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라! (2)
[시편 26편 말씀 묵상]
6월 10일 토요일에 있을 세 사역 연합 새생명축제 및 새신자 환영회 때 우리 승리장로교회 역사를 슬라이드로나마 소개하고자 이번 주 한 이틀 연속으로 교회 엘범들에 있는 오래 전 사진들을 다 스캔하였습니다. 1980년 7월부터 2006년 5월 까지의 사진들을 스캔하면서 참 세월이 빨리 지나갔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오래 전부터 승리장로교회에 나오시는 분들의 옛 사진들을 보면서 참 신앙생활에 있어서 신실함 혹은 성실함이란 영적 자세는 참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요즘 교회를 여기 저기 왔다 갔다 하면서 교회를 옮겨다니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서 한 교회에서 수년동안 오랫동안 섬긴다는 것은 참으로 귀하다는 생각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26편에 나오는 다윗 또한 참으로 성실한 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므로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다고 오늘 본문 1절과 11절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완전함에 행했다는 말씀은 하나님처럼 완전하여 무죄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가 그 시대에, 어떤 죄악을 범하는 무리들과 같이, 동화한 적이 없다는 의미입니다(4, 5절) (박윤선). 한 마디로 말하면, 다윗은 성실히 행하였다는 말씀입니다[“’완전함’이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톰’이니 성실함, 전심함 등의 의미를 가진다”(박윤선)].
성실히 행하였던 다윗에게서 배우는 첫 번째 교훈은 ‘성실히 행하는 자는 요동치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 26편 1절을 보십시오: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다윗은 자기가 처해있었던 힘든 상황에서도 요동치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는 힘든 상황을 하나님께 기도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는 오늘 본문 2절에서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라고 기도하였는데 여기서 “살피시고”란 말씀은 “마음을 깊이 들여다 봄”을 의미하고 “단련하소서”란말씀은 “금속을 정제하기 위하여 불의 연단을 가함”입니다 (박윤선). “이 말은, 여기서 신앙 인격에 불순물이 있는가 하여 환난 같은 것으로 흔들어 봄을 가리킨 듯 하다”라고 박윤선 박사님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좀 역경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흔들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고통과 역경이 없이는 마음을 잘 깊이 들여다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 때에 좀 멈춰서서 자신을 뒤돌아보는 시간을 갖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윗은 그가 당면한 어렵고 힘든 상황을 오히려 하나님의 눈으로 자기 자신 마음을 깊이 들여다 보는 기회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는 그의 힘든 상황을 연단의 기회로도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더욱더 하나님을 의지함에 있어서 요동함이 없이 견고했던 것입니다. 오늘 성실히 행하는 자는 어떻게 행하는지 나머지 두 가지 교훈을 배우고자 합니다.
둘째로, 성실히 행하는 자는 주님의 진리 중에 행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26편 3절을 보십시오: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 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다윗은 역경 속에서도 죄악된 세상과 또한 악인들과 타협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진리) 중에 행하였습니다. 그는 충분히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을수도 있었고 “간사한 자와 동행”할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초월한 신앙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어떻게 다윗은 거짓된 사람들과 세상 가운데서도 주님의 진리 중에 행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주의 인자하심”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은 환난과 역경 속에서도 오히려 자신을 살펴보며 자신의 뜻과 마음을 단련하는 기회로 삼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자기의 목전에서 보았기 때문에 그는 진리 중에 행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의 눈으로 보며 살아아고 있습니까? 지난 몇 칠을 뒤돌아 볼 때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의 눈으로 보셨습니까? 저는 지난 주 Warren Wiersbe 목사님이 쓰신 “Be Decisive”라는 책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예언의 말씀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예언의 말씀이 성취될 때까지 그의 종 예레미야를 보호해주신다는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승리장로교회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인 마태복음 16장18절 말씀 – “내가 … 내 교회를 세우리니” – 을 이루시는 그 날까지 하나님께서는 주의 종인 저를 보호해 주신다는 적용을 했을 때에 큰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자기의 목전에서 보았기 때문에 허망한 자들과 간사한 자들과 타협하지 않고 주님의 진리 중에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좀 반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역경 속에서 왜 진리 중에 행하지 않고 타협할 때가 있는 것인가하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우리의 목전에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랑을 직접 영의 눈으로 보는 이러한 영적 체험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의 육신의 눈만이 우리가 당면한 역경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면 우리는 진리 중에 행하지 못하고 타협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진리 중에 행하였던 다윗의 삶을 한 세 가지로 묘사할 수 있음습니다: 첫째로, 다윗은 진리대로 행치 않는 자들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그들과 동행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행악자들의 집회도 미워하였습니다[(4-5절)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여기서 “허망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대로 행치 않는 자들을 가리킵니다(박윤선). 진리 중에 행하였던 다윗은 하나님의 진리대로 행치 않는 사람들의 “주의를 따르지 않”았던 것입니다(박윤선). “간사한 자”란 “가리움이 된 자들”(The veiled)을 의미하는 바, 내용은 가장 악하면서도 외모로는 가장 선한 체하는 자들입니다(박윤선). 진리 중에 행하는 자는 이러한 간사한 자를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선한 체하면서 내용은 거짓되고 악한 사람을 구별할 수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다윗은 악을 행하기 위하여 모인 단체, 즉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였고 또한 악한 자, 즉 “문문한 자”인 “도덕 실행해 견고성이 없고 방종히 가는 자요, 되는대로 행하는 자”와도 친교를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둘째로, 다윗은 정결한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였습니다. 6절을 보면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사장이 제단 봉사에 착수하기 전에 손을 씻고 시작하는 사실을 염두해 두고 하는 말”입니다 (출40장; 신21:6, 7, 30-33) (박윤선). 다윗은 제단에 이르러 하나님과 교제하기 전에 평소의 생활을 정결히 하고서 하나님과 교제하였습니다(박윤선). 마치 주중에 정결한 생활을 하다가 주일 주님의 전에 올라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셋째로,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증거하였습니다[(7절) “감사의 소리를 들리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이르리이다”]. 박윤선 박사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하여 감사함은, 그 당사자가 마땅히 해야 할 개인적 책임”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삶 속에 하신 일들을 다른 이들에게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남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여서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전도자의 책임”을 감당하였습니다(박윤선).
마지막 셋째로, 성실히 행하는 자는 교회를 사랑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 26편 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 이 말씀의 의미는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 곧, 교회를 사랑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영광이 거하는 교회를 사랑하는 자는 어떻게 합니까? 첫째로, 거짓(죄)를 미워합니다. 진리의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를 사랑하는 자가 어떻게 거짓을 좋아하겠습니까? 거짓, 죄를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코 교회 안에 거짓된 죄악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우리는 심히 그 죄를 미워해야 합니다. 특히 고통 중에 내 마음 깊은 속까지 주님의 눈으로 살펴보므로 말미암아 내 안에 있는 위선의 죄를 깨닫고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둘째로, 교회를 사랑하는 성실한 자는 죄인들과 함께 하지 않습니다. 진리 중에 행하는 자가 거짓된 죄인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저희 손에 악특함이 있고 그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 하”기 때문입니다(10절). 셋째로, 교회를 사랑하는 성실한 자는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는 교회를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이 없는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집회를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라를 통해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사1:13-14).
“물이 바다 덮은 같이”라는 복음성가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 가득찰 그 날을 생각하면서 흘렸던 그 눈물이 그립습니다. 죄악된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더럽혀지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우리들의 죄를 회개하는 마음과 더불어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 날이 올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찬 세상, 그 영광 가운데 하나님께 온전한 찬양과 경배를 드릴 날이 반듯히 올 줄 믿습니다. 그 날이 올 때까지 이 죄악된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그 곳을 사모하면서 믿음으로 걷기를 원합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므로 요동하지 아니할 것이며 거짓된 세상에서 거짓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진리 중에 거할 것이며 또한 주님의 피로 사신 교회를 더욱더 사랑하기를 기원합니다.
“내 주의 나라와 주 계신 성전과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내 주의 교회는 천성과 같아서 눈동자 같이 아끼사 늘 보호하시네.
이 교회 위하여 눈물과 기도로 내 생명 다하기까지 늘 봉사합니다.
성도의 교제와 교회의 생활과 구주와 맺은 언약을 늘 좋아합니다.
하늘의 영광과 베푸신 축복이 진리와 함께 영원히 시온에 넘치네”
(찬송가 246장)
찬송가 246장을 부르면서 승리장로교회를 생각케 하시며 사랑의 눈물을 흘리게 하신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을 의지하면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06년 6월 2일 주님 사랑, 교회 사랑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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