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마지막 문안 인사 (11) 두기고와 오네시모의 두 번째 공통점은 그들은 신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 골 4:7, 9). 흥미로운 점은 바울은 골로새 교 회 성도들에게 마지막 문안 인사를 하면서 신실한 사람들인 두기고와 오네시모를 언급하였는데 , 시작 인사를 보면 그는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 ” (1:2) 하고 언급했을 뿐만 아니라 에바브라는 그들을 위한 “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 ”(7 절 ) 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 여기 골로새서 1 장 2 절에서 “신실한 형제들”이란 말을 현대인의 성경은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들”이라고 번역을 했 는 데 여기서 “신실한 형제들”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해 서 신실하게 믿는 형제들입니다 . “신실한 형제들”이란 (1) 믿음이 충만한 자들이요 (full of faith), (2) 신뢰하는 사람들 (trustful) 이요 , 또한 신뢰할 만한 사람들 (trustworthy) 로서 (3) 그리스도에게 충성된 자들 (loyal to Christ) 입니다 (KJV 성경 주석 ).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은 그리스도에게 충성된 자들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들 입니다 ( 계 1:5). 그들은 흠 없이 정직하게 주님을 따르며 ( 시 101:6), 지극히 작은 것에도 충성하며 ( 눅 16:10), 죽도록 충성하여 ( 계 2:10) 주님 앞에서 설 때에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다는 주님의 칭찬 ( 눅 19:17) 과 더불어 주님께로부터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 계 2:10).
그릇된 가치관
우리는 그릇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그릇된 가치관이란 예수님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사53:3). 예수님을 귀하에 여기지 않는 이유는 우리는 슬픔과 질고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3절). 예수님은 간고를 많이 겪으셨습니다(3절). 즉, 예수님은 슬픔(비애)의 사람이셨습니다(3절). 또한 예수님은 질고를 아는 분이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질고에 익숙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슬픔도 그리고 질고도 싫어하므로 얼굴을 그것들로부터 돌립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기쁨과 행복, 그리고 안락함과 평안함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귀히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싫어하며 멸시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그릇된 가치관은 육신의 정욕에 이끌림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요일 2:16). 마치 하와가 선악과를 보고 보암직했을 뿐만 아니라 먹음직도 했던 것처럼(창3:6) 우리의 그릇된 관점에서 세상에 많은 것들을 바라보면서 보암직 할 뿐만 아니라 먹음직 한 이유는 육신의 정욕 때문입니다. 육신의 정욕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가치관을 버리게 하고 오히려 순간적인 가치관을 택하게 만듭니다. 육신의 정욕은 무엇이 참으로 귀하고 무엇이 하잖은 것인지를 구분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 결과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헛된 것들을 먹으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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