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의 두 번째 복:
우는 자는 반드시 웃게 될 것입니다!
“…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누가복음 6:21하반절)하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저는 팔복의 두 번째 복인 누가복음
6장 21절 하반절 말씀을 마태복음
5장 4절인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하는 말씀과 연관해서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a)
누가복음
6장 21절 하반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우는”이란 헬라어 단어 “κλαίοντες”(클라이온테스)의 의미는 ‘적절하게는 소리 내어 울다,
억제할 수 없어서 소리 내어 표현되는 슬픔을 나타내다(소리 내어 우는 것)’입니다(인터넷). 이 헬라어 단어가
25절 하반절에도 나옵니다:
“…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i)
전도서
7장 3-4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슬픔이 웃음보다 나은 것은 그 슬픔으로 인해서 새로운 것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죽음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눈 앞에 보이는 즐거움밖에 생각하지 못한다”(현대인의 성경)].
·
그래서 저는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란 제목 아래 전도서
7장 1-4절 말씀을 묵상한 글을 다시금 읽게 되었습니다:
“… 우리는 슬픔보다 웃음을 더 좋아합니다. 박윤선 박사님의 해석에 비춰 또 달리 말한다면,
우리 사람들은 육체적 희락에 빠짐을 별세한 자의 유족을 방문함보다 좋아합니다(박윤선). 그러나 이미 솔로몬 왕이 전도서
2장 11절에서 말하였던 것처럼 육체적 희락(쾌락)은 무익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잔치집에 가서 세상적 쾌락을 즐기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엔 아무 유익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보시기에 유익한 것은 초상집에 가서 슬픔을 맛보는 것이라고 솔로몬 왕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그는 슬픔이 웃음보다 낫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되기 때문입니다(3절). 무슨 말씀입니까? 죽음 문제로 근심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이 부드러워진다는 말씀입니다(박윤선). 그리고 마음이 부드러워지면 헛된 세상적 쾌락이나 추구하면서 인생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부드러워지면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유익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지혜자 솔로몬 왕은 오늘 본문 전도서
7장 4절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우리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어서는 아니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마음은 육체적 괘락을 즐기는 잔치집에 있어서는 아니됩니다. 오히려 우리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장례식에 가는 것을 더 좋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장례식에 가서 고인의 죽음 앞에서 우리의 죽음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주님께서 오라하시면 가야합니다. 그 이유는 죽음이란 우리 모든 사람의 결국이기 때문입니다(2절).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과연 오늘 하루를 어떻게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이름’을 이 세상에 남기고 가야 합니다. 우리 자녀의마음에,
후손들에 마음에 우리의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고 가야 합니다. 최고의 아름다운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 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로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므로 우리 후손들에게 또한 앞으로 장차 우리 장례식에 참석할 이웃들에게 예수님의 기억들을 남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장례식 때 우리 자녀들이나 후손들이나 심지어 이웃들이 우리 이름 석자를 생각할 때에 참된 칭찬이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사람들이 우리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의 소리가 울려 퍼져야 할 것입니다.”
(ii)
요한복음
1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16절)하고 말씀하시니까 제자 중에 몇 사람이 “조금 있으면 보지 못하고 그러다가 조금 있으면 다시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과 또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 더우기 조금 있으면이란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저히 모르겠다”(17-18절, 현대인의 성경)라고 서로 말하였습니다.
·
예수님은 제자들이 묻고자 하는 뜻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고 그러다가 조금 있으면 다시 나를 보게 될 것이라는 말 때문에 너희가 서로 문의하느냐? 내가 분명히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고 슬퍼할 것이나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 슬픔은 오히려 기쁨이 될 것이다”(19-20절, 현대인의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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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울고”란 헬라어 단어는 “κλαύσετε”로서 오늘 본문 누가복음
6장 2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우는”과 동일한 헬라어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제자들이 더 이상 예수님을 보지 못할 것이기에 그들은 슬퍼하고 애통할 것이지만 세상은 예수님의 죽음을 기뻐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슬픔은 오히려 기쁨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실 것(부활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참고: 인터넷).
n
“슬픔은 기회입니다”란 제목 아래
2020년 2월 12일에 쓴 말씀 묵상 글을 한 부분을 나누고 싶습니다:
“…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자는(죽은) 분들을 생각할 때 충분히 슬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는 우리들의 슬픔은 소망이 있는 슬픔입니다.
그 소망이란 바로 예수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데리고 오신다는 소망입니다(살전
4:13-14). 이렇게 주님은 주님 안에서의 우리의 슬픔조차도 허비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슬픔을 돌이켜 기쁨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회복의 은총을 누릴 때에 우리는 울며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걸어가되 우리는 감사의 눈물과 기도의 눈물과 헌신의 눈물을 흘리면서 주님 가신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회복의 은혜에 감사의 눈물과 기도의 눈물을 흘리면서 언약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헌신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
(b)
마태복음 5장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애통하는”이란 헬라어 단어 “πενθοῦντες”(펜둔테스)의 의미는 ‘드러나는 슬픔’을 의미하는데,
이는 너무나 심각해서 사람을 완전히 사로잡아 숨길 수 없는 슬픔을 가리킵니다(인터넷).
(i)
이 동사는 헬라어 신약성경에 열 번 등장하며,
경건한 슬픔(회개와 주님에 대한 의존과 관련된 슬픔)
또는 세상적인 슬픔(세속적인 쾌락과 번영의 상실을 애통하는 슬픔)과 같이 깊은 슬픔을 일관되게 묘사합니다(인터넷).
·
고린도후서
7장 10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나 애통(경건한 슬픔)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룬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슬픔은 결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ii)
호크마에 의하면 ‘애통하다’란 헬라어 단어 “πενθοῦντες”(펜둔테스)는 70인역(LXX)에서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 또는 자신과 타인의 죄에 대한 결과를 탄식하는 아픔을 묘사하는 말(McNeile)로서 진실로 애통하는 자는 자신의 죄에 대해 깊이 슬퍼하고 철저히
'애통하는 자'의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 애통은 영적인 측면의 애통을 말하는 것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는 불의에 대한 애통이며,
사람들이 자랑하던 바로 그 도덕성과
'자기 의'(self-righteousness)에 대한 애통이며,
하나님의 뜻을 진지하게 찾고 끝끝내 발견하려는 애통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호크마).
·
실로 예수 당시 경건한 생활을 유지하던 자들은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과 수치가 외세의 압제 이전에 그들 백성들의 개인적인 죄와 민족적인 공동의 죄 때문인 것으로 생각했고 그 때문에 수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같은 회개의 눈물을 원하십니다(마4:17)(호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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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2017년 7월 27일에 “회개가 우선시 되야 하는데 …”라는 제목 아래 이사야
22장 12-13절 말씀 중심으로 쓴 말씀 묵상 글의 한 부분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회개(repent)하라고 말씀하고 계신데 우리는 하나님께 “회복”(restoration)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흘려야 할 눈물은 ‘회개의 눈물’인데 우리는‘회복을 간구하는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회개가 없는 회복이 없는데 지금 우리는 회개의 필요성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회복의 필요성만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그만큼 지금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범하고 있는 죄를 인식하며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계속해서 거룩하신 하나님께 같은 죄를 반복하면서 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는 우리 가족 식구들과 우리 교회 식구들에게도 죄를 범하고 있으면서도 그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담대하게 죄를 반복해서 범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회개를 해야 한다는 생각조차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정도로 지금 우리는 죄에 대하여 무감각해졌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회복의 축복과 물질의 축복 등에 대하여는 매우 민감해져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오늘 하나님께서는 “통곡하며 애곡하며 머리 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따라”[(현대인의 성경)
“통곡하고 슬퍼하며 머리를 밀고 굵은 삼베 옷을 입으라”]고 명령하시고 계십니다(사22:12). 한 마디로 요약 적용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회개의 눈물을 흘리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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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2018년 7월 18일에 “목사의 눈물”이란 제목 아래 예레미야
8장 18, 21절과 9장 1절 말씀 중심으로 쓴 말씀 묵상 글의 한 부분을 나눕니다:
“우리 목사들은 깊은 슬픔에 잠겨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슬피 울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보다 더 통곡하며 슬피 울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 자신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슬피 울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바로 대언하지 아니하는 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본질을 망각하고 거짓 복음을 전파하는 죄,
복음의 열정이 식어져서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죄,
천하보다 한 영혼이 귀하다고 말하면서도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죄,
탐심과 욕심 속에서 목회하므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양 떼들에게 목자 되신 주님 한분만으로 자족할 수 있는 비결을 삶으로 가르쳐 주지 않는 죄,
…, 목이 곧고 마음을 강팍하게 하여 우리 자신들이 범하고 있는 죄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죄 그러므로 회개치 못하는 죄,
그리고 회개의 눈물 뿐만 아니라 감사의 눈물과 헌신의 눈물이 메마른 죄,
이러한 수 많은 죄들로 인하여 우리 목사들은 슬피 울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iii)
사도 야고보는 손을 깨끗이 해야 할 “죄인들”과 마음을 성결하게 해야 할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약4:8)에게 “슬퍼하며 애통하여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9절)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고린도전서
5장 2절은 고린도 교회가 공공연한 부도덕에 대해
"슬픔에 잠겨야 마땅했음에도 불구하고"
교만했던 것을 책망합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12장 21절은 바울이 회개하지 않는 신자들 때문에
"슬퍼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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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적 및 실제적 함의(인터넷):
예배: 고백과 애통은 찬양과 함께 드려져야 하며,
십자가와 빈 무덤 모두를 반영해야 합니다.
제자도: 성도들에게 올바르게 애통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겸손,
죄에 대한 경계심,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갈망을 키워줍니다.
상담: 진정한 슬픔은 억압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은 슬픔을 인정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위로로 인도합니다.
선교: 자신의 죄와 세상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애통하는 교회는 피상적인 기쁨에 마비된 문화 속에서 진정성 있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c)
누가복음
6장 21절은 “우는 자”의 복은 “웃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웃을 것이다’라는 헬라어 단어 “γελάσετε”는 ‘(기쁨이나 만족감을 나타내는 표시로)
웃다’라는 의미입니다(인터넷).
(i)
이 동사는 신약성경에 두 번나오는데 두 경우 모두 누가복음
6장의 복과 화에 대한 말씀에서 나타납니다(눅6:21, 25). 예수님께서는 현재의 슬픔과 다가올 기쁨,
그리고 현재의 경솔함과 임박한 슬픔을 대조시키시는데 각 경우에서 세상적인 상황(earthly
circumstances)은 하나님 나라의 현실(kingdom
realities)에 의해 역전됩니다[종말론적 역전(Eschatological
Revesal): 누가는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의 사회적 상황을 뒤엎을 것이라고 제시합니다.
의로움 때문에 소외당한 사람들은 결국 웃게(laugh)
될 것이고,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들(self-satisfied)은 슬픔(lament)에 잠기게 될 것입니다](인터넷).
·
“최고의 역전 드라마”(에스더 9장 20절)란 제목 아래
2009년 7월 20일에 쓴 말씀 묵상 글을 다시금 읽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에스라
9장22절을 보면 우리는 유대인의 역전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다 멸족 당할 뻔 하던 유대인들이 역전되어 이젠 그들을 미워하는 유대인 대적들을 제어하게 된 것입니다(9:1).
멸족 당할 뻔 유대인들이 도리여 그들의 대적들을 제어하게 된 원인은 왕후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4:16)는 각오로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감으로 인하여(9:25)
결국 유대인들의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였고 그들의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던 것입니다(22절)”[참고: “최고의 역전 드라마(에스더 9장 22절)”: https://blog.naver.com/kdicaprio74/150056786119?trackingCode=blog_bloghome_searchlist;
“하나님께서 쓰시는 드라마”:
https://blog.naver.com/kdicaprio74/150140286212;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슬픔을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https://blog.naver.com/kdicaprio74/22315253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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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10일에 “막장 드라마를 역전 드라마로!”란 제목 아래 쓴 글입니다:
“아무리 사탄이 막장 드라마를 쓰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역전 드라마를 쓰신다. (에스더에 나오는 하만의 막장 드라마를 통해서도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에스더와 모르드개를 통해 유다 백성들에게 역전 드라마를 쓰신 것을 생각하면서).”
·
또한 저는 룻기에서 나오는 나오미 생각났습니다. “나의 즐거움”이란 이름의 뜻을 가진 나오미가 최고의 슬픔의 자리에서 섰다가(남편과 두 아들이 모압 땅에서 다 죽음)[(룻1:20-21)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주님께서 그녀의 삶을 최고의 기쁨의 자리로 역전시키신 이야기[(룻4:14-15)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가 생각났습니다[참고: “하나님, 우리 가정에 풍년이 들게 하소서”:
https://blog.naver.com/kdicaprio74/222984597860].
(d)
마태복음
5장 4절은 “애통하는 자”의 복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는 헬라어 단어 “παρακληθήσονται”는 “곁으로”(παρα)와 “부른다”(καλέω)의 합성어로서 그 의미는 “위로하다,
격려하여 힘을 북돋아 주다,
달래다”입니다(인터넷).
(i)
메시야(그리스도)의 오신 목적은 이스라엘의
'위로'(눅 2:25)가 되려 하심이요,
성령님이 오신 목적도
'위로자'(요 14:16)가 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위로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에게 내려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부분적으로 실현된
'위로'는 종말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이루어질 천국에서의
'위로'(계
7:17;21:4)가 될 것입니다.
진정 애통치 않는 자에게 현세와 내세의 위로는 전혀 기대될 수 없는 법입니다(호크마).
·
제가
2011년 8월 27일에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까?”란 제목 아래 예레미야 애가
1장 20절과 2장 14절 중심으로 말씀 묵상한 글의 일 부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원인의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참된 위로를 받기 위해선 그들의 범한 죄악의 문제가 먼저 해결이 되었어야야 했습니다. 그리할 때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것이며 또한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회복될 수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회복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참된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위로를 받기 위해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야 했으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위해선 그들의 죄악 문제가 해결됬어야 했습니다. 저는 이 점을 묵상할 때 과연 죄를 범하여 고통을 당하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를 생각케 되었습니다. 과연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위로하시는지를 한
4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하시되 먼저 우리의 죄악을 드러내십니다(expose)(2:14). 다시 말하면,
성령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으로 우리의 죄악을 책망하십니다(엡5:11). (2) 성령님께서는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악을 자백케 하십니다(confess). 성령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에 대하여 동의하며 인정케 하시사 결국에는 토설케 하십니다(시32:3). (3) 성령님께서는우리의 죄악을 회개케(repent)
하시사 하나님께 돌아오게(return)하십니다. (4)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사로잡힌 것에서부터 자유케(free)
하시사 회복(restoration)의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이 하나님의 회복의 은총을 우리가 누릴 때에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참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참된 위로가 우리에게 있길 기원합니다”[참고: https://blog.naver.com/kdicaprio74/150117338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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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2018년 9월 5일에 “진정한 위로는?”이란 제목 아래 쓴 나누는 몇 마디 글입니다:
“자기의 죄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고 있는 친구에게 '괜찮아.
앞으로 잘될꺼야'라고 말하는 것은 진정한 위로가 될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위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이 있다는 진리를 믿고 참된 회개 가운데 죄 용서함을 받는 것입니다. 죄에서 자유를 누릴 때만이 고통에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의
"물총새에 불이 붙듯"을 읽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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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2024년 6월 21일에 “어디를 보아도 우리를 위로할 자가 없을 때 …”란 제목 아래 쓴 짧은 말씀 묵상 글입니다:
“어디를 보아도 우리를 위로할 자가 없을 때(참고: 예레미야 애가
1:9, 현대인의 성경;
전도서 4:1) 우리는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하듯 우리를 위로하시며(이사야66:13, 현대인의 성경),
낙심한 우리를 위로하시며(고린도후서 7:6,
현대인의 성경)
또한 온갖 고난을 겪는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1:4,
현대인의 성경)을 믿음으로 바라보므로 위로의 하나님께 부르짖으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견뎌내야 할 뿐만 아니라(참고: 6절, 현대인의 성경)
우리 주위에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해야 합니다(4절, 현대인의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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