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짧은 말씀 묵상
예루살렘에 가까운 감란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 중 둘을 보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들어가거라.
거기에 가면 아무도 타 본 적이 없는 나귀 새끼 한 마리가 매여 있을 것이다. 그것을 풀어서 끌고 오너라. 누가 너희에게 왜 그러느냐고 묻거든 주님이 쓰신다고 하여라.
그러면 곧 보내 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가서 문 밖 길거리에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고 풀자(마가복음11:1-3,
현대인의 성경)
주인이 “왜 나귀 새끼를 푸시오”하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주님이 쓰십니다”하고 대답하자 그가 허락하였습니다(누가복음19:33-34,
마가복음11:6,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한
2 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께서 두 명의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나귀 새끼 한 마리”를 “풀어서 끌고 오너라”(마가복음11:2, 현대인의 성경)하고 말씀하셨는데 왜 하필이면 “나귀 새끼”였을까요? 왜 예수님은 말(horse)을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지 않으시고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것일까요? 스가랴
9장 9절의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시고자 그러신 것입니다:
“시온 사람들아,
크게 기뻐하라.
예루살렘 사람들아,
기쁨으로 외쳐라.
보라,
너희 왕이 너희에게 나아간다 그는 의로우신 분이며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가 겸손하여 나귀를 탔으니 어린 나귀,
곧 나귀 새끼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2장 14-15절에서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셨는데 이것은 성경에
'시온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현대인의 성경). 분명히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시야”(헬라어로는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무력의 왕”으로(호크마) 오셔서[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덩어리로 남자만
5,000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셨을 때 강제로 예수님을 잡아 자신들의 왕으로 삼으려고 했었음(요한복음6:15, 현대인의 성경)]
자기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로마로부터 해방시켜주시길[정치적 해방(political
freedom)(김세윤)]
간절히 기대하였을 것입니다[메시아적 기대(Messianic
expectation)].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유월절 명절을 지키로 사방에서 예루살렘에 온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말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가지고 예수님을 맞으러 나가서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이스라엘의 왕에게 찬양을!”하고 외쳤던 것입니다(12:12-13,
현대인의 성경). 그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예수님을 환영했던 이유는 종려나무는 “의와 아름다움과 승리”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그들은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스라엘의 승리의 왕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승리의 왕으로 자기들을 지배하고 다스리고 있었던 로마 제국으로부터 구원(정치적 해방)해주시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호산나!”,
즉 “지금 구원해 주소서”하고 외쳤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경제적 번영과 사회적 공의를 가져다줄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대하였기 때문에 그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하여”
“나귀 새끼”를 타신 의로우신(스가랴 9:9) “왕 중의 왕”(디모데전서6:15,
공동번역) 또는 “왕들의 왕”(요한계시록17:14;
19:16, 현대인의 성경)이신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시고자 하신 구원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주시고(시편130:8, 현대인의 성경;
누가복음24:47,
새 번역;
사도행전10:43)
우리를 구원하사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시고자 하신 것이었습니다(로마서6:23,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겸손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요한복음1:29) 유월절 어린 양(역대하35:1,
6; 누가복음22:7, 현대인의 성경)으로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순종하신 것입니다(빌립보서2:8).
(2)
예수님께서 그 두 명의 제자들에게 매여 있는 “나귀 새끼 한 마리”를 “풀어서 끌고 오너라”하고 말씀하신 후 “누가 너희에게 왜 그러느냐고 묻거든 주님이 쓰신다고 하여라. 그러면 곧 보내 줄 것이다”(마가복음11:2-3,
현대인의 성경)하는 말씀을 묵상할 때 저는 주님께 쓰임받은 그 “나귀 새끼 한 마리”와 거짓 선지자 발람이 탔던 “나귀”(민수기22:21)와 비교하여 쓴 짧은 말씀 묵상의 글을 다시금 읽게 되었습니다. 그 묵상 글의 제목은 “나귀(짐승)처럼 주님을 충성되이 섬기고 있나요?”입니다:
(a)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본 "나귀"를 발람은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고 말했습니다(민수기 22:23,
29). 나귀는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서 있는 하나님의 사자를 보고 발람에게 채찍으로 세 번이나 맞으면서까지 자기 주인을 살리려고 했었지만(23-27절) 발람은 일생 동안 자기를 충성되이 섬기고 있었던(30절) 나귀를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고 말했습니다(29절). 발람은 자기 나귀(짐승)보다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짐승보다 못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자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마21:7-10). 예수님께서 타신 나귀는 발람의 나귀처럼 예수님을 살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나귀는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시고 계셨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같으신(이사야 53:7, 현대인의 성경)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님에게 순종했습니다. 과연 우리는 발람이 탄 나귀와 예수님이 타신 나귀처럼 주님을 충성되이 섬기고 있나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셨습니다.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님께서 시장하셨습니다.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열매가 있는지 보려고 가셨으나 아직 무화과 철이 아니어서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나무를 향해 “사람이 네게서 다시는 열매를 따먹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는데 제자들도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마가복음11:11-14,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한
3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1)
예수님께서 시장하셨다(마가복음11:12)하는 말씀을 묵상할 때 원로 목사님께서 수요 예배 때 설교하신 내용이 생각났습니다. 그 설교 내용이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신 데 연약한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기에 잡수시지 못하시면 시장하셨고(마태복음4:2), 피곤하셔서(요한복음4:6) 배의 뒷부분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셨고(마가복음4:38) 또한 목이 마르셨다(요한복음19:28)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원로 목사님께서는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연약하셨을 때 사탄은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와서 예수님을 많이 시험했지만(예: 마태복음4:3ff.)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모든 시험을 이기셨기에(히4:15) 죄가 없으시다고 설교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을 연관해서 묵상하며 반영해 볼 때 저는 배가 고팠을 때 신경이 좀 예민해져서 아내에게 좀 짜증을 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그 틈을 노려 사탄이 저로 하여금 시험에 들게 하여 심지어 부부 갈등을 일으켰던 기억도 납니다. 별거 아니라고 가볍게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저의 경우는 배가 고프면 이렇게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아내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과 아내에게 죄를 범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이나 금식하여 몹시 시장하셨을 때 시험하는 마귀가 예수님께 와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을 빵이 되게 하라”(마태복음4:1-3,
현대인의 성경)고 시험(유혹)했을 때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으니라”(4절)하고 대답하셔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신명기
8장 3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시며 여러분과 여러분의 조상들이 전에 먹어 보지 못한 만나를 주어 먹게 하신 것은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현대인의 성경). 사람이 연약하여 시장할 때(배가 고플 때)에도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에베소서6:17)을 가지고 마귀의 유혹과 싸워 범죄하지 않고 우리의 믿음을 승리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참고: 요한일서5:4 –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2)
예수님께서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열매가 있는지 보려고 가셨으나 아직 무화과 철이 아니어서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마가복음11:13)는 말씀을 묵상할 때 두 개의 복음성가 가사가 생각났습니다:
(a)
“작은 불꽃 하나로 남아”
2절 가사:
이름없는 들풀 하나 주님 앞에 섭니다 찬바람에 견디도록 주여 도와 주옵소서 꽃 피우지 못한 죄인 열매 없는 무화과라 허송세월 보낸 이 몸 엎드리어 우옵니다 슬픔 근심 가득 찰 때 하늘나라 소망하며 아버지의 품 안에서 영원토록 살게 하소서 어둔 세상 향내내는 작은 들 풀 하나로 남아 피우고 또 피워서 청지기가 되게 하소서,
(b)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
후렴: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그리고 그 사랑 전하기 위해 주께서 택하시고 이 땅에 심으셨네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
이 두 복음성가를 오늘 본문 말씀 마가복음
11장 13절과 연관해서 묵상하고 반영하고 적용할 때 주님께서는 저에게 혹시 “또 하나의 열매”가 있는지 바라보시고 계실텐데 저는 “꽃 피우지 못한 죄인 열매 없는 무화과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나무에 잎사귀와 열매가 없을지라도 …”란 제목 아래 쓴 짧은 말씀 묵상 글입니다:
“장인 어르신이 걸을 좀 걸으실 수 있으셨을 때 집 뒤뜰에 있는 한 나무에다가 물을 주신 적이 있으십니다. 그 때 저는 장인 어르신의 뒤에서 물호수를 들고 장인 어르신을 따라 그 한 나무에 물을 주시는데 보조했습니다. 근데 그 한 나무는 열매도 없을 뿐만 아니라 가지에 잎사귀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장인 어르신을 그 나무에 물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이라 생각합니다. 주님이 나같은 죄인을 사랑하시되 열매 없고 잎사귀 없는 그 나무와 같은데도 불구하고 주님은 지금도 저에게 사랑의 물을 계속해서 부어주시고 계십니다. ….”
(3)
예수님께서 그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가 나무를 향해 “사람이 네게서 다시는 열매를 따먹지 못할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마가복음11:14,
현대인의 성경)는 말씀을 묵상할 때 호크마의 주석 글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 무화과나무에 대해 예수께서 강하게 저주한 것은 예수께서 시장하셨거나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대한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극적이고도 예고적으로 보여준 표징이었다.
잎은 많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하나님의 은총과 그들의 종교에 대한 외적인 인상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영적인 불모성을 상징한 것이었다”(호크마). 특히 저는 “그들의 종교에 대한 외적인 인상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영적인 불모성을 상징한 것”이라는 말을 생각할 때 지금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즉,
지금 우리 교회는 외적으로는 사람들에게 인상적으로만 보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화려하게까지 보이면서도 영적으로는 아무런 발전이나 결실이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교회의 화려함을 묵상할 때 제가 전에 묵상한 짧은 말씀 묵상 글들을 다시금 묵상하게 됩니다:
(a)
“아름다운 교회인가 아니면 화려한 교회인가?”:
“다양성 속에서 교회의 통일성을 힘써 지켜나아가므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인가 아니면 다양한 문제들 속에서 교회의 화려함만을 힘써 홍보하는 교회인가?
(참고: 시편 133:1, 사도행전 6:5; 에베소서 4:3)”
(b)
“세상적으로 화려한 교회의 부끄러운 것이 보이고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화려한 교회의 부끄러운 것이 보이고 있습니다(참고: 이사야 47:3, 현대인의 성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그녀의 수치를 모르고 있습니다.”
(c)
“십자가를 장식품으로만 여기는 화려한 교인들의 모습?”:
“십자가를 장식품으로만 여기는 화려한 교인들의 모습은 사라지고 예수님처럼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좁은 길을 걸어가는 성도들의 모습이 회복될 것입니다(참고: 이사야 47:1, 현대인의 성경).”
이 하나님의 회복의 은총을 사모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회개의 은총을 베풀어 주셔서 우리 교회의 죄를 깨닫게 하시사 인정하며 고백하며 돌이킬 수 있게 하여주시길 기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 답게 하여 주시고 교회가 교회답게 하여 주시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세우신 목적대로 우리로 하여금 “아름다운 열매”(마태복음7:17,
18 , 19)를 맺게 하여 주시길 기원합니다. 그 “아름다운 열매”란 영원한 생명(14절)인 천국에 들어가는 것(21절)과 성령님의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라디아서5:22-23)와 선행(에베소서2:8-10)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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