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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         “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 누가복음 13:22-24).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3 장 22-24 절을 읽을 때 “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24 절 ) 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금 좀 더 구체적으로 묵상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   (a)    첫째로 , 예수님이 말씀하신 “ 좁은 문 ”( 눅 13:24) 이란 무엇일까요 ?   (i)                   헬라어 성경을 보니까 “τ ῆ ς στεν ῆ ς θύρας”( 테스 스테네스 뒤라스 ) 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στεν ῆ ς”( 스테네스 )( 좁다 ) 라는 단어의 의미는 엄밀히 말해 ‘ 좁은 ’ 을 뜻하며 , ( 비유적으로는 ) 하나님의 인정을 얻기 위해 나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 엄격하게 규정된 길을 의미합니다 ( 인터넷 ).   ·          이 단어가 신약 성경에 세 차례 사용되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3 장 24 절 [“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στεν ῆ ς θύ...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예수께서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누가복음 13:22-24).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3 22-24절을 읽을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24)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금 구체적으로 묵상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a)   첫째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좁은 ”(13:24)이란 무엇일까요?

 

(i)                  헬라어 성경을 보니까 “τς στενς θύρας”(테스 스테네스 뒤라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στενς”(스테네스)(좁다)라는 단어의 의미는 엄밀히 말해좁은 뜻하며, (비유적으로는) 하나님의 인정을 얻기 위해 나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엄격하게 규정된 길을 의미합니다(인터넷).

 

·         단어가 신약 성경에 차례 사용되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3 24[“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στενς θύρας)] 외에 마태복음 7 1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στενς πύλης)]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στενή πύλη)) 사용하셨습니다.

 

-          성경구절을 보면 미묘하고 흥미로운 차이가 있는데 차이란 마태복음 7 13절과 14절은 뜻할 “πύλη”(필레)( 대문/성문) 사용한 반면, 누가복음 13 24절은 “θύρα”(뒤라)(일반적인 집의 )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πύλη): 성으로 들어가는 커다란 공적 입구를 대조하며, 다수가 가는 길과 소수가 가는 길의 '운명적 선택' 강조합니다.

 

누가복음(θύρα): 집주인이 직접 닫을 있는 '개인적인 집의 ' 묘사하며,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 들어갈 기회가 마감될 것이라는 '긴박함' 더해줍니다.

 

이처럼 번의 쓰임새 모두 구원은 보편적으로 열려 있으나, 통로는 오직 주님이 정하신 좁은 기준뿐이라는 엄중한 진리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인터넷).

 

·         70인역(LXX) 당시 유대 문학에서 “στενός”(스테노스)(좁다, narrow) 단순히 공간적인 의미를 넘어 '환난, 고난, 궁지'라는 심리적·상황적 고통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단어를 사용하셨을 , 당시 청중들이 느꼈을 함의는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1.      70인역(LXX)에서의 용례: '고난' '압박'

 

구약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 '스테노스'(좁다) 어근은 주로 히브리어 '차르(tsar)' 번역할 사용되었습니다.   단어는 '좁다' 뜻과 함께 '고통, 원수, 환난' 동시에 의미합니다.

 

다윗의 고백: 다윗이 인구 조사의 죄로 인해 가지 재앙 하나를 골라야 했을 , "내가 곤경(στενά) 빠졌도다"(삼하 24:14)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좁음(στενά)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절박한 위기 상황을 뜻합니다.

 

원수의 압박: 시편이나 예언서에서 대적들이 포위하여 없이 압박해 단어가 사용됩니다.

 

2.      '스테노스'(στενός) '들립시스(θλίψις)' 관계:

 

신약에서 '환난'으로 가장 많이 번역되는 단어인 '들립시스(θλίψις)' '스테노스' 어원이 같습니다.   '사방에서 짓누르다(press)'라는 뜻을 공유합니다.

 

, 좁은 (Stenos)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환난(Thlipsis) 통과한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제자가 되는 길은 세상으로부터 오는 압박과 자기 절제라는 고통을 수반한다는 점을 단어 자체에서 이미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외경 유대 문학(에스드라 4) 비유: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익숙했던 외경 '에스드라 4(7:3-14)'에는 '좁은 ' 매우 유사한 비유가 등장합니다.

 

비유 내용: "도시가 건설되어 평지에 세워졌으나, 그곳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좁고 험해서 한쪽은 불이 있고 한쪽은 깊은 물이 있는 것과 같다.   사이의 외나무다리는 오직 사람만 지나갈 있을 만큼 좁다."

 

의미: 문학적 배경에서 좁은 입구는 ' 세상의 고난' 뜻하며, 고난을 통과해야만 넓은 평지에 세워진 '약속된 보상(장차 세상)' 도달할 있다고 가르칩니다.

 

요약하자면, 예수님이 선택하신 '스테노스'(στενός)(좁다) 듣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뉘앙스를 전달했습니다.

 

필사적인 투쟁: 숨이 막히는 압박 속에서 빠져나가려는 절박함.

 

희생의 감수: 넓은 길의 편안함을 포기하고 고난의 길을 선택하는 용기.

 

정해진 : 마음대로가 아닌, 하나님이 설계하신 엄격한 통로(환난) 통과해야 하는 필연성.

 

따라서 좁은 문은 단순히 '찾기 힘든 ' 아니라, '고난과 압박을 뚫고서라도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유일한 생명문'이라는 강한 의지가 담긴 표현입니다(인터넷).

 

(ii)                저는 좁은 ”[“τς στενς θύρας”(테스 스테네스 뒤라스)] 묵상할 마태복음 7 1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넓은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길이 넓어(πλατεα) 그리고 들어가는 자가 많고.”

 

·         제가 인공지능에게 던진 질문은 지금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넓은 문을 선호하는 것일까요?”입니다.  인공지능의 답변입니다(인터넷):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넓은 (πλατύς)' 선호하게 되는 이유는 본능적인 편안함과 현대 사회의 가치관이 교묘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요 원인은 다음과 같이 분석해 있습니다.

 

1.      희생 없는 복음(Cheap Grace) 유혹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가 지적했듯이, 현대 기독교는 '값싼 은혜' 익숙해져 있습니다.

 

자기 부인의 부재: 좁은 문은 '자기 십자가' 지고 자아를 죽이는 고통을 요구하지만, 넓은 문은 현재의 욕망을 유지하면서도 구원을 얻을 있다는 착각을 줍니다.

 

부담 없는 신앙: 헌신이나 책임보다는 위로와 심리적 안정을 주는 메시지에 끌리기 때문입니다.

 

2.      번영 신학(Prosperity Gospel) 영향

 

신앙을 '세상적인 성공의 도구' 여기는 풍토가 넓은 문을 매력적으로 만듭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경제적 , 건강, 사회적 지위와 동일시하면서, 고난과 인내가 필수적인 '좁은 ' 기피해야 대상이 되었습니다.

 

예수 믿으면 모든 일이 풀린다 식의 가르침은 좁은 뒤에 숨겨진 '협착함' 외면하게 만듭니다.

 

3.      다수결의 원칙과 군중 심리

 

마태복음 7:13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 기록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다수가 선택하는 길에서 안전함을 느낍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진리는 하나가 아니다라는 상대주의적 흐름은, 좁은 문의 '유일성' '배타성' 불편하게 여기게 만들고, 누구나 쉽게 수용할 있는 넓은 길을 택하게 합니다.

 

4.      제자도(Discipleship) 실종

 

그리스도인을 단순히 '교회 다니는 사람(Churchgoer)'으로만 정의하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권을 양도하는 '제자' 훈련하지 않는 구조적 문제도 있습니다.

 

아고니제스테(사투) 영성보다는 편리함(Convenience) 영성이 현대 교회의 주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넓은 문을 선호하는 이유는 나의 왕좌를 주님께 내어드리기 싫어하는 본성 고난 없이 영광만 취하려는 영적 안일함 맞물린 결과라고 있습니다”(인터넷).

 

(b)   둘째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들어가기를 힘쓰라”(13:24)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i)                  헬라어 성경을 보니까 누가복음 13 24절은 γωνίζεσθε εσελθεν”(아고니제스테 에이셀테인)(“들어가기를 힘쓰라”)라고 시작하는데 원어적 의미는 훨씬 역동적이고 처절한 분투를 묘사합니다.  단어별로 나누고 깊은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인터넷):

 

1.      “Ἀγωνίζεσθε”(아고니제스테)(“힘쓰라”): 목숨을 사투이 단어는 영어 단어 Agony(고뇌, 극심한 고통) 어원이 되는 동사 '아고니조마이(γωνίζομαι)' 명령형입니다.

 

운동 경기의 비유: 당시 그리스-로마 세계의 고대 올림픽 경기장에서 레슬링 선수나 격투기 선수가 승리하기 위해 근육이 뒤틀리고 피가 터질 정도로 전력투구하는 모습을 뜻합니다.

 

전쟁터의 비유: 군사가 전선에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우는 전투적 자세를 의미합니다.

 

영적 의미: 구원은 가만히 앉아 있는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의 본성과 세상의 유혹을 거슬러 올라가는 치열한 영적 전쟁임을 시사합니다.  '힘쓰라' 단순히 '노력해라' 정도가 아니라 "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 사투를 벌이라" 뜻입니다.

 

2.      “εσελθεν”(에이셀테인)(“들어가기를”): 목적을 향한 단호한 진입이 단어는 '들어가다' 뜻의 부정과거(Aorist) 어미를 취하고 있습니다.

 

단회적 결정: 헬라어 문법상 부정과거형은 구체적인 '결단의 순간' 강조합니다.  , 밖에서 서성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문턱을 넘어서는 결정적인 행위를 요구합니다.

 

목표의 명확성: 주위의 구경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직접 몸을 던져 들어가는 것이 핵심입니다.

 

3.      '아고니조마이'(γωνίζομαι) 사용하셨을까? (신학적 배경)

 

예수님께서 강한 단어를 사용하신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방해 요소가 많음: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가로막는 자기 교만, 세상의 정욕, 종교적 타성이라는 거대한 장애물이 있기 때문에 '적당한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능동적 참여: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지만, 은혜를 붙잡는 인간의 반응은 전인격적인 결단이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위선의 거부: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 13:25) 아니라, 삶의 방향을 완전히 틀어 좁은 문으로 뛰어드는 자가 진짜 제자임을 보여줍니다.

 

요약하자면"γωνίζεσθε εσελθεν"(“들어가기를 힘쓰라”) 단순히 "노력해서 들어가라" 권고가 아니라, "문이 닫히기 전에 모든 생애를 걸고 문으로 뛰어들어라!"라는 강력한 긴급 명령입니다(인터넷).

 

(ii)                저는 들어가기를 힘쓰라 말씀을 묵상할 인공지능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지금 많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문이 닫히기 전에 모든 생애를 걸고 문으로 뛰어들어라!"("γωνίζεσθε εσελθεν")라는 예수님의 강력한 긴급 명령에 불순종하고 있는 것일까요?”  인공지능의 답변입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아고니제스테(사투하라)’라는 긴급 명령에 불순종하거나 무뎌지는 이유는, 복음의 핵심인 '위기감' '배타성' 현대 문화의 가치관과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1.      '심판의 긴급성' 상실 (The Loss of Urgency)

 

누가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좁은 문을 말씀하신 핵심 이유는 문이 닫힌다 사실입니다.

 

지연된 종말론: 현대인들은 죽음이나 심판을 미래의 일로 치부합니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은퇴하고 나면신앙에 집중하겠다는 태도가 만연해 있어, 지금 당장 문으로 뛰어들어야 영적 시급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2.      '영적 투쟁'보다 '심리적 위로' 선호

 

현대 기독교는 '죄와의 전쟁'보다는 '마음의 치유' 집중하는 경향이 큽니다.

 

소비자 중심의 신앙: 교회를 영적 훈련소가 아닌, 서비스를 받는 곳으로 인식합니다.  사력을 다해 사투하는(Agonizomai) 제자의 삶보다는, 삶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적절한 위로를 주는 '부드러운 종교' 선택하는 것이 현대적 트렌드가 되었습니다.

 

3.      '자아 실현'이라는 현대의 우상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비대한 자아(Ego) 깎아내야 하지만, 현대 사회는 자신을 긍정하고 사랑하라 가르칩니다.

 

자기 부인의 거부: 예수님의 명령은 자기 부인을 전제로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권리와 행복이 최우선인 시대에, 주권을 전적으로 양도하고 좁은 문으로 뛰어드는 행위는 미련하거나 극단적인 것으로 치부됩니다.


4.      '종교적 다원주의' '포용성' 함정

 

좁은 기본적으로 배타적입니다.  오직 길뿐이라는 선언입니다.

 

불편함 기피: 모든 가치를 포용해야 선하다고 믿는 현대인들에게, 오직 예수만이 유일한 문이라는 선언은 무례하게 느껴질 있습니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넓은 ' 근처에서 머무는 것이 사회적으로 세련되고 안전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5.      '익숙함'이라는 마비 증상

 

비유 유대인들처럼, 교회 안에서의 활동(예배, 봉사) 구원이라는 종교적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시늉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믿기 때문에, 굳이 고통스러운 사투를 벌이며 안으로 들어갈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아고니제스테’(사투하라) 대한 불순종은 구원을 '값진 보물' 아닌 '당연한 권리' 여기는 경외심의 결핍에서 비롯됩니다”(인터넷).

 

·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영적 무감각' 깨뜨리고 다시 좁은 문을 향한 사투를 시작할 있을까요?  

 

영적 무감각을 깨뜨리고 '아고니제스테(사투)' 영성을 회복하기 위한 실천적 출발점은 다음과 같은 본질로의 회귀에 있습니다.

 

1.      '관객'에서 '선수'로의 전환 (Identity Shift)

 

신앙을 경기장에서 구경하는 '관람' 아니라, 직접 트랙을 뛰는 '경주' 재정의해야 합니다.

 

실천: 예배를 '드려주는 ' 아니라, 삶의 가장 소중한 것을 제물로 드리는 영적 예배( 12:1) 회복하는 것입니다.   주일 나는 오늘 주님을 위해 무엇을 포기하고 사투했는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2.      '작은 자기 부인' 습관화 (Daily Self-Denial)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투는 번의 거창한 결단보다 매일의 작은 선택에서 시작됩니다.

 

실천: 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할 ,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고집을 꺾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타인을 비판하고 싶은 순간에 입을 닫거나, 나의 편안함을 포기하고 누군가를 섬기는 '의도적인 불편함' 선택하는 것이 좁은 길을 걷는 근육을 키워줍니다.

 

3.      '말씀의 거울' 앞에 단독자로 서기 (Solitude)

 

군중 속에 숨어 있으면 내가 넓은 길에 있는지 좁은 길에 있는지 없습니다.

 

실천: 하루 짧은 시간이라도 모든 소음을 차단하고 단독자로서 주님 앞에 서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 말씀이 심령의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4:12) 나를 노출시킬 , 나의 종교적 가식과 위선이 드러나고 비로소 좁은 문을 향한 갈급함이 생깁니다.

 

4.      '마지막 ' 기억하는 (Memento Mori)

 

주인이 문을 닫는 시간은 반드시 옵니다.  종말론적 긴박감을 회복해야 합니다.

 

실천: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지금 넓은 길의 안락함을 즐기겠는가, 아니면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사투하겠는가?   시급성을 인식할 때만 우리는 비본질적인 것들을 털어버리고 좁은 문으로 뛰어들 에너지를 얻습니다.

 

5.      '공동체적 격려' (Walking Together)

 

좁은 길은 혼자 가기 매우 어렵습니다.

 

실천: 함께 좁은 길을 걷기로 결단한 영적 우정의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서로의 영적 게으름을 깨워주고, 사투(Agonizomai) 현장에서 지칠 서로를 붙들어주는 소그룹 안에서 좁은 문의 영성은 유지됩니다.

 

결국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힘은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의 사랑을 깊이 신뢰할 나옵니다.  그분이 먼저 우리를 위해 십자가라는 가장 좁고 고통스러운 문을 통과하셨기 때문입니다”(인터넷).

 

(c)   마지막 셋째로, 예수님께서는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현대인의 성경 많은 사람이 들어가려고 애써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13:24) 말씀하신 것일까요?

 

(i)                  누가복음 13 24 후반부의 경고는 예수님의 가르침 가장 두렵고 엄중한 말씀 하나입니다.  구하여도(Seeking)’ 못하는 자와 힘쓰는(Striving, Agonizomai)’ 자를 극명하게 대조하시며, 구원의 문이 닫히는 원리를 가지 차원에서 설명하십니다.

 

1.      '구하는 (Seeking)' '사투하는 (Striving)' 차이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바라고(Wish)' '구하기(Seek)' 하지만, 정작 자신의 삶을 걸고 '사투(Strive)'하지는 않습니다.

 

적당한 종교심: 이들은 구원의 유익은 얻고 싶어 하지만,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반드시 버려야 '죄의 '이나 '자기 (Self-righteousness)' 포기하지 않습니다.

 

반쪽짜리 결단: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지적 동의) 있으나, 자신의 삶의 주권을 완전히 넘겨드리는 좁은 통로의 압박을 견디려 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2.      '시기' 문제: 은혜의 때가 지났기 때문 (누가복음 13:25 연결)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말씀 바로 뒤에 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은 후에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많은 사람이 들어가고 싶어 하는 '시점' 너무 늦었다는 뜻입니다.  심판이 닥치고 문이 닫힌 후에는 아무리 간절히 구하고 문을 두드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이 결코 '아무 때나 내가 원할 ' 얻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한이 정해진 은혜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3.      '자격' 착각: 관계 없는 종교 행위

 

들어가기를 구해도 거절당하는 자들은 주님과 함께 먹고 마셨으며 길거리에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13:26).

 

이들은 주님과 '익숙한(Familiar)' 사이일 , '연합된(United)'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해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말씀하십니다.  삶의 변화(회개) 없이 종교적 모양만 갖춘 구원을 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강력한 경고입니다.

 

요약하자면, 예수님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구원의 문은 생각보다 훨씬 좁고, 열려 있는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짧다 사실을 일깨워주시기 위함입니다.  단순히 구원을 바라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하며, 지금 즉시(시급성), 존재를 걸고(전폭성) 주님과의 실제적인 관계 안으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촉구입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나는 지금 밖에서 서성거리며 구경만 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미 좁은 문턱을 넘어 주님과 동행하고 있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집니다”(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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