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짧은 말씀 묵상
"예수님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님이 앞장서서 가시자 제자들이 놀라고 뒤따라가는 사람들도 두려워하였다. 예수님은 다시 열 두 제자를 가까이 불러 자기가 앞으로 당할 일을 이렇게 일러주셨다. '지금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서 나는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다음 나를 이방인들에게 넘겨줄 것이며 이방인들은 나를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3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마가복음
10:32-34,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2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1)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은 분명히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고난당하신 후 십자가에 죽으시러 가시는 길인데 예수님은 왜
"앞장서서"
가셨을까요? 왜 예수님의 고난의 길이요 죽음의 길을 앞장서서 가신 것일까요? 혹시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그 고난과 죽음의 길이요 영적으로 죽어있는 우리를 살리는 길(중생의 길)이요 또한 영원히 살리는 구원의 길인 줄 알고 계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2)
왜 예수님의 제자들이 놀라고 뒤따라가는 사람들도 두려워하였던 것일까요? 혹시 제자들이 놀란 것은 그 고난과 죽음의 길을 예수님께서 담대히 앞장서서 걸을셨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뒤따라가는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던 이유는 혹시 자기 자신들의 위험에 사로잡혀 스스로 두려워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에 그들은 자기들이 무한한 위험 속에 뛰어들어가고 있음을 생각하였다. 그들의 선생과 자기들을 적대시하는 산헤드린 대법원 법관들이 얼마나 악한가를 그들은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이러한 생각을 하여도 겁이나 떨리었다"(메튜 헨리).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열 두 제자들에게 자신이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서기관들)의 손에 넘어가 사형 선고를 받아 이방인들에게 넘겨져서 그들이 자신을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죽일 것과
3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일러주셨는데(마가복음10:32-34,
현대인의 성경)
세베대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
저희들의 소원을 좀 들어주십시오”하고 말하면서 자기들이 원하는 소원은 “우리를 주님의 영광스러운 나라에서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주님의 왼편에 앉게 해주십시오”하고 부탁하였습니다(35-37절, 현대인의 성경).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
내가 마셔야 할 고난의 쓴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아야 할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겠느냐?”하고 물으셨고 그들은 “예,
할 수 있습니다”하고 답변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정말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편과 왼편에 앉는 것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정해진 사람들의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38-40절,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몇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1)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제자들에게 일러주셨는데 어떻게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우리를 주님의 영광스러운 나라에서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주님의 왼편에 앉게 해주십시오”하고 부탁할 수가 있었을까요? 마태복음20장20절을 보면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그런 부탁을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그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절하면 그리 부탁을 드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어머니를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미국에서 만들어진 신조어이자 사회 용어인 “헬리콥터 부모”(Helicopter
parent)란 말이 있습니다. 그 의미는 부모가 자식들의 위에서 헬리콥터처럼 떠다니며 모든 일에 간섭하려 드는 부모를 의미합니다(인터넷): “내 아이가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먹고 곱게 자라길 바라는 좋은 뜻에서 시작한 아이에 대한 간섭! 하지만 이것은 세심한 보호와 지나친 배려를 넘어서 ‘과잉보호’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자녀를 지나치게 과잉보호 하는 부모는 교육적 무지,
불안, 미성숙, 자녀 교육에 대한 자신감 부족 등이 원인 일 수 있습니다. 불행한 부부 관계로 배우자에게 실망을 갖고 그 실망을 아이에게 보상받으려는 심리도 있을 수 있어요. 심리학 전문가들은 과잉보호의 결정적 요소를 부모의 ‘감정적인 태도’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과잉보호를 하는 부모는 자신이 아이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하고,
감정적으로 가장 가까운 상대여야 하며,
아이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길 바란다고 해요. 자녀는 부모의 분신이나 소유물이 아니지만 헬리콥터 맘(helicopter
mom)은 자녀를 독점하려는 성향이 강한 것이 특징입니다. 과연 이것이 사랑일까요?”(인터넷) 제 생각엔 야고보와 요한 형제의 어머니는 ‘헬리콥터 엄마’였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가장 위대하냐 하고 서로 다투었”던 예수님의 제자들(마가복음9:34; 참고: 마태복음18:1; 누가복음9:46,
22:24, 현대인의 성경)
중에는 야고보와 요한이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그 사실을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알고 있었기에 그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절하며 그런 부탁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마태복음20:20-21,
현대인의 성경). 왜 자식들 일에 어머니가 나서서 그리했을까요? 이렇게 헬리콥터 엄마는 자식들의 일이라면 물불을 안 가리고 뛰어들어서 어떻게 해서든 자식을 사랑한답시고 무리하게 말하고 행동을 합니다. 그 무리함에는 무지함도 있기에 야고보와 요한도 자신들의 어머니를 본받아 무지하였습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너희는 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22절, 현대인의 성경).
(2)
헬리콥터 엄마인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나 야고보와 요한이 모르고 있었던 것은 주님의 영광스러운 나라에서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주님의 왼편에 앉고자 할 때에 그 “영광”을 얻기 위해선 “고난”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영광만을 받으려고 했었지 고난은 전혀 염두해두지도 못했습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이 마셔야 할 “고난의 쓴 잔”은 마실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예수님의 영광만을 원했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6-11절 말씀으로 말한다면,
야고보와 요한이나 그들의 어머니가 몰랐던 것은 겸손하신 예수님께서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6-8절)은 배제하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최고로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셔서 하늘과 땅과 땅 아래 있는 자들이 모두 예수님의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 것(9-11절, 현대인의 성경)만 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간구로 말한다면,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인 “고난의 잔”은 받지 않고 자기들의 원(하는)대로(참고: 마가복음14:36)
하나님의 영광만을 원했던 것입니다. 저희 교회 원로 목사님이 수요 예배 때 설교하신 로마서
8장 17-18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 우리가 그(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선 우리는 고난도 예수님과 함께 받아야 합니다. 헬리콥터 엄마의 과잉보호 사랑을 받고 자라난 자녀들은 야고보와 요한처럼 몸은 ‘예수님과 함께’일지는 모르겠지만 마음과 정신과 감정은 자신들의 헬리콥터 ‘엄마와 함께’이고 또한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지 않고(그것은 pass하고) 헬리콥터 엄마와 함께 영광만을 받길 원합니다.
(3)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마셔야 할 고난의 쓴 잔과 받으셔야 할 세례를 자기들도 받을 수 있다고 “예,
할 수 있습니다”하고 말했는데(마가복음10:38-39,
현대인의 성경)
어떻게 그들은 그리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의 자신감은 무엇에 근거한 것이었을까요?
제 생각엔 그들의 자신감은 무지함에 근거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예수님이 마셔야 할 “고난의 쓴 잔”이나 받으셔야 할 “세례”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들이나 자신들의 헬리콥터 엄마가 원하는 영광은 무지함 가운데서도 너무나 원했기에 “예,
할 수 있습니다”(39절, 현대인의 성경)하고 대답했다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야고보와 요한이 허영심에 근거한 자신감을 갖게 된 원인은 그들의 헬리콥터 엄마의 책임입니다. 이러한 헬리콥터 엄마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2장 3절 말씀입니다(공동번역): “무슨 일에나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을 버리고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예수님의 일행이 여리고에 들렀다가 군중들과 함께 그 곳을 나갈 때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들은 “나사렛 예수님이 지나가신다”하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바디매오는 큰 소리로 “다윗의 후손 예수님(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하고 외쳤습니다(마가복음10:46-47;
누가복음18:35-38,
현대인의 성경;
참고: 마태복음20:29-30,
현대인의 성경). 앞서가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꾸짖으며 조용히 하라고 했으나 바디매오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후손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하고 외쳤습니다(마가복음10:48;
누가복음18:39,
현대인의 성경). “예수님이 걸음을 멈추시고”(마가복음10:49;
마태복음20:32;
누가복음18:40,
현대인의 성경)
“그를 불러오너라”하고 말씀하시자 사람들이 소경에게 “잘됐다. 일어나라.
예수님이 너를 부르신다”하였습니다(마가복음10:49,
현대인의 성경). 그러자 소경이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하고 물으시자 그는 “선생님(주님), 눈,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하고 대답하였습니다(50-51절, 현대인의 성경;
참고: 누가복음18:41,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예수님이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하고 말씀하시자 그가 곧 눈을 뜨고 예수님을 따라 갔습니다(마가복음10:52,
현대인의 성경).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모두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누가복음18:43,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몇 가지고 생각하게 됩니다:
(1)
“예수님의 일행이 여리고에 들렀다가 군중들과 함께 그 곳을 나갈 때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마가복음10:46,
현대인의 성경)라는 말씀을 묵상할 때 든 생각은 왜 마가는 거지 “바디매오”가 “디매오의 아들”이라고 기록했을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여기서 “디매오”란 이름의 뜻은 “존경”인 반면에 “바디매오”란 ‘아들’이란 뜻의 ‘바’와 ‘디메오’의 합성어로서 ‘디매오의 아들’이란 뜻이기에 “바디매오”는 그의 진짜 이름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고 합니다(인터넷). 바디매오는 자신의 이름으로 불린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에 의탁하여 사람들에게 구걸하면서 살아가는 거지였든지 아니면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가족에게서 버려져서 아버지의 이름 디매오만 알고 있는 불쌍한 한 인간이었을 지 모릅니다(인터넷). 호크마에 의하면 마가가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라고 기록한 이유는 히브리어를 알지 못한 이방인 수신자들을 위해 주해적 설명을 부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호크마).
(2)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들은 “나사렛 예수님이 지나가신다”하고 말해 주었다(마가복음10:46-47;
누가복음18:35-37,
현대인의 성경)는 말씀을 묵상할 때 아무래도 바디매오는 소경이었기에 귀가 많이 밝았을 것이고 그 “많은 사람들이”(마가복음10:48,
현대인의 성경)
“지나가는 소리”(누가복음18:36,
현대인의 성경)를 들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그가 그 소리를 듣고 관심을 가지고 “무슨 일이냐”고 물을 필요까지는 없었습니다(36절, 현대인의 성경).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관심입니다. 왜 거지 바디매오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에 관심을 가졌던 것일까요? 누가복음
16장을 보면 “한 부자”
“집 대문 앞에”
누워 있었던 거지 “나사로”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하였다(19-21절, 현대인의 성경)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거지 나사로의 관심은 굶주린 배를 채우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 나오는데 그는 “미문”이라는 성전 문 앞에서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였는데 그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 줄 알고 바라보았으나 베드로는 그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2-3, 5-6절,
현대인의 성경)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앉은뱅이의 관심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은이나 금을 얻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의 관심은 돈도 아니고 굶주린 배를 채우려는 것도 아니고 오직 눈이 뜨게 되어 보기를 원하는 것이었습니다(마가복음10:51;
마태복음20:33;
누가복음18:41). 요한복음
9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실로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1절, 현대인의 성경)에게 예수님께서는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 소경의 눈에 바르시고 그에게 “실로암(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못에 가서 씻어라”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소경은 가서 씻고 눈을 뜨고 돌아왔다는 말씀입니다(6-7절, 현대인의 성경). 복음성가 “실로암”
가사가 생각납니다:
“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 새벽을 찾아 떠난다 종이 울리고 닭이 울어도 내 눈에는 오직 밤이었소 우리가 처음 만난 그때는 차가운 새벽이었소 그대 눈 속에 여명있음을 나는 느낄 수가 있었소 오 주여 당신께 감사하리라 실로암 내게 주심을 나에게 영원한 이 꿈속에서 깨이지 않게 하소서.”
(3)
“나사렛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누가복음18:37,
현대인의 성경하는 말을 듣고 소경 거지 바디매오는 큰 소리로 “다윗의 후손 예수님(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하고 외쳤다(마가복음10:47;
누가복음18:37-38,
현대인의 성경;
참고: 마태복음20:30,
현대인의 성경)는 말씀을 묵상할 때 첫째로 드는 생각은 갈급한 사람에게 우리는 “예수님”을 소개해야(전해야)한다는 교훈입니다. 둘째로 드는 생각은 지금 저의 심정도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Lord,
have mercy on me)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 1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세리(세무원)의 기도가 자꾸만 생각납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세무원은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간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신음 소리를 들으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한없는 사랑과 은혜와 긍휼로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사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하고 계십니다(로마서 5:20, 새 번역). 하나님께서는 이 죄인에게 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계십니다(고린도후서12:9). 그래서 저는 이렇게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1절)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2절) 왜 내게 굳센 믿음과 또 복음 주셔서 내 맘이 항상 편한지 난 알 수 없도다,
(3절) 왜 내게 성령 주셔서 내 맘을 감동해 주 예수 믿게 하는지 난 알 수 없도다,
(후렴) 내가 믿고 또 의지하는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
(4)
앞서가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꾸짖으며 조용히 하라고 했으나 바디매오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후손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하고 외쳤다(마가복음10:48;
누가복음18:39,
현대인의 성경)는 말씀을 묵상할 때 어떻게 이 죄인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누가복음18:13,
현대인의 성경)하고 마음 속으로부터 부르짖는 기도를 멈출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누가 저에게 뭐라고 말해도 어떻게 제가 죽을 때까지 이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중단할 수 없는 저의 기도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제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나는 죄인들 중에서 가장 큰 죄입니다”(새 번역)](디모데전서1:15)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5)
“예수님이 걸음을 멈추시고”(마가복음10:49;
마태복음20:32;
누가복음18:40,
현대인의 성경)
“그를 불러오너라”하고 말씀하시자 사람들이 소경에게 “잘됐다. 일어나라.
예수님이 너를 부르신다”하였다(마가복음10:49,
현대인의 성경)는 말씀을 묵상할 때 저는 걸음을 멈추신 예수님을 생각해 봅니다. 왜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신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소경 거지 바디매오의 “다윗의 후순 예수님,
저를 불상히 여겨 주십시오”(47절, 현대인의 성경),
“다윗의 후손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48절, 현대인의 성경)하는 부르짖는 큰 소리를 들으셨기 때문이 아닌가요? 시편 145편 18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부르짖는 모든 자,
곧 진실한 마음으로 부르짖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하신다.” 아멘입니다! 시편
10편 17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들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들을 격려하시며 그들이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사무엘하22장 7절(시편 18:6)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내가 고통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성소에서 내 음성을 들으시고 내가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네.” 우리가 고통 중에서 부르짖을 때에 우리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새 찬송가 528장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생각납니다:
(1절)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문 앞에 나와서 사면을 보며 우리를 기다리네,
(2절) 간절히 오라고 부르실 때에 우리는 지체하랴 주님의 은혜를 왜 아니받고 못들은 체 하려나,
(후렴)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 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 그래서 저는 “나 주의 도움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새 찬송가
214장, “나 주의 도움받고자”,
1절): (3절) 내 힘과 결심 약하여 늘 깨어지기 쉬우니 주 이름으로 구원해 날 받으옵소서,
(4절) 내 주님 서신 발 앞에 나 꿇어 엎드렸으니 그 크신 역사 이루게 날 받으옵소서,
(후렴)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6)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르신다는 말을 들은 소경 거지 바디매오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하고 물으시자 그는 “선생님(주님), 눈,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하고 대답하였다(마가복음10:50-51,
현대인의 성경;
참고: 누가복음18:41,
현대인의 성경)는 말씀을 묵상할 때 먼저 요한복음
21장 7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 순간,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베드로에게 말했다.
‘저분은 주님이시다!’
시몬 베드로는 ‘주님’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벗어 두었던 겉옷을 얼른 걸치고는,
물속으로 급히 뛰어들었다”(쉬운 성경). 바디매오는 예수님께 나아가면서 겉옷을 벗어 던진 반면에 옷을 벗고 있었던 베드로는 예수님께 나아가면서 겉옷을 걸쳤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에 폈다”(누가복음19:36,
현대인의 성경)는 말씀도 생각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신다는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난 바디매오를 생각할 때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 마르다가 자기 여동생 마리아에게 귓속말로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하고 일러주었더니 “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나 예수께 달려갔다”(요한복음11:28-29,
현대인의 성경)는 말씀과 비교가 됩니다. 그리고 이 말씀들을 제 자신에게 반영하며 적용해 볼 때 주님께서 저를 부르시는 음성을 들을 때 저는 “벌떡 일어나”
주님께 달려나아가고 싶습니다. 복음성가 “주 말씀 향하여”
가사가 생각납니다:
“하늘의 나는 새도 주 손길 돌보시네 온 땅에 충만한 주 사랑으로 내 마음을 덮으소서 주 나를 부르셨네 주의 영광 위해 모든 사람 이끄소서 주의 영광으로 주 말씀 향하여 달려가리라 힘도 아닌 능도 아닌 오직 성령으로 주 얼굴 향하여 달려가리라 오 주의 영광 안에 살게 하소서.”
(7)
예수님이 그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하고 물으시자 그는 “선생님(주님), 눈,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하고 대답하였다(50-51절, 현대인의 성경;
참고: 누가복음18:41,
현대인의 성경)는 말씀을 묵상할 때 만일 주님이 저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무엇이라고 답변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할 때 저는 솔로몬이 하나님께 구한 내용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나의 아버지에게 하신 약속을 이행하소서. 주는 나를 땅의 티끌처럼 많은 백성의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와 지식을 나에게 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이처럼 많은 주의 백성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역대하1:9-10,
현대인의 성경) 이 말씀이 저에게 적용되는 이유는 저의 한국어 이름이 “지원”으로서 그 의미는 ‘지혜의 으뜸’입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론 부모님이 저에게 그 이름을 져주시고 저를 위해 기도할 때 붙잡으시는 말씀이 다니엘
12장 3절입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현대인의 성경)
“지혜로운 자들은 하늘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며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한 자들은 별처럼 영원히 빛날 것이다”]. 그런데 저는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제가 얼마나 미련하고 어리석은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야고보서
1장 5절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한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꾸짖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후하게 주시는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께서 저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주님께 ‘지혜를 주십시오’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제가 지혜로운 자가 되어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데 주님의 도구로 쓰임받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8)
예수님이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하고 말씀하시자 그가 곧 눈을 뜨고 예수님을 따라 갔습니다(마가복음10:52,
현대인의 성경).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모두 하나님을 찬양하였다(누가복음18:43,
현대인의 성경)는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하고 말씀하시면 그 말씀을 하신 주님을 믿고 그 능력의 말씀에 사로잡혀 믿음으로 가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곧 눈을 뜨고 예수님을 따라 갔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눈을 뜨고 믿음의 근원이시며 우리 믿을 완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히브리서12:2, 현대인의성경) 예수님을 따라가는 예수님의 참 제자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모두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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