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의도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정치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궁지에 물아 놓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호크마).
악한 포도원 농부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한 말인 줄 알고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으나 군중들이 두려워 예수님을 잡지 못하고 그냥 가 버렸던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구실을 붙여 예수님을 잡으려고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 중 몇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 이렇게 물어보게 하였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알기에 선생님은 진실하셔서 사람의 겉모양을 보지 않으시고 진리대로 하나님의 교훈을 가르치시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거리낌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우리가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마가복음12:12-14,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말씀을 마태복음
22장 15-17절과 누가복음
20장 19-22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과 연관해서 묵상할 때 오늘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 중 몇 사람을 예수님께 “그런데 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우리가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마가복음12:14,
현대인의 성경)는 말씀을 좀 묵상하고자 합니다:
(1)
지난 주에 제가 네이버 블로그에 “지금도 기름 부음 받은 주님의 종인 목사님을 대적하여 공격함에 있어서
...”란 제목 아래 쓴 짧은 말씀 묵상 글에 누군가가 이렇게 댓글을 달았습니다:
“목사님 , 왜 한국의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런 견해의 글이 없으신 겁니까
? 정교분리는 맞지 않습니다.” 그 사람뿐만 아니라 저를 사랑하시는 어느 교회 장로님도 교회나 기독교 단체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에 대해서 발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제가 전도하고 싶어서 기도하고 있는
40년 넘은 친구는 지난 주에 그의 Facebook에 “제가 요번이 윤석열 사태로 태극기 부대가 탄핵반대 시위를 하면서 나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 몇가지들”이란 제목 아래
4개로 나눠서 글을 쓴 것을 읽게 되었는데
4번째 글을 이렇습니다:
‘4. 목사들: 사람들을 집회에서 선동을 하는 목사들.
그리고 그 현장에서 헌금까지 챙기는 모습들이 너무도 보기가 안 좋았습니다.
목사들이면 사람들을 평화와 용서를 펼쳐야 하는 사람들이.
그 많은 사람들한테 강한혐오를 심어주는 그 분들을 보면서.
저 사람들은 목사들이 아니라,
자신의 부를 위해서 나온 사람들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세 사람들의 글과 생각을 제가 생각할 때 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특히 목사로서 한국 정치뿐만 아니라 미국 정치[지금 제가 사랑하는 아내는 미국에
4살 때 부모님을 따라 이민 온 사람으로서 한국어도 할 줄을 몰랐기에 한국 정치는 전혀 모르고 미국 시민으로서 미국을 그녀 나름대로 사랑하기에 미국 정치에 대해 절제를 하면서 저에게 마음을 쏟아내곤 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제 아내는 트럼프가 처음에 대통령이 되었을 때 너무나 많이 힘들어해서 결국 저랑 같이 공화당이었지만 그녀는 민주당으로 바꿨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제가
TV를 켜서 미국 뉴스를 볼 때에 제 아내가 지나가다가
TV에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뉴스가 나오면 아내는 저에게 이런저런 말들을 하곤 해서 결국 저는 그 때
TV를 끊었을 정도였답니다.
ㅎ 제가 요정도로만 저희 부부의 미국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께요. 저희 집 세 자녀들까지는 나누고 싶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저는 그들의 아버지로서 그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미국 정치에 대한 견해를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들에게 미국 대통령 등 선거 때 투표용지가 집으로 오면 제 견해를 그들에게 나눠서 그들이 저에게 정치적으로 영향을 받아 아버지인 제가 원하는대로 투표하는 것보다 자기들 각자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지고 있는 정치적 견해대로 결정해서 투표하는 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에 대해서 제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견해를 공적으로 설교 시간에나 아니면 교회 웹사이트나 카카오톡 방에나 또는 제가 운영하고 있는 여러 개의 웹사이트나 등등 나눠야 하는 게 맞는 것일까요?
(a)
좀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제가 속해있는 어느 목사님들의 카카오톡 방에서는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을 금했는데 그 이유는 다른 정치적 견해로 말미암아 신학교 동문 우정 관계가 매우 나빠질 수도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몇 달 전에 제가 제 대학교 동문 친구들(대학 후배들)을 만나 저녁 식사를 함께 했는데 그 때 두 형제들이 미국 정치에 대해서 얘기를 하면서 얌전하게(?)
흥분도 하지 않고(감정도 섞이지 않게?)
서로의 다른점들을 말하는 것을 보고 제가 그들을 칭찬했었습니다. 한 친구는 아마 공화당인 것 같고 다른 친구는 아마 민주당인 것 같아보였는데 서로의 의견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나름대로 미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각자의 견해를 점잖게 대화하는 것을 보면서 저는 감사했고 보기가 좋았습니다.
(2)
오늘 본문 마가복음
12장 14절을 보면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 중 몇 사람이 예수님께 “그런데 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우리가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하고 물어보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칭찬하고 추켜 세우면서,
그리고 예수님이 진리와 권위를 갖춘 가르치는 자로 인정하면서(호크마) 로마황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받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옳지 않은 것인지 그래서 세금을 바쳐야 하는 것인지 바쳐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 예수님께 질문을 했는데 그들의 의도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정치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궁지에 물아 놓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호크마).
(a)
“예수 당시 유대 지방의 납세 문제는 민감한 문제였다. 갈릴리 지방의 분봉왕 헤롯은 종교적으로는 유대인이었으므로 그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종교적인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유대 지방은 아켈라오가 폐위되고 황제의 직속령으로 재편성되어 황제가 임명하는 총독이 다스리게 되자 유대 백성들은 로마 황제인 가이사에게 직접 세금을 바치는 격이 되었다.
한편 이때 가이사는
A.D. 12-37년에 로마를 통치한 티베리우스 황제였다.
그리고 로마 정부는 매
14년마다 한 번씩 그 각 지방에서 바쳐야 하는 세금의 총량을 결정하기 위해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눅 2:1). 이스라엘에서는 바벨론 유수때부터 이방 지배자들에게 조공(朝貢)을 바치는 일이 문제된 적이 없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인구 조사를 즈음하여 갈릴리 사람 유다(행 5:37)가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신데 이방 왕들에게 세금을 바쳐 그를 인정한다면 이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반란은 진압되었어도 가이사에 대한 납세의 적법성(適法性) 문제는 계속 신학적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더욱이 하나님의 선민이 예루살렘성전이 있는 유대 땅의 소출(所出)에서 십일조를 성전에 바치면서 그 동일한 소출에서 떼어 이방인 왕의 통치아래 있다는 표로 세를 바치는 것을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꺼림직하게 여겼다(F.
F. Bruce). 과격분자들인 열심당은 그 일을 수치(羞恥)로 여겼다.
그러나 헤롯당은 헤롯 가문을 재흥시켜 헤롯 대왕의 호시절로 돌이키려고 로마 제국에 협력하면서 납세도 적극 권장하던 자들이었다.
어쨌든 지금 예수는 궁지에 빠졌다.
납세를 찬성하면 열심당과 바리새인들과 일반 백성들로부터 외면을 당하여 그들이 환영하는 메시아가 될 수 없고,
납세를 반대하면 헤롯당원과 사두개인들,
로마 총독과 헤롯 왕으로부터 정치범으로 몰리게 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의 생각에 예수가 로마에 대한 납세를 찬성하지 않으실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사실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서 살려는 그들에게도 그 문제는 큰 고민이었다.
여하튼 바리새인들의 사악함은 하나님의 도에 참된 예수의 견해 중에서 율법에 열심인 자신들과 일치되리라고 예상한 점을 이용한 데 있다.
왜냐하면 이 문제가 예수를 옭아매기에 충분한 문제였기 때문이다”(호크마).
(b)
“여기서 특별히 가이사(Caesar)에게 바치는 세금에 관하여 질문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유대인들이 자기 나라를 무력적으로 지배하면서 높은 세금을 징수하는 로마 제국에 대해 깊은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 같은 민족 감정에 대한 예수의 입장을 말하게 함으로써 예수를 로마 쪽이나 유대 쪽으로부터 미움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고안된 진퇴 양난식(進退兩難式)의 교묘한 질문이다.
민족 감정으로 첨예하게 드러나 있는 지배국에 대한 세금 납부 문제는 초기 단계에 이미 유대인의 저항을 불러 일으킨 바 있다(I.
H. Marshall). 예수 당시에 유대인의 반(反) 로마적 감정은 세금 징수 문제에 있어 큰 반발심으로 표출되었다.
그래서 정탐꾼은 자신들이 민족주의 운동을 하는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인 것처럼 가장하여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주의적 측면에서 말하자면 당연하게 세금을 내지 말아야 한다는 대답이 나올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반대로 친로마적 발언을 한다면 예수를 환호했던 대다수 무리들로부터 배척당할 것이라는 기대를 했던 것이다”(호크마).
(3)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저희 부부만의 추억들이 두개가 있습니다. ㅎ 잊을 수가 없는,
아니 잊혀지지 않은 추억들이지요. 그 추억들이란 첫째로 저희 부부가 약
6시간을 운전해서
San Francisco를 가고 있었는데 옆에 앉아있던 사랑하는 아내가 미국의 낙태 문제와 그 낙태를 반대하는 미국 공화당 정치인들과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의 위선적인 면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과 의분을 가지고 저에게 쏟아내는데 제가 약
6시간 동안 들으면서 힘들어 했던 기억입니다.
ㅎㅎ (물론 이것은 아내의 견해에 대한 제 생각이지 정확하게 아내의 생각이나 관점이나 입장이 아닙니다). 둘째로,
저희 부부가 제 장모님을 방문하고자 약
9-10시간 운전하면서 가고 있었을 때
(그 때가 밤이었음) 제 옆에 앉아있던 아내가 미국 정치에 대해서 또 다시 자기의 견해를 말하는데 [한쪽으로는 제가 운전하면서 졸릴까봐 아내가 계속 대화를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다른 한쪽으로는 제 아내는 제가 볼 때 변호사 기질이 있어서 논리적으로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는 정치적인 관점을 그녀가 사랑하는 남편인 저에게만 쏟아냈을텐데]
제가 몇 시간을 듣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그녀에게 ‘Please stop’(제발 얘기하는 것을 멈춰달라고 부탁한 기억이 납니다.
하하. 제 아내는 저와 성격이 매우 달라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을 보면 의분을 가지고 저에게만 쏟아냅니다 ㅎㅎ 제 대학교 후배 자매들 세 명과
6년 넘도록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데도 그녀들에게 쏟아내지 않고 저에게만 쏟아냅니다 ㅎㅎ. 그래서 제가 트럼프 대통령
1기 때 실제로 뉴스에서 많은 미국 시민들이 우울해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제 아내가 그 시민들 중에 한명이였답니다. 그러니 옆에 있는 저도 … ㅎㅎ).
(a)
제가 저희 부부만의 이 추억들을 이렇게 나누는 이유는(아내를 생각할 때 나누고 싶지 않지만)
지금 미국을 사랑하는 미국 시민들의 정치적 견해뿐만 아니라 특히 이민자들이 고국을 떠나서 이방 나라(?)에 와서 고생하시면서 살아가고 있으신데 각자가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관심을 가지시고 기도하면서 각자의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함께 승리장로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을 믿으면서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빌립보서1:27)을 하시고자 노력들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한 성도님들에게 저는 담임 목사로서 또한 윤 장로님은 장로님으로서 우리 당회원들이 어떻게 모범된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i)
골로새서
4장 5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대할 때는 지혜롭게 행동하고 기회를 최대한 이용하십시오.” 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까? 그 이유는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믿지 않는 불신자들을 대할 때 지혜롭게 행동하고 기회를 최대한 이용해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길 원했기 때문입니다[참고: (3-4절,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도의 문을 열어 주셔서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할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나는 이 일 때문에 지금 갇혀 있습니다. 내가 이 비밀을 명확하게 전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도 바울이나 골로새 교회 성도들처럼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도의 문을 열어주시사 불신자들의 영혼 구원을 위하여 그들을 대할 때 지혜롭게 행동하고 기회를 최대한 이용하여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명확하게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입술로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로도 복음을 불신자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합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믿는 사람답게 생활하십시오. 그래서 내가 함께 있든지 떠나 있든지 여러분이 한마음 한 뜻으로 기쁜 소식의 신앙을 위해서 함께 싸운다는 소식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
여기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한다는 말씀의
3가지 의미 중 첫번째는,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한 마음,
한 뜻으로 서서 서로 협력하는 것입니다(27절). 그러므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생명을 버리는(마가복음8:35, 현대인의 성경)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가면서(겸손한 마음)
모든 형제,
자매들과 한 마음을 품고(빌립보서4:2) 한 뜻인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림에 있어서 서로 돕고 힘을 합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신다면 이 고난의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누가복음22:42,
현대인의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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