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의 기회를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누가복음 12:10).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장 10절 말씀을 읽으면서 먼저 병행구절을 찾아 읽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12:31-3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막3:28-29). 그리고나서 저는 이 세 성경 구절을 비교하면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눠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a)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눅12:10상)라고 말씀하십니다.
(i)
저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먼저 “사하심을 받으려니와”라는 말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헬라어로는 한 단어입니다:
“ἀφεθήσεται”(아페데세타이).
·
이 헬라어 단어는 “용서하다”,
“면제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ἀφίημι(아피에미)의 미래 수동태 형으로,
"용서받을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의 구체적인 의미와 신학적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1.
단어의 의미와 문법적 특징
어원: “멀리 보내다”, “내버려 두다”,
“면제하다”라는 뜻의 ἀφίημι(아피에미)에서 유래했습니다.
성경에서는 주로 죄에 대한 책임을 면제해 주는 “죄 사함”의 의미로 쓰입니다[예: 주기도문의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수동태(Divine Passive): 이 구절에서 수동태가 쓰인 것은 이른바 “신적 수동태”로, 용서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암시합니다.
즉,
"하나님에 의해 용서받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2.
문맥 속에서의 대조적 의미
누가복음 12장 10절에서는 이 단어가 긍정과 부정의 형태로 동시에 나타나 두 가지 상황을 극명하게 대조합니다:
인자를 거역하는 자:
"사하심을 받으려니와"(ἀφεθήσεται) —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오해하거나 일시적으로 거부하는 죄는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οὐκ ἀφεθήσεται)
— 성령의 사역을 고의적이고 지속적으로 거부하며 악한 것으로 치부하는 행위는 용서의 기회 자체가 차단됨을 경고합니다.
3.
신학적 해석
의도적 거부: 성령 모독이 용서받지 못하는 이유는 성령이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로 인도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통로를 스스로 거부하는 상태에서는 용서의 전제 조건인
'회개'가 일어날 수 없으므로 결과적으로 용서(ἀφεθήσεται)가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사례: 베드로는 인자인 예수를 세 번 부인했으나 나중에 용서받았습니다.
이는 “인자를 거역하는 죄”에 해당하여 “ἀφεθήσετα”ι(아페데세타이)(사하심을 받음)의 은혜를 입은 대표적인 예로 꼽힙니다(인터넷).
(ii)
그 다음에,
저는 이 예수님의 말씀(눅12:10상)을 묵상할 때 “인자를 거역하면”이란 말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비교해 보았습니다: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마12:31),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막3:28).
·
다시 말하면,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장
10절과 마태복음
12장 32절은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추가로 마태복음
12장 31절은 먼저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라고 말씀하고 있고,
마가복음 3장
28절은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과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
인공지능(인터넷)은 이렇게 한 문장으로 요약을 하였습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제외한,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종류의 죄와 비방,
심지어 인자(예수)를 거역하는 말조차도 회개를 통해 용서(ἀφίημι)받을 수 있다.” 이 선언이 갖는 중요한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인터넷):
1.
용서의 무한한 범위:
'모든 죄'와 '모든 모독'이 사하심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인간의 그 어떤 흉악한 범죄나 실수보다 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a.
여기서 “용서의 무한한 범위”라는 표현은 단순히 “많이 봐준다”는 뜻을 넘어,
하나님의 사죄 능력이 인간의 타락보다 압도적임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인터넷):
1.
죄의 ‘질'과 '양'을 초월함
마태복음 12장 31절에서 "모든 죄와 모든 모독"이라고 할 때,
헬라어 πᾶσα(파사)는 '어떠한 예외도 없는 전체'를 뜻합니다.
윤리적인 죄(도둑질, 간음 등)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직접 비방하는
'모독'까지도 포함됩니다.
인간의 기준으로는
"저런 짓까지 용서받을 수 있을까?"
싶은 극악무무도한 죄나 반복되는 실수조차 하나님의 자비(용서의 팔)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선언입니다.
2.
‘인자를 거역하는 죄'조차 수용함
당시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를 비방하는 것은 신성모독 중의 신성모독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자를 거역해도 사하심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셨을 때,
그분의 신성을 알아보지 못하고 비난했던 무지함까지도 품으시겠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을 오해하여 저지른 대적 행위조차 회개의 기회 앞에선 용서의 대상이 됩니다.
3.
용서의 근거가
'인간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성품'에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ἀφεθήσεται”(용서받을 것이다)라는 단어는 인간이 노력해서 쟁취하는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죄의 크기가 아무리 커도,
하나님의 자비라는 바다에 던져지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유일한 조건은 '회개'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끝까지 거부하지만 않는다면(성령 모독),
그 어떤 상태에 있는 인간이라도 사죄의 은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이 말씀의 핵심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네 죄가 아무리 주홍 같을지라도,
돌이키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용서 시스템은 작동한다"는 강력한 확신을 줍니다(인터넷).
2.
인자와 성령의 대조:
당시 유대인들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인자)을 몰라보고 비방한 것은
'무지'에 의한 것이므로 용서의 기회가 열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명백한 역사(귀신을 쫓아내고 치유하는 권능)를 보고도 이를 악의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구원의 통로 자체를 발로 차는 것과 같기에 용서받을 길이 없다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성령의 부르심에 반응하여 회개하기만 한다면,
그 어떤 죄인이라도 용서의 은혜(ἀφεθήσεται) 안에 들어올 수 있다"는 복음의 강력한 초청이기도 합니다(인터넷).
(b)
마지막 둘째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눅12:10하)고 말씀하십니다.
(i)
저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모독하는”이란 헬라어 단어 “βλασφημήσαντι”(블라스페메산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헬라어 단어는 “모독하다”,
“비방하다”라는 뜻의 동사
βλασφημέω(블라스페메오)의 분사 과거 능동태 형태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풀면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1.
단어의 기본 의미
어원: “해로운, 악한”을 뜻하는
βλάπτω(블랍토)와 “말하다”라는 뜻의
φήμη(페메)가 합쳐진 말입니다.
핵심 의미: 단순히 기분 나쁜 말을 하는 수준을 넘어,
상대방의 명예를 훼손하고 신성한 가치를 의도적으로 깎아내리며 모욕하는 것을 뜻합니다.
2.
문법적 특징과 뉘앙스
분사 형태: 이 구절에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자에게는(모독한 자에게는)"라고 하여,
그 행위를 저지른 주체를 지칭합니다.
과거 시제(Aorist):
여기서 과거 시제는 단순히 옛날 일을 말하는 게 아니라,
성령님의 명백한 사역을 보고도 그것을 거부하고 모독하기로 결정적인 태도를 취한 상태를 암시합니다.
3.
'인자를 거역하는 것'과의 차이
누가복음 12장 10절은 두 종류의 “말”을 대조합니다:
인자를 거역함 (εἴπῃ
λόγον): “말 한마디를 내뱉다”는 표현으로,
무지나 실수로 예수님을 비난하는 뉘앙스가 강합니다.
성령을 모독함
(βλασφημήσαντι): 이는 성령이 하시는 일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뻔히 알면서도,
그것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짓”이라고 비방했던 바리새인들처럼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거부를 의미합니다.
4.
왜
'모독'이 문제가 됩니까?
성령님은 우리 마음속에서 죄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드는 통로입니다.
그런데 그 통로 자체를 “악하다”고 비방(βλασφημέω)하며 끊어버리면,
하나님이 용서(ἀφίημι)를 베푸시려 해도 인간 편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수신기'가 고장 난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인터넷).
·
“βλασφημέω”(블라스페메오)(의미: 모독하다)는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침해하는 언행'을 다룰 때 매우 엄중하게 사용됩니다.
몇 가지 주요 사례를 통해 이 단어의 무게감을 살펴보겠습니다(인터넷):
1.
십계명과 구약적 배경
(제3계명)
헬라어 구약성경(LXX)은 제3계명인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를 번역할 때 이 단어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단순히 욕설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이나 권위를 깎아내리는 모든 시도를 의미합니다.
레위기 24장 16절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βλασφημέω)하면 반드시 죽일 것이라고 명시할 정도로 엄한 죄였습니다.
2.
바울의 회심 전 모습
(딤전 1:13)
사도 바울은 자신이 과거에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했던 시절을 회상하며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βλασφημέω)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
바울은 자신이 몰라서(무지해서) 인자를 거역하고 비방했으나,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셔서 용서(ἀφίημι)받았음을 고백합니다.
이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장 10절의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으려니와"의 실제 사례가 됩니다.
3.
유대교 지도자들의 신성모독 고소
예수님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시거나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실 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향해 이 단어를 썼습니다: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βλασφημέω)하도다"(마9:3).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고유 권한인
'죄 사함'을 침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진짜 모독을 하고 있던 쪽은 성령님의 사역을 거부하던 그들이었습니다.
4.
말세의 특징
(딤후 3:2)
바울은 마지막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고 비방(βλασφημέω)하며 부모를 거역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여기서의 비방은 타인에 대한 험담뿐만 아니라,
진리와 하나님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태도를 포함합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에서 이 단어는
'자신이 하나님보다 위에 있거나,
하나님의 선하심을 악하다고 규정하려는 교만한 언사'를 뜻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2장 10절에서 성령님의 구원 사역을 보고도
"저것은 귀신의 역사다"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치명적인 “βλασφημέω”(모독하다)가 되는 것입니다(인터넷).
-
성령님의 사역을
"귀신의 역사"라고 부르는 것이 왜
'용서받을 수 없는'
치명적인 모독(βλασφημέω)이 되는지,
그 구체적인 이유 세 가지 입니다(인터넷):
1.
'진리의 통로'를 악으로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게 하시며,
회개로 이끄시는
'구원의 유일한 통로'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성령의 역사를 보고
"저건 귀신(사탄)의 짓이야"라고 규정한다면,
그는 자신을 구원하러 온 치료제를
'독약'이라고 부르며 거부하는 환자와 같습니다.
약을 독이라고 믿는 환자는 결코 그 약을 먹지 않을 것이고,
결국 치료(용서)받을 기회를 스스로 발로 차버리는 셈이 됩니다.
2.
'무지'가 아닌
'의도적인 거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자를 거역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계실 때 그분을 단순한 목수의 아들로 오해해서 비난하는 것은
'몰라서 하는 실수'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성령님의 권능(병 고침,
귀신 쫓아냄 등)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명백한 선의 역사입니다.
이 명백한 빛을 보고도
"이것은 어둠이다"라고 고의적으로 뒤집어 씌우는 것은,
단순히 몰라서 하는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 자체를 악하다고 공격하는 의도적인 반역입니다.
3.
회개의 기회를 원천 봉쇄하기 때문입니다
용서(ἀφίημι)의 전제 조건은 언제나
'회개'입니다. 그런데 회개는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내 마음을 두드리실 때 가능합니다.
성령님을 모독하는 자는 성령님의 두드림 자체를
'사탄의 유혹'이나 '악한 것'으로 치부해버립니다.
마음의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그고 열쇠를 버린 격이라,
하나님이 용서하고 싶으셔도 그 사람이 회개할 마음 자체를 갖지 못하게 되므로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는 상태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성령님 모독이 치명적인 이유는 하나님이 용서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인간이 성령을 악하다고 비방함으로써
'회개라는 유일한 구명줄'을 스스로 끊어버리기 때문입니다(인터넷).
(2)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장 10절에서 예수님이 구분하신
'인자 거역'과 '성령 모독'의 결정적인 차이는 죄의
'대상'보다는 그 죄를 대하는
'마음의 상태와 회개의 가능성'에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세 가지 차이점입니다(인터넷):
1.
'무지에 의한 오해'
vs '의도적인 거부'
인자(예수님)를 거역함: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이나 나사렛 사람으로만 보았습니다.
그가 연약한 육신을 입고 오셨기에,
그분의 신성을 알아보지 못하고 비난하는 것은
'몰라서 하는 실수(무지)'일 수 있습니다.
이는 나중에 복음을 제대로 듣고 깨달으면 언제든 회개하고 용서(ἀφίημι)받을 수 있는 영역입니다.
성령님을 모독함: 성령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이를 보고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린 것"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일임을 뻔히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악하다고 뒤집어씌우는 고집입니다.
2.
'외적인 비방'
vs '내적인 단절'
인자를 거역함: 이는 겉으로 드러나는
'말(λόγον)'이나 행동의 실수에 가깝습니다.
사도 바울이 회심 전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했던 것처럼,
외적으로는 대적했으나 내면의 양심이 성령님에 반응할 여지가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성령님을 모독함: 성령님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죄를 깨닫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성령님 자체를 부정하고 모독하면,
내면에서 울리는
'회개의 음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셈이 됩니다.
즉,
죄를 뉘우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를 파괴하는 내적인 단절입니다.
3.
'용서의 기회'
vs '용서의 불가능성'
인자를 거역함: 베드로는 예수님(인자)을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성령님의 역사로 눈물로 회개하고 용서받았습니다.
이처럼 인자를 향한 죄는 회개의 기회가 열려 있습니다.
성령님을 모독함: 하나님이 용서하지 못할 만큼 죄가 커서가 아니라,
인간이 성령님을 거부함으로써
'회개'라는 용서의 전제 조건을 스스로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를 강제로 용서하실 수는 없기에,
결과적으로
"사하심을 받지 못하는"
영원한 죄가 됩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인자를 거역하는 것은 치료제(복음)를 몰라보고 밀어내는 것이라면,
성령님을 모독하는 것은 치료제를
'독약'이라 부르며 쏟아버리고 다시는 치료받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인터넷).
(a)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장 10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두려운 경고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깊은 위로와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두 가지 핵심 메시지가 있습니다(인터넷):
1.
믿는 자들에게 주는 강력한
'위로':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다"
이 구절의 전반부("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으려니와")와 병행구절(마 12:31)의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라는 선언은 엄청난 복음입니다.
과거의 실수에 대한 자유:
우리가 과거에 하나님을 몰라서 저질렀던 죄,
심지어 예수님을 비방하거나 거부했던 이력조차도 회개하기만 하면 완벽하게 사하심(ἀφεθήσεται)을 얻는다는 보증입니다.
사도 바울의 사례:
그는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려 했던
'비방자(모독자)'였지만, 인자를 거역했던 그 죄를 회개했을 때 사도가 되었습니다.
즉,
"내가 지은 죄가 너무 커서 용서받지 못할 거야"라는 불안감을 무너뜨리는 말씀입니다.
2.
믿는 자들에게 주는 엄중한
'경고':
"회개의 기회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
성령 모독이 용서받지 못한다는 경고는,
우리가 가진
'회개의 도구'를 소중히 여기라는 뜻입니다.
양심의 가책은 은혜의 신호:
만약 내가 어떤 죄를 짓고
"혹시 내가 성령 모독죄를 지은 건 아닐까?"라고 걱정하며 괴로워하고 있다면,
역설적으로 그 사람은 성령 모독죄를 범한 것이 아닙니다.
진짜 성령을 모독한 자는 양심이 화인을 맞아(딤전 4:2) 죄를 깨닫지도 못하고,
회개하고 싶은 마음 자체가 아예 없기 때문입니다.
지속적인 거부의 위험성:
성령님이 내 마음속에서
"그건 죄야,
돌이켜야 해"라고 속삭이실 때,
그것을 반복적으로 무시하고
'악한 것'
혹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하며 마음을 딱딱하게 굳히는 태도를 경계해야 합니다.
요약하자면, 이 말씀은 우리를 겁주려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네 마음을 두드리실 때 그 손길을 뿌리치지 말고,
그분께 반응하여 용서의 바다로 나오라"는 간절한 초대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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