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짧은 말씀 묵상
예수님의 제자들 중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저주한 무화과나무가 뿌리채 마른 것을 보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선생님,
저것 좀 보십시오. 어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렸습니다”하였습니다(마가복음
11:20-21,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한 가지만 생각하게 됩니다:
(1)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란 말씀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사도 베드로가 생각난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는 마가복음11장 14절 말씀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나무를 향해
'사람이 네게서 다시는 열매를 따먹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제자들도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었다”(현대인의 성경). 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미 들었던 베드로는 “다음 날 아침”(20절, 현대인의 성경)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과 길을 가다가 예수님이 저주한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그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얻는 교훈은 제가 이미 묵상하고 설교한 하나님의 말씀을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지금 이렇게 마가복음
11장 20-21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을 묵상하면서도 생각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생각나게 하신 말씀이란 바로 누가복음
22장 61-62절입니다: “주님께서 몸을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자 그는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말할 것이다.'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한없이 울었다”(현대인의 성경). 이 말씀을 보면 여기서도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나서”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도 베드로는 주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었는데 저는 이것이 귀한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귀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마음 것 누리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묵상의 맛이요 축복이라 믿습니다. 저는 여태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오면서 베드로처럼 전에 들은 주님의 말씀이 다시금 생각나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일)를 자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저로 하여금 다시금 생각나게 하신 그 주님의 말씀과 지금 묵상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성을 짓게하시곤 하십니다. 예를 들어,
오늘 본문 마가복음
11장 21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을 묵상하다가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다는 말씀을 생각하는데 누가복음22장 61-62절 말씀이 생각나서 그 두 말씀의 유사점을 생각케 되었을 때 그 두 말씀의 연결성이란 예수님의
12 제자들 중에서 유독 베드로가 이렇게 주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모습을 엿보게 되면서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는 열매가 없고 잎사귀만 있는 무화과나무를 저주(마가복음11:21)하신 반면에 누가복음
22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째 부인하였 때 말씀을 마태복음
26장 74절 말씀으로 보면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의 저주와 베드로의 저주를 연관짓게 되면서 갈라디아서3장 13절 말씀과 연관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현대인의 성경)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성경에도
'나무에 달린 사람마다 저주를 받은 자입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제 말씀 묵상의 글을 읽으면서 무슨 성경 말씀이 생각나십니까? 어떤 말씀의 연결성을 짓게 되십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어라.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누구든지 이 산을 향해 땅에서 들려 바다에 빠져라 하며 마음 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마가복음11:22-23,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몇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어라”(22절, 현대인의 성경)는 말씀을 묵상할 때 요한복음
14장 1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과 연관해서 묵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예수님의 “하나님을 믿어라”는 말씀은 곧 ‘예수님을 믿어라’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를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0장 3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현대인의 성경]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즉,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는 하나이시기에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6:29,
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하나님을 믿어라”(마가복음11:22,
현대인의 성경)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또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요한복음5:24, 현대인의 성경).
(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누구든지 이 산을 향해 땅에서 들려 바다에 빠져라 하며 마음 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마가복음
11:23, 현대인의 성경)하는 말씀을 묵상할 때 마음 속으로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 속으로 던지우라고 하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과장법을 사용하여 말씀하셨는데 한 가지 조건은 부정적으로 의심없이 그리고 긍정적으로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호크마).
(a)
먼저 예수님은 마음 속으로 의심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음 속으로 의심한다는 것은 마음이 둘로 나뉘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즉,
마음 속으로 의심한다는 것은 마음의 한 쪽은 하나님을 믿지만 마음의 다른 한 쪽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은 일에 정함이 업는 사람입니다(야고보서1:8). 현대인의 성경으로 말한다면,
“그는 이중 인격자이며 언제나 자기가 하는 일에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은 마음을 정결하게 하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4:8,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 마음”(에스겔11:19),
즉 ‘나뉘지 않는 마음’(undivided
heart)을 주시사 더 이상 의심하지 말게 하시고 온전히 하나님을 믿게 하여 주시길 기원합니다.
(b)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모두 죄입니다(로마서14:23, 현대인의 성경). 잠언
3장 4-6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지식을 의지하지 말아라. 너는 모든 일에 여호와를 인정하라.
그러면 그가 너에게 바른 길을 보이실 것이다.” 우리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기 위해선 우리 자신의 지식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7절, 현대인의 성경).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이사야5:21).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바라고 믿어야 합니다(로마서4:18, 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불신앙으로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에 더욱 굳게 서서 하나님을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수 있다고 확신해야 합니다(20-21절, 현대인의 성경).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그대로 될 것이다”(마가복음11:24,
현대인의 성경)[(마태복음21:22,
현대인의 성경)
“너희가 기도할 때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을 것이다”].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묵상하였습니다:
(1)
“너희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그대로 될 것이다(마가복음11:24,
현대인의 성경)[(마태복음21:22,
현대인의 성경)
“너희가 기도할 때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을 것이다”]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제가 대학교 때 어느 목사님에게 다른 지체들과 함께 제자 훈련을 받았을 때 배운
5가지 확신 말씀 중에 ‘기도 응답의 확신’
성경 구절인 요한복음
16장 24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그런데 저는 이 말씀을 배웠지만 제 자신의 부족한 기도 생활을 뒤돌아볼 때 복음성가 “날 구원하신 주 감사”
가사의 이 부분이 생각났습니다:
“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하신 것 감사.” 아마도 그 이유는 요한복음
16장 24절 말씀대로 제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기도 응답을 기도한대로 받을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았던 경우가 생각났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a)
그 경우 중 하나는 바로 제 첫째 아기 주영이가 중환자실에 있었을 때 저는 제 마음 속으로라도 수 없이 하나님 아버지께 주영이를 살려달라고 신음소리를 내면서까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구하였지만 결국에는 제 품에서 그녀가 죽었습니다. 주영이만이었겠습니까?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있었던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리도 살려주시길 간구했거만 제가 기도하고 기대했던 대로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고 그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 응답의 확신 성경 구절인 요한복음
16장 24절보다 “날 구원하신 주 감사”
복음성가 가사 “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하신 것 감사”가 제 마음에 더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마가복음11장 24절 현대인의 성경은 “너희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을 줄로 믿어라. 그러면 그대로 될 것이다”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까 저는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서 받아들여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b)
제가 우선적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말씀은 “하나님을 믿어라”는 말씀입니다(22절,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제가 믿는 하나님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한일서4:8,
16)입니다. 그리고 제가 믿는 하나님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말씀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요한복음1:1)입니다. 그 말씀이신 예수님은 진실하고 신실하십니다(요한계시록19:11,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저는 예수님께서 “저주한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마가복음11:20,
현대인의 성경)을 묵상할 때 이사야
55장 11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현대인의 성경)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내 뜻을 이루며 내가 의도한 목적을 성취할 것이다”]. 민수기
23장 19절 말씀도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며 인간이 아니시니 후회하지 않으십니다.
어찌 그가 말씀하시고 행하지 않으시며 약속하시고 지키지 않으시겠소?”].
(c)
저는 주 하나님께서 우리 승리장로교회에게 하신 “… 내가 … 내 교회를 세우리니 …”(마태복음16:18)라는 약속의 말씀을 반드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신다고 믿습니다. 저는 마음 속으라 의심하지 않고 주님의 약속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마가복음11:23,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저는 약속하신 주님이 진실하시고 신실하심을 믿기에 저와 우리 교회 식구들이 신실하지 못하더라도 주님은 언제나 신실하셔서 우리 교회에게 약속하신 것을 어기실 수 없음을 믿습니다(디모데후서2:13,
새 번역과 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저는 우리 교회 식구들과 함께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을 행하고 싶지 않습니다(고린도후서5:7). 그리고 저는 우리 교회 식구들과 함께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그 말씀에 붙잡힌 바 되어)
계속해서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기도하고 구하는 이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그래도 될 것입니다(마가복음11:24,
현대인의 성경).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 어떤 사람과 서로 마음 상한 일이 있거든 용서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용서해 주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해 주시지 않을 것이다)”(마가복음11:25-26,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묵상하였습니다: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음으로(22절)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말씀하신 후(23-24절) 오늘 본문 마가복음
11장 25-26절에서는 ‘이웃을 용서한 후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는 이 말씀들을 연관해서 묵상할 때 예수님의 이중 계명이 생각났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태복음22:37),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39절). 그 이유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용서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씀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a)
먼저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저는 하나님과 저와의 관계(수직적인 관계)에서 예수님의 이중 계명대로 제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그리고 제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때 전심(“마음을 다하여”)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과 생명을 걸고(“목숨을 다하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뜻대로(“뜻을 다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특히 저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한다는 교훈을 묵상할 때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가 생각났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이 고난의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마가복음14:36,
현대인의 성경).
(b)
그 다음에 ‘이웃을 용서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저는 저와 제 이웃과의 관계(수평적인 관계)에서 예수님의 이중 계명대로 제가 제 이웃을 제 자신같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저를 용서하신 것처럼 저도 제 이웃을 용서한 후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 어떤 사람과 서로 마음 상한 일이 있거든 용서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마가복음11:25,
현대인의 성경)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제 자신에게 반영하고 적용해 볼 때 만일 제가 사랑하는 제 아내하고 다투었음으로 서로 마음이 상해있다면 제가 제 아내를 먼저 용서하고 또한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여 서로 화해를 한 후에 하나님께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마태복음
5장 23-24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러므로 제단에 예물을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와 화해하라. 그리고 와서 예물을 드려라”(현대인의 성경). 그런데 만일 제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제 아내와 서로 용서하고 화해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드린다면 과연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제 “잘못”(“허물”)(마가복음11:25)을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용서해 주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해 주시지 않을 것이다”(26절, 현대인의 성경). 제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예수님의 이중 계명의 첫 번째 계명)
실제로 제일 가까운 이웃인 제 아내조차도 용서하지 않고(또는 용서를 구하지 않고)
서로 화해도 하지 않는다면 과연 이것이 예수님의 이중 계명의 두 번째 계명대로 제가 제 이웃(제 아내)을 제 자신같이 사랑하는 것일까요? 아니지요.
(c)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나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만 거리를 두고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과도 멀어져 있습니다(유진 피터슨).
즉,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할 수가 없습니다.
(d)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용서를 받은 자로서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셨듯이 나 또한 나에게 죄 지은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를 해야합니다. 그러나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지 못하면 나에게 용서를 구하는 그 형제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고 용서하기를 거부할 것입니다(마태복음
18:23-35, 현대인의 성경).
(e)
말세에 고통하는 때에 사랑이 없고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디모데후서 3:1,
3, 현대인의 성경). 실제로 지금 이 말세에 가정에서조차도 사랑이 없고 용서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겉으로는 신앙심이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 능력은 거부하는 것입니다(5절, 현대인의 성경).
(f)
수 없이 하나님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주기도문)을 드리고 있으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기를 거부하면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소서"라고 기도하고 이는 것은 아닌지요(마태복음 6:12,
현대인의 성경).
(g)
"죽어도 용서 못해!"가 아니라 죽기까지 용서:
마귀가 지배하는 이 세상(This
Age)에 속한 사람들은
"죽어도 용서 못해!"라고 말하지만,
다가오는 세상(The
Coming Age)에 속한(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천국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용서하신 것처럼 죽기까지 용서합니다(누가복음
23:34; 고린도전서
15:40, 48, 49; 빌립보서3:20;
요한일서
5:19).
(h)
배우자 용서하기
(2) (마태복음6:14-15):
우리 마음에 있는 상처와 쓰라림은 우리로 하여금 서로에게 잘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게하고 서로에게 잘못하고 있는 것만을 보게 합니다. 그러한 잘못들을 보면 볼수록 우리는 서로를 판단하게 되고 심지어 서로를 비판하며 정죄까지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서로를 판단하고 비판하며 정죄까지 한다는 것은 우리가 “자기-의”(self-righteousness)를 서로에게 들이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기에게 잘못하고 상처를 입힌 배우자를 용서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마음에 있는 상처와 쓰라림을 가지고 배우자를 대하므로 상대방이 잘못했을 때마다 판단하고(마음으로라도) 비판하며 심지어 정죄까지 하면서 “당신은 틀렸고 나는 옳다”하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까지 자기가 옳다는 것은 인정받고자 합니다.
그 결과 그는 교만하여 자기가 하나님께 범하고 있는 죄를 깨닫지 못하므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필요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하나님께 범하고 있는 죄는 무엇입니까? 바로 자기 배우자를 용서하지 않고 있는 죄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상처와 쓰라림 속에서 자기 배우자의 잘못과 죄를 보면서 판단하고 지적하고 비판하며 심지어
(마음으로라도) 정죄하고 있으니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하겠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판단과 지적과 비판과 정죄를 배우자에게서 받는 상배 배우자의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그 사람은 자신이 자신의 배우자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있음을 느끼며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처로 인해 상대 배우자를 용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부부가 서로 용서하지 않고 살다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의 마음에는 상처와 쓰라림 등이 계속 쌓이고 쌓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서로를 향해 폭파할 것이고 그들의 부부 관계는 깨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i)
배우자 용서하기
(3) (마가복음8:34; 누가복음11:4):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태복음6:15).
부부는 서로에게 잘못했을 때 서로를 용서해야 합니다.
잘못한 사람은 자신의 배우자에게 ‘미안하다(I am
sorry)’라는 말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잘못했어(I
am wrong)’라고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되 구체적으로 자기가 자신의 배우자에게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는지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그렇게 잘못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헌신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용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우리 옛 사람의 본능은 이기적이라 내 잘못보다 상대의 잘못이 더 크고 많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의 본능은 상대방을 용서하기 보다는 상대방이 나를 용서하기를 더 바라고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나 자신의 죄악된 이기적인 본능과 싸워 이겨서 내 배우자를 용서해야 하니 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까?
내가 내 배우자를 용서한다는 것은 이렇게 큰 값을 치뤄야 가능합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해야 하며, 또한 자기 자신을 희생해야 합니다(막8:34).
그러나 이렇게 큰 값을 치루어 내 배우자를 용서할 때 그 용서의 수확은 아름답습니다.
내 배우자가 큰 값을 치루면서 나에게 용서를 구할 때 나는 상대 배우자를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하되,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나)를 용서하심과 같이” 해야 합니다(에베소서4:32).
거룩하신 하나님께 무수히 죄를 범한 나 같은 죄인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셨고, 지금도 용서하시고, 앞으로도 용서하실 것을 믿으며 내 배우자의 잘못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 내 배우자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용납하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기도를 드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누가복음11:4).
(j)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섬기시되(마태복음20:28;
빌립보서 2:8)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위하여 용서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누가복음
23:34).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 가족을 죽기까지 섬기되 특히 우리는 용서를 해야할 식구를 위해 죽기까지 용서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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