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길을 막으시는 하나님 (1)
[민수기 22장 21-34절]
지난 10월 29일에 일어난 이태원 압사 사고로 약 3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합니다(인터넷). 네이버 지도에 따르면 사고가 난 골목의 폭은 4m
내외이고 총 길이는 50m라고 합니다(인터넷). 생존자들과 목격자들은 좁은 골목에 인파가 몰리면서 움직일
수 없게 됐고, 경사진 골목구조상 아래쪽에 있던 사람들이 견디지 못하고 넘어지면서 사고가 발생한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합니다(인터넷).
오늘 본문 민수기 22장 24, 26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이번에는
여호와의 천사가 두 포도원 사이에 있는 좁은 길에 섰는데 양쪽에는 담이 있었다. … 그때 여호와의 천사는 앞으로 더 나아가서 좌우로 빠져 나갈 틈이 없는 좁은 곳에 섰다.” 이 두 성경 구절을 보면 “좁은 길”(24절)과 “좁은 곳”에 하나님의 천사가 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천사가 그 “좁은 길”과 “좁은 곳”에 섰는가 하면 하나님의 천사가 발람이란 선지자가 가는 길을 막아 서기 위해서 였습니다(22절). 그 이유는 발람이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32절, 현대인의 성경). 개역개정은 하나님 앞에서 발람의 길이 사악하므로 하나님의
천사가 그를 막으려고 나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32절).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시므로 하나님의 사자(천사)가 발람을 막으려고(22절) “좁은 길”(24절)과 “좁은 곳”(26절)에 섰던 것입니다. 여기서 “좁은 길”(24절)은 “협소하고 우묵하여 한 사람이 가까스로 지날 수
있는 좁다란 길”을 뜻하고, “좁은 곳”은 하나님의 사자가 진노의 칼을 빼든 채 계속 나귀를 몰아가자 마침내 나귀는 더 이상 빠져나갈 데 없는 협착한 곳에 이르고 만 것입니다(인터넷 주석). 그래서
나귀를 탄 발람이 이른 곳은 더 이상 “피할 데 없는 좁은 곳”이었습니다(26절).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두 가지가 생각났습니다.
(1) 제가 여러 번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좁은 길’을 걸어 가십시다”하고 설교한 내용이 생각났습니다.
마태복음 7장 13-14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길도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고 생명에 이르는 문은 작고 길도 좁아 찾는 사람이 적다.”
이 말씀이 생각난 이유는 오늘 본문 민수기 22장 24절에 “좁은 길”이란 말씀과 26절에 “좁은 곳”이란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말씀 중심으로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골고다의 좁은
길을 걷되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예수님의 따라가되(요10:3, 11)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마16:24) 그 좁은 길을 걷자고 여러 번 권면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민수기 22장 21-34절에서 발람이란 거짓 선지자가 “좁은 길”을 가되(24절) 하나님 보시기에 그 좁은 길이 사악하다[현대인의
성경은 “가서는 안 될 길”]하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중요한
것은 “좁은 길”이나 ‘넓은 길’이라기 보다 그 길이 멸망에 이르는 길인가 아니면 생명에 이르는 길인가 라는 것입니다. 좀 달리 말한다면,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가시는 길(출33:15, 현대인의 성경)인가 아니면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시는 길(출14:43)인가 입니다. 복음 성가 “좁은 길”
가사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 너의 길을 걸으라 좁고 험한 이 길은 영원한 생명
있는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 주를 향해 달려라 어둔 밤이 지나면 영광의 아침 오리니 나의 달려 가는 길 나의 주님 주신 길 나를 위해 예비하여
주신 이 길 기쁨으로 가는 길 노래하며 가는 길 하늘 아버지 부르심을 따라서 나의 달려 가는 길 나의 주님 가신 길 십자가를 지나 승리에 이르는
길 무릎으로 가는 길 순종하며 가는 길 나의 주님 가신 길을 따라서 어둔 세상 빛을 밝히며 예정하신 주의 뜻 이루며 내 평생(온세상에) 외치는 노래 나의 힘 나의 구원 예수라 그 길은 멀고 멀고 험했었네 그러나 주님
늘 함께 계셔 영원한 기쁨 평화 넘치는 곳 아버지 집에 나를 인도했네 그 길은 멀고 멀고 험했었네 그러나 주님 늘 함께 계셔 영원한 본향 나를
기다리신 아버지 품에 이제 안기네.”
(2) 제가 대학교 때 어느 목사님에게 제자 훈련을 받으면서 배웠던
5가지 확신
구절 중 승리의 확신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 말씀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이 당한 시험은 모든 사람들이 다 당하는 시험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므로 여러분이 감당할 수 없는 시험 당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여러분이 시험을 당할 때에 피할 길을 마련해
주셔서 감당할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이 말씀이 생각난 이유는 오늘 본문 민수기 22장 26절에는 “피할 데 없는”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는 “피할 길”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우리가
당한 것이 없다,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안으신다(13절)고 말씀하고 계신데 왜 우리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당할 때가 있는 것일까요? 분명히 우리는 사랑하는 식구가 암 같은 질병으로 고통을 계속
당하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의학적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게 되던지 또는 갑작스럽게 사랑하는 식구가 심장마비가 와서 의식이 없이 산소호흡기를
끼고 중환자실에 누워있던지 하면 우리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심신이 지치고 탈진 상태까지 올 때가 있는데 어떻게
성경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13절)
그 이유는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우리를 도우시사 우리로 하여금 그
시험을 감당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일어나 걸어라”라는 복음성가 가사가 생각납니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1절) 나의 인생 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 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 주시에 (2절) 평안히 길을
갈 때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 내미시네 (3절) 때때로 뒤돌아보면 여전히 계신 주 잔잔한 미소로 바라보시며 나를 재촉하시네 (후렴)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아멘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시사 우리로 하여금 시험을
감당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너희(우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십니다(고전10:13).
그런데 오늘 본문 민수기 22장 26절을 보면 하나님의 천사가 나귀를 탄 발람이 더 이상 피할 데 없는 좁은 곳에 서있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셔서 우리의 길을 이정도로 막으시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그 정도로 진노하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발람이 가는 길은 사악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32절). 현대인의 성경은 발람이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32절, 현대인의 성경). 발람이 가고 있었던 그 길이 어떠한 길이었길래 하나님의 천사는
“사악”하다(32절),
“가서는 안 될 길”이다(32절,
현대인의 성경)라고 말씀한 것일까요? 베드로후서 2장 15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현대인의 성경) “그들은 바른 길을
버리고 잘못된 길에 빠져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고 있습니다. 발람은 악한 방법으로 얻은 재물을 사랑하다가”]. 발람이 걸었던 길은 “불의의 삯을 사랑”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악한 방법으로
얻은 재물을 사랑”했습니다.
비록 민수기 22장을 보면 모압 왕 발락이 모압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로
하여금 돈을 가지고 발람에게 가서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전하게 하였을 때(7절, 현대인의 성경) 발람은 그 모압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에게 “오늘 밤은 여기서 지내시오. 여호와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대로 당신들에게 대답하겠소”라고 말하고(8절,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너는 이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아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다”(12절, 현대인의 성경)라고 말씀하시니까 “발람은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발락이 보낸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돌아가시오. 여호와께서는 내가 당신들과 함께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라고 말한 것(13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그는 “불의의 삯”(벧후2:15)인 “돈”(민22:7, 현대인의 성경)을 사랑했던 선지자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또한 모압 왕 발락이 “다시 그들보다 더 높은 사람들을 전보다 많이” 발람에게 보내서(15절, 현대인의 성경) “내가 당신에게 충분히 사례하고
또 당신이 무슨 말을 해도 다 들어주겠소. 그러니 제발 와서 나를 위해 이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해
주시오”(17절, 현대인의 성경)라고 말했을 때에도 발람은 그들에게 “발락 왕이 금은 보화가 가득한 궁전을 나에게 준다고 해도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어기는 일은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소”(18절, 현대인의 성경)라고 말할 정도로 전혀 “악한 방법으로
얻은 재물을 사랑”하는 사람(벧후2:15, 현대인의 성경)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발람의 말을 들으면 그리 보이지만 베드로후서 2장 15절을 보면 성경은 분명히 발람은 “불의의 삯을
사랑”했다[“악한 방법으로 얻은 재물을 사랑”했다(현대인의 성경)]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 2장 14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 성경 말씀을 보면 분명히 발람은 모압 왕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4절, 참고: 민25:1-3). 그래서 오늘 본문 민수기 22장 32절에서 하나님의 천사가 거짓 선지자 발람에게 “보내 내 앞에서 네 길이 사악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다[“네가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기 때문에 내가 너를 막으려고 왔”다(현대인의 성경)]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혹시 지금 우리 목사님들이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혹시 지금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사악한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 사악한 길, 가서는 안 될 길은 무엇입니까? 발람처럼 혹시 지금 우리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혹시 지금 우리는 악한 방법으로
얻는 재물을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혹시 지금 우리 목사님들은 바리새인들처럼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 아닌지요? (눅16:14) 혹시 지금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든가 아니면
한 편에게는 충성을 다하고 다른 편은 무시하게 될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눅16:13, 현대인의 성경) 겉으로는
발람처럼 재물을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마음 속으로는 돈과 재물을 사랑하여 그것을 탐내므로
미혹을 받고 있는 것(딤전6:10은 아닌지요? 지금도 거짓 선지자 발람처럼 돈과 재물을 사랑하여 사악한
길을 걷는 거짓 목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천사를 보내어 발람의 길을 막으신 것처럼(민22:22,
26) 돈과 재물을 사랑하는 거짓 목사들이 가는 길을 막으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계십니다. 막으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되 하나님께서는 발람의 길을 막으시고(민22:22) 또 막으셨던 것(26절) 우리의 길을 막으시고 또 막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발람이 타고 있던 나귀로 하여금 칼을 들고 있는 하나님의 천사를 보게 하시사 세 번이나 그 천사를 피해가게
하신 것처럼(32절, 현대인의 성경) 우리에게도 피할 길을 열어주심(고전10:13)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불의의 삯에 영의 눈이 어두워져서 하나님께서 사악한 길을 걷고 있는 우리를 막으시고 계심을 모르고 또한 피할 길을 주시는 것조차도 몰라서
계속 돈과 재물을 사랑하므로 가서는 안 될 길을 계속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호세에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우상 바알을 함께 섬기면서 영적 “창녀 짓”을 하고 있었을 때(호2:5,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더 이상 그들이 사랑하는 바알을 따라가지 못하도록(7절) 가시덤불로 그 길을 막고 담을 쌓아 그들로 하여금 영적 창녀 짓을 하는 길을 찾지 못하게
하신 것(6절, 현대인의 성경)처럼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돈을 사랑하는 영적 창녀 짓을 하는 길을 걷고 있을 때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돈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을 막으시고 계십니다. 그 결과 호세아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제서야 “내가 본남편에게 돌아가겠다. 내 형편이 그 때가 지금보다 더 나았다”고 말했습니다(7절, 현대인의 성경). 즉, 그들은 그들의
“본남편”인 하나님께 돌아가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던 그 때가 바알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을 깨달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누가복음 15장 11-32절에
말씀하고 있는 예수님의 탕자 비유가 생각났습니다. 그 작은 아들 탕자가 아버지에게 자기 몫으로 돌아올 재산을 달라고 하여 받아서 먼 나라로 가서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자기 재산을
모두 날려버렸을 때 그 나라에 심한 흉년까지 들어 굶주리게 되자 하는 수 없이 그 나라의 어떤 시민에게 가서 몸 붙여 살면서 그 주인의 돼지를
치면서 너무도 배가 고파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 배를 채우려 했지만 그것마저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눅15:13-16, 현대인의 성경). “그제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양식이 풍부하여 많은 일꾼들이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17절, 현대인의 성경) 그 결과 탕자는 일어나서 자기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20절).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고 있을 때 우리의 길을 막으시사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길이 사악할 때 우리를 막으십니다(민22:32). 막으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막으심을 영안과 영적 분별력으로
깨닫고 더 이상 가서는 안 될 길을 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 길을 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여기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34절,
현대인의 성경).
나의
길을 막으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돌이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제임스
김 나눔
[2022년 11월 5일, 복음 성가 “주님 가신 길 십자가의 길” (1절)주님 가신 길 십자가의 길 외롭고 무거웠던 길 골고다의 거친 언덕길 지치신 주님의 모습, (4절) 우리의 생명 주께 드리네 나의 자랑 십자가일세 나의 생애 주님 가지사 주님 영광 나타내소서,
(후렴) 오 나의 주님 용서하소서 죄인 위해 고난 받으셨네, 이 세상에 생명 주시길 그렇게도 원하셨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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