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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nseparable Love of God (1) [Romans 8:38-39]

The Inseparable Love of God (1) [ Romans 8:38-39 ] Why can nothing separate us from the love of God? 1. Because God’s love is eternal. Romans 8:29a says: “For those whom He foreknew…” The word “foreknew” refers to before eternity began —before the creation of heaven and earth . The phrase “those whom He foreknew” does not simply mean knowing about someone intellectually, but rather loving them. In other words, it refers to “those whom God loved from eternity past.” Amos 3:2a says: “You only have I known of all the families of the earth.” If “known” merely meant intellectual knowledge, that would imply that God only knew Israel and did not know the other nations—which cannot be true, because the all-knowing God lacks knowledge of nothing. Therefore, “I have known you only” means “I have loved you only.” God loved Israel among all the nations of the earth. Hosea 13:5 says: “I knew you in the wilderness , in the land of great drought.” The “wilderness” was where the Israelite...

둘중에 하나입니다.

둘중에 하나입니다 .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할 정도로 ( 전도서 2:10)  안목의 정욕 ( 요한일서 2:16) 에 이끌려  보지 말아야 할 여자를 보던지  아니면  내 눈과 약속하여  처녀를 주목하지 않던지 ( 욥기 31:1)  둘 중에 하나입니다 .   우리는 우리의 눈을 통제해야지  우리 자신이 눈에 통제를 받으면 안됩니다 .          ( 유진 피터슨의 " 물총새에 불이 붙듯 " 을 읽으면서 )

그릇된 생각

그릇된 생각  우리는 그릇된 생각을 합니다 ( 사 53:4).   우리의 그릇된 생각이란  예수님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5 절 )  우리는 예수님께서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4 절 ).   분명히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와 슬픔을 지시고 (4 절 )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고난을 당하셨건만  우리는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시며 ( 신성모독죄 )  성전을 모독한 죄로 ( 성전모독죄 )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  저주의 나무인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고 생각합니다 .   분명히 그분의   고난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인데도 말입니다 .   우리의 그릇된 생각의 뿌리는 교만입니다 .   교만은 우리의 생각을 삐뚤어 놓습니다 .   교만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   그래서 하와는 선악과를 보고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했었을 뿐만 아니라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던 것입니다 .   이것을 사도 요한은 “이생의 자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요일 2:16).   이것은 결코 하나님께로서 좆아온 것이 아닙니다 .   이것은 세상으로 좇아온 것입니다 ( 요일 2:16).   이렇게 이생의 자랑은 그릇된 생각을 하게 하여 하나님께 죄를 범하게 합니다 .

그릇된 가치관

그릇된 가치관 우리는 그릇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    그 그릇된 가치관이란  예수님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 사 53:3).   예수님을 귀하에 여기지 않는 이유는  우리는 슬픔과 질고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3 절 ).   예수님은 간고를 많이 겪으셨습니다 (3 절 ).   즉 , 예수님은 슬픔 ( 비애 ) 의 사람이셨습니다 (3 절 ).   또한 예수님은 질고를 아는 분이셨습니다 .   즉 , 예수님은 질고에 익숙하신 분이셨습니다 .   그러나 우리는 슬픔도 그리고 질고도 싫어하므로  얼굴을 그것들로부터 돌립니다 .   그 이유는 우리는 기쁨과 행복 ,  그리고 안락함과 평안함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귀히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싫어하며 멸시까지 하는 것입니다 .   그 이유는 우리의 그릇된 가치관은  육신의 정욕에 이끌림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 요일 2:16).   마치 하와가 선악과를 보고 보암직했을 뿐만 아니라 먹음직도 했던 것처럼 ( 창 3:6)  우리의 그릇된 관점에서 세상에 많은 것들을 바라보면서 보암직 할 뿐만 아니라  먹음직 한 이유는 육신의 정욕 때문입니다 .   육신의 정욕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가치관을 버리게 하고  오히려 순간적인 가치관을 택하게 만듭니다 .   육신의 정욕은 무엇이 참으로 귀하고 무엇이 하잖은 것인지를  구분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   그 결과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헛된 것들을 먹으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입니다 . 

그릇된 관점

그릇된 관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릇된 관점이란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 사 53:2).   즉 , 우리의 그릇된 관점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자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 빌 1:6)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못보는 것입니다 .   우리는 예수님의 순종하심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께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   그리고 우리의 불순종의 관점으로 순종을 바라볼 때  우리는 순종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    우리의 그릇된 관점은  하와아 선악과를 보고 보암직했다는 말씀을 생각할 때  좀 더 쉽게 이해 할 수 있습니다 ( 창 2:6).   분명히 선악과는 순종의 관점으로 볼 때  보암직해서는 아니되는 것이였는데  하와의 관점에서는 보암직한 것을 보면  그녀 마음에 순종의 미보다 불순종의 추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   그녀는 안목의 정욕 ( 요일 2:16) 에 이끌려  결국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엿던 것입니다 .   이렇게 그릇된 관점은  안목의 정욕에 이끌려 그릇되게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 

마음과 육신이 따로

마음과 육신이 따로  제 마음은  하나님을 경외하였던 요셉처럼 행하고 싶은데  제 육신은  삼손처럼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하나님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는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 삼하 12:14).  사 탄은  저의 취약점인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 요일 2:16) 을 자극하여 하나님께 죄를 짓게 하므로  저를 낙심시키며 저의 영적 힘을 고갈시키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