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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관하여 (1): 역경에서 더 큰 역경을 접하게될 때 크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기회가 되길 기원합니다.

  https://youtube.com/shorts/FzRQN_BsoLY?si=kQomS4VX5XSJYSYI

 외식하는 신앙적 가면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내면의 정결과 정직한 신앙을 추구하십시다!

외식하는 신앙적 가면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내면의 정결과 정직한 신앙을 추구하십시다!

 

 

 

 

 

 

 

 

 

 

 

제임스





 

종교적 형식주의를 버리고

내면부터 정결케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잡수시기 전에 씻지 아니하심을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그러나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누가복음 11:37-41).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1 37-41 말씀을 묵상할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38) 말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38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 바리새파 사람은 예수님이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는 것을 보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a)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겼던 것일까요?

 

(i)                      여기서 씻다라는 헬라어 βαπτίσθη”(에바프티스테) 동사 “βαπτίζω”(배티조) 부정과거 수동태형으로, 여기서 “βαπτίζω”(배티조) 담그다”, “잠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흔히 세례 침례 변역됩니다.  단어는 규례에 따라 식사전에 그릇에 손을 담그는 것을 뜻합니다[누가복음의 저자 누가가 여기서 일반적인 '씻다'라는 단어 “νίπτω”(닙토) 대신 “βαπτίζω”(배티조) 수동태형인 βαπτίσθη”(에바프티스테) 사용한 것은, 당시 바리새인들이 식사 세척을 단순한 청결이 아닌 하나의 엄격한 종교적 의례(baptism) 간주했음을 보여줍니다”](참고: 인터넷, 호크마).

 

·       단어는 신약성경의 여러 문맥에서는 전신을 물에 담그는 것뿐만 아니라, 손이나 그릇을 씻는 정결 의식을 가리키는 포괄적인 용어로도 사용되었는데 오늘 본문 누가복음 11 38절에서의 씻는 행위는 단순히 손의 먼지를 닦는 것이 아니라, 식사 손을 씻음으로써 자신을 성별하는 바리새인들의 전통적인 규례를 의미합니다(인터넷).

 

-            행위는 당시 하나의 예의요 관습이었고, 단순히 위생상의 문제 뿐만 아니라 죄많은 세상과 접촉함으로 인해서 생기는 불결을 제거하기 위한 결례였습니다.  아무튼 제의적 식사 관습은 바리새인 아니라 일반 유대인들도 철저히 지켰던 규범이었습니다( 7:3-4).  따라서 유전을 무시한 예수의 행위는 바리새인에게 파격적인 것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호크마).

 

(2)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11:39-40).

 

(a)    예수님(주님) 예수님이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은 것을 보고 이상히 여기고 있었던 바리새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i)                      예수님은 주님으로서 자신을 초청한 바리새인을 면전에 두고 매우 강한 어조로 그뿐만 아니라 전체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비판하셨는데 마태의 경우는 있을진저라는 저주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3 25 말씀입니다: “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거룩함을 보이려고 그릇의 겉을 닦듯이 철저히 예식을 엄수함으로써 자신들의 외양을 포장하지만 속은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위선자들이라는 것입니다(호크마).

 

-            여기서 탐욕이란 헬라어 ρπαγή”(하르파게스) 움켜쥐다또는 채어가다 뜻의 ρπάζω”(하르파조)에서 말로 강탈”, “약탈 의미를 포함합니다.   단어는 다음과 같은 이미지를 가집니다: (1) 맹수의 사냥: 늑대가 떼를 덮쳐서 낚아챌 ( 10:12) 사용됩니다.  (2) 무력 사용: 상대방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 폭력적으로 빼앗는 행위입니다.  (3) 약탈: 전쟁터에서 승리자가 패배자의 물건을 휩쓸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인터넷).

 

n  이는 단순히 마음속으로 갖고 싶어 하는 욕심을 넘어,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거나 약탈하는 공격적인 탐욕을 뜻합니다.  겉으로는 거룩한 씻고 있지만, 실제로는 남의 것을 착취하고 있었다는 통렬한 비판입니다”(인터넷).

 

-            또한 악독이란 헬라어 “πονηρία”(포네리아) 악한 뜻하는 “πονηρός”(포네로스)에서 말로서 이는 단순히 도덕적인 실수를 넘어 타인을 해치려는 적극적인 악의나 부패한 성품을 의미합니다.  , 바리새인들이 겉으로는 종교적 순결성을 지닌 것처럼 보이나 중심을 얼마나 욕심이 많고 악한 자들인가를 표현해 주는 말입니다(호크마).

 

n  가지 흥미로운 점은, 악독이란 헬라어 “πονηρία”(포네리아)(39) 앞서 34절에서 눈이 나쁘면 몸이 어두울 것이요라는 말씀에서 나쁘면이란 헬라어 “πονηρός”(포네로스) 같은 단어라는 것입니다.  말은 악독”(39) 나쁜 ’(34) 연결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 마음속에 악독”(포네리아) 가득한 바리새인들은 나쁜(포네로스) 가진 상태이며, 결과 하나님의 빛을 보지 못하고 어둠 속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ii)                    예수님께서 식사 손을 씻지 않은 것을 보고 의아해하는 바리새인에게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39)라고 강한 어조로 말씀하신 이유는, 그들의 '종교적 위선' '본질의 상실' 정면으로 지적하시기 위함입니다(인터넷).  

 

·       구체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의식적 청결' '도덕적 부패' 극명한 대비

 

바리새인은 손을 씻는 βαπτίσθη”(에바프티스테)(정결 예식)'라는 외적 형식에만 몰두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 잔의 ) 닦는 데는 지극 정성이지만, 정작 손으로 행하는 실상은 남의 것을 강탈”[“ρπάζω”(하르파조)]하고 마음에는 악독”[“πονηρία”(포네리아)] 품고 있다는 이중성을 폭로하신 것입니다.  , "손은 씻어서 깨끗할지 모르나, 마음은 썩어 있다" 것을 '안과 ' 비유로 질타하신 것입니다.

 

2.       '사람의 유전' '하나님의 공의' 가로막음

 

당시 식사 손을 씻는 것은 구약 성경의 핵심 율법이라기보다 바리새인들이 만든 '장로들의 전통' 가까웠습니다.

 

바리새인은 사소한 전통을 어기는 것에는 크게 놀라면서도, 정작 율법의 본질인 '사랑과 공의' 저버리고 탐욕을 부리는 자신의 상태에는 무감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무엇이 중요한 가치인지를 잊어버린 '영적 맹인' 상태임을 깨우쳐 주려 하신 것입니다.

 

3.       '내면의 ' 대한 실천적 훈계

 

앞선 33-36절에서 예수님은 "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보고 '이상히 여긴 ' 자체가 이미 그의 내면() 어둡다는 증거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판단하는 바리새인에게 "정작 (내면) 탐욕으로 가득 차서 어두운데, 어찌 겉만 씻는 것에 연연하느냐?"라고 반문하시며 마음의 개혁을 촉구하신 것입니다.

 

결국 말씀은 "하나님은 잔의 겉이 아니라 안에 담긴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 강력한 경고이자 가르침이었습니다(인터넷).

 

(iii)                 예수님께서 식사 손을 씻지 않은 것을 보고 의아해하는 바리새인에게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40)하고 말씀을 하신 이유는, 그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인터넷).

 

1.       창조주의 통합적 주권 (겉과 속의 일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외적 정결)'만을 보시는 분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드셨다"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신체()뿐만 아니라 마음과 영혼()까지 창조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겉만 깨끗하게 닦고 (마음) 탐욕으로 가득 상태는, 창조주 하나님을 기만하는 행위이자 그분의 주권을 무시하는 '어리석음'이라는 지적입니다.

 

2.       본질적인 정결의 기준 제시

 

바리새인들은 '손을 씻는 예식'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믿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결은 '전인적인 정결'임을 강조하십니다.

 

겉을 닦는 정결례는 인간이 만든 전통에 불과할 있지만, (내면) 살피시는 것은 하나님의 본래 창조 목적입니다.

 

속을 만드신 하나님 앞에서 속이 더러운데 겉만 씻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논리입니다.

 

3.       영적 무지에 대한 책망 ('어리석은 자들')

 

헬라어 '아프론(φρων)' 단순한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영적 통찰력이 없는 상태' 뜻합니다.

 

누가복음 11 34-36절의 '(통찰력)' 비유와 연결됩니다.  그들은 눈이 나빠서(포네로스) 창조주의 의도를 보지 못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의식(씻기)에는 민감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부패(탐욕과 악독)에는 무감각한 그들의 지독한 모순을 '어리석음'이라는 단어로 꼬집으신 것입니다.

 

결국 말씀은 "하나님은 손의 청결보다 마음의 청결을 만드신 분이며, 그것을 중요하게 보신다" 창조 신앙적 경고입니다(인터넷).

 

(3)    예수님께서는 식사 손을 씻지 않은 것을 보고 의아해하는 바리새인에게 그러나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41)하고 말씀하셨습니다. 

 

(a)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유는, 바리새인들이 집착하던 '외적 정결' 한계를 깨고 '내면의 본질적 변화' 촉구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구체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1.       '소유'보다 '존재' 정결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잔과 대접의 (의식적인 ) 닦는 몰두했지만, 안에는 남의 것을 낚아챈 탐욕(하르파게) 악독(포네리아)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은 독소로 가득 내면을 비워내는 유일한 방법으로 '구제' 제시하셨습니다.  남의 것을 빼앗아 채웠던 손을 펴서 가난한 자에게 내어줄 , 비로소 창조주가 만드신 '(내면)' 씻겨 내려가기 때문입니다.

 

2.       율법의 형식보다 '사랑의 정신' 본질임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정결이란 '물로 씻는 예식'이었으나, 예수님에게 정결이란 '하나님의 자비(구제)'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손을 깨끗이 씻어도 마음속에 이웃을 향한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운 상태입니다.  따라서 "구제하라" 말씀은 율법의 문자에 매몰된 그들에게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회복하라는 명령입니다.

 

3.       '모든 ' 깨끗해지는 원리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구제를 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하셨습니다.  이는 내면() 하나님 앞에서 사랑과 자비로 정결해지면, 정결한 마음으로 행하는 식사나 의식 삶의 모든 외적인 영역()까지도 저절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행위가 된다는 원리입니다.  , '안에서 밖으로(Inside-out)' 흘러나오는 진짜 정결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탐욕으로 가득 마음을 비우고 이웃을 사랑하는 구제를 실천하라.  그것이 물로 손을 씻는 것보다 배나 너를 정결하게 만든다" 영적 통찰을 주신 것입니다(인터넷).

 

(i)                      저는 말씀을 묵상할 제가 2010 10 14일에 사도행전 22 30 – 23 5 말씀 중심으로 바른 신앙생활” (Upright Christian Life)이란 제목 아래 말씀 묵상 글을 다시금 읽게 되었습니다(참고: https://blog.naver.com/kdicaprio74/150095461603).  부분만 나눕니다:

 

둘째로, 바른 신앙생활은 위선을 경멸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3 3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가로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하느냐 하니.  말은 사도 바울이모인 공회원들에게 자기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선한 양심대로)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했을 (1)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바울의 입을 치라고 하여 바울이 대제사장 아나니아에게 말할 내용입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회칠한 이란 표현은 “겉은 아름답지만(희지만) 속은 온갖 더러운 ()으로 가득 찼다는 말”입니다(유상섭).  마디로 말한다면, 겉과 속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위선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대제사장 아나니아에게 ‘당신은 위선자’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치실 것이다’고 꾸짖었던 것입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회칠한 겉모습은 율법에 따라 심판하기 위해서 재판석에 앉아 있는 것이고, 더러운 속모습은 율법을 어기고 바울을 치라는 명령에 있습니다(유상섭).  바울의 말은 예수님께서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에게 하신 말씀들과 유사합니다.  누가복음 11 39, 44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있을찐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23 2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회칠한 무덤 같다고 질책하신 모습을 우리는 있습니다.  회칠한 담이든, 회칠한 무덤이든 겉은 아름답지만 속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찼음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종교적 예식을 철저히 감당하는 모습은 사람이 보기에 참으로 아름답게 보이고 깨끗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 속에 있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함을 보고(알고) 계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는 ‘위선의 상징’으로 ‘바리새인’을 꼽았습니다.  그들은 당시 유태 사회에서 사회적 지위가 높은 만큼 신앙적과 시욕 또한 대단해서 외식(外飾), 허식(虛飾), 가식(假飾) 전형으로 비쳐졌습니다.  거짓으로 꾸미고 자기 (self-righteous) 과시하는 위선자들 이였습니다.  어거스틴은 배우들이 그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인 것처럼 가장하고, 그들의 모습이 아닌 다른 사람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교회 안과 모든 인간 생활에서 본래의 자기 모습이 아닌 것처럼 가장하려는 모든 사람은 위선자이거나 배우라고 말했습니다(인터넷).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12 1 하반절에서 하고 계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 바리새인들의 누룩 외식을 주의하라.’  우리는 너무 겉으로 사람에게 옳게 보이려고 힘쓰지 말아야 합니다(23:28).  오히려 우리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그래야 겉도 깨끗하게 것입니다(23:26).  베드로전서 1 22 말씀처럼 우리는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우리)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어리석은 바리새인과 같은 교인들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누가복음 11:42-44).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1 42-44 말씀을 목요일에 이미 묵상한 누가복음 11 37-41(말씀 묵상 제목: “종교적 형식주의를 버리고 내면부터 정결케 해야 합니다!”) 말씀과 연관해서 묵상할 [ 이유는 말씀 바리새인들의 위선(Hypocrisy) 주제로 하며, “겉과 속의 불일치라는 핵심 논리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임(인터넷)] 말씀 묵상 제목을 어리석은 바리새인들과 같은 교인들이라고 정했습니다(참고: 여기서 어리석은 40절에서 말씀하고 있고, “바리새인 42절과 43절에서 말씀하고 있음.  그리고 교인들이란 오늘 말씀을 현재 자신과 같은 교인들을 생각하면서 적용한 것임).

 

(a)    먼저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1 42절과 4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이란 헬라어(그리스오) 단어 “Φαρισαίοις”(파리사이오이스) 관심을 가지게 되어 묵상하고자 합니다.

 

(i)                      단어의 어원적 의미: '파리새'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페루쉼(Perushim)'에서 유래했으며, '분리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분리된 자들”).  그들은 이방인이나 부정한 유대인들로부터 자신들을 분리하여 율법을 엄격히 준수함으로써 거룩함을 유지하려 했던 집단이었습니다(인터넷).

 

·       오늘 본문 누가복음 11 42-43절에서의 의미는 위선의 상징입니다.  , 예수님께서 "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라고 부르실 , 명칭은 다음과 같은 부정적인 영적 상태를 폭로하는 호칭으로 쓰였습니다(인터넷):

 

-            본질보다 형식을 앞세우는 태도: 박하와 운향 같은 아주 작은 채소의 십일조까지 철저히 계산해 바치면서도, 정작 신앙의 핵심인 '공의(Justice)' '하나님께 대한 사랑(Love of God)' 저버리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            사람의 인정을 갈구하는 종교적 명예욕: 회당의 높은 자리(상석) 시장에서의 문안(공적인 존경) 즐기는 이들의 자기중심적 신앙을 비판하는 대상입니다.

 

-            내면이 썩은 신앙: 겉으로는 거룩해 보이지만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타인을 영적으로 오염시키는 '평토장한 무덤' 같은 존재로 정의됩니다”(인터넷).

 

n  요약: 오늘 본문의바리새인(Φαρισαίοις) 단순히 유대교의 파벌을 부르는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진실한 관계보다 외적인 종교적 행위와 사회적 지위에 집착하는 '외식하는 '들을 말씀합니다(인터넷). 

 

(ii)                    바리새인들이란 외식하는 들입니다.  여기서 외식이란 무엇입니까?  히브리어 의미는 ‘자기를 감추는 자’ 또는 ‘위선자’입니다.  신약에서는 원래 무대에서 가면을 쓰고서 연출하는 배우를 가리킨 것으로서, 후에는 위선자, 외식하는 자를 의미하는 단어 ‘휘포크리테스’가 사용되었습니다.  말은 특히 종교인들에게 상용된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이 없는 거짓된 태도를 뜻합니다.  겉으로는 아주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하면서도 내면으로는 거짓과 위선이 가득한 경우가 바로 외식의 적합한 표현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외식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의 죄악은 무엇이었습니까?  마디로, 경건은 말로만 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이였습니다(박윤선).  시편 50 16 말씀입니다: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 율례를 전하며 언약을 입에 두느냐”. 

 

-            이것은 외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로만 하나님의 종교를 전문하고 있음을 꾸짖고 있는 말씀입니다(박윤선).  17 말씀입니다: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말을 뒤로 던지며”.  무슨 말씀입니까?  외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교훈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들 뒤로 던집니다. 

 

·       이것이 우리의 외식이요 죄가 아닙니까?  주일,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예배당을 나아갈 때에 말씀을 우리의 뒤로 던지고 세상에 나아가서 다시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는 우리가 아닙니까.  이렇게 하나님의말씀을 우리 뒷전에 미뤄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면서 살아갑니까?

 

-            원인을 칼빈은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외식하는 종교가들의 증표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그들의 경외심의 결핍이다”(칼빈).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의 결핍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미워하고 뒤로 던지는 죄악을 범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b)    둘째로, 저는 우리가 이미 묵상한 누가복음 11 4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어리석은 자들아 헬라어 단어 φρονες”(아프로네스) 관심을 가지게 되어 묵상하고자 합니다.

 

(i)                      어원적 의미: 부정 접두어 '(-)' + 마음/지각을 뜻하는 '프렌(φρήν)': 직역하면 '지각이 없는', '마음(정신)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       사물을 올바르게 판단할 있는 영적 통찰력이 결여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ii)                    누가복음 11 40절에서의 구체적 의미: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단어를 사용하신 이유는 그들의 치명적인 영적 무지 때문입니다.

 

·       창조의 원리를 모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의 외형뿐만 아니라 내면(마음) 창조하셨음을 간과하는 어리석음을 지적합니다.

 

·       본말전도(本末顚倒): 그릇의 (외적인 정결 예법) 닦는 데는 힘을 쏟으면서, 정작 하나님이 보시는 그릇 (마음의 탐욕과 악독) 방치하는 비논리적인 태도를 꼬집는 것입니다.

 

·       영적 근시안: 눈에 보이는 종교적 형식에만 매달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보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iii)                 시편의 '어리석은 '(성경적 배경): 단어는 구약 성경(70인역) 시편 14 1절의 "어리석은 (나발, Nabal)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라는 개념과 맥을 같이 합니다.  , 하나님을 믿는다고 공언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이 마음 중심을 보고 계심을 무시하고 사는 '실천적 무신론자' 뜻하기도 합니다.

 

·       결국 어리석은 자들”(아프로네스)(11:40) 종교적 행위는 화려하지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단절된 영적인 눈먼 상태를 꾸짖는 강력한 경고의 단어입니다(인터넷).

 

-            로마서 2 19-24 말씀입니다: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n  어리석은 바리새인들은 스스로를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 '어둠에 있는 자의 '이라고 확신합니다(19).  하지만 정작 남은 가르치면서 자기 자신은 가르치지 않는 치명적인 영적 맹점을 보입니다(21).  그리고 그들은 율법을 '소유'했다는 사실만으로 자랑하지만, 정작 율법을 '범함'으로써 하나님을 욕되게 합니다(23).

 

#  그들의 '눈먼 상태' 단순히 지식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몰두하여 정작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모르는 상태입니다(인터넷).

 

-            마태복음 15 14 말씀입니다: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

 

n  (그릇) 닦으면서 (마음) 만드신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 어리석은 바리새인들은(11:40), 겉으로 드러나는 '장로들의 전통'( 씻기 ) 매몰되어, 정작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 15:19)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그들은 스스로는 '가장 믿는 '라고 자부하지만, 예수님 보시기에 이들은 진리의 길에서 이탈한 위험한 안내자들입니다(인터넷).

 

#   제가 2009 7 21일에 예배의 정화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으면서 글의 부분입니다(참고: https://blog.naver.com/kdicaprio74/150057413766): “우리 한국 교회의 예배당은 놀랍다. 그런데 진정한 교회인 우리 성도들(목회자들이나 평신도들이나) 썩어져 가고있지 않나 하는 두려움이 있다. 특히 같은 목회자들이 썩어져 가므로 떼들이 영적 굶주림과 목마름 속에서 방황하고 있지않나 생각한다. 이젠 우리 목회자들이 더이상 떼들에게 모델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시대를 맞이하지 않았나 생각한다.바래새인의 모델로 대치 되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이젠 성도님들 입에서 목회자를 향한 - '자기는 안하면서 우리에게 자꾸만하라고 하는지 ...'- 이란 말이 충분히 나오는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배가 부른 목회자, 자기 배만 살찌우고 떼들은굶주려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에서도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목회자들에게 주신 영적 권위를 우리 목회자들이남용하여 권위주의식 목회를 하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러한 권위주의식 목회를 하는 목회자를 '존경' (적어도겉으로는)하는 떼들이 없이 많다는 생각이다. 이것을 가리켜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격이 아닌가 생각된다. 바리새인목회자는 바리새인 교인들 만들어 밖에 없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이사야 114절말씀처럼 하나님의 마음이 싫어하시는 예배요 하나님에게 무거운 짐이 되는 예배일 뿐인 것이다.”

 

(c)    마지막 셋째로, 저는 평토장한 무덤” (11:44)같은 어리석은 바리새인들은 어떠한 사람들이었는지 관심을 가지게 되어 묵상합니다.

 

(i)                      평토장한 무덤같은 바리새인들은 한마디로 '겉은 평범해 보이나 속은 죽음(부정함) 품고 있어, 타인까지 오염시키는 치명적인 위선자들' 의미합니다.  구체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1.       '보이지 않는 위선' 가진 사람들 ( 11:44)

 

평토장한 무덤: 원래 유대인들은 무덤에 회칠을 하여 사람들이 닿지 않게 표시했습니다.  하지만 평토장한 무덤 표시가 없어 사람들이 위를 밟고 지나가도 그것이 무덤인 모릅니다.

 

의미: 이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경건하고 거룩해 보여서, 사람들은 그들과 접촉하는 것이 영적으로 유익하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실체는 영적 죽음 상태에 있습니다.

 

2.       본질보다 '사소한 규칙' 목숨 거는 사람들 ( 11:42)

 

박하와 운향의 십일조: 아주 작은 향신료 채소까지 철저히 계산해 바치는 종교적 열심을 보였습니다.

 

결여된 : 정작 신앙의 핵심인 '공의(정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 통째로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 형식은 있으나 생명력은 없는 상태입니다.

 

3.       '영적 교만' '명예욕' 빠진 사람들 ( 11:43)

 

높은 자리와 문안: 회당의 상석에 앉고 시장에서 존경 섞인 인사를 받는 것을 즐겼습니다.

 

의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종교적 권위' 중요하게 여긴 이들입니다.

 

4.       타인을 '부정하게' 만드는 사람들 ( 11:44)

 

유대 율법상 무덤을 밟으면 7 동안 부정해집니다.  평토장한 무덤 같은 바리새인들과 접촉하는 이들은, 그들이 위선자인 줄도 모른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과 가치관에 물들어 영적으로 오염됩니다.

 

요약: 결국 이들은 "신앙의 껍데기는 화려하고 정교하지만, 중심에는 하나님이 아닌 자기 (Self-righteousness) 탐욕이 가득하여 주변 사람들까지 영적 파멸(구덩이) 끌어들이는 위험한 인도자들"이었습니다(인터넷).

 

(2)    결론적으로 오늘 본문 누가복음 11 42-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어리석은 바리새인과 같은 교인들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a)    '본질'보다 '종교적 체크리스트' 집착하는 교인 (42)

 

(i)                      성경의 모습: 박하와 운향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림.

 

(ii)                    오늘날의 모습: 주일 성수, 십일조, 봉사 외형적인 종교 의무는 철저히 수행하지만, 일상 속에서 정직(공의)하게 살거나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은 식어버린 상태입니다.  신앙을 '관계' 아닌 '행위의 목록'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b)    '영적 허영심' '인정 욕구' 강한 교인 (43)

 

성경의 모습: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즐김.

오늘날의 모습: 교회 내에서의 직분이나 사회적 지위를 영적 권위로 착각하며, 남들에게 경건해 보이고 대접받는 것에 가치를 둡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의 시선과 칭찬' 머물러 있는 상태입니다.

 

3. '영적 선영력' 아닌 '오염원' 교인 (44)

 

성경의 모습: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사람들이 위를 밟고도 모름.

 

오늘날의 모습: 겉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신실한 교인처럼 보이지만, 실제 () 세속적인 가치관과 탐욕으로 가득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가 신앙인인 알고 교제하지만, 정작 그의 위선적인 삶과 이중성을 통해 은연중에 영적인 해악을 입게 됩니다.

 

4.   '자기 객관화' 되는 교인

 

성경의 모습: 자신이 '무덤' 줄도 모르고 남을 인도하려 .

 

오늘날의 모습: 스스로는 구원받은 의인이라 확신하며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지만, 정작 자신의 내면이 부패해 가고 있다는 사실에는 눈먼 '영적 소경' 상태입니다.

 

결국 어리석은 바리새인 같은 교인은 "종교적 형식이라는 안경을 쓰고 자기 (Self-righteousness) 취해, 정작 하나님이 보시는 마음 중심은 방치하는 사람"입니다.

 

 

 

 

 

 

 

 

 

 

 

 

 

 

 

 

 

 

 

 

 

 

 

 

 

희생적인 사랑이 없는 교만과 위선적 지식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이르시되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손가락도 짐에 대지 않는도다”(누가복음 11:45-46).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1 45-46 말씀을 묵상할 모욕하심이니이다”라는 율법교사”의 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45).  단어는 헬라어로βρίζω”(휘브리조)인데, 이는 상대방에게 무례하게 굴거나 치욕을 주어 명예를 짓밟는 행위를 뜻합니다(인터넷).

 

(a)    , “한 율법교사”는 예수님에게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45)라고 말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우리가 심한 모욕감을 느꼈습니다’라고 항의한 것입니다(참고: 인터넷).  그러면 그는 심한 모욕감을 느낀 것일까요?

(i)                      “율법교사가 예수님의 말씀에 '모욕감' 느낀 결정적인 이유는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향해 던진 비판이 자신들의 '전문성' '생계적 기반' 정면으로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       구체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나도 같은 취급을 받는다고? (연대 책임)

 

당시 율법교사들은 바리새파의 지적인 스승이자 이론가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꾸짖으시자, 율법교사는 ‘우리가 저들과 패라는 말이냐?  우리 같은 고결한 학자들까지 저급한 위선자들과 도구급으로 취급하는 것이냐?’라며 불쾌해한 것입니다.

 

2.       '지적 자부심' 대한 상처

 

그들은 평생 성경을 연구하며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최고 전문가'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정식 랍비 교육도 받지 않은 젊은 청년(예수) 자신들의 삶과 가르침을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니, 전문가로서의 자존심이 짓밟혔다고 느낀 것입니다.

 

3.       '숨겨진 치부' 찔림

예수님의 비판은 정확했습니다.  율법교사들은 남들에게는 엄격한 규칙을 강요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곤 했습니다.  자신들만 아는 위선적인 모습이 대중 앞에서 폭로되자, 부끄러움이 '모욕감'이라는 공격적인 감정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4.       권위의 위협

 

당시 유대 사회에서 '명예' 권력과 직결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교사들이 쌓아온 종교적 기득권과 사회적 영향력을 뿌리째 흔드는 일이었기에, 이를 자신들에 대한 심각한 명예훼손(모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모욕감은 '내가 틀릴 수도 있다' 겸손함이 없을 나타나는 전형적인 반응입니다.  진리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기보다 '나의 체면' 먼저 생각했기에 발생한 감정입니다”(인터넷).

 

(b)    저는 말씀을 묵상할 “주로 목사는 모욕감을 느끼는 것일까요?”라는 질문을 인공지능(AI)에게 물어보았습니다:

 

(i)                      “성경 율법교사가 느꼈던 모욕감과 오늘날 목회자가 느끼는 모욕감은 심리적으로 맞닿아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주로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그런 감정을 느끼곤 합니다.

1.       '영적 권위' 부정당할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는 자부심과 소명의식으로 삽니다.  그런데 누군가 자신의 설교나 가르침을 비판하거나 신뢰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면, 그것을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 가치와 영적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깊은 모욕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2.       '도덕적 결점' 드러날

 

율법교사들이 예수님의 지적에 발끈했던 결정적 이유는 지적이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 역시 겉으로 보여지는 거룩한 모습과 실제 사이의 간극을 누군가 날카롭게 꼬집을 , 당혹감이 분노와 모욕감으로 변질될 있습니다.

 

3.       '헌신' 인정받지 못할

 

‘내가 교회를 위해 얼마나 희생했는데...’라는 보상 심리가 있을 위험합니다.  자신의 수고가 성도들에게 당연하게 여겨지거나,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무시당했다'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4.       '지적 전문성' 대한 자부심

본문의 율법교사들처럼 공부를 많이 전문가 집단일수록, 자신의 해석이나 논리가 반박당하는 것을 참기 힘들어합니다.  ‘내가 전문가인데 감히?’라는 엘리트 의식이 모욕감의 뿌리가 되기도 하죠.

 

요약하자면 결국 '자아(Self)'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자신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목사라는 직분' '' 동일시하다 보니 직분에 대한 비판을 나에 대한 모욕으로 연결 짓는 것입니다”(인터넷).

 

(c)    “그러면 교인들은 모욕감을 느끼는 것일까요?”라는 질문을 인공지능(AI)에게 물어보았습니다:

 

(i)                      “교인들 역시 율법교사와 본질적으로 비슷한 이유로 모욕감을 느끼지만, 양상은 '신앙적 자부심' '보상 심리'라는 측면에서 조금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1.       '자기 (Self-righteousness)' 건드려질

 

율법교사들이 율법을 지킨다는 자부심이 컸던 것처럼, 열심 있는 교인일수록 ‘나는 남보다 경건하다’는 무의식적인 우월감을 갖기 쉽습니다.

 

누군가 자신의 신앙생활(기도, 봉사, 헌금 ) 순수성을 의심하거나 비판하면, 그것을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모독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깊은 상처와 모욕감을 느낍니다.

 

2.       '헌신에 대한 인정' 결여될

 

많은 교인이 시간과 물질을 드려 교회에 헌신합니다.  헌신이 순수하게 하나님을 향해야 하는데, 사람의 '인정' 섞이게 되면 위험해집니다.

 

자신의 수고를 알아주지 않거나, 오히려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 혹은 잘하라는 권면을 들을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나를 무시하나’라는 서운함이 모욕감으로 변합니다.

 

3.       '영적 정체성' '자아' 분리하지 못할

 

‘나는 집사다’, ‘나는 권사다’라는 직분을 계급이나 권위로 인식할 발생합니다.

 

직분자로서의 허물을 지적받으면, 그것을 '성숙을 위한 조언'으로 듣지 못하고 자신의 인격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오해합니다.  율법교사가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들에 대한 '모욕'으로 단정 지은 것과 같은 심리적 메커니즘입니다.

 

4.       '익숙한 위선' 폭로될

 

교회 안에서 거룩한 가면을 쓰고 지내다 보면, 어느덧 가면이 진짜 모습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말씀이나 타인의 조언을 통해 안의 이중성이나 세속적인 욕망이 날카롭게 지적될 ,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방어기제로 "무례하다", "나를 모욕했다" 화를 내게 됩니다.

 

요약하자면 교인들이 느끼는 모욕감의 핵심도 결국 '(Self)' 있습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 신앙생활을 , '나의 체면' '나의 공로' 부정당하면 모욕감을 느낍니다.  반면,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라는 겸손한 태도를 가진 사람은 어떤 지적 앞에서도 모욕감 대신 자신을 돌아보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인터넷).

 

(2)       이렇게 예수님에게 모욕감을 느낀 “한 율법교사”에게 예수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손가락도 짐에 대지 않는도다”(11:46)라고 말씀하셨는데 의미가 무엇일까요?

 

(a)    먼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유는 “한 율법교사”는 예수님께서 근거 없고 정당성을 갖고 있지 않는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교사들의 죄악성을 낱낱이 파헤치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참고: 호크마).

 

(i)                      예수님께서는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운다’하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지기 어려운 짐”이란 율법 자체가 아니라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에 대한 율법사들의 해석을 말합니다.  이들은 사실상 자신들의 해석을 율법 자체보다 우월한 것으로까지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해석은 지나치게 세분화되어 있고 복잡하여(모세의 율법을 제외하고도 613조에 달하는 규범이 있었다) 일반 백성들이 일일이 암기하여 지키기란 대단히 어려운 것이었습니다(호크마).

 

·       “본질보다 복잡한 '세칙':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정신(사랑과 정의) 사라지고, 말씀하신 대로 613개에 달하는 방대한 규정(하라 248, 하지 마라 365) 그에 딸린 무수한 '장로들의 전통' 남았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무엇이 죄인지조차 몰라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인터넷).

 

1.       '세세한 규칙' (형식주의)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핵심은 '사랑'인데, 율법교사들은 이를 수천 가지의 잘게 쪼개진 행동 지침으로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말씀을 지키기 위해 ' 미터 이상 걸으면 된다', '매듭을 묶으면 된다' 식의 막히는 규칙들을 만들었습니다.

 

백성들은 일상 속에서 "이게 죄인가, 아닌가?" 전전긍긍하며 감시받는 기분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2.       '죄책감' (영적 열등감)

 

율법교사들이 만든 613개의 조항은 생업에 종사하는 일반인들이 도저히 지킬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규칙을 지키지 못하는 백성들은 스스로를 '함량 미달의 신앙인'이라 여기며 죄책감 속에 살았습니다.

 

반면 율법교사들은 이를 지키지 못하는 이들을 '무식하고 부정한 ' 낙인 찍어 영적인 열등감을 심어주었습니다”(인터넷).

 

·       “성도들이 오늘날 교회 생활에서 가장 무겁게 느끼는 '현대판 종교적 ' 율법교사들이 지웠던 613개의 조항처럼 눈에 보이진 않지만, 심리적·문화적으로 강요되는 '보이지 않는 규칙들'입니다.

1.       성도들이 느끼는 '현대판 종교적 '

 

'완벽한 신앙인' 프레임: 주일 성수, 십일조, 봉사, 새벽기도 외형적인 신앙 지표를 모두 갖춰야만 "신앙이 좋다" 인정받는 분위기입니다.  기준에 미치면 스스로를 '자격 없는 신앙인'이라 정죄하며 영적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거룩한 가면' 강요: 교회 안에서는 항상 기뻐하고 감사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삶의 고통이나 의심, 슬픔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합니다.  감정적 위선이 정서적 짐이 됩니다.

 

'사역과 봉사' 과부하: 사랑과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삶이나 안식은 무시된 , 교회의 여러 부서에서 ''로서의 사역에 동원되는 현상입니다.

 

'세속적 성공' '신앙' 결합: ‘믿음이 좋으면 복을 받아 성공해야 한다’는 식의 기복주의적 가르침은,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내 믿음이 부족해서 이런가?’라는 이중의 짐을 지웁니다”(인터넷).

 

-            “이런 짐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율법교사의 짐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예수님의 원리를 회복해야 합니다.

 

'복음의 본질' 회복 (은혜의 우선성): 내가 무엇을 '행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사랑' 때문에 반응하는 것이 신앙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자들아 내게로 오라’( 11:28) 하신 예수님의 초청은 종교적 의무에서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취약함' 공유 (가면 벗기): 교회 공동체가 서로의 약점과 실패를 정죄하지 않고 품어주는 안전한 곳이 되어야 합니다.  율법교사들처럼 손가락질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울어주는 공감이 필요합니다.

 

'사역'보다 '사귐' (관계 중심):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성도 간의 진실한 교제가 종교적인 프로그램이나 업무보다 우선시되어야 합니다.

 

'직분' 권위주의 타파: 목회자나 중직자가 율법교사처럼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삶의 무게를 '함께 손을 대어' 나누어지는 섬김의 리더십을 실천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현대판 짐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은 우리의 업적이 아니라 존재를 사랑하신다’는 단순한 진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인터넷).

 

(ii)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손가락도 짐에 대지 않는도다”(11:46)하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율법교사들의 '극단적인 위선' '공감 능력의 결여' 가장 날카롭게 비판하신 부분입니다.  구절에는 가지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1.       자신들은 빠져나갈 '편법' 만들었습니다

 

율법교사들은 백성들에게는 613개의 조항을 엄격하게 적용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법망을 교묘히 피할 있는 '해석상의 예외 규정' 만들어 즐겼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 멀리 이동하지 못하게 해놓고는, 미리 자기 물건을 목적지에 가져다 놓으면 그곳도 ''으로 간주해 이동할 있다는 식의 편법(에루브) 사용했습니다.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법을 어기면서 백성들만 옥죄었던 것입니다.

 

2.       고통당하는 이들에 대한 '긍휼' 전무했습니다

‘손가락 하나 대지 않는다’는 표현은 짐이 너무 무거워 쓰러져가는 사람을 보고도 도와주려는 최소한의 노력이나 마음조차 없었음을 뜻합니다.

 

그들은 율법의 정신인 '사랑'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타인을 정죄하고 통제하는 '권력'으로만 율법을 사용했습니다.  백성들이 때문에 영적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방관한 것입니다.

 

3.       '' 있고 '' 없는 종교 지도자의 표본입니다.

 

그들은 강단 위에서 "하라, 하지 마라" 외치는 입술은 살아있었지만,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수고'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러 오셔서 인류의 짐을 직접 대신 지셨지만( 11:28), 율법교사들은 거꾸로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타인에게 짐을 떠넘기기만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은 ‘너희는 가르치기만 , 가르침대로 살려는 고통은 조금도 분담하지 않는구나’라는 무서운 책망입니다.  이는 오늘날 '가르치는 위치' 있는 모든 이들에게 언행일치와 형제에 대한 사랑이 결여된 지식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고합니다”(인터넷).

 

·            “누가복음 11 45-46절의 맥락에서 보면, 말만 번지르르하고 행함이 없는 교인은 '지식의 저주' 빠진 현대판 율법교사와 같습니다.  이들의 특징과 이면에 숨겨진 영적 상태를 가지로 정리해 있습니다.

 

1.       '' '행함'으로 착각하는 착각 (영적 나르시시즘)

 

이들은 성경 지식이 많거나 신앙적인 언어(기독교 술어) 유창하게 사용하는 것을 자신의 신앙 수준이라고 믿습니다.

 

심리: "나는 진리를 알고 있고, 남에게 가르칠 있으니 나는 이미 이대로 살고 있다" 착각에 빠집니다.

 

결과: 입으로는 '사랑' '헌신' 유창하게 말하지만, 실제 삶에서 손해를 보거나 몸을 쓰는 수고는 철저히 피합니다.

 

2.       남에게는 '철퇴', 나에게는 '솜방망이' (이중잣대)

 

율법교사들이 백성들에게는 613개의 조항을 들이대며 정죄했듯이, 말만 앞서는 교인들은 타인의 부족함을 기가 막히게 찾아냅니다.

 

특징: ‘집사님이 기도가 부족해서 그래요’, ‘교회가 사랑이 없네요’라며 남의 어깨에 '지기 어려운 ' 얹어 놓습니다.

위선: 정작 본인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비판하는 행위 자체를 '공의로운 조언'으로 포장합니다.

 

3.       '회개' 대신 '모욕감' 선택하는 완악함

 

이런 유형의 가장 무서운 점은 누군가 그들의 실상을 지적했을 때의 반응입니다.  11:45 율법교사처럼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해서 모욕감을 주느냐’며 화를 냅니다.

 

원인: 자아(Self) 너무 강해서, 말씀의 거울 앞에 자신을 비추기보다 자신의 '체면' '자존심' 지키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Woe to you)’라고 무섭게 경고하셨습니다.  말만 번지르르한 신앙은 공동체를 전염시키고, 정작 본인은 구원의 앞에서 서성이며 남들도 들어가게 막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인터넷).

 

-            “말만 번지르르한 신앙'에서 벗어나 '손가락을 대는 수고(행함)' 옮겨가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 3가지를 제안해 드립니다.

1.       '비판'하고 싶을 , '도움' 가지를 먼저 찾기

 

누군가의 부족함이나 교회의 문제가 눈에 들어올 , 입을 열기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훈련입니다.

 

실천: ‘저 집사는 저러지?’라는 비판이 올라올 , ‘내가 분을 위해 오늘 있는 작은 도움(격려의 문자, 대신 들어주기 ) 가지는 무엇인가?’를 찾고 실행한 뒤에 말을 꺼내는 것입니다.  손가락을 먼저 움직이면 말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2.       '영적 용어' 사용 줄이고 '구체적 동사' 사용하기

 

추상적이고 거룩해 보이는 (: ‘기도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뒤로 숨지 않는 연습입니다.

 

실천: ‘기도할게요’라고 말만 하고 잊어버리는 대신, ‘지금 여기서 같이 짧게 기도할까요?’라고 제안하거나, ‘사랑합니다’라는 대신 ‘이번 주에 식사 같이 대접하고 싶습니다’처럼 구체적인 시간과 몸을 쓰는 약속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3.       '나의 약함' 먼저 고백하기

 

율법교사들처럼 완벽한 , 가르치는 자의 위치에 서지 않는 것입니다.

 

실천: 남의 허물을 지적하기보다 ‘사실 저도 부분이 됩니다.  우리 같이 노력해 볼까요?’라고 자신의 연약함을 먼저 오픈하는 것입니다.  내가 낮아질 '모욕감' 사라지고, 함께 짐을 지는 '동역' 시작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율법교사들처럼 높은 의자에 앉아 지시하지 않으셨고, 가장 낮은 곳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직접 손을 대셨습니다.  우리도 '말의 권위' 아닌 '섬김의 흔적'으로 증명하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인터넷).

 

 

 

 

 

 

 

 

 

“겉모양을 꾸미는 '코스메틱(Cosmetic)' 신앙에서 벗어나, 내면의 동기를 살피고 소외된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는 '오이코스(가족 공동체)' 정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누가복음 11:47-48).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1 47-48 말씀을 묵상할 먼저 헬라어로 구절 말씀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리하였을 저는 개의 헬라어 단어에 관심을 갖게 되어 단어들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a)    번째 단어는, “οκοδομετε”(오이코도메이테)입니다.

 

(i)                      헬라어 단어를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만드는도다”(47) “만드니”(48) 번역을 했는데 단어는 “세우다”, “건축하다”, “쌓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인터넷).

 

·       헬라어 단어의 어원은 “집”을 뜻하는 oikos(오이코스) “세우다”를 뜻하는 domos(도모스) 합성어에서 유래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건물을 짓는 것을 의미하지만,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신앙의 덕을 세우거나 공동체를 세우는 영적인 의미로 자주 쓰입니다”(인터넷).

 

-            여기서 oikos(오이코스) 신약성경에서 120 정도 사용되며, 단순히 물리적인 “집(건물)”뿐만 아니라 “가족”, “권속”, “가문” 공동체적 의미로 폭넓게 쓰입니다.  단어가 사용된 주요 사례는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1.       “가족/권속” (Household) 의미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형태로, 사람의 회심이 집안의 구원으로 이어지는 맥락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삭개오의 : "오늘 구원이 (oikos) 이르렀으니"( 19:9).

 

빌립보 간수의 : "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oikos) 구원을 받으리라"( 16:31).

 

고넬료의 : 베드로를 청해 집안이 세례를 받은 사건( 10:2, 11:14).

 

회당장 그리스보의 : " 집안(oikos) 더불어 주를 믿으며"( 18:8).

 

2.       “하나님의 /교회” (House of God) 의미

 

건물이 아닌 믿는 자들의 공동체나 영적인 거처를 상징할 사용됩니다.

 

교회의 질서: " (oikos)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 3:15).

 

영적인 : "너희도 같이 신령한 (oikos)으로 세워지고"(벧전 2:5).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oikos)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벧전 4:17).

 

3.       “이스라엘 족속” (House of Israel) 의미

 

특정 가문이나 민족 전체를 가리킬 사용됩니다.

 

"내가 이스라엘 (oikos) 잃어버린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15:24).

 

"다윗의 동네(oikos, 집안) 족속이므로"( 2:4).

 

4.       물리적인 “집/거처” (Physical House) 의미

 

치유 사건: 중풍병자에게 " (oikos)으로 가라" 하신 경우( 9:6).

 

성전: " (oikos) 기도하는 집이라"( 21:13).

 

“오이코스”는 현대 선교학에서 개인을 둘러싼 “관계의 그물망(가족, 친구, 동료)”을 의미하는 용어로도 중요하게 사용됩니다(인터넷).

n   “오이코스(oikos)”가 현대 교회와 선교 현장에서 어떻게 실제적인 전략으로 쓰이는지 핵심적인 내용입니다(인터넷):

 

1.       관계 중심 전도 (Oikos Evangelism)

 

현대 선교학에서 “오이코스”는 단순히 건물이 아니라 “한 개인이 관계를 맺고 있는 8~15명의 영향력 안에 있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전략: 모르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노방 전도”보다, 이미 형성된 관계(가족, 친구, 직장 동료) 속에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는 방식입니다.

 

성경적 근거: 앞서 말씀드린 빌립보 간수나 고넬료가 자신의 집안(오이코스) 주님께 인도한 모델을 따릅니다.

 

2.       소그룹/가정 교회 (House Church)

 

신약 성경의 교회들은 대부분 '(oikos)'에서 모였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 "그의 (oikos)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16:5).

 

빌레몬의 : " (oikos)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1:2).

 

현대적 적용: 오늘날의 “구역”, “셀(Cell), “목장” 모임이 바로 오이코스 모델을 계승한 것입니다.  대형 집회보다는 소그룹 안에서의 친밀한 교제와 양육을 강조합니다.

 

3.       영적 가족 공동체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를 “하나님의 (oikos)”이라고 불렀습니다(딤전 3:15).

 

이는 교회가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가족 공동체”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도 간의 관계를 단순한 교우가 아닌 “형제와 자매”라는 가족적 유대감으로 바라보게 합니다(인터넷).

 

(ii)                    예수님께서 “οκοδομετε”(오이코도메이테) 단어를 사용하신 이유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의겉치레와 위선”을 책망하시기 위해서입니다(참고: 인터넷).

 

·       여기서 바리새인들의 겉치레와 위선이란 그들은 선지자들이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죽임을 당하여 묻힌 무덤을 다시 쌓고 비석을 세워 선지자들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처럼 선전하지만[( 23:29,30)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것은 자신들의 악함을 은폐하기 위한 위선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은 선지자를 기념하면서 살아있는 선지자를 죽이는 모순된 자들이었습니다(9:9; 14:3-12)(호크마).

 

-            여기 마태복음 23 29-30절에서 주목할 점은 바리새인들이 사용하는 가지 행동입니다: (1) 무덤을 만들고 (oikodomeite): 누가복음과 같은 단어로, 선지자의 죽음을 화려한 건축물로 박제하는 행위입니다.  (2) 비석을 꾸미며 (kosmeite): “장식하다”, “단장하다”라는 뜻의코스메오(kosmeō)” 쓰였습니다.  속은 썩어가는 무덤인데 겉모양만 번지르르하게(그럴듯하게) 치장(장식)하여 자신들의 경건함을 과시하는 것입니다(인터넷)[여기서코스메오(kosmeō)” 단어는 본래무질서한 것을 질서 있게 정돈하다”는 뜻이었으나, 점차아름답게 꾸미다”, “단장하다”, “장식하다”라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화장품을 뜻하는 “Cosmetic(코스메틱)” 어원이 바로 단어입니다(인터넷)].

 

n  그들은 "우리는 조상들과 다르다"라고 말하며 선지자의 피를 흘리지 않았을 것이라 장담하지만, 예수님은 바로 이어지는 마태복음 23 31절에서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하는도다"라고 정곡을 찌르십니다.  결국 입으로는 존경을 말하지만, 손으로는 선지자를 죽인 조상의 업적(?) 관리하고 보수하는 모순을 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쌓아 올리는 화려한 비석들이 선지자에 대한 사랑의 증거가 아니라, 그들을 죽인 조상들의 악행에 동참하고 있다는 유죄의 증거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인터넷).

 

(b)    번째 단어는, “συνευδοκετε”(쉬뉴도케이테)입니다.

 

(i)                      헬라어 단어를 개역개정 성경에서는옳게 여기는도다”(11:48)라고 번역을 했는데 단어는마음을 같이하여 기꺼이 찬성하다”, “전적으로 동의하며 기뻐하다”라는 강력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헬라어쉬뉴도케이테(συνευδοκετε)”함께”를 뜻하는(syn)”기뻐하다, 동의하다”를 뜻하는유도케오(eudokeō)” 합쳐진 단어임](인터넷).

 

·        오늘 본문 누가복음 11 48절에서 예수님이 단어를 사용하신 맥락적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1.       "조상의 범죄에 도장을 찍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선지자의 무덤을 꾸미는 것이 조상들과 다르다는 증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행위가 조상들이 저지른 살인이라는 범죄에 '찬성표' 던지는 행위라고 지적하십니다.

 

조상들은 선지자를 죽였고, 후손들은 무덤을 만듦(장식함)으로써 범죄를 최종적으로 확정 짓고 마무리했다는 것입니다.

 

2.       위선적인 '마음의 일치'

 

“쉬뉴도케이테”(συνευδοκετε) 겉으로는 경건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조상들의 악한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그들의 내면적 상태를 폭로합니다.  입으로는 "우리는 조상처럼 하지 않았을 "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조상들의 행위를 옳게 여기고 기뻐하고 있다는 책망입니다.

 

요약하자면, 누가복음 11 48절에서의쉬뉴도케이테”(συνευδοκετε) 바리새인들이 선지자를 죽인 조상들의 죄에 대해 방관자가 아니라, 악행을 기꺼이 찬성하고 계승하는 공범자임을 드러내는 단어입니다(인터넷).

 

-            흥미로운 점은, 헬라어 단어가 사도행전 8 1절에서도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스데반) 죽임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συνευδοκν).”

 

n  “여기서 사울(바울)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다' 것은 단순히 ‘그럴 수도 있지’라는 방관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1.       전폭적인 지지와 승인

 

'쉬뉴도콘(συνευδοκν)' 현재 분사형으로, 사울이 현장에서 스데반의 죽음을 지켜보며그래, 자는 죽어 마땅해!’라고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동조하고 기뻐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는 유대교의 열심으로 살인이 하나님을 위한 '정의로운 '이라고 확신하며 범죄에 심리적으로 완전히 합류한 상태였습니다.

 

2.       누가복음 11:48과의 연결성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비판하신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바로 사울의 모습에서 구체적으로 재현된 것입니다.

 

바리새인: 조상들의 선지자 살해를 무덤 장식으로 찬성(쉬뉴도케이테).

 

사울: 동시대의 의인(스데반) 죽이는 현장에서 죽음을 찬성(쉬뉴도콘).

 

결국 모습 모두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에 대한 동조'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합니다”(인터넷).

 

(ii)                    저는 부분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인공지능(AI)에게 이렇게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바리새인과 같은 목사나 장로가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에 대한 동조가 있나요?  그랬더니 이러한 답변을 받았습니다(인터넷):

·       오늘날 교회 안에서 '바리새인적 위선' '종교적 폭력에 대한 동조(συνευδοκέω, 쉬뉴도케오)' 매우 아프고 민감하지만, 반드시 직면해야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성경 바리새인들이 선지자의 무덤을 꾸미며 자신들의 의로움을 과시했던 것처럼, 현대의 교회 지도자들(목사, 장로 ) 사이에서도 유사한 형태의 '구조적·영적 폭력' 나타날 있습니다.

 

1.       교리나 법을 앞세운 '정죄의 폭력'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세부 조항으로 사람들을 정죄했듯, 오늘날에도 특정 교리나 교회 내부의 규칙을 절대화하여 약자나 소수자의 목소리를 억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의 잘못을 지적하는 성도에게 '영적 권위에 도전한다'거나 '사탄의 도구'라는 프레임을 씌워 공동체에서 고립시키는 행위가 대표적입니다.

 

2.       가해자에 대한 '침묵과 방조' (쉬뉴도케오)

 

성범죄나 재정 비리 교회 중대한 범죄가 발생했을 , 많은 지도자가 '교회의 덕을 세운다' 명분(oikodomeō 오용)으로 사건을 은폐하거나 가해자를 두둔합니다.

 

이때 사건을 덮으려는 침묵의 카르텔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악행에 동조하는 행위(쉬뉴도케오)'입니다.

 

피해자의 고통보다 조직의 안위를 우선시하는 것은, 선지자를 죽인 조상들의 무덤을 화려하게 꾸미는 바리새인의 모습과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3.       '성공주의'라는 우상 숭배

 

외적으로 교회를 세우고(oikodomeō) 화려하게 장식하는(kosmeō) 것에만 몰두하며, 과정에서 일어나는 노동 착취나 인격 모독을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경우입니다.

 

성도 개개인의 삶과 영혼(oikos) 돌보기보다, 숫자로 증명되는 성과에 집착하는 모습은 예수님이 책망하신 '회칠한 무덤' 다를 없습니다.

 

4.       비판적 사고의 차단 (지식의 열쇠를 감춤)

누가복음 11:52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셨습니다.

 

성도들이 성경을 스스로 깊이 연구하고 질문하는 것을 막고, 오직 지도자의 해석에만 맹종하게 만드는 것은 영적인 눈을 가리는 폭력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경계해야 것은 '전통과 권위'라는 이름 뒤에 숨은 잔인함입니다.  예수님은 건물을 얼마나 크고 화려하게 지었느냐가 아니라, 안에 생명과 사랑, 그리고 공의(justice) 살아있는지를 물으십니다”(인터넷).

 

(c)    마지막 번째 단어는, “μάρτυρές”(마르튀레스)입니다.

 

(i)                      헬라어 단어를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증인이 되어”(11:48)라고 번역을 했는데, 예수님께서 단어를 사용하심에는 매우 역설적이고 날카로운 비판이 담겨있습니다(인터넷):

 

1.           단어의 이중적 의미

 

법정적 의미: 어떤 사건을 눈으로 보고 증언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성경적 확장: 복음을 전하다가 목숨을 바치는 '순교자'라는 의미로 발전했습니다.

 

2.           누가복음 11 48절에서의 독특한 쓰임

 

보통 “증인”은 좋은 일이나 진리를 증언할 쓰이지만, 여기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너희는 너희 조상들이 저지른 살인죄의 증인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범죄의 공범 증명: 조상들은 선지자를 죽였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건축하니), 건축 행위 자체가 조상들의 악행을 확인해주고 전적으로 찬성한다는 “살아있는 증거”가 된다는 뜻입니다.

 

자백하는 증인: 그들은 자신들이 조상과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무덤을 화려하게 꾸미는 행위가 오히려 "우리 조상이 선지자를 죽인 맞습니다"라고 공증을 서주는 꼴이라고 꼬집으신 것입니다.

 

3.           역설적인 결과

결국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진리의 증인”이 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인 역사의 “범죄 증인”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요약하자면: 여기서의 '마르튀레스' 바리새인들이 입으로는 조상의 죄를 부정하지만, 실제 행위로는 죄를 확증하고 계승하고 있음을 폭로하는 “유죄의 증인”이라는 의미입니다(인터넷).

 

(ii)                    저는 인공지능(AI)에게 이렇게 질문해보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입으로는 신앙의 조상의 죄를 부정하지만 실제 행위로는 죄를 확증하고 계승하고 있는 면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지 않나요?  그랬더니 이러한 답변을 받았습니다(인터넷):

 

·       “정확하고 아픈 통찰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던지신 '마르튀레스(증인)'라는 비판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거울처럼 비춰지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입으로는 신앙의 전통을 자랑하지만, 실제 행위로는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며 '죄의 계승자' 되는 모습들을 가지 측면에서 돌아볼 있습니다.

 

1.       선지자를 죽이고 무덤을 꾸미는 '박제된 신앙'

우리도 과거에 고난받고 희생했던 신앙의 선배들을 존경한다고 말하며 화려한 기념관을 짓거나 기념 예배를 드립니다.  하지만 정작 그분들이 목숨 걸고 지켰던 '공의와 낮은 자를 향한 사랑' 정신은 외면한 , 형식적인 의례에만 집착한다면 그것이 바로 현대판 '무덤을 꾸미는 행위(kosmeō)'입니다.

 

죽은 성인은 칭송하지만, 지금 우리 곁에서 소리를 하는 살아있는 양심은 '교회를 흔든다' 배척하는 모순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2.       '말의 신앙' '삶의 부정' (위선적 찬성)

 

‘우리는 과거의 부패한 종교 지도자들과 다르다’라고 말하지만, 실제 삶의 현장에서 돈과 권력, 명예를 쫓는다면 우리는 입술로는 부정해도 삶으로는 그들의 죄에 '전적으로 찬성(συνευδοκέω, 쉬뉴도케오)'하고 있는 셈입니다.

 

과거의 잘못을 비판하면서도 똑같은 구조적 모순(세습, 재정 불투명성 ) 답습한다면, 우리는 죄가 정당하다는 '살아있는 증인(마르튀레스)'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지식의 열쇠' 독점하는 교만

성경 지식은 해박하여 남을 판단하는 데는 빠르지만, 말씀이 삶을 변화시키도록 허용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남도 들어가게 막고 자신도 들어가지 않는 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신앙의 본질보다 '교리적 정답'만을 강요하며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가로막았던 바리새인의 죄를 그대로 계승하는 일입니다.

 

4.       고난 없는 영광만을 추구함

 

신앙의 조상들은 좁은 길을 걸었으나, 우리는 그들이 닦아놓은 위에서 넓은 길과 안락함만을 누리려 합니다.

 

조상들의 고난을 '자산'으로 삼아 기득권을 유지하려 한다면, 그것은 신앙의 계승이 아니라 신앙의 착취입니다.

 

                                             결론: ‘회칠한 무덤’에서 ‘살아있는 성전’으로

 

결국 우리 안에 있는 '바리새인적 본성' 인정하는 것이 회복의 시작입니다.  겉모양을 꾸미는 '코스메틱(Cosmetic)' 신앙에서 벗어나, 내면의 동기를 살피고 소외된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는 '오이코스(가족 공동체)' 정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조상의 죄에 대한 유죄 증인"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증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오늘 우리가 당장 회복해야 우선순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인터넷).

 

-            제가 “뭐지요?”라고 물었더니 이렇게 답변을 했습니다(인터넷):

 

“우리가 '바리새인적 위선'에서 벗어나 가장 먼저 회복해야 우선순위는 ‘겉치레(Cosmetic) 멈추고 정직한 내면(Oikos) 마주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맥락에서 구체적인 가지 실천 방향을 제안해 드립니다.

 

1.       '비석 닦기'보다 '사람 살리기': 화려한 건물이나 전통, 종교적 형식을 유지하는 쓰는 에너지보다, 지금 곁에서 신음하는 '살아있는 이웃(오이코스)' 고통에 응답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2.       '지식의 열쇠' 소유가 아닌 통로로: 성경 지식을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쓰지 않고, 자신이 먼저 말씀 앞에 발가벗겨지는 '회개의 도구' 삼아야 합니다.

 

3.       '조상의 이름' 뒤에 숨지 않기: "우리 교단은, 우리 선조는 이랬다" 과거의 영광을 의로움으로 착각하지 말고, 오늘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증명하고 있는지 정직하게 자문해야 합니다.

 

결국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화려하게 단장된 '죽은 무덤' 아니라, 비록 투박하더라도 생명이 고동치는 '살아있는 성전'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오늘날 우리 교회 공동체가 가장 먼저 '청소하고 비워내야 겉치레' 무엇이라고 느끼시나요?  구체적인 사례나 개인적인 생각을 나누어 주시면 대화를 이어가기에 도움이 같습니다”(인터넷).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신앙적인 가면을 벗어버리는 투명성이 있는 정직한 신앙입니다!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외식을 주의하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누가복음 12:1-3).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 1-3 말씀을 묵상할 헬라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주의하라 단어 “Προσέχετε”(프로세케테) 먼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예수님께서 무리 수만 명이 상황에서 먼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 외식을 주의하라”(1)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a)    헬라어 단어는 의도적이고 지속적인 주의를 기울이는 초점을 둡니다.  “주의를 기울이다, “경계하다, “헌신하다, 또는 “유의하다”로 번역될 있지만, 언제나 단순한 인지가 아니라 능동적이고 집중된 반응을 요구합니다.   동사는 마음(진리를 이해함), 가슴(진리를 소중히 여김), 그리고 의지(진리에 따라 행동함) 모두 호소합니다(인터넷).

 

(i)                      예수님께서는 누룩—부패한 가르침을 상징하는 것—에 대한 경고에서 헬라어 단어 “προσέχω”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 1절외에도 반복적으로 사용하셨습다(인터넷):

 

·       ( 16:6) “삼가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       ( 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       (16:11-12) “어찌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을 삼가라 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            말씀들을 종합해서 묵상할 건전한 교리는 단지 진리를 소유하는 것만으로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거짓이 스며들지 않도록 끊임없이 깨어 있음으로 유지되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인터넷).

 

n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주의하라”(딤전 1:4) 권면하고, 디도에게는 “유대인의 신화와 진리를 배척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피하라”( 1:14) 말씀하했습니다.  명령은 선제적입니다”: 오류는 뿌리내리기 전에 식별되고 저항되어야 합니다(인터넷).

 

(b)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 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 외식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주의하라 헬라어 단어 “Προσέχετε”(프로세케테) 마음을 쏟아 경계하다”, 내면으로 스며드는 위선의 전염성을 파수꾼처럼 감시하라는 뜻입니다(인터넷).

 

(i)                      어떻게 우리는 내면으로 스며드는 위선의 전염성을 파수꾼처럼 감시할 있을까요?  , 어떻게 우리는 영적 파수꾼이 있을까요>

 

1.       '하나님의 시선' 앞에 머물기 (Coram Deo)

 

누가복음 12:1 바로 뒤인 2절에서 예수님은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위선은 '사람' 의식할 생깁니다.

 

실천: 어떤 선행이나 사역을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라는 생각이 들면, 즉시 "하나님은 지금 마음의 중심을 보고 계신다" 사실을 상기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2.       '동기' 수시로 질문하기

 

바리새인의 누룩은 '행위' 자체가 아니라 '동기'에서 시작됩니다.  파수꾼은 성문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을 검문하듯, 마음의 동기를 검문해야 합니다.

 

자가 진단: "내가 지금 말을 하는 이유가 나를 높이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진심으로 상대와 공동체를 위한 것인가?" 스스로에게 정직하게 물어보세요.

 

3.       '' '' 간격을 인정하기

 

위선은 내가 도달하지 못한 영적 수준을 마치 도달한 것처럼 포장할 발생합니다.

 

실천: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하나님과 신뢰할 만한 공동체 앞에서 정직하게 고백하는 '영적 정직성' 유지하세요.  "나는 아직 부족한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고백이 위선의 누룩을 막는 가장 강력한 방부제입니다.

 

4.       '은밀한 시간' 소중히 여기기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의 모습이 진짜 나의 영성입니다.

 

방법: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도나 성경 읽기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 나만 아는 '골방의 시간' 늘려가세요.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와의 교제가 깊어질수록 겉치레에 대한 욕구는 줄어듭니다.

 

5.       공동체의 '거울' 활용하기

 

파수꾼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를 깨워줄 동료가 필요합니다.

 

적용: 나의 위선적인 태도나 교만함을 가감 없이 지적해 있는 영적 멘토나 공동체 형제들과 소통하세요.  타인의 권고를 겸손하게 듣는 태도가 위선의 전염을 막아줍니다.

 

결국 위선을 이기는 힘은 "하나님 앞에서 나의 실상을 그대로 대면하는 용기"에서 나옵니다 (인터넷).

 

·       저는 예수님의 주의하라”(12:1) 말씀을 묵상할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개들을 주의하라”(3:2) 말씀을 생각났습니다.  여기서 개들 유대인들, 특히 유대주의자들(Judaizers) 말합니다.

 

-            여기서 ‘유대주의자들’이란 누구입니까?  유대주의자들은 초기에 복음을 맹공격을 퍼부은 단체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들은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이방인들이 구약의 어떤 의식(특히 할례의식)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주의자들과 그들의 거짓된 복음을 이단으로 말하고있으며 심지어 저주까지 했습니다(갈라디아서).  그런데 문제는 유대주의자들은 교회 안에 있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진짜 신자로 인정받았다는 것입니다. 

 

n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 교회에서 그랬습니다(2:12).  그러나 정작 그들은 교회에서 복음의 명료성을 훼손하고, 복음을 심각하게 더럽혔으며 또한 이방 신자들을 혼란에 빠트렸습니다.  혼란에 원인을 간략하게 요약한다면 바울의 논리는 누군가가 (1) 먼저 그리스도를 믿고, (2) 그런 다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고, (3) 다음에 즉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준비를 한다고 말한 반면에 유대주의자들은 누군가가 (1) 그리스도를 믿고, (2) 최선을 다해 율법을 지키고, (3) 그리고는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말한 것입니다(그래샴 메이첸).  

 

#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반면에 유대주의 자들은 인간이 노력하여 율법을지켜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전파하였던 참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에 초점을 맞추지만(은혜), 유대주의자들이 주장한 거짓된 복음은 죄인인 사람들이 행하는 일에 초점을 맞춥니다(공로).  마디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유대주의자들은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거짓가르치는 유대주의자들을 가리켜 “개들”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들이 물질을 탐하여 스승으로 자처하고 돌아 다니는 까닭이었습니다(3:19).  그러므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거짓된 복음(가르침) 전하는 거짓 스승들인 유대주의자들이 위험하기에 그들을 주의(조심)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            예수님이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 1절에서 경계하신 바리새인의 누룩(외식)’ 사도 바울의 시대에는 '할례와 율법 준수를 강요하는 유대주의'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인터넷):

 

n  본질적 공통점: 부류 모두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중심"보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종교적 행위" 앞세웠습니다.

 

n  바울의 결론 ( 3:3): 진정한 할례는 몸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성도) 진짜 할례파라고 선언합니다.

 

-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3:2) 강하게 경고했을까요?

 

n  이유는 유대주의자들의 외식은 단순히 개인의 도덕적 결함에 그치지 않고, '오직 은혜로 얻는 구원'이라는 복음의 기초를 흔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누가복음 12 1절의 예수님처럼 "조심하라(삼가라)" 말을 번이나 반복하여 강력하게 권면한 것입니다(인터넷).

 

(2)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 1-3 말씀을 묵상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 외식을 주의하라”(1) 하신 말씀에서 누룩 외식이란 단어의 연관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a)    먼저 누룩이란 헬라어 단어 “ζύμης”(쥐메) 성경에서 주로 '보이지 않게 퍼져서 전체를 변화시키는 강력한 영향력' 상징합니다(인터넷):

 

1.       사전적 의미

 

원뜻: 발효제, 이스트(yeast). 반죽을 부풀게 하는 물질입니다.

 

특징: 아주 적은 양으로도 반죽 전체의 성질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침투력' '확산성' 특징입니다.

 

2.       부정적 의미: "부패와 위선" ( 12:1)

 

성경에서 누룩은 대부분 죄나 부패, 잘못된 교훈을 상징할 쓰입니다.

 

외식(위선):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위선을 누룩에 비유하셨습니다(12:1).  겉은 경건해 보이나 속은 부패하여 남들까지 전염시키는 종교적 허위를 경계하신 것입니다.

 

거짓 교리: 사천 명을 먹이신 , 예수께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16:6, 1112),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8:15) 경고하셨습니다.  분별력 없는 마음이 이를 받아들일 , 종교적 율법주의와 정치적 기회주의는 모두 빠르게 퍼질 있습니다.

 

도덕적 관용: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음행을 용인한 것을 책망하며 “적은 누룩이 덩어리를 부풀게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5:6)라고 말했습니다.

 

의식적 자기 의존: “적은 누룩이 덩어리를 부풀게 한다”( 5:9) 바울은 율법주의적인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경고하며, 행위에 근거한 메시지가 어떻게 은혜를 무너뜨리는지를 드러냅니다.

 

침투성: 죄는 처음에는 작아 보이지만, 방치하면 순식간에 영혼 전체와 공동체를 오염시킵니다.

 

3.       긍정적 의미: "천국 복음의 확장"

 

드물게 긍정적인 의미로도 쓰입니다.

 

마태복음 13 33: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누룩과 같으니라."

 

의미: 복음이 개인과 세상에 들어갔을 , 보이지 않게 세상을 변화시키고 확장시키는 생명력 있는 영향력을 뜻합니다(인터넷).

 

(b)    그러면 외식이란 헬라어 단어 πόκρισις”(휘포크리시스) 의미는 무엇일까요?

 

(i)                      헬라어 단어는 본래 성경 용어가 아니라 고대 그리스 연극 무대에서 사용되던 단어입니다.  단어의 유래와 의미를 알면 예수님이 그토록 죄를 경계하셨는지 명확해집니다(인터넷):

 

1.       단어의 유래: "가면을 배우"

 

어원: '아래에서' 뜻하는 '휘포(πό)' '대답하다/판단하다' 뜻하는 '크리노(κρίνω)' 합성어입니다.

 

배경: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배우가 커다란 가면을 쓰고 '가면 아래에서' 대사를 읊는 행위를 뜻했습니다.  , 실제의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인물인 연기하는 것이 단어의 본뜻입니다.

 

2.       성경적 의미: "신앙의 연기"

 

예수님은 단어를 종교적 맥락으로 가져오셔서,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함이 아닌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종교적 퍼포먼스를 비판하셨습니다.

 

이중성: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지만 속은 부패한 상태, '가면' '실제 얼굴' 다른 상태를 말합니다.

 

관객 중심의 신앙: 하나님이 관객이 아니라 '사람들' 관객으로 삼아 칭찬과 인정을 받으려는 태도입니다.

 

3.       누룩”(ζύμη)과의 상관관계

 

예수님이 위선을 누룩 비유하신 이유는 전염성 때문입니다.

누룩이 반죽 속에 숨어서 보이지 않게 퍼지듯, “휘포크리시스”(위선) 처음에는 아주 작은 '체면'이나 '자랑'에서 시작되지만, 결국은 영혼 전체를 좀먹고 공동체 전체를 가식적인 분위기로 몰아넣습니다.

 

4.       사도 바울의 서신과의 연결 ( 2:13)

 

사도 바울도 단어를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안디옥에서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하다가 유대주의자들을 두려워하여 피했을 , 바울은 이를 '외식(휘포크리시스)'이라고 강하게 질책했습니다.

 

의미: 복음의 진리(은혜)보다 사람의 눈치(율법적 체면) 살피는 행위가 바로 '가면을 쓰는 행위'임을 지적한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휘포크리시스'(외식) 단순히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해 '종교적인 가면' 쓰고 사는 모든 삶의 태도를 의미합니다(인터넷).

 

·       우리가 쓰고 있는 가면 가장 내려놓기 힘든 '신앙적인 가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인공지능은 가지로 요약을 하였습니다(인터넷):

 

1.       "괜찮은 " 하는 가면 (영적 허세)

 

내면은 메말라 있고 죄와 싸우느라 처절한데, 교회나 공동체 안에서는 마치 아무 문제 없는 신실한 신앙인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실체: 슬픔이나 의심, 연약함을 드러내면 믿음이 없다고 평가받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2.       " 많이 아는 " 하는 가면 (지적 교만)

 

성경 지식이나 신학적 용어는 유창하게 사용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고민이나 실천이 없는 상태입니다.

 

실체: 머리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나, 가슴과 손발은 자기 유익을 따르는 이중성입니다.

3.       "하나님을 위하는 " 하는 가면 (공로주의)

 

겉으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자신의 수고와 헌신을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고 인정받지 못하면 서운해하는 마음입니다.

 

실체: 영광은 하나님께 돌린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영광의 일부를 내가 취하려는 욕심입니다.

 

예수님이 '휘포크리시스(외식)' 누룩처럼 무섭다고 하신 이유는, 이것이 처음에는 '예의' '경건' 모양으로 시작되어 결국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완전히 끊어놓기 때문입니다.

 

혹시 지금 마음 한구석에 "사람들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이미 드러나 있는" 모습이 있으신가요?  그것을 정직하게 대면하는 것이 가면을 벗는 시작입니다(인터넷).

 

-            어쩌면 가정 벗기 힘들게 느껴지는 가면은 가식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식(假飾)'이라는 한자어가 헬라어 '휘포크리시스(πό크리시스)' 의미를 가장 정확하고 날카롭게 꿰뚫는 단어입니다.

 

(): 거짓 / 빌릴

(): 꾸밀

 

, '진짜 자기 모습이 아닌 거짓된 것을 빌려와서 겉을 예쁘게 꾸미는 ' 가식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식' 위험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누룩같은 가식 ( 12:1)

 

가식은 처음에는 아주 작게 시작됩니다.  조금 경건해 보이고 싶어서’, ‘남들에게 실망을 주기 싫어서살짝 꾸미는 정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것을 누룩이라 부르셨습니다.  허용하면 영혼 전체를 '연기하는 연기자'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2.       개들같은 가식 ( 3:2)

 

사도 바울이 경계한 유대주의자들의 가식은 '형식' 있었습니다.  마음은 하나님과 먼데, 몸에 할례를 행하고 율법의 조항들을 지키는 '모양' 갖춘 것입니다.  바울은 알맹이 없는 그들의 종교적 가식을 향해 개들을 삼가라 아주 거친 표현을 썼습니다.

 

3.       가식의 결말: 소외와 고립

 

가식을 떨면 사람들에게는 인정받을지 모르지만, 가지 치명적인 결말을 맞이합니다.

 

하나님과의 단절: 하나님은 외모가 아닌 '중심' 보시기에, 가식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자기 소외: 진짜 모습과 꾸며진 모습 사이의 간격이 커질수록, 영혼은 공허해지고 지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가식을 벗는 유일한 방법은 '정직한 노출'입니다.  바울처럼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라고 고백하거나, 시편 기자들처럼 자신의 분노와 슬픔을 하나님 앞에 가감 없이 쏟아내는 것이 가식이라는 누룩을 제거하는 길입니다”(인터넷).

 

(3)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 1-3 말씀을 묵상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2)라고 말씀하신 내용의 의미가 무엇인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a)    저는 2 말씀을 헬라어 성경으로 때에 먼저 감추인 이란 헬라어 단어 “συγκεκαλυμμένον”(슁게칼뤼메논) 숨긴 이란 헬라어 단어 “κρυπτν”(크뤼프톤)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i)                      감추인 ”[“συγκεκαλυμμένον”(슁게칼뤼메논)]:

 

단어는 예수님께서 앞절(1)에서 경고하신 '외식(가식)' 실체를 폭로하는 핵심 단어입니다(인터넷):

 

1.       단어의 어원과 의미

 

어원: '~ 함께' 뜻하는 '(σύν)' '덮다, 감추다' 뜻하는 '칼뤼프토(καλύπτω)' 합성어입니다.

 

: '완전히 덮어씌워진', '철저히 은폐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뉘앙스: 단순히 살짝 가린 것이 아니라, 겹겹이 포장하거나 베일로 씌워 안의 실체를 전혀 없게 만든 상태를 말합니다.

 

2.       누가복음 12 2절에서의 맥락: "가면의 한계"

 

예수님은 1절에서 외식(가면 쓰기) 주의하라고 하신 , 바로 단어를 사용해 결말을 선언하셨습니다: "감추인 (συγκεκαλυμμένον)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저치 않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폭로의 필연성: 아무리 겹겹이 덮어씌워(슁게칼뤼메논) 완벽하게 감춘 가식이라 할지라도, 결국 하나님의 아래에서는 '완전한 노출' 피할 없다는 뜻입니다.

 

위선의 허망함: 사람의 눈은 속일 있을 만큼 철저히 덮을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덮개(가면) 자체가 무용지물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3.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의 연관성 (고전 4:5)

 

사도 바울 역시 비슷한 논조로 개념을 설명합니다: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바울은 '감추인 ' 단순히 행위뿐 아니라 '마음의 동기()'까지 포함된다고 보았습니다.  빌립보서 3 2절에서 경계한 유대주의자들의 '외적 행위'라는 덮개 역시 결국 심판 날에 벗겨질 것임을 시사합니다.

요약하자면, “감추인 ”[“συγκεκαλυμμένον”(슁게칼뤼메논)] 우리가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꽁꽁 싸매어 위선의 보따리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어차피 드러날 텐데, 힘들게 덮어쓰고(가식하며) 사느냐?"라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결국 단어는 우리에게 '은밀한 영역에서의 정직함' 요구합니다. 

 

지금 삶에서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아 겹겹이 덮어둔(슁게칼뤼메논)" 마음의 영역은 무엇인가요?  그것을 하나님 앞에 스스로 먼저 여는 것이 위선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인터넷).

 

(ii)                    숨긴 ”[“ κρυπτν”(크뤼프톤)]:

 

단어는 앞서 언급된 감추인 ”[“συγκεκαλυμμένον”(슁게칼뤼메논)] 짝을 이루어, 위선의 '은밀함' '비밀성'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1.       단어의 의미

 

원뜻: '숨겨진', '비밀의', '은밀한' (영단어 Crypt, Encryption 어원).

 

뉘앙스: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어, 밖에서는 없는 내면의 영역을 뜻합니다.

2.       누가복음 12 2절에서의 맥락

 

예수님은 단어를 통해 위선의 속성을 정의하셨습니다: "감추인 (겉으로 덮은 )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크뤼프톤, 내면에 숨긴 비밀)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중적 폭로: 겉으로 포장한 가식(외식)뿐만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둔 은밀한 동기와 생각까지도 하나님 앞에서는 밝혀질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3.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의 사용 (핵심 연결고리)

 

바울은 '크뤼프톤'이라는 단어를 매우 중요하게 사용했습니다.  그는 복음이 결국 인간의 '은밀한 ' 심판한다고 보았습니다.

 

로마서 2 16: "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κρυπ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의미: 겉으로 드러난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아무도 모르는 마음의 '비밀스러운 영역'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4 5: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 κρυπ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의미: 빌립보서 3 2절에서 언급된 유대주의자들처럼 겉모습만 꾸미는 자들에게 보내는 경고입니다.  인간의 눈은 속여도 하나님의 빛은 '숨겨진 '까지 비춘다는 논리입니다.

 

4.       종합적 의미

 

숨긴 ”[“κρυπτν”(크뤼프톤)] 우리가 남몰래 품고 있는 '비밀의 ' 같습니다.

 

예수님과 바울은 공통적으로 "신앙이란 사람 앞에서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숨겨진 (크뤼프톤)' 정직하게 관리하는 "임을 강조했습니다.

 

결국 위선을 이기는 힘은 "하나님은 나의 '크뤼프톤(비밀)' 이미 알고 계신다"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지금 나의 '비밀의 '에는 어떤 생각들이 담겨 있나요?  그것이 세상에 밝히 드러난다고 , 당신의 마음은 평안한가요 아니면 불안한가요?   차이가 바로 우리 영성의 현주소일지 모릅니다(인터넷).

 

(b)    다음에,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 2 말씀을 헬라어 성경으로 때에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말씀에서 드러나다라는 헬라어 단어 ποκαλυφθήσεται”(아포칼뤼프테세타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말씀에서 알려지다라는 헬라어 단어 “γνωσθήσεται”(그노스테세타이)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i)                      드러나다’[“ποκαλυφθήσεται”(아포칼뤼프테세타이)]:

 

단어는 위선의 결말을 단정 짓는 가장 강력한 단어입니다(인터넷):

 

1.       단어의 어원과 의미

 

어원: '~로부터 멀리' 뜻하는 '아포(πό)' '덮개' 뜻하는 '칼뤼마(κάλυμμα)' 합성어입니다.

 

직역: '덮개를 벗겨내다', '베일을 제거하다'라는 뜻입니다.

 

영단어 유래: 여기서 요한계시록의 제목인 '아포칼립스(Apocalypse, 계시)' 나왔습니다.

 

2.       누가복음 12 2절에서의 맥락: "강제적 노출"

 

예수님은 앞서 언급된 '감추인 (슁게칼뤼메논)' 대응하여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덮어 씌워진(슁게칼뤼메논) 것이 베일이 벗겨지지(아포칼뤼프테세타이) 않을 것이 없고..."

 

수동태의 의미: 단어는 헬라어 문법상 '신적 수동태' 이해됩니다.  , 사람이 스스로 벗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강제로 가면을 벗기실 것이라는 엄중한 선언입니다.

 

완전한 반전: 위선(가식) 사람의 눈을 가리는 '덮개' 씌우는 작업이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덮개를 단번에 낚아채어 본래의 추한 실체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작업입니다.

 

3.       사도 바울의 서신과의 연관성

 

바울은 단어를 주로 '하나님의 진리나 심판이 나타남' 설명할 사용했습니다.

 

로마서 1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ποκαλύπτεται)."

 

의미: 빌립보서 32절의 유대주의자들처럼 겉만 꾸미는 자들의 불의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 앞에 숨길 없이 '폭로'된다는 논리입니다.

 

고린도전서 3 13: "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ποκαλύπτεται)..."

 

의미: 마지막 날에 우리가 쌓은 신앙의 업적이 '가식의 나무'인지 '진실의 '인지가 불로 베일을 벗기듯 드러날 것이라는 뜻입니다.

 

4.       종합적 의미: "가면 파티의 "

 

'아포칼뤼프테세타이' 연극이 끝나고 배우가 가면을 벗어야 하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가식(휘포크리시스)으로 꽁꽁 싸맨(슁게칼뤼메논) 인생일지라도, 하나님의 '아포칼립스(계시/폭로)' 앞에서는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단어는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하나님이 강제로 가면을 벗기시는 (심판)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베일을 벗고 정직하게 나아갈 것인가?"(인터넷)

 

(ii)                    알려지다’[“γνωσθήσεται”(그노스테세타이)]:

 

단어는 위선의 결과가 단순한 노출을 넘어, 실체가 '완전하고 객관적으로 이해됨' 의미하는 단어입니다(인터넷):

 

1.       단어의 의미와 문법적 특징

 

어원: '알다' 뜻하는 '기노스코(γινώσκω)' 미래 수동태형입니다.

 

: '알게 것이다', '인지될 것이다', '판명될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뉘앙스: 단순히 정보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실체가 무엇인지 명확히 간파당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2.       누가복음 12 2절에서의 맥락: "감출 없는 진실"

 

예수님은 앞서 언급된 '숨은 (크뤼프톤)' 대응하여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숨은 (크뤼프톤) 알려지지(그노스테세타이) 않을 것이 없나니."

 

객관적 판명: 위선자는 자신의 속마음을 감출 있다고 믿지만, 결국 그가 품었던 은밀한 동기(크뤼프톤) 무엇이었는지 모든 이가 ', 사람이 저런 마음이었구나'라고 분명히 알게 되는 날이 온다는 경고입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 인간은 겉모습에 속아 넘어가지만, 하나님은 실체를 이미 '알고 계시며', 장차 모든 피조물 앞에서 진실을 확증(확인)하실 것임을 선포합니다.

 

3.       사도 바울의 서신과의 연관성 (고전 13:12)

 

사도 바울은 단어를 사용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대면할 때의 상태를 아주 아름답고도 엄중하게 묘사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3 12: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같이(πεγνώσθην) 내가 온전히 알리라."

 

의미: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온전히 알고 계심' 강조합니다.  빌립보서 3 2절의 유대주의자들이 아무리 율법으로 자신을 포장해도, 하나님은 이미 그들의 중심을 꿰뚫어 알고 계시다는 논리와 일맥상통합니다.

고린도후서 5 11: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려졌으니(πεφανερώμεθα) 너희의 양심에도 알려지기를 바라노라."

 

의미: 바울은 자신의 사역이 하나님 앞에 숨김없이 '알려져(그노스테세타이와 유사한 의미)' 있음을 고백하며, 성도들의 양심 앞에서도 가식 없는 진실함이 드러나기를 구했습니다.

 

4.       종합적 의미: "전지하신 시선"

 

'그노스테세타이' 우리 인생의 성적표가 하나님 앞에서 '공개 채점'되는 장면과 같습니다.

 

위선(휘포크리시스) 사람의 판단을 흐리게 수는 있지만, 결국 모든 진실은 하나님의 아래서 ' 정체가 탄로 수밖에 없음' 보여줍니다.

 

결국 단어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영적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안다' 하는 모습과, 하나님이 나에 대해 '알고 계신' 실제 모습 사이에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지금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생각이 세상에 '온전히 알려진다면(그노스테세타이)', 당신은 결과가 영광일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부끄러움일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알려짐의 ' 준비하는 것이 바로 위선의 누룩을 제거하는 가장 정직한 신앙의 태도입니다”(인터넷).

 

(4)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 1-3 말씀을 묵상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3)라고 말씀하신 내용의 의미가 무엇인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a)    말씀은 앞서 살펴본 '외식(가식)' 대한 최종적인 경고이자 물리적 확장입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 1-2절이 내면의 '상태' '심판' 다뤘다면, 3절은 위선이 어떻게 공개적으로 폭로될 것인지를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대비를 통해 보여줍니다(인터넷):

 

1.       극명한 장소적 대비의 의미

 

예수님은 가지 상반된 상황을 설정하여 위선의 허망함을 드러내십니다.

 

어두운 (암흑) 광명한 ():

'어두운 ' 남들이 보지 못한다고 믿고 은밀하게 공모하거나 위선을 행한 곳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 자체이기에, 어둠 속의 모든 은밀한 행위는 마치 대낮의 햇빛 아래 놓인 것처럼 선명하게 '들리게(드러나게)' 됩니다.

 

골방(밀실) 지붕 (광장):

 

'골방' 당시 유대 가옥에서 가장 깊숙하고 은밀한 곳으로, 남몰래 속삭이는 장소입니다.

 

'지붕 ' 당시 마을 사람들에게 소식을 알리는 공공의 장소(방송대) 역할을 했습니다.

 

의미: "너희만 안다고 생각하며 소곤거린 위선적인 계획들이, 결국은 세상 사람이 있도록 확성기로 대고 말하는 것처럼 전파될 "이라는 뜻입니다.

 

2.       사도 바울의 편지와의 맥락적 일치

 

사도 바울 역시 빌립보서 3 2절에서 경계한 '행악자들'이나 '유대주의자들' 은밀한 위선이 결국은 수치로 드러날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고린도전서 4 5: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예수님의 '광명한 데서 들리고'라는 말씀과 바울의 '드러내고(bring to light)' 완벽히 일치하는 통찰입니다.

 

에베소서 5 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위선은 어둠을 먹고 자라지만, 진리의 빛이 비추는 순간 정체가 탄로 난다는 원리를 강조합니다.

 

3.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 "비밀은 없다"

 

말씀의 핵심은 '은밀함의 종말'입니다.

 

위선자는 "아무도 모르겠지"라는 전제 하에 연기(휘포크리시스) 시작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는 비밀번호가 걸린 방이 없다" 선언하십니다.  따라서 성도의 삶은 '골방'에서 하는 말과 '지붕 '에서 하는 말이 다르지 않은 '투명성' 회복해야 합니다.

 

결국 구절은 우리에게 "당신의 삶이 생중계되고 있다면, 지금 말과 행동을 계속하겠는가?"라고 묻고 있는 셈입니다.  지금 내가 누군가에게 '귀에 대고 속삭이는 '들이 나중에 '지붕 위에서 울려 퍼져도' 당당할 있을까요?

 

가장 은밀한 순간의 나와 사람들 앞에서의 사이의 간격을 줄이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정직한 신앙입니다(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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