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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식하는 교계 지도자들이 견고하게 구축해 놓은 종교적 주도권과 형식주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강력한 '회개의 메시지' 앞에 철저히 무너져 내려야 합니다.

외식하는 교계 지도자들이 견고하게 구축해 놓은 종교적 주도권과 형식주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강력한 ' 회개의 메시지 ' 앞에 철저히 무너져 내려야 합니다 .         “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라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 ”( 요한복음 1:19-28).     (1)    저는 오늘 본문 요한복음 1 장 19-28 절 말씀을 한국어 성경으로 읽은 후 헬라어 성경으로 읽었을 때 왜 “ 바리새인들이 ”(24 절 ) “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19 절 ) 을 세례 요한에게 보내서 “ 네가 누구냐 ”[Σ ὺ τίς ε ἶ ( 쉬 티스 에이 ?) ](19 절 )...

외식하는 교계 지도자들이 견고하게 구축해 놓은 종교적 주도권과 형식주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강력한 '회개의 메시지' 앞에 철저히 무너져 내려야 합니다.

외식하는 교계 지도자들이 견고하게 구축해 놓은 종교적 주도권과 형식주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강력한 '회개의 메시지' 앞에 철저히 무너져 내려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라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요한복음 1:19-28).

 

 

(1)   저는 오늘 본문 요한복음 1장 19-28절 말씀을 한국어 성경으로 읽은 후 헬라어 성경으로 읽었을 때 왜 “바리새인들이”(24절) “제사장들과 레위인들”(19절)을 세례 요한에게 보내서 “네가 누구냐”[Σὺ τίς εἶ (쉬 티스 에이?)](19절), “누구냐”[Τίς εἶ (티스 에이?](22절)라고 이렇게 두 번이나 물어보게 하였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세례 요한이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28절) 세례를 베풀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은데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는 “그리스도”나 “엘리야”나 “그 선지자”(25절)만이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a)   바리새인들이 주도하여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통해 세례 요한에게 “네가 누구냐”와 “누구냐”라고 두 번이나 집요하게 질문하게 한 배경에는 ‘요단강에서의 세례 사역’과 관련된 당시 유대교의 철저한 메시아적 율법관’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 끈질긴 질문 뒤에 숨겨진 종교 지도자들의 속내와, 그 질문의 원어적 의미를 인공지능이 3가지 차원으로 설명한 것입니다(인터넷):

 

1.      왜 두 번이나 "네가 누구냐"고 다그쳤을까? (원어적 뉘앙스)

 

19절의 질문 [Σὺ τίς εἶ (쉬 티스 에이?)]: 주어인 '쉬(Σὺ, 너는)'를 강조하여 물어봅니다.  요한이 행하는 광야의 사역이 워낙 파격적이었기에, 종교적 주도권을 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수사관을 파견하듯 강력한 경계심을 품고 "도대체 너란 존재는 정체가 무엇이냐?"라며 그 인물의 '신분적 정체성'을 직접 확인하려 한 것입니다.

 

 22절의 질문 [Τίς εἶ (티스 에이?)]: 요한이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그 선지자도 아니라고 다 부인하자(20-21절), 이제는 주어['쉬(Σὺ, 너는)'] 빼고 "그렇다면 정체가 누구냐?”[Τίς εἶ (티스 에이?)]라고 다급하게 묻습니다.  뒤이어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라는 마디에서 보듯,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보고 체계 시스템 안에서 요한을 규정할 '공식적인 타이틀(명분)'이 다급하게 필요했던 것입니다.

 

2.      세례 사역이 바리새인들을 자극한 이유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는 아무나 세례를 베풀어서는 안 되며, 오직 종말론적인 구원자들만이 세례를 베풀 자격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정결 의식(세례)의 주도권: 당시 유대교에서 '물로 씻는 정결 세례'는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나 성전 제사를 드리기 전 율법에 따라 행하던 예식이었습니다.  즉, 세례는 성전의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종교적 통제와 허가 아래서만 행해져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종말론적 메시아의 세례 (25절의 고백): 유대인들은 에스겔 36장 25절("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이나 스가랴 13장 1절("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같은 구약의 예언을 근거로, 세상을 정결하게 하는 대대적인 물의 사역은 오직 그리스도나 에스겔, 엘리야 같은 종말론적 존재만이 행할 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분노: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의 허락도 받지 않은 한 청년(요한)이, 성전도 아닌 광야 요단강 한복판에서, 이방인도 아닌 '유대인 동포들'을 향해 "너희는 죄인 가득하니 세례를 받으라"고 선포하고 있으니, 바리새인들로서는 ‘네가 메시아적 권세를 받은 자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권리로 우리 종교 시스템을 뒤흔들며 세례를 베푸느냐?’(참고: 25절)라며 사상 검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3.      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거룩한 영적 교훈

 

①     세상은 늘 우리의 '타이틀(신분)'을 묻지만, 성도는 나의 '사명(소리)'으로 답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끝까지 요한에게 "네 명함이 무엇이냐?  네 직책이 무엇이냐?"라고 체제 안의 신분을 물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23절에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나는... 소리라"고 답합니다.

 

세상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너는 어느 대학을 나왔냐, 직급이 무엇이냐, 얼마나 가졌냐"라며 끊임없이 "네가 누구냐"라고 정체성을 흔듭니다.  그때 우리는 세상의 타이틀로 나를 증명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처럼 "나는 그저 내 삶의 자리에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도록 보냄을 받은 주의 소리일 뿐입니다"라는 사명 중심의 고백으로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②     "내 뒤에 오시는 이"를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 "내 사역의 경계"를 지켜야 합니다.

 

요한은 유대교 최고의 권력자들이 찾아와 "네가 혹시 그 대단한 메시아냐?"라고 부추길 때, 얼마든지 영적 교만에 빠져 자신을 과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호하게 자기를 부인하고, 26-27절에서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그이는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고 고백합니다.

 

내게 주어진 은사와 사역(물 세례)이 아무리 대단해 보일지라도, 그것은 오직 진짜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성령 세례)를 드러내기 위한 징검다리일 뿐임을 기억하는 철저한 한계 의식이야말로 바리새인들의 종교적 공격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요한의 진짜 권위였습니다.

 

한 문장 요약:

 

바리새인들은 요한이 베푸는 세례의 권위를 캐물으며 그의 종교적 '타이틀'을 요구했으나(19,22,25절), 세례 요한은 자신은 오직 주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일 뿐이며 진짜 세례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통로일 뿐임을 명확히 선언했습니다(인터넷).

 

(i)                  여기서 저는 그 당시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 세례 요한에게 ‘네가 메시아적 권세를 받은 자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권리로 우리 종교 시스템을 뒤흔들며 세례를 베푸느냐?’(참고: 25절)라고 세례 요한의 사상을 검증하려고 한 것을 생각할 때 지금도 바리새인들과 같은 외식하는 위선자들은 자기들의 입장(예를 들어 말씀보다 사람들이 만든 전통을 더 중요시 하는 입장)에서 자기들의 종교 시스템을 뒤흔드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세례 요한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23절)를 내는 그리스도인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들이 만든 '장로들의 전통'과 종교적 '시스템(기득권)'을 더 숭배했듯이, 오늘날에도 본질을 잃어버린 외식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며 그 비뚤어진 종교 시스템을 뒤흔드는 ‘참된 소리(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를 내는 그리스도인들을 집중적으로 경계하고 공격합니다.  이 뼈아픈 영적 현실을 묵상하며, 우리가 이 시대의 세례 요한이 되어 바리새인들의 공격 앞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신실하게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3가지 강력한 영적 교훈과 실제적 무기를 인공지능이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a.      바리새인들의 공격 본질: '본질의 소리'가 '비본질의 체제'를 부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두려움: 바리새인들이 세례 요한을 향해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25절)라고 따진 진짜 이유는, 자신들이 견고하게 구축해 놓은 종교적 주도권과 형식주의가 요한의 강력한 '회개의 메시지' 앞에 무너져 내리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현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만든 전통, 교권, 교회의 외형적 크기, 혹은 체면을 말씀의 진리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바리새인적 집단이 있습니다.  그곳에 누군가 성령의 능력으로 "형식을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가자, 내 자존심을 비워내고 참빛의 성품을 반사하자"라는 '본질의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체제에 안주하려는 위선자들은 불편함을 느끼고 그 사람의 자격(타이틀, 학벌, 직분)을 캐물으며 공격을 개시합니다.

 

b.     바리새인의 공격을 이기는 세례 요한의 무기: "철저한 무소유의 영성"

 

요한이 그 서슬 퍼런 사상 검증과 공격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당당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리새인들이 빼앗을 수 있는 것을 요한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울 때 오는 권위: 바리새인들은 성전의 화려한 옷, 백성들의 대접, 종교적 직분이라는 기득권을 가졌지만, 요한은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세상의 유혹을 거절한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구체적 실천: 우리가 세상이나 외식하는 자들의 공격에 흔들리는 이유는, 내 안에도 인정받고 싶고 대접받고 싶은 '바리새인적 욕망'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내 타이틀을 흔들 때, 세례 요한처럼 "나는 그저 사라지는 소리일 뿐이며, 나는 빛이 아니다, 내 가치는 오직 내 뒤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다"라는 철저한 자기 부인의 영성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빼앗길 명예가 없는 자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c.      공격받을 때 성도가 가져야 할 영적 시선: "길이 곧아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명의 확증: 에베소서 5장 11, 13절 말씀처럼 빛이 임하면 어둠 속에 숨겨진 죄와 위선은 필연적으로 폭로당하게 됩니다.  즉, 참된 그리스도인이 삶의 자리에서 말씀의 빛을 내고 소리를 질러 바리새인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내 삶의 소리가 지금 어둠을 뒤흔들고 있으며 주님의 길을 바르게 곧게 만들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구체적 실천: 공격과 오해를 받을 때 맞서 싸우거나 혈기로 변명하지 마십시오.  요한은 그들의 다그침에 성질을 내지 않고, 조용히 26-27절에서 다시 한 번 "내 뒤에 오시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기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며 시선을 오직 예수님께로만 고정시켰습니다.  묵묵히 주님의 이름을 힘입어 임마누엘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품으로 빛을 반사하는 일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를 향한 거룩한 선언과 적용:

 

‘바리새인들이 만든 전통과 시스템의 눈치를 보지 마십시오.  세상이 당신에게 “네가 누구냐”라고 정체성을 뒤흔들며 공격할 때, 조용히 내 이름을 지우고 오직 내 안에 계신 참빛이신 예수님의 이름만을 힘입어 신실한 소리의 사명을 이어가십시오.’

 

외식하는 자들의 집중 공격 앞에서도 주인공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묵묵히, 그리고 신실하게 마음 밭을 기경하는 통로로 살아내는 우리를 통해, 하나님은 이 어두운 시대 속에 다시 오실 주님의 대로를 가장 임팩트 있게 건설하실 줄 믿습니다(인터넷).

 

(2)   둘째로, 저는 세례 요한의 “아니라”[Οὐκ εἰμί (우크 에이미)](요1:20, 21)하는 답변이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네가 누구냐”(19절)라고 물었을 때 숨기지 아니하고 드러내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ἐγὼ οὐκ εἰμὶ ὁ Χριστός (에고 우크 에이미 호 크리스토스)]하고 말한 것(20절)과 “그러면 “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라고 물었을 때에도 “아니라”(21절)하고 말한 것을 묵상할 때 우리가 이미 묵상한 “그는 이 빛이 아니요”[ οὐκ ἦν ἐκεῖνος τὸ φῶς  (우크 엔 에케이노스 토 포스)](8절)라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세례 요한이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ἐγὼ φωνὴ βοῶντος ἐν τῇ ἐρήμῳ· Εὐθύνατε τὴν ὁδὸν Κυρίου, καθὼς εἶπεν ᾿Ησαΐας ὁ προφήτης (에고 포네 보온토스 엔 테 에레모, 에우튀나테 텐 호돈 퀴리우, 카도스 에이펜 에사이아스 호 프로페테스)](23절)하고 말하기 전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20절), ‘나는 엘리야나 그 선지자가 아니라’(21절)하고 분명하게 말한 것이 우리에게 귀한 교훈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a)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던진 질문은 사실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 대단한 유혹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년 동안 선지자가 없어 영적 기갈에 시달리다 요한의 탁월한 사역을 보며 큰 존경을 보내고 있었습니다(눅 3:15).  만약 요한이 그 분위기에 편승해 “내가 바로 그 그리스도다, 혹은 엘리야다”라고 슬쩍 인정했다면, 그는 당대 종교계의 정상이자 백성들의 왕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나는 소리라”) 사명을 말하기 전에, 내가 누구가 아닌지(“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자기 부인(Self-denial)] 선을 긋는 일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이 철저한 “아니라[Οὐκ εἰμί (우크 에이미)]”의 고백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3가지 강력한 영적 교훈을 인공지능이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에고 에이미(나는 … 이다)’의 주님 앞에 ‘우크 에이미(나는 아니다)’로 서는 겸손

 

대조의 신비: 요한복음 전체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실 때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 나는 … 이다)”라는 신적 선언을 일곱 번이나 사용하십니다(6:35, 8:12 등).  반면 피조물인 세례 요한은 철저하게 “우크 에이미(Οὐκ εἰμί, 나는 아니다)”라며 자신을 완벽하게 부인합니다.

 

교훈: 영적 지도자나 성도가 타락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오직 하나님만 쓰실 수 있는 고유한 주권의 자리인 ‘에고 에이미’(내가 … 이다)를 탐내며 내가 대접받고, 내가 영광을 받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8절의 말씀("그는 이 빛이 아니요") 그대로 자기가 서야 할 피조물의 자리와 한계를 명확히 알고, 오직 예수님만이 ‘에고 에이미’(내가 … 이다)가 되시도록 자신을 완전히 지워버렸습니다.  주님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아닙니다’라고 고백하는 과정이 필수적입니다.

 

2.      허탄한 타이틀(이름표)을 거절하는 정직함

 

유혹의 실체: 유대 지도자들은 당시 구약 성경(말 4:5, 신 18:15)에 예언된 가장 위대하고 매력적인 타이틀인 ‘그리스도’, ‘엘리야’, ‘그 선지자’라는 명예를 요한에게 계속 제시했습니다.

 

교훈: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너는 대단한 사람이다, 네가 이 일을 다 해냈다"라며 영적인 교만의 바람을 불어넣고 세상적인 타이틀을 안겨주려 합니다.  이때 요한처럼 단호하게 “우크 에이미(아니라)”라고 거절할 수 있는 영적 정직함이 필요합니다.  내가 받지 말아야 할 영광, 내 사역의 크기를 뛰어넘는 세상의 칭찬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이 진짜 사명자의 실력입니다.

 

3.      '소리'의 권위는 '나를 비움'에서 시작됩니다.

 

순서의 중요성: 요한은 자신이 광야의 ‘소리[φωνὴ (포네)]’(23절)라고 사명을 밝히기 ‘전에’ 먼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20-21절)를 분명히 했습니다.

 

교훈: 나를 비워내지 않은 채 소리를 지르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메시지)을 듣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지르는 나라는 인간(메신저)의 얼굴과 이름을 보게 됩니다.  마이크가 소리를 잘 전달하기 위해 자기 내부를 텅 비워내야 하듯, 요한은 자신을 완벽하게 숨겼기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핵심만을 세상에 온전히 들려줄 수 있는 완벽한 ‘소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묵상을 나에게 대입하는 최종 적용:

 

"주님, 오늘 제가 사람들의 인정과 대접이라는 ‘거짓 빛’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하시고, 날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고백하며 주님만 높이는 진짜 소리가 되게 하옵소서."

 

내 삶의 영역에서 "아니라" 선포하기: 가정이나 교회, 직장에서 내가 수고하여 좋은 성과를 냈을 때, 혹은 남들에게 칭찬을 받을 때 속으로 즉시 선포하십시오: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이 영광의 주인공(빛)이 아닙니다.  오직 임마누엘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사라지는 소리로 기쁘게 살아가기: 소리는 아버지를 해석하여 전달하고 나면 공중으로 흔적 없이 사라집니다.  내 수고를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소리는 사라져도 그 소리가 전달한 예수 그리스도라는 '영원한 말씀'은 상대방의 영혼 속에 영원히 남기 때문입니다.  내 이름은 지워지고 주님의 이름만 남는 것에 자족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길 기원합니다(인터넷).

 

(3)   셋째로, 저는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φωνὴ βοῶντος ἐν τῇ ἐρήμῳ· Εὐθύνατε τὴν ὁδὸν Κυρίου (포네 보온토스 엔 테 에레모, 에우튀나테 텐 호돈 퀴리우)](요1:23)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제가 쓴 짧은 말씀 묵상 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세례 요한과 같은 사람으로서 주님의재림의 길을 곧게 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입니다.  그러므로우리는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을 우리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해야 합니다(요한복음 1:6, 7, 23, 현대인의 성경).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가 주님이 재림의 길을 곧게 하라는 부르심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같이 섬겨야 하는 것일까요?

 

1.      광야[ἐρήμῳ (에레모)]를 도망치지 않고 사명의 자리로 받아들이는 것

 

원어적 의미: 헬라어 ‘에레모스(ἔρημος)’는 물이 없고 황폐하여 사람이 살 수 없는 거칠고 척박한 땅을 뜻합니다.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탐욕과 이기주의로 메말라 버린 이 죄악된 세상을 상징합니다.

 

구체적 실천: 세례 요한은 안락한 제사장의 가문과 성전을 떠나 거친 광야로 나아갔습니다.  우리가 재림의 길을 예비하는 소리가 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이 광야처럼 영적으로 메마르고 상처를 주며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신앙의 온실 속으로 도피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척박한 삶의 현장(가정, 일터, 이웃)을 주님이 나를 '소리'로 파송하신 선교의 무대로 정직하게 수용하고 그 자리를 지켜내야 합니다.  광야에 서 있어야 비로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2.      외치는 자[βοῶντος (보온토스)]가 되어 타협 없는 소망을 선포하는 것

 

원어적 의미: ‘외치다’에 해당하는 ‘보온토스(βοῶντος)’는 단순히 감정을 질러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왕의 전령관이 중대한 소식을 온 백성에게 엄숙하고 담대하게 공포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구체적 실천: 세상의 눈치를 보느라 복음의 색깔을 흐리거나 비겁하게 침묵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문화가 아무리 물질주의와 쾌락주의로 흘러가도, 성도는 입술과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영원한 생명이 없다", "우리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신다"라는 절대적인 진리와 하늘의 소망을 세상에 선포해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나의 선명한 삶의 궤적과 담대한 입술의 고백으로 왕이신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세상에 알리는 전령관이 되어야 합니다.

 

3.      소리[φωνὴ (포네)]가 되어 철저하게 주님만 남기고 사라지는 것

 

원어적 의미: 헬라어 ‘포네(φωνή)’는 내용(말씀)을 전달하는 물리적인 ‘음성’을 뜻합니다.  소리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순간 공중으로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만약 소리가 사라지지 않고 공중에 남아 웅웅거린다면 진짜 중요한 왕의 목소리(말씀)를 가리게 됩니다.

 

구체적 실천: 우리가 세상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믿음의 다리(통로)’(7절)가 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나를 비워내야 합니다.  내가 열심히 수고하고 봉사한 뒤에 내 이름이 드러나지 않고, 아무도 내 공로를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말씀이신 예수님만 전달하고 사라지는 소리일 뿐이니 주님만 영광 받으셨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라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메신저인 '나'는 사라지고, 메시지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상대방의 마음 밭에 남게 하는 것이 소리의 완벽한 사명 완수입니다(인터넷).

 

(4)   마지막 넷째로, 저는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요1:25)라는 질문에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26-27절)하고 대답한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좀 자세하게 알고 싶습니다.  특히 저는 이 말씀을 우리가 이미 묵상한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15절)는 말씀과 연관성[예를 들어, “내 뒤에 오시는 이”(15절)과 “내 뒤에 오시는 그”(27절)]도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는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26절)이란 말씀을 묵상할 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14절)란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a)   요한복음 1장 25-27절에서 바리새인들의 날카로운 검증에 대한 세례 요한의 답변은, 앞서 서론에서 선포된 성육신의 신비(14절)와 예수님의 영원성(15절)이라는 거대한 하늘의 진리가 어떻게 실제 역사적 현장에서 증명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위대한 신앙적 변증입니다.  그리고 15절(서론의 외침)과 27절(실제 현장의 외침)의 연관성, 그리고 14절(우리 가운데 거하심)과 26절(너희 가운데 서 계심)의 연결은 매우 중요합니다.  핵심 의미들을 인공지능이 구체적으로 풀어서 설명한 것입니다(인터넷):

 

1.      26-27절 자체의 구체적인 의미: 참된 세례와 완전한 종의 자세

 

물 세례와 성령 세례의 대조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바리새인들이 "무슨 권리로 세례를 주느냐"고 다그칠 때, 요한은 자신이 행하는 물 세례의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물 세례는 인간의 외면을 씻어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마음 밭 기경)를 시키는 표상일 뿐이며, 진짜 인간의 영혼 내면을 재창조하고 죄를 사하시는 완전한 세례(성령 세례)는 내 뒤에 오시는 그분만이 하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27절):

고대 유대 사회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엄격했으나, 제자라 할지라도 스승의 '신발을 벗기거나 발을 씻기는 일'만큼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오직 이방인 노예들 중에서도 가장 낮은 최하층 노예만이 하던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주님 앞에서 그 가장 비천한 노예의 자격조차 되지 않는 존재라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신성과 권위를 극대화하여 높이고 있습니다.

 

2.      15절과 27절의 연관성: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지닌 구속사적 성취

 

사도 요한은 15절에서 소개했던 세례 요한의 추상적인 외침이, 27절의 바리새인들과의 치열한 논쟁 속에서 어떻게 역사적 실체로 증명되는지를 보여줍니다.

 

15절 ➔ Ὁ ὀπίσω μου ἐρχόμενος (호 오피소 무 에르코메노스): "내 뒤에 오시는 이"

 

27절 ➔ ὁ ὀπίσω μου ἐρχόμενος (호 오피소 무 에르코메노스): "내 뒤에 오시는 그"

 

연관성의 신비: 15절에서는 예수님이 요한보다 나중에 태어나고 나중에 사역을 시작하셨지만, 원래 만물 이전에 먼저 계셨던 영원한 창조주이심을 선포했습니다.  27절은 그 영원하신 분이 이제 요한의 사역 뒤편에 역사적 시간의 순서를 따라 바로 내 뒤에 당도하셨다는 선언입니다.

 

교훈: 요한은 "내가 서론(15절)에서 목이 터지라 외쳤던 그 영원한 하나님이, 지금 내 뒤에 진짜 인간의 몸을 입고 줄을 서 계시는 바로 이분이다!"라고 바리새인들 앞에서 완벽하게 그 실체를 지목하여 연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3.      14절과 26절의 연관성: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신 임마누엘의 신비

 

14절의 성육신 선언과 26절의 요한의 폭로는 전율이 돋을 정도로 완벽하게 이어집니다.

 

14절 ➔ ἐσκήνωσεν ἐν ἡμῖν (에스케노센 엔 헤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 가운데 성막을 치셨다)

 

6절 ➔ μέσος ὑμῶν ἕστηκεν (메소스 휘몬 헤스테켄): "너희 가운데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연관성의 신비: 14절이 하늘의 관점에서 "하나님이 인간 세상 한복판에 텐트를 치고 찾아오셨다"는 거대한 신비를 선포했다면, 26절은 그 성막이 되신 예수님이 지금 유대인들이 숨 쉬고 있는 그 군중들의 틈바구니 속에 실제로 발을 딛고 서 계신다는 역사적 실재를 고발합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는"의 비극: 하나님이 인간 가운데 텐트를 치고 바로 곁에 서 계시는데도(26절), 종교 전문가라는 바리새인들은 눈이 멀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앞서 묵상한 10절의 비극("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이 26절에서 구체적으로 재현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최종 교훈: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순간에도 참빛이신 예수님은 이미 내 삶의 한복판에 찾아와 텐트를 치고 묵묵히 서 계시며(14,26절), 성도는 그 위대하신 창조주 주님 앞에서 나를 철저히 노예보다 낮은 자로 부인할 때 비로소 내 뒤에 오시는 주님을 온 세상에 가장 찬란하게 드러내는 소리가 될 수 있습니다(15,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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