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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에 관하여 (2): 하나님의 사랑 다음이 어머님의 사랑

  https://youtube.com/shorts/lZWeUX8LPWo?si=C4ybN2jJ5LYqgNo4

외식하는 자의 특징은 사태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껍데기(절차, 규칙)만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식의 의미를 회복해야 합니다.

외식하는 자의 특징은 사태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껍데기(절차, 규칙)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식의 의미를 회복해야 합니다.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고치시는 것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것이니라 하거늘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동안 사탄에게 매인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예수께서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누가복음 13:14-17).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3 14-17 말씀을 묵상할 가지 궁금한 점들이 생겨서 헬라어 성경과 영어 성경 NASB[“NASB(New American Standard Bible) 현대 영어 성경 원문에 가장 충실한 '직역' 성경으로 손꼽히는 번역본입니다”(인터넷)]으로도 읽어보았습니다.  그리하였을 저는 누가복음 13 14-17 말씀을 가지로 나눠서 묵상하면서 오늘 본문 말씀이 나에게 또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a)   첫째로, 저는 누가복음 13 14 말씀을 개역개정으로 읽었을 회당장이 …”라고 시작을 반면에 현대인의 성경은 그러나 회당장은 …”라고 시작을 하기에 헬라어 성경을 보았습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δὲ”()라고 적혀있길래 저는 영어 성경 NASB 보았더니 “But”(그러나)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고 현대인의 성경이 그러나 회당장은 …”이라고 번역한 것이 개역개정에서 그저 회당장이 ..”라고 번역한 것보다 원어 헬라어 성경을 번역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i)            제가 그러나라는 접속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냐면 접속사가 우리가 이미 묵상한 누가복음 13 10-13절과 연관을 지어주기 때문이요 연관성을 제대로 알아야 우리가 오늘 본문 누가복음 13 14-17 말씀을 제대로 묵상할 있기 때문입니다.

 

·         다시 설명한다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18년간 귀신 들려 앓으며 허리가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자를 고치시므로 그녀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는데(10-13) “그러나 회당장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고치는 것을 보고 화가났다(14, 현대인의 성경) 것입니다.

 

-       , 오늘 본문 누가복음 13 1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δὲ”()라는 접속사는 그러나”(But) 의미로서 누가복음 13 10-13절에서 예수님이 병든 여인을 고치신 치유의 역사에 대하여 대조적으로 회당장의 부정적인 반응을 소개하는 접속사입니다.

 

(ii)          저는 접속사[“δὲ”(): “그러나”(But)](13:14) 묵상할 오늘 아침에 인도 선교사님들에게 받은 메시지가 생각났습니다.  메시지란 오늘 2026 5 4 기준으로 인도 서벵골(West Bengal) 의회 선거에서 인도국민당(BJP)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는 독립 이후 서벵골에서 인도국민당(BJP) 거둔 승리이자, 15년간 이어진 마마타 바네르지(Mamata Banerjee) 주총리와 트리나물 의회당(TMC) 정권의 종료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젠 인도 서벵골에서도 자이 스리 ”(Jai Sri Ram) 구호가 울려 퍼진다는 내용인데 구호를 인공지능에게 물어보았더니 이렇게 답변을 하였습니다: “’자이 스리 ' 그동안 BJP 서벵골 내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핵심 구호로 사용해 왔습니다.  과거 마마타 바네르지 주총리가 구호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갈등을 빚기도 했기에, 지지자들에게 구호는 '기존 정권에 대한 승리' 상징합니다.    결론적으로, 서벵골 전역에서 '자이 스리 ' 울려 퍼진다는 것은 서벵골의 정치 권력이 완전히 교체되었으며, BJP 이념적 색채가 전역에 본격적으로 투영되기 시작했음을 상징하는 현상입니다”(인터넷).

 

·         현상은 이젠 서뱅골도 광신적인 힌두 세력이 통치를 받게 된다는 것이여 개종 금지 법안이 강력하게 적용될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여기서 개종 급지 법안이란 공식적으로 불법 종교 개종 금지법(Unlawful Conversion Prohibition Act)”이라 불리는데 법은 표면적으로는 강압이나 기만으로 인한 개종을 막는다는 목적을 가지나, 실제로는 특정 종교 결합을 억제하는 강력한 통제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미 인도 아삼에는 아삼 치유 실천법(Assam Healing Practices Act, 2024)” 통해 기독교 선교 활동 '치유' 명목으로 개종을 단속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법안을 더욱 강화하여 개종 관련 범죄에 종신형까지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합니다(인터넷).

 

-       그러나”(But)(13:14) 이러한 강력한 개종 금지법과 정치적 압박 속에서도, 많은 이들은 인도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더욱 깊고 강하게 흐르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현재 인도의 기독교 공동체가 증언하는 놀라운 변화들은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1.      '가정 교회' 통한 생명력의 확산:

 

대규모 집회나 화려한 교회 건물을 통한 선교는 막혔지만, 오히려 수천수만 개의 가정 교회(House Church) 마을 구석구석에 생겨나고 있습니다.

 

자생적 성장: 외부 선교사가 아닌, 현지인들이 자기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며 신앙 공동체를 세우고 있습니다.  이는 핍박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강력한 뿌리가 되고 있습니다.

 

일상의 침투: 신앙이 '종교 의식' 머물지 않고, 삶의 현장인 가정과 일터에서 살아있는 간증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2.      고난 속에서 정금같이 나오는 신앙:

 

개종 금지법이라는 '풀무불' 같은 시련이 오히려 가짜 신앙을 걸러내고 참된 제자들을 세우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영적 각성: 핍박이 거세질수록 성도들은 더욱 간절히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있습니다.

 

교파를 초월한 연합: 가톨릭, 개신교, 오순절 서로 달랐던 교파들이 생존과 복음을 위해 하나로 뭉쳐 서로를 돕는 아름다운 연합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3.      소외된 자들의 존엄성 회복:

 

카스트 제도의 하층민인 달리트(Dalit) 산간 지역의 아디바시(부족민) 사이에서 하나님은 '존엄성의 회복'이라는 역사를 행하고 계십니다.

 

평등의 복음: "누구든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소중한 존재"라는 메시지는 수천 년간 억눌려온 이들에게 단순한 종교 이상의 해방감을 주며,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4.      치유와 평강의 간증:

 

법적으로 '기도 치유' 금지하려 함에도 불구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이들이 기도를 통해 평안을 얻고 삶의 소망을 되찾는 역사는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영적 갈급함: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갈등 속에서 진정한 평화를 찾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이는 복음이 스며드는 통로가 됩니다.

 

5.      보이지 않는 곳으로 흐르는 복음:

 

히말라야 산맥의 오지나 중부 인도의 깊은 정글 , 과거 선교사들이 가기 힘들었던 곳까지 상인이나 이주 노동자들을 통해 '삶의 선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성경 초대 교회가 핍박 속에서 오히려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져 복음을 전했듯이, 지금의 인도 역시 겉으로는 어두워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가장 뜨거운 영적 부흥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인터넷).

 

(b)   둘째로, 저는 회당장의 분노에 대해서 묵상하고 싶어졌습니다.  묵상의 핵심 질문은 회당장의 분노가 합당한 것이었는가?’입니다.

 

(i)                  제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것은 분노하는 요나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4:4, 개역한글),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니이다”(9, 개역한글).

 

·         요나 선지자의 입장에서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자기의 분노가 합당하다고 여긴 이유가 뭘까요?  요나의 입장에서 분노가 정당하다고 여긴 구체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1.      니느웨(앗수르) 대한 강한 적개심과 민족주의:

 

원수의 구원을 수용 불가: 당시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는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잔인한 행위를 일삼던 원수 국가였습니다.  요나는 이스라엘의 원수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믿었으며, 그들이 용서받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선민의식: 요나는 하나님의 자비가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어야 한다고 믿는 좁은 민족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2.      선지자로서의 체면과 자존심 (예언의 성취 여부):

 

거짓 선지자로 오인될 우려: 요나는 니느웨가 "40 후면 무너지리라"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지 않기로 결정하시면서, 자신의 예언이 빗나감에 따라 선지자로서의 권위와 자존심이 훼손되었다고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일관성 부재에 대한 불만: 그는 하나님이 이미 심판을 선언하셨음에도 마음을 바꾸신 것에 대해 "그럴 알았다" 반발했습니다( 4:2).

 

3.      개인적인 안락과 통제권 상실:

 

박넝쿨 사건의 상실감: 요나는 자신에게 그늘을 제공하던 박넝쿨이 사라지자 극도로 분노합니다.  이는 자신이 수고하지도 않은 사소한 안락함(박넝쿨) 소중히 여기면서도, 수십만 명의 생명이 달린 니느웨의 구원에는 냉담했던 그의 이기적인 마음을 보여줍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 요나는 하나님조차 자신의 생각과 정의의 기준(악인은 벌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 따라 움직여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난 하나님의 자비가 그를 견딜 없게 만든 것입니다.

 

-       우리는 우리의 분노가 합당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자신의 분노를 합당하다고 믿는 이유는 심리적 방어 기제와 인지적 왜곡, 그리고 도덕적 우월감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주요 원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자아 보호와 방어 기제

 

자기 정당화: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과 신념이 일치하지 않을 발생하는 불편함(인지부조화) 해소하기 위해 분노를 정당화합니다.  분노를 '합당한 반응'으로 정의함으로써 스스로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취약성 은폐: 분노 뒤에는 상처, 수치심, 불안 같은 연약한 감정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감정을 마주하는 것보다 화를 내는 것이 스스로를 강하고 통제력 있게 느끼게 해주기 때문에 분노를 정당화합니다.

 

2.      인지적 왜곡과 개인적 기준

 

내적 규칙의 절대화: 개인마다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규칙' 있습니다.   규칙이 침범당할 사람들은 그것을 보편적 진리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며 강한 분노를 느낍니다.  요나처럼 기준이 옳다 확신이 분노를 정당한 것으로 믿게 만듭니다.

 

감정적 추론: ‘내가 이렇게 화가 나는 보니, 상대방이 분명히 잘못을 저지른 틀림없다 결론 내리는 오류입니다.  , 느낌을 사실의 근거로 삼는 것입니다.

 

3.      도덕적 우월감과 정의감

 

도덕적 분노(Moral Outrage): 불공정하거나 부도덕한 상황을 목격했을 느끼는 분노는 스스로를 '정의의 ' 서게 합니다.  이때 느끼는 도덕적 우월감은 분노를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일시적인 쾌감을 주기도 합니다.

 

상대적 박탈감과 인정 욕구: 공정한 대우나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느낄 생기는 분노는 자신을 피해자로 설정하게 하며, 피해자로서의 분노는 당연히 정당하다는 논리를 만듭니다.

 

4.      생존을 위한 본능적 반응

 

분노는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생존 본능입니다.  뇌는 물리적 위협뿐만 아니라 자존심이나 정체성에 대한 위협도 생존 위협으로 간주하여 분노를 촉발하며, 이를 '필요한 방어' 인식하게 합니다.

 

결국 분노의 정당화는 나는 옳고, 상황(또는 타인) 틀렸다 인식을 유지함으로써 자신의 심리적 안정을 지키려는 인간의 본능적인 시도라고 있습니다”(인터넷).                  

 

(ii)                오늘 본문 누가복음 13 1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회당장의 분노는 자기 입장에서는 합당한 것이라고 생각했었을텐데 이유가 무엇일까요?

 

·         그의 율법적 관점과 직분상의 책임감을 기준으로 , 스스로에게는 매우 합당하고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회당장의 입장에서 자신의 분노가 정당하다고 여긴 구체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1.      거룩한 안식일 법의 준수 (종교적 정당성):

 

4계명 수호: 회당장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20:8; 5:12) 십계명의 말씀을 절대적인 진리로 믿었습니다.

 

치유를 '노동'으로 간주: 당시 유대 전통(구전 율법) 생명이 위급한 상황이 아닌 이상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행위를 금지된 '노동(Work)'으로 규정했습니다.  회당장 눈에는 예수님의 치유가 신성한 안식일을 더럽히는 명백한 범법 행위로 보였습니다.

 

2.      회당 운영자로서의 질서 유지 (사회적 정당성):

 

공식적 질서 강조: 그는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것이니라 말합니다(14). 이는 급하지 않은 치유는 평일에 질서 있게 행해져야 하며, 회당이라는 거룩한 장소에서 규칙이 깨지는 것을 방치할 없다는 관리자로서의 책임감이 투영된 것입니다.

 

군중 통제: 예수님의 기적으로 인해 분위기가 술렁이자, 회당장은 율법의 권위를 빌려 군중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통제하려 했습니다.

 

3.      전통과 권위에 대한 도전 (심리적 정당성):

 

기득권 보호: 예수님이 자신의 허락이나 기존 관례를 무시하고 안식일에 치유를 행하는 것은 회당장의 권위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자신의 지도력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느끼는 분노를 '종교적 열심'으로 포장하여 정당화한 측면이 있습니다.

 

-       저는 회당장의 분노를 묵상할 율법적인 목사님의 분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적인 목사님의 분노가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것일까요?

 

회당장과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 '질서' '원칙' 수호하려는 목사님의 분노는 본인에게는 정당할지 몰라도,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의 기준에서는 결코 합당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유를 주님의 시선에서 가지로 정리해 있습니다.

 

a.      분노의 대상이 '사람' 아닌 '규칙'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18 동안 허리가 굽어 고통받던 여인을 보며 아브라함의 이라 부르시며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하지만 회당장의 분노는 여인의 '해방' 아닌, 안식일이라는 '시간적 규칙' 깨진 것에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주님의 시선: 교회는 사람을 살리는 곳이지, 법을 수호하기 위해 사람이 희생되는 곳이 아닙니다.  사람보다 법이 우선시되는 분노는 주님의 마음과 멀어져 있습니다.

 

b.     '거룩' '정죄'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적인 분노는 흔히 교회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참된 거룩은 죄인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변화시켜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사랑의 힘입니다.

 

주님의 시선: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분리된 거룩' 아니라,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고치시는 '찾아가는 거룩' 보여주셨습니다.  정죄를 동반한 분노는 거룩이 아니라 교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c.      '외식(위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13:15).

 

주님은 회당장을 향해 외식하는 자들아라고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자기 짐승에게 물을 먹이는 일상적인 '노동' 허용하면서,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사역은 정죄하는 이중 잣대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시선: 목회자의 분노가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통제권이나 권위가 도전받았을 나오는 혈기인지를 주님은 꿰뚫어 보십니다.

 

결론적으로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은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12:7)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의 잣대로 형제를 판단하고 분노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통치를 거부하고 자신이 심판주의 자리에 앉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목회자의 분노가 공동체를 세우기보다 위축시키고, 생명을 살리기보다 정죄에 치우쳐 있다면 그것은 주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의 성냄' 뿐입니다”(인터넷).

 

(c)   셋째로,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3 15-16 기록된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묵상하고 싶습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동안 사탄에게 매인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i)                  저는 말씀을 헬라어 성경으로 읽었을 단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λύει”(뤼에이)(“풀어내어”)(15) “λυθναι”(뤼테나이)(“푸는 ”)(16).

 

·         누가복음 13 15절과 16절에 사용된 '뤼오(λύω)'라는 동사는 사건의 핵심 메시지를 관통하는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단어를 중의적으로 사용하셔서 회당장의 율법주의적 논리를 무너뜨리셨습니다. 구절에서 가지는 의미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15: “λύει”(뤼에이, 풀어내어) — 일상적·물리적 해방

 

상황: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물을 먹이러 가는 행위입니다.

 

의미: 여기서의 '풀다' 짐승을 묶고 있는 '줄을 끄르는 '이라는 아주 일상적이고 사소한 수고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논리: ‘너희는 안식일에 재산(짐승) 갈증을 해결해주기 위해 줄을 푸는 수고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느냐?’라는 점을 지적하십니다.

 

2.      16: “λυθναι”(뤼테나이, 푸는 ) — 영적·본질적 해방

 

상황: 18 동안 사탄에게 매임 아브라함의 딸을 매임에서 풀어주는 행위입니다.

 

의미: 여기서의 '풀다' 질병과 고통, '사탄의 결박으로부터의 해방'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논리: ‘짐승의 목마름을 위해 줄을 푸는 것이 정당하다면, 하물며 사탄에게 묶여 18 동안 고통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결박에서 풀어주는(해방시키는) 것이 안식일에 얼마나 합당하냐?’라고 반문하시는 것입니다.

 

단어의 연결이 주는 메시지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같은 어근의 단어(λύω) 사용하여 회당장의 가치 전도(Value Inversion) 폭로하셨습니다.

 

a.      가치의 경중: 회당장은 '짐승을 푸는 ' 안식일 예외 조항으로 인정하면서도, '사람을 고통에서 푸는 ' 노동이라며 분노했습니다.  예수님은 짐승의 줄보다 사람의 결박이 훨씬 시급하고 중대한 문제임을 보여주십니다.

 

b.     안식일의 본질: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금지' 날이었지만, 예수님께 안식일은 사탄에게 매인 자들을 '풀어주는(λύω)' 해방의 날이었습니다.

 

c.      언어유희를 통한 질책: ‘너희가 짐승의 고삐는 풀면서(15), 사탄이 채운 쇠사슬을 푸는 (16)에는 분노하느냐?’ 강력한 반어법입니다.

 

결국 단어는 율법의 문자에 매여 있는 회당장과, 생명을 살리는 사랑의 법으로 사람을 풀어주시는 예수님의 극명한 대비를 보여줍니다”(인터넷).

 

(ii)                저는 단어를 묵상할 주님의 누가복음 13 15-16 말씀이 외식하는 우리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주고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인공지능의 답변입니다(인터넷):

 

·         누가복음 13 15-16절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논리는 오늘날 우리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선별적 경건' '가치 전도'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크게 가지로 요약할 있습니다.

 

1.      "무엇을 '풀고' 계십니까?" — 가치 우선순위의 점검

 

회당장이 짐승의 목마름을 해결하는 (경제적 가치) 당연하게 여기면서, 영혼이 고통에서 해방되는 (생명 가치)에는 분노했던 것처럼, 우리도 현대판 '짐승의 고삐' 푸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지 않은지 묻고 계십니다.

 

적용: 재산, 자녀의 성적, 평판을 지키기 위한 '수고' 안식일에도 마땅한 일로 여기면서, 곁에 있는 지체의 아픔을 돌보거나 소외된 이웃의 결박을 푸는 일에는 원칙 바쁨 핑계로 냉담하지는 않습니까?

 

2.      종교적 형식이 생명의 사역을 막고 있지는 않습니까?’ 

 

회당장은 율법의 문자를 지키느라 율법의 완성인 '사랑' 놓쳤습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 역시 신앙생활의 '형식'(예배 참석, 봉사 직분, 전통적인 교회 운영 방식) 지키는 데는 엄격하지만, 형식의 목적지인 '사람을 살리는 '에는 무관심할 때가 많습니다.

 

적용: ‘우리 교회는 원래 이래’, ‘성경에 맞네라는 말로 누군가를 판단하기 전에, 지금 나의 판단이 사탄에게 매여 있는 영혼을 옥죄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형식의 수호자가 아니라 생명의 해방자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3.      사탄의 결박을 보는 영적 안목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여인의 병을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 사탄에게 매인 으로 보셨습니다.  반면 회당장은 그것을 단지 안식일에 고쳐서는 업무로만 보았습니다.

 

적용: 외식하는 자의 특징은 사태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껍데기(절차, 규칙) 보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중독, 우울, 가난, 차별 속에 '사탄에게 매여 있는' 이들을 , 우리는 그들을 '불편한 대상'이나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정죄합니까, 아니면 반드시 '풀어주어야 하나님의 자녀' 바라봅니까?

 

결론: '안식' 의미를 회복하라

 

예수님께 안식은 '아무것도 하는 ' 아니라, '사탄의 결박을 풀고 하나님 나라의 자유를 맛보는 '이었습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네가 소중히 여기는 사소한 일상(짐승의 고삐) 위해 법을 어기면서까지 예외를 둔다면,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너의 모든 원칙과 고집을 꺾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 

 

결국 말씀은 우리에게 당신의 종교는 사람을 가두고 있습니까, 아니면 풀어주고 있습니까?’라는 무거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인터넷).

 

-       외식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의 완성인 '사랑' 놓치고 신앙생활의 형식에 메여서 율법적인 종교생활을 철저히 하면서 사람들이 만든 전통적인 관례나 규칙 등을 지키고 있지 않는 교인들(성도들) 마음 속으로 판단하고 심지어 정죄까지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본질을 '생명의 관계' 아닌 '자기 증명의 수단'으로 삼을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외식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전통' '규칙' 앞세워 타인을 판단하고 정죄하게 되는 심리적, 영적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a.      '통제권' '안정감' 대한 집착

 

형식과 규칙은 눈에 보이고 측정이 가능합니다.  "나는 주일을 지켰고, 십일조를 했고, 교회의 전통을 따랐다" 성취감은 스스로에게 신앙적 안정감을 줍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나 '자비' 정량화할 없습니다.  따라서 통제하기 쉬운 규칙을 신앙의 척도로 삼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 이들을 정죄함으로써 자신의 영적 우월감을 확인하려 합니다.

 

b.     '율법의 수호자'라는 자기 착각

 

이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는 사람들을 심판하는 '거룩한 분노' 내고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사실은 '내가 만든 신앙의 질서' 깨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은 교회의 머리이시지만, 이들은 자신이 교회의 머리가 되어 타인의 신앙을 재단하려 합니다.

 

c.      '수직적 관계' 결핍을 '수평적 정죄' 채움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 만남(사랑) 메마르면, 신앙생활은 고역이 됩니다.  내가 힘들게 지키고 있는 규칙을 누군가 가볍게 여기는 것을 , 억울함과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힘들게 지키는데, 사람은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는가?"라는 보상 심리가 정죄로 이어집니다.

 

d.     긍휼이 없는 '박제된 신앙'

 

예수님이 회당장을 향해 외식하는 ”(15)라고 하신 이유는, 그가 짐승의 목마름(자신의 손해) 공감하면서 인간의 고통(타인의 아픔)에는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율법적 교인들도 교회 내의 행정, 건물 관리, 전통적 관례에는 철저하지만, 정작 규칙 때문에 상처받고 떠나가는 '사람' 대해서는 무감각해지는 영적 질병에 걸려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전통과 규칙은 신앙을 담는 '그릇' '내용물' 아닙니다.  그릇을 깨끗이 닦는 데만 신경을 쓰느라 정작 안에 담겨야 '그리스도의 사랑' 쏟아버린다면, 그것은 주님이 가장 경계하셨던 바리새인의 길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d)   마지막 넷째로, 오늘 본문 누가복음 13 17절을 보면 그룹이 반응이 나옵니다: (1)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2) 무리는 (예수님)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i)                  첫째 그룹인 모든 반대하는 자들 부끄러워했던 것일까요?

 

·         누가복음 13 17절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 앞에 반대자들이 느꼈던 '부끄러움' 단순히 창피함을 넘어선, 영적·논리적 완패에서 오는 수치심이었습니다.  그들이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자신들의 '이중잣대'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입니다(위선의 폭로).

 

예수님은 그들이 안식일에 자기 짐승에게 물을 먹이는 사소한 '경제적 자비' 베풀면서, 18 동안 사탄에게 매인 여인을 고치는 '본질적 자비' 정죄했다는 사실을 짚어내셨습니다.

 

짐승보다 사람을 천하게 여긴 그들의 비인도적인 실체가 대중 앞에서 드러나자, 자신들이 내세웠던 '거룩한 명분' 한순간에 '이기적인 변명'으로 전락하며 수치를 느끼게 것입니다.

 

2.      율법의 참된 의미(안식일의 본질) 몰랐던 무지가 탄로 났기 때문입니다.

 

회당장과 일행은 자신들이 율법의 최고 전문가라고 자부하며 예수님을 가르치려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명쾌한 논리(15-16) 앞에 그들의 해석이 얼마나 좁고 편협했는지가 증명되었습니다.

 

성경을 가장 안다고 자부하던 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모르는 자들이었음이 확인되자, 그들의 종교적 권위는 땅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3.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부정할 없는 현실 앞의 무력감

 

여인은 즉시 허리를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13).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없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라고 정죄했던 자신들의 판단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였음을 직면하게 되면서 오는 영적 당혹감과 수치심이 그들을 짓눌렀을 것입니다.

 

4.      군중들의 반응 변화로 인한 고립

 

방금 전까지 회당장의 권위에 눌려 있던 무리 예수님의 말씀에 환호하며 기뻐하기 시작했습니다(17 하반절).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다고 믿었던 영적 주도권이 예수님께로 완전히 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반대자들은 권위의 상실과 고립에서 오는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습니다.

 

결국 그들의 부끄러움은 내가 틀렸다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오는 거부감 섞인 수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부끄러움이 회개로 이어지지 않고 나중에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로 발전하게 됩니다”(인터넷).

 

-       성경을 가장 안다고 자부하던 목사님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모르는 자들이었음이 확인될 (어떻게 확인될 있을까요?)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나요?  인공지능의 답변입니다:

 

맞습니다.  성경의 지식이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날 , 영적 지도자들은 마땅히 주님 앞에서 통회하며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회당장처럼 부끄러움을 '회개' 아닌 '분노' '자기방어' 덮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모르는 자들이었음이 확인되는 순간은 주로 '예상치 못한 하나님의 자비' 임할 드러납니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상황들입니다.

 

1.      '자격 없는 '에게 임하는 은혜를 정죄할

 

상황: 교회 안에서 소외된 , 사회적 죄인, 혹은 전통적인 규율을 어긴 사람이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고 회복될 때입니다.

 

확인: 목사님이 사람의 '회복' 기뻐하기보다, 그가 어긴 '절차' '과거의 잘못' 먼저 지적한다면, 그것은 잃은 마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 15) 전혀 모른다는 증거입니다.

 

2.      '사람의 생명'보다 '교회의 체면' 우선할

 

상황: 공동체 내의 아픈 상처나 부정적인 사건이 터졌을 때입니다.

 

확인: 피해자의 고통을 어루만지고 진실을 밝히기보다, ‘교회에 덕이 된다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 명분으로 사건을 덮고 침묵을 강요한다면, 이는 고통받는 자와 함께 우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3.      자신의 '신학적 ()' 무너질

 

상황: 자신이 평생 가르쳐온 신학적 체계나 전통과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이 일하실 때입니다.

 

확인: 요나처럼 생각이 옳다 고집하며 성을 내거나, 회당장처럼 율법의 잣대로 하나님의 생명 사역을 비판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지식'으로만 소유했을 '하나님의 성품' 소유하지 못했음이 폭로되는 순간입니다.

 

4.      '낮은 '으로 향하지 않는

 

확인: 설교는 사랑과 겸손을 외치지만, 실제 삶에서 권위주의를 내려놓지 못하고 대접받기만을 바란다면, 그가 아는 성경 지식은 하나님의 마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죽은 지식'임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부끄러워하지 않을까요?

 

성경은 이를 '마음이 완고해졌다' 표현합니다.  자신이 쌓아 올린 종교적 권위와 지식이 우상이 되면, 성령의 조명하심보다 자신의 해석을 신뢰하게 됩니다.  이때 부끄러움은 '회개' 기회가 아니라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느껴지기에 더욱 강하게 반발하게 되는 것입니다”(인터넷).

 

(ii)                둘째 그룹인 무리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한 것일까요?

 

·         누가복음 13 17절에서 무리 예수님의 일을 보며 크게 기뻐했던 이유는, 그들이 현장에서 '종교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하나님 나라의 실재' 동시에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무리가 기뻐할 수밖에 없었던 구체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사람을 가두는 종교' 아닌 '사람을 살리는 복음'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무리들은 회당장과 같은 지도자들로부터 이것은 된다’, ‘저것은 죄다라는 식의 금지와 정죄 중심의 가르침에 짓눌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모든 율법적 장벽을 깨뜨리고, 18 동안 고통받던 여인을 즉각적으로 고쳐주셨습니다.  무리들은 규칙보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진정한 영적 안식과 위로를 경험한 것입니다.

 

2.      '말뿐인 권위' 이기는 '실제적인 능력' 보았기 때문입니다.

 

회당장의 분노는 (문자) 불과했지만, 예수님의 사역은 '실제적인 변화(영광스러운 )' 가져왔습니다.  굽었던 허리가 펴지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여인의 변화된 모습은 어떤 설교보다 강력한 메시지였습니다.

 

사탄의 결박을 푸는 압도적인 신적 권능 앞에 무리들은 경외감을 느끼며, 자신들을 다스리는 진정한 왕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환호한 것입니다.

 

3.      '소외된 ' '아브라함의 ' 회복되는 정의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18 동안 병들고 귀신 들렸던 여인은 유대 사회에서 부정하게 여겨지며 잊혀진 존재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녀를 아브라함의 이라 부르며 존귀하게 대우하시고 회복시키시는 과정을 보며, 무리들(주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 자신들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음을 깨닫는 대리 만족과 기쁨을 느꼈습니다.

 

4.      지도자들의 위선이 폭로된 것에 대한 영적 카타르시스

 

예수님의 명쾌한 논리가 권위적인 지도자들을 부끄럽게 만들었을 , 오랫동안 그들의 압제 아래 있던 무리들은 영적인 체증이 내려가는 듯한 시원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거짓된 종교적 권위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참된 정의가 승리하는 현장을 목격한 기쁨입니다.

 

요약하자면 무리의 기쁨은 단순히 병이 나은 것에 대한 구경꾼의 즐거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셨고, 그분의 나라는 우리를 얽매는 것이 아니라 자유케 한다 사실을 직접 확인한 데서 오는 본질적인 기쁨이었습니다”(인터넷).


-       우리 시대의 교회 안에서도 이런 '해방의 기쁨' 회복되려면, 우리는 어떤 '영광스러운 ' 집중해야 할까요?

 

현대 교회에서 누가복음 13장의 '해방의 기쁨' 회복하기 위해 우리가 집중해야 '영광스러운 ' 화려한 행사나 건물의 확장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여주신 '영혼을 향한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가지 영역에 집중해야 합니다.

 

1.      '결박된 ' 찾아내고 이름을 불러주는

 

예수님은 무리 속에 숨어 있던,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18 병자를 먼저 보시고 아브라함의 이라 불러주셨습니다.

 

우리의 집중: 교회 안에 존재하지만 '투명 인간'처럼 여겨지는 이들(경제적 빈곤층, 마음의 병을 앓는 , 사회적 소수자 ) 이름을 불러주고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가치가 시스템보다 소중함을 입증하는 일이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2.      '종교적 문턱' 낮추고 '환대의 식탁' 차리는

 

회당장이 세운 '안식일의 높은 ' 사람들을 정죄했지만, 예수님의 치유는 벽을 무너뜨렸습니다.

 

우리의 집중: ‘우리 교회는 원래 이래라는 관례나 전통보다, 처음 사람이나 신앙의 초보자가 자유롭게 있는 '환대의 문화' 만드는 것입니다.  형식 때문에 상처받는 이가 없도록 배려하고, 누구나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받았음을 느끼게 하는 포용의 사역이 필요합니다.

 

3.      '판단의 ' 멈추고 '해방의 ' 내미는

 

외식하는 자들은 입으로 율법을 논했지만, 예수님은 손을 얹어 결박을 푸셨습니다.

 

우리의 집중: 비판과 정죄의 언어를 멈추고, 실질적으로 사람의 짐을 나누어지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중독, 우울, 고독과 같은 현대판 '사탄의 결박' 묶인 이들을 위해 구체적인 돌봄의 체계를 만들고, 그들이 다시 '직립'하여 하나님을 찬양할 있도록 돕는 실질적인 사랑의 수고가 영광스러운 사역입니다.

 

결론

교회의 영광은 건물의 높이나 예산의 규모가 아니라,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유함을 얻고 다시 웃게 되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옳음 증명하려 하기보다 사랑함 증명하려 , 비로소 세상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것입니다”(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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