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길을 막으시는 하나님 (3)
[민수기 22장 21-34절]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제가 Fuller 신학교를
다녔을 때 선교학 교수님이 ‘요나와 벌레’(Jonah and the Worm)이란 책을 우리 학생들에게 소개하시면서 자신은 성경책 다음으로 이 책을 좋아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책을 사서 읽었는데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그 책에 그려진 그림들 중에 요나 선지가는 니느웨 반대 방향으로 뛰어가는 모습이었고 벌레는 니느웨 방향으로 기어가는 모습이었습니다. 비록 한 장의 그림이지만 저는 지금까지도 그 사진을 생각하면
비록 하나님의 종인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였지만 벌레는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에 신실하게 순종하여 니느웨로 가서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을 만들어 주시고자 예비하신 박넝쿨을 갉아먹었기에(욘 4:6-7) 요나 선지자는 벌레만도 못하다는 생각입니다. 새 찬송가 143장 “웬 말인가 날 위하여”
1절 가사가 생각납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또 생각나는
것은 시편 73편 22절 말씀입니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시편 기자 아삽은 의인은 고통을 당하는데(시73:13-14)
악인은 형통하는 것을 보고(3-12절) 오만한
악인을 질투하다가(3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그 악인들의 종말을
깨닫게 되었을 때(17절) 자신의 마음이 괴롭고 양심이 찔리므로 말미암아
자신이 어리석고 무지함으로 주님 앞에 짐승같이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21-22절, 현대인의 성경). 또
생각난 것은 제가 얼마 전에 쓴 짧은 말씀 묵상 글입니다: “한 마음, 한 뜻으로 서로 협력하지 않고 갈등과 다툼이 있는 장로교회의 당회[목사님과 장로님(들)]는 개미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개미는 감독하는 자가 없어도 자발적으로 부지런히
그리고 협력하며 일하기 때문입니다(잠언 6:7).”
오늘 본문 민수기 22장 21-34절을 보면 사람인 발람보다 나은 짐승 나귀가 나옵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로, 나귀가 발람보다 나은 이유는 나귀는 발람이 못 보던 여호와의 사자(천사)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22장 23, 25, 27절 말씀입니다: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
이 석 절 말씀을 보면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여호와의 천사”(현대인의 성경)]를 세 번이나 보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았습니다(22절). 흥미로운 점은
민수기 22장 22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 하나님께서는 발람이 그들[모압 왕 발락이 보낸 고관들(15절)]과 함께 가는 것을
보시고 …”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보시고”있으신 것처럼, 나귀도
‘보고’ 있었는데 발람만 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발람은 나귀도 보고 있었던 여호와의 천사를 보지 못했던
것일까요? 제 생각엔 그 이유를 베드로후서
2장 15절과 요한계시록 2장
14절 말씀이 답변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른 길을 버리고 잘못된
길에 빠져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고 있습니다. 발람은 악한 방법으로 얻은 재물을 사랑하다가”(밷후2:15,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계2:14). 즉,
그 이유는 발람은 “악한 방법으로 얻은 재물을 사랑”[“불의의 삯을 사랑”(개역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요(벧후2:15) 또한 자기 자신도 “바른 길을 버리고 잘못된
길에 빠져”있었던 상태에서(15절, 현대인의 성경)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던
자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죄를 짓는 어두운 생활”(요일1:6, 현대인의 성경)을 하고 있었던 거짓 선지자 발람은 영안이 어두워서 나귀도 보았던 여호와의 천사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짐승 나귀가 사람 발람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 말씀 묵상할 때 하나님께서 저로 하여금
인터넷 사역을 통해 가르쳐 주시고 계시는 출애굽기 3장 7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분명히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백성의
고통을 저 또한 보길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기원하는 마음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주님 안에서의 형제, 자매들을
주님께서 저로 하여금 만나게 하시사 그들의 고통의 소리나 신음의 소리를 경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에 따라 돕는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님께서 생각나게
하시는 말씀을 하나님의 적합한 때에 그 지체들에게 나누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제 마음에 순수하지 못한 돈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불순한 동기가 있다면 저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백성의 고통을 결코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는 발람처럼 영안이 어두워져서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민22:32, 현대인의 성경) 저의 길을 막고 계시는 하나님의 천사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에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은
영안이 열린 나귀와 같은 가까운 형제, 자매나 친구 등을 통해서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가서는
안 될 길을 막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제, 자매나 친구 등의 진실한 충고는 아름다운 것입니다(잠27:9,
현대인의 성경).
둘째로, 나귀가 발람보다 나은 이유는 나귀는 자기 주인인 발람을 칼을 손에 들고 있었던 여호와의 천사로부터 세 번이나 살리려고 노력했지만,
발람은 자기를 살리려고 한 나귀를 채찍질하고 또한 지팡이로 때린 후 만일 자기 손에 칼이 있었다면 즉시 나귀를 죽여 버렸을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22장 23, 25, 17절 말씀입니다: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간지라 발람이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채찍질하니 …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그 담에 짓누르매 발람이 다시 채찍질하니 …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발람 밑에 엎드리니 발람이 노하여 자기 지팡이로 나귀를 때리는지라.” 이 석 절 말씀을 보면 나귀는 칼을 빼들고 길에 서 있는
여호와의 천사를 보고 세 번이나 발람을 살리려고 애쓰는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애씀은, 나귀는
여호와의 천사가 칼을 빼들고 길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그 길을 벗어나 밭으로 들어갔습니다(23절). 그런데 그 천사를 보지 못하고 있었던 발람은 자기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채찍질했습니다(23절). 아니, 채찍질을 맞아서라도
돌이켜 그 사악한 길(32절)을 가지 말았어야 했던 장본인은 발람이
아닌가요? 두 번째 애씀은,
여호와의 천사가 포도원 사이 좁은 길에 섰고 좌우에는 담이 있는 것을 보고 나귀는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그 담에
짓눌렀습니다[“발람의 발을 담에 비벼 상하게”했습니다(현대인의 성경)](25절). 그런데 자신의 발이 짓눌림을 당해 상하게 되기까지 했던 발람은
“다시” 자신의 나귀를 채찍질했습니다(25절). 아니,
상하게 됨을 통해서라도 발람은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자기가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길에서
돌이켜야 했지 않았나요? 세 번째 애씀은,
여호와의 천사가 “더 나아가서 좌우로 피할 데 없는 좁은 곳[“더 나아가서 좌우로 빠져나갈 틈이 없는 좁은 곳”(현대인의 성경)]에 서 있는 것(26절)을 보고 발람 밑에 엎드렸습니다(27절). 그런데 발람은
자기 밑에 엎드린 나귀를 자기 지팡이로 때렸습니다(27절). 아니, 더 이상 칼을
들고 서 있는 하나님의 천사를 피할 수 없어서 자기 앞에 엎드린 나귀를 발람은 채찍질도 아니고 지팡이로 그리 때려도 되는 것인가요? 발람이 평생 타고 다녔던 나귀는 이렇게 자기 주인인 발람에게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30절, 현대인의 성경) 발람은 눈(영안)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천사가 손에 칼을
빼들고 길에 선 것을 보지 못했기에(31절) 그는 자신의 충실한 나귀가
자기를 거역했다고 생각하고 자기 손에 칼이 있었더라면 벌써 자신의 나귀를 죽여 버렸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29절, 현대인의 성경). 그러니 어찌 짐승 나귀가 사람 발람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기를 세번이나 부인한 제자 베드로에게(마26:34, 70, 72, 74)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번
물으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요21:15, 16, 17). 아마도 그 이유는 발람이 자기의 충실한 나귀를 세 번이나
채찍질(두 번)하고 때렸다(한번)는 사실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번 부인한 사실과 연관을 짓고, 나귀가 발람을 세 번이나 살리려고
했다는 사실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사실과 연관을 짓게 되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이 연관성에서 얻는 교훈은 비록 충실한 나귀는 발람에게 칼로 죽임을 당하진 않았지만 하나님 아버지께 충실하셨던
예수님은 자기를 세번이나 부인한 불충실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고 내 양을 치라’는 사명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15, 16, 17절) 그를 위해서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불순종의 죄 때문에 영적으로 죽은 우리를(엡2:1,
현대인의 성경) 살리시기 위해서(중생)
였습니다(요일 4:9). 그리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롬6:23, 현대인의 성경).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저는 거짓 선지자 발람보다 나은 그의 나귀를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타신 나귀가 생각났습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슥9:9; 마21:4-5). 비록 발람이 탔던 나귀는 자기 주인이 발람을 살리려고 세번이나
노력했지만 발람은 자신의 나귀를 채찍질을 두번하고 지팡이로 때리기까지 했을 뿐만 아니라 만일 자기 손에 칼이 있었더라면 그 나귀를 즉시 죽이려고까지
했지만 그 나귀는 하나님의 개입으로 살아났습니다(민22:31-33). 그러나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불순종의
죄 때문에 영적으로 죽은 우리를(엡2:1, 현대인의 성경)
살리시려고(요일 4:9)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큰 소리의
부르짖음(마27:46)을 들으시고도 외면하시고 버리셨습니다. 그 결과 발람처럼 영적으로 죽어서 영적 시각 장애인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보지 못하고 있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의 눈으로 보시고 먼저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하시사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을 뿐만 아니라[중생(첫째 부활)]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릴 때(고전15:52, 현대인의 성경), 즉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어(51절)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52절)(둘째 부활).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살전4:16-17).
멍에
매는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사 모든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제임스
김 나눔
(2022년 11월 19일, 짐승 나귀만도 못한 이 죄인을 용서해주시고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부르시사 사명을 주셔서 도구로 사용해주시는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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