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길을 막으시는 하나님 (2)
[민수기 22장 21-34절]
이번 주 월요일엔 좀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날에 이런 저런 일들이 좀 보통 날보다 많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안과에 가서 대학
후배에게 눈 검사 등 받고 그 근처에 있는 히스패닉 마켓에 가서 참 먹음직한 부리또(burritos)를 사서
부모님 집에 가 식탁 교제를 나눴습니다. 그런 후 그 근처에 사시는 작은 고모님 댁에 들려서 조카 선교사님이 우리 곁을 떠났으므로 힘들어하는 사촌 여동생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안 그래도 쌍둥이 여동생이 3년 넘도록 암 투병하는 중에 있기에 그녀와 그녀의 가정을 도와 헌신적으로 섬기고 있는 가운데 많이 지치고 힘들텐데 이렇게 조카 선교사님까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했으니 많이 힘들 수 밖에 없으리라 생각되어 거실에 앉아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눴습니다. 대화 중에 우리의 조카 선교사님에 대한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그 조카 선교사님의 마음이 그리도 주님을 보고 싶어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사촌 여동생과 대화를 하다보니 그녀의 아버님이신 저의
작은 고모부 목사님이 병원에 갔다가 오셔서 한참 대화를 나눴습니다.
자신의 아빠가 저하고 대화를 열심히(?)하시는 모습을 보고 그 사촌
여동생이 감사하고 좋아하는 모습을 문자로 보낸 글로나마 엿보니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조금이나마 힘든 그 사촌 여동생에게 위로가 되었길 바랄 뿐입니다. 그날 오후 8시에 대학
후배와 기도 모임이 있어 고모님 집에서 서서 하나님께 그 가정을 위해 기도한 후 집으로 돌아와 책상 컴퓨터 앞에 앉아 카톡 문자가 온 것이 있어
열어보았더니 과테말라 선교사님이신 서희숙 권사님이 갑자기(?) 부르심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좀 놀랬습니다. 그 이유는 비록 암 투병중에 계셨지만 호전되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지 얼마 안되었는데 이렇게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고 서희숙 선교사님과 남편되시는 서진국 선교사님은 1980년에서 1990년 초반까지 저희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하시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셨던
장로님과 권사님이셨는데 이렇게 65세 나이에 떠나셨다고 생각하니 좀 충격이었습니다. 특히 조카 선교사님이 갑자기 떠났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았는데
서 선교사님까지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니 좀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토요 새벽기도회 때 새 찬송가 430장 “주와 같이 길 가는 것”을 하나님께 찬양 드리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 두 선교사님은 주님과 함께 길을 한걸음
한걸음 날마다 걸으시다가 주님의 손에 이끌리어 생명 길이요 천국에 가는 길이요 순교자의 길을 걸으셨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그 두 여종이요 하나님의 보배롭고 존귀한
따님들이 이 세상에서 걸었던 순교자의 길을 기뻐하신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 민수기 22장 21-34절을 보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하지 않는(34절) 사악한 길(32절)을 걸었던 거짓 선지자 발람이 나옵니다. 발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서는 안 될 길”을 갔습니다(32절, 현대인의 성경). 그 가서는 안 될 길이란 발람이 모압 왕 발락이 보낸 사람들과
함께(21절) 모압으로 가서 발락을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는
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1-6절).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12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불의의 삯을
사랑”[“악한 방법으로 얻은 재물을 사랑”(현대인의 성경)]하였던 발람(벧후2:15)은 모압 왕이 보낸 고관들(민22:15)과 함께 가서는 안 될 그 사악한 길을 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시므로 하나님의 천사가 발람의 길을
막았습니다(22절). 이것이 첫 번째 하나님의 막으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발람이 타고 있던 나귀가 하나님의 천사가 칼을 빼 들고 길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그 길을 벗어나 밭으로 들어갔습니다(23절, 현대인의 성경). 그러자 이번에는 하나님의 천사가 두 포도원 사이에 있고 양쪽에
담이 있는 “좁은 길”에 서서 발람의 길을 막았습니다(24절, 현대인의 성경). 이것이 두 번째 하나님의 막으심이었습니다. 그러자 나귀가 여호와의 천사를 보고 몸을 담에 대고 버티며 발람의 발을 담에 비벼 상하게 하자 발람이 다시 채찍질하였습니다(25절, 현대인의 성경). 그 때 하나님의 천사는 앞으로 더 나아가서 “좌우로 빠져 나갈 틈이 없는 좁은 곳”에 서서 발람의 길을 막았습니다(26절, 현대인의 성경). 이것이 세 번째 하나님의 막으심이었습니다.
저는 이 세 번의 하나님의 막으심을 생각할 때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길을
막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교훈을 받습니다. 막으시되 사도 바울이 디모데와 함께(행16:1) 아시아에 가서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막으시고(6절) 또한 무시아에 이른 후에 비두니아로 가려고 하였으나 그것도 허락하시지 않으신 성령 하나님께서(7절, 현대인의 성경) 만일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사악한
길이요 가서는 안 될 길을 가려고 한다면(민22:32) 어찌 그 길을
막으시고, 막으시며 또 막으시지 않으시겠는가 라는 생각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한
목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도 막으시는 하나님이시라면[물론 바울과 디모데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뜻은 그들이
마게도냐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행16:9-10)이 우선이었기에
두 번이나 아시아로 가는 것을 막으신 것이고 나중에 하나님의 때에 아시아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음] 하나님 보시기에 사악한 길이요 가서는 안 될 길을 가는 우리는 어찌 하나님께서 막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의 천사가 발람의 길을 세 번이나 막으셨을
때 그 세 번이나 막으신 길이 점진적으로 좁은 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천사가 발람의 첫 번째
길을 막으셨을 때 그 길을 성경은 그냥 “길”(민22:22)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두 번째 길은 “좌우에는 담이
있”는 “좁은 길”(24절)이라고 말씀하고 있고[여기서 “좁은 길”이란 “협소하고 우묵하여 한 사람이 가까스로 지날 수 있는 좁다란 길”을 뜻함(인터넷)], 세 번째 길은 아예 “좌우로 피할 데 없는
좁은 곳”[“좌우로 빠져나갈 틈이 없는 좁은 곳”(현대인의 성경)](26절)[여기서 “좁은 곳”은 하나님의 천사가 진노의 칼을 빼든 채 계속 나귀를
몰아가자 마침내 나귀는 더 이상 빠져나갈 데 없는 협착한 곳에 이르고 만 것임(인터넷)]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저의 이 생각이 맞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지 않으시는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고 있을 때 우리를 막으시고, 막으시되 “더 나아가서” 아예 우리가 “좌우로 빠져 나갈 틈이 없”도록(26절,
현대인의 성경) 막으시는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합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은 우리가 가서는 안 될 길을 가는 것을
원치 않으실 뿐만 아니라 그 정도로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34절)을 가길 그리도 원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저와 여러분은 어느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요?
과연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인가요? 아니면 지금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까?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이 말씀 묵상의 글을 적는 중에 제 조카 선교사님에 대한 업데이트 소식을 받았습니다. 그 소식 내용 중 하나는 ‘마침내 (유)가족이 모든 집으로 돌아옵니다”라는 소식입니다. 아마
내일 주일(13일) 지금 있는 나라에게 여기 미국으로 출발하여 다 함께
귀국할 예정인가 봅니다. 기도 부탁
중 하나는 유가족의 평안과 육신의 쉼, 하나님 아버지의 품 안에서 안위를 느낄 수 있도록과 애도할 수 있는
공간과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부탁입니다.
다시금 생각납니다. 조카 선교사님의 소식을 듣고 생각난 시편 23편 4절
말씀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고 서희숙 선교사님의 유가족과 제 조카 선교사님의 유가족과 함께 하시는 줄 확신합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그 모든 유가족 분들을 안위하실 줄
믿습니다. 주님과 같이 이 세상에서
65년(서 선교사님)과
23년(조카 선교사님)을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고 주님을 따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걷다가 주님의 품 안에 안긴 고 서희숙 선교사님과 제 조카 선교사님을 생각할 때 비록
충격속에서 남은 유가족을 생각할 때 마음에 슬픔이 있지만 그 슬픔보다 그 두 선교사님들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로 순교자의 길을 걷다가 주님의
품 안에 안기셨다는 생각이 드니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더욱더 올려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비록 고 서희숙 선교사님의 장례 예배를 제가 참석하지 못했기에(저희 교회 대표로 윤장로님께서 가셔서 참석하신 것에 대해 하나님과 윤장로님께 감사드림) 오늘
오전 6시 온라인으로 토요 새벽기도회를 드리기 시작할 때 여태까지 주기도문으로 시작했지만 오늘은 자초지종을
성도님들에게 말씀을 드린 후 제가 기도로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는 여기 미국 서부 오전 6시가 동부 뉴저지는 오전 9시이고 그 시간에 고 서희숙 선교사님의 장례 예배가 시작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제 조카 선교사님의 장례 예배는 앞으로 하나님께
드릴 예정인데 저도 입관 예배에 참여해서 관 안에 누워있을 조카 선교사님과 그녀의 유가족을 직접 보면 참 쉽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풍성한 은혜로 조금이나마 유가족에게
위로가 되길 기원합니다. 복음 성가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삶”(“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가사를 나눔으로 묵상 글을 마칩니다: (1절) 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나의 말에 주가 주신 진리로 나의 눈에 주의눈물 채워주소서, (2절) 내입술에 찬양의 향기가 두손에는 주를 닮은 섬김이 나의 삶에 주의 흔적 남게 하소서,
(후렴)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하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순교자의 삶을
사는 이에게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순교자의 삶을 살기를 기원하는,
제임스
김 나눔
[2022년 11월 12일, 지옥으로 가는 길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막으시고,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천국가는
가는 길을 활짝 열어주시사 사랑하는 동역자의 잠든 소식에도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23:6)라고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고백케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 찬양 경배를 드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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