의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4:14).

 

n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1:12).

 

(ii)                    제가 2015 10 10일에 있는 사람은 …”이란 제목 아래 짧은 말씀 묵상 글입니다:

 

·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합니다( 1:2).  그의 즐거움은 아침에 주님의 인자한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143:8).  그러므로 그는 주님의 말씀을 기다리며(130:5) 또한 말씀을 향하여 달려갑니다(119:32).  그리고 그는 말씀에 순종하여 의인의 길을 걸으면서 떨며 죄를 범하지 않습니다(4:4).  그는 말씀을 자기 마음에 두므로 죄를 범하기 않고 자기의 행실을 깨끗케 합니다(119:9, 11).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적 싸움에 승리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소유’로 삼습니다(56).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자입니다.

 

있는 사람은 어떠한 핍박과 역경 속에서도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면서 주님만을 의지합니다.  그는 두려운 상황에서 어느 누구도 자기를 도울 없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봅니다(62:5).  그는 자기의 짐을 하나님께 맡겨 버립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를 건지시는 구원의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라고 긴급한 기도를 드립니다(70:12).  그는 “나는 기도할 뿐이라”고 고백하면서 또한 자기의 소원을 주님께 겸손히 아룁니다(109:4).  그러면서 그는 “나는 새벽을 깨우리로다”라고 기도에 헌신합니다(57:8; 108:2).  그가 그리하는 이유는 그는 항상 주님께 소망을 품었기 때문입니다(39:7).  이유는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해 주실 믿기 때문입니다(66:19).  그러므로 그는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라고 결심합니다.  기도 응답의 확신을 통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달으며 가운데서도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있는 사람은 평생 기도에 헌신합니다.

 

있는 사람은 전심으로 주님께 감사합니다(9:1; 11:1; 138:1).  그는 자기 마음의 소원 기도를 거절하지 못하시고 겸손히 자의 소원을 들으시사(10:17) 자기를 건지시사 자기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그는 자기의 머리를 드시고(3:3; 110:7) 자기의 의를 따라 주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18:20) 그는 자기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며 주님께 감사드립니다(68:35).  그가 그리도 주님께 감사하는 이유는 주님의 영원하신 사랑 때문입니다(136:8, 9, 14, 15, 16).. 

 

그는 자기를 향하신 주님의 생각이 수도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40:5).  고난을 통해서도 자기에게 유익되게 하시며 연약함 속에서도 주님의 강하심을 경험케 하시는 주님, 주님께서 자기의 영혼을 붙들어 주시고 계시기에 그는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54:4; 119:116).  이렇게 주님께 감사하는 있는 사람은 자기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모든 은택을 잊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잊을 수도 없습니다(103:2).  그러므로 그는 주님께 이러한 고백을 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18:1).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최고의 기쁨으로 삼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나의 극락의 하나님”입니다(43:4).  그는 극락의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면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합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며 자기를 세상의 으뜸으로 삼으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합니다(18:43).  그는 자기를 향하여 수도 없는 주님의 생각과 자기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자기의 길을 견고케 하시는 하나님, 자기를 있게 하시는 하나님, 죽을 때까지 자기를 인도하시는*48:14) 하나님의 변치 않는 영원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감사하므로 하나님께 찬양합니다.  그는 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님을 영원히 찬양하는데 헌신합니다.  있는 사람은 호흡이 있는 동안 하나님을 찬양합니다(150:6).”

 

(b)    둘째로, 심령이 가난한 말씀입니다(6:20; 5:3).

 

(i)                      여기서 가난한 ”(6:20) 또는 심령이 가난한 ”(5:3)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이든 영적으로 가난한 자이든 그들은 항상 예수가 필요한 사람들이고 항상 예수의 관심의 대상이 됩니다.  그들의 가난의 문제는 하늘의 복으로만 영원히 해결될 있기 때문입니다(호크마).

 

·       특히 여기서 가난한 라는 말은 구약에서도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헬라어 “πτωχοί”(프토코스)(“가난한”) 동일한 의미를 지닌 여러 개의 히브리 단어 가장 중요한 עֲנָוִים”(아나임) (가난한 )이란 말은 부자나 권력가들의 경제적 수탈과 사회적 억압(suppression)에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가난한 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37:14; 40:17; 69:29; 16:19) (호크마).

 

-            이같이 가난한 자란 말은 내용적 측면에서 심령이 겸손하고 회개하는 자에 대한 구절들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57:15; 66:2).  더욱이 이사야 61 1절은 장차 오실 메시야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오실 것이라고 함으로써 가난한 자의 특성이 단순한 물질적 궁핍의 차원을 능가하고 있음을 짐작할 있습니다( 4:18).  이러한 점에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단지 용기가 없다거나 물질적으로 궁핍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적인 파탄을 솔직이 시인하며, 하나님 앞에 인간은 무가치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백하는 것입니다( 69:29; 70:5; 74:21; 61:1; 3:12) (호크마).

 

n  또한 하나님 앞에서 오만한 자들과는 정반대되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오만한 자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것이며( 37:14; 86:14), 그리고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34:6, 18; 51:17; 66:2) (호크마).

 

(ii)                    박윤선 박사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란 “인격적인 골수와 같은 극히 내부적인 영혼 부분에서 영적 궁핍을 느끼는 자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영적 궁핍을느끼는 자들”이란 박윤선 박사님은 가지로 말하였습니다(박윤선):

 

·       첫째로, 영적 궁핍을 느끼는 자들은 자기의 없는 처지와 하나님 밖에 도와 자가 없음을 아는 자들입니다(61:1, 69:29,70:5, 74:21, 86:1-6; 3:12). 

 

-            시편 70 5 말씀입니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주님의 도우심과 건지심을 갈급하게 간구하는 시편 기자는 자기는 가난하고 궁핍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시편 기자와 같은 자가 영적으로 궁핍한 자요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       둘째로, 영적 궁핍을 느끼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오만한 자들과 반대되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오만한 자들의 박해를 받는 자들입니다(37:14, 86:14). 

 

-            시편 37 14 말씀입니다: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겨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 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  영적으로 궁핍한 자는 악인들의 핍박과 환난으로 인하여 가난하고궁핍하게 자입니다.  그러면 악인들이 영적으로 궁핍한 자를 핍박합니까?  그이유는 그가 정직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       셋째로, 영적 궁핍을 느끼는 자들은 죄를 인하여 상심하며 회개하는 자들입니다(66:2, 34:6, 18, 51:17). 

 

-            시편 34 18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편 5117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영적으로 궁핍한 자는 마음이 상한자요 상한 심령 속에서 통회하는 마음을 가진 자입니다.  이러한 자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이러한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자기의 의가 없는 알고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과 사죄를 구하는 자들입니다.  ,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란 “사람이 사람에게 대한 겸손을 이름이 아니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도무지 의를 가지지 못하였음을 발견한” 자들을 가리킵니다(박윤선).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전혀 소망이 없음을 알고 있을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없이는 완전히 영적으로 파산 상태에 놓여있음을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MacArthur).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의 의”가 절실히 필요함을 아는 자들입니다.  자급자족하였던 바리새인들과 달리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오직 자기의 의가 없는 줄을 알기에 오직 하나님의 의를 덧입어야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있음을 아는 자들입니다. 

 

(c)    마지막 셋째로, “하나님의 나라(천국) 너희(그들의) 것임이요 말씀입니다(6:20; 5:3).

 

(i)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모인 무리들에게 교훈해 주신 번째 복은 “천국”(the kingdom of heaven)입니다(5:3).  “천국”이란 다른 말로하면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입니다(6:20).  ,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는 동일한 말입니다.  마태복음 5 3절에서 저자 마태가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하지 않고 “천국”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는 유대인들에게 마태복음을 쓰고 있었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피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누가복음을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것이기에 “하나님의 나라”라고 것입니다(Wood). 

 

·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 또는 “천국”하면 주로 우리가 죽은 후에 들어가는 곳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7 2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가는 곳이 바로 “천국”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란 달리 말한다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6:29)로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6 29절에서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디로 말한다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            그러므로 마태복음 5 3절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번째 복인 “천국”이란 예수님을 믿음으로 들어가는 곳이라고 말할 있습니다.  천국이란 곳은 성경 요한계시록 21 4절을 보면 눈물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시는 사망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곳에는 다시 저주가 없을 뿐만 아니라(22:3)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없다(5)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국을 가리켜 요한계시록은 “새 하늘과 땅”(21:1) 또는 “거룩한 예루살렘”(2)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n  장차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면 때에는우리가 주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것”입니다(고전13:12).   지금은 비록 우리가 부분적으로 아나 때에는 주님께서 우리를 아신 같이 우리가 온전히 것입니다(12). 


·       이렇게 “천국”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이 장차 들어갈 곳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성경은 천국 또는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장차 들어갈 곳으로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천국 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에게 임하였다고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11:20).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7 21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            예수님의 말씀의 배경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라고 물었을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       말씀들을 종합해서 생각해 “천국” 또는 “하나님의 나라”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장차 들어갈 곳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임하였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천국” 또는 “하나님의 나라”를 장소 개념으로만 생각하며 또한 미래 지항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아니됩니다.  말은 우리가 “천국”을 얘기할 Where?(어디?) 또는 When?(언젠?)라는 개념으로만 생각하기보다“Who?(누구?) 관점에서도 생각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Who?(누구?) 관점에서도 천국 또는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해야 한다는 말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 우리가 천국 또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할 우리는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은 이미 예수님께서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십니다.  말은 왕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통치하시고 다스리시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천국) 우리 안에 이미 임하였습니다.  , 우리 안이 바로 천국이요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 가정도 천국이요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이유는 주님이 우리 가정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천국(하나님의 나라)이란 왕중의 왕이신 주님이 통치하시는 우리 마음과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란 말입니다.

 

n  이러한 개인과 가정과 교회는 예수님의 이중 계명인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라”(22:37, 39) 말씀에 순종합니다.  결과 우리 마음, 우리 가정 그리고 우리 교회가 천국화를 이루어 나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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