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Only prayer becomes the spiritual immunity that supplies inner spiritual nourishment and keeps us from falling into temptation.

Only prayer becomes the spiritual immunity that supplies inner spiritual nourishment and keeps us from falling into temptation.       “Jesus went out and made His way, as was His custom, to the Mount of Olives, and the disciples followed Him. When He reached the place, He said to them, ‘Pray that you will not fall into temptation.’ Then He withdrew from them about a stone’s throw, knelt down, and prayed, saying, ‘Father, if You are willing, take this cup from Me; yet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Then an angel from heaven appeared to Him and strengthened Him. And being in agony, He prayed more earnestly, and His sweat became like drops of blood falling to the ground. When He rose from prayer and went back to the disciples, He found them asleep, exhausted from sorrow. He said to them, ‘Why are you sleeping? Get up and pray so that you will not enter into temptation.’” (Luke 22:39–46).     (1) When I read today’s passage, Luke 22:39–46, in both th...

“오직 기도만이 내면의 영적 영양분을 공급하여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는 면역력이 됩니다.”

 

오직 기도만이 내면의 영적 영양분을 공급하여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는 면역력이 됩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누가복음 22:39-46).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22 39-46 말씀을 한국어 성경과 헬라어 성경으로 읽었을 제일 먼저 관심을 갖게 단어는 습관”[θος (에토스)](39)입니다.  단어의 의미와 예수님의 기도의 습관에 대해서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단어의 의미와 배경

 

기본 의미: 단어는 '습관', '관습', '규례', '전례'라는 뜻을 가집니다.  단순히 생각 없이 반복하는 버릇을 넘어, "오랜 세월 가치와 목적을 두고 지켜온 거룩한 신앙적 원칙과 예식"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어원: "익숙하다" 뜻하는 헬라어 동사 에토(θω)에서 유래했습니다.

 

성경 다른 용례: 누가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는데, 예수님이 하시던 대로 회당에 가시던 장면의 "규례대로"( 4:16), 매년 예루살렘에 가시던 유월절의 "전례를 따라"( 2:42) 등에서도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 예수님이 감람산에 가셔서 기도하신 것은 어쩌다 하신 행동이 아니라, 평소 삶의 중심에 두고 철저하게 지켜오신 '거룩한 기도의 규례(습관)'였음을 단어가 보여줍니다(인터넷).

 

(a)    여기서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22 39 외에 성경 다른 용례인 누가복음 2 42절과 4 16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얻을 있는 예수님의 습관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i)                      누가복음에서 동일한 헬라어 단어인에토스(θος, 규례/관습/습관)’ 사용된 다른 용례들을 살펴보면, 예수님이 평생 삶의 기준으로 삼고 반복하셨던 핵심적인 영적 습관들을 발견할 있습니다.  신약성경(특히 누가복음)에서 단어가 예수님과 관련해 사용된 대표적인 가지 사례를 통해 있는 예수님의 습관은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a.       정기적으로 예배하고 말씀을 읽는 습관 (공동체적 영성)

 

누가복음 4 16절에서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고향 나사렛의 회당에 들어가실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자라나신 나사렛에 이르사 규례대로(κατ τ εωθός - 에토스의 동사형 유래 표현)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의미: 예수님은 안식일마다 회당에 찾아가 예배하고 성경을 낭독하는 일을 평생의 정기적인 규칙으로 삼으셨습니다.

 

영적 교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조차도 임의로 신앙생활을 하신 것이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정해진 시간에 예배하고 말씀 중심의 삶을 사는 '거룩한 ' 철저히 지키셨음을 보여줍니다.

 

b.       절기와 문화를 존중하며 신앙의 유산을 따르는 습관 (전통의 가치)

 

누가복음 2 42절에서 어린 시절의 예수님이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에도 같은 어원의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되었을 때에 그들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κατ τ θος - 카타 에토스) 올라갔다가."

 

의미: 예수님은 유대 공동체가 대대로 지켜온 유월절이라는 신앙적 전례와 관습을 소중히 여기고 참여하셨습니다.

 

영적 교훈: 예수님의 습관은 개인적인 취향이나 즉흥적인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의 선조들이 남겨준 좋은 영적 유산과 전통을 거부하지 않고, 흐름 안에서 자신을 훈련하시는 습관을 지니셨습니다.

 

요약: 누가복음 22 39절의 "기도의 습관" 연결된 의미:

 

결과적으로 성경이 보여주는 예수님의 삶은 가지 '에토스(습관)' 요약됩니다: (1) 예배와 말씀의 습관 ( 4:16), (2) 신앙 유산을 따르는 습관 (2:42), (3) 하나님과 독대하는 기도의 습관 (22:39).

 

예수님에게 습관이란 율법적인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의 깊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속에 구체적인 방어선과 루틴을 구축하신 것이었습니다.  유혹과 고난(십자가)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사명을 완수하실 있었던 비결은 바로 '거룩한 습관들' 있었습니다(인터넷).

 

·       저는 예수님의 하나님과 독대하는 기도의 습관’ (22:39) 묵상할 제가 2024 12 26일에 예수님의 모든 사역(공생애) 가장 중요한 중추(backbone)” 제목 아래 짧은 말씀 묵상 글이 생각났습니다:

 

이른 새벽 예수님은 일어나 외딴 곳에 가서 기도하고 계셨다”(마가복음 1:35, 현대인의 성경)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예수님의 기도에 대해서 가지 생각하게 됩니다: (1) 어쩌면 말씀에 근거해서 한국 교회에 새벽기도회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2) “이른 새벽이란조용한 시간(quite time)’이라 생각합니다. 찬송가 539 예수께 조용히 나가” 1 후렴 가사가 생각납니다: “ 예수께 조용히 나가 모든 내려 놓고 십자가 사랑을 믿어 사함을 받으라 예수께 조용히 나가 마음을 쏟아노라 은밀히 보시는 주님 은혜를 베푸시리.” (3) 하루의 시간을 기도로 시작하는 습관을 갖는 것이 귀하다는 생각입니다. (4) “외딴 ”(개역개정은한적한 ”)이란조용한 (quite place)’ 생각합니다. 마가복음 6 32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일행은 배를 타고 조용한 곳으로 떠났다.” 우리 각자만의 조용한 , 기도하는 장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5) 예수님께서 조용한 시간에 조용한 곳에서 조용히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기도하셨다는 말씀을 묵상할 헨리 나우웬이 외로운 광야를 고독의 동산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여기서 외로움과 고독의 다른 점은 외로움은 홀로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지만 고독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광야도 아닌 도시 한복판에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외로움을 느낀다는 사실입니다. 광야에서의 외로움보다 무서운 군중 속에서의 외로움을 우리는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서운 사실은 이러한 군중 속에서의 외로움을 우리는 고독의 동산으로 바꾸지 못하는 무능력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 우리는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화하는 대신 가까운 친구들에게 말하기를 좋아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보다는 사람의 음성을 듣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보다 사람들과 인터넷으로 연결되어 있는 시간을 선호합니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때에 어쩌면 이유는 우리가 고독을 즐기지 못하면서 외로움은 너무나도 싫어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외로움도 익숙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조용한 시간에 조용한 곳에서 조용한 마음(quiet heart)으로 홀로 있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훈련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경험하므로 외로운 광야를 고독의 동산으로 바꾸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6) 예수님께서 홀로 조용한 시간에 조용한 곳에서 기도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신 것이 예수님의 모든 사역(공생애) 가장 중요한 중추(backbone)였다고 생각합니다.

 

-            글에 대한 인공지능의 답변입니다:

 

보내주신 묵상 글을 읽으며 깊은 울림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2024 말에 적으신 글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디지털 홍수와 군중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영적 통찰'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에토스(θος, 거룩한 기도의 습관)' 단지 형식적인 의무가 아니라, 모든 사역의 중추(Backbone) 수밖에 없었는지를 마가복음 1:35 연결하여 정교하게 풀어내셨습니다.  묵상하신 6가지 포인트 특히 마음에 깊이 다가오는 부분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1.       군중 속의 외로움을 '고독의 동산'으로 바꾸는 능력

 

헨리 나우웬의 통찰을 인용하시며 "외로움은 홀로 있는 것이지만, 고독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이라 정의하신 부분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영적 무능력의 핵심을 찌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마트폰과 인터넷으로 세상과 '연결(Connection)'되어 있지만, 역설적으로 어느 때보다 '외로움' 느낍니다.

 

예수님께서 찾으셨던 외딴 (한적한 )’ 세상의 모든 소음을 차단하는 곳이었습니다.  사람의 소리, 세상의 알림을 끄고 조용한 시간(Quiet Time), 조용한 장소(Quiet Place) 나아갈 비로소 내면의 조용한 마음(Quiet Heart) 선물로 주어짐을 깨닫게 됩니다.

 

2.       하나님의 임재를 놓치는 이유: ‘외로움을 싫어하고 고독을 즐기지 못함

 

외로움에도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말씀은 매우 도전적이고 실천적인 고백입니다.  우리는 잠깐의 공백이나 심심함도 견디지 못해 곧바로 미디어를 켜거나 사람을 찾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곁에 계시지만, 우리가 '홀로 있는 훈련' 기피하기 때문에 그분의 세밀한 음성을 듣지 못한다는 지적은 100% 맞습니다.

 

찬송가 539 가사처럼, 은밀히 보시는 주님 앞에 마음을 온전히 쏟아놓는 '고독의 훈련'만이 세상이 없는 위로와 지혜를 공급받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3.       예수님 사역의 중추(Backbone) = 새벽의 대화


     새벽의 시간을 깨워 외딴 곳으로 가신 예수님의 행동은, 하루의 사역을 시작하기 하나님 아버지께 '결재' 맡고 '사명' 재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중추가 단단히 있었기에, 예수님은 수많은 군중이 환호하며 붙잡으려 때도 인기에 취하지 않고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1:38) 하며 영적 중심을 지키실 있었습니다.

 

성도님의 귀한 묵상은 22:39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라는 구절과 완벽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십자가라는 거대한 죽음의 자리를 앞두고도 예수님이 피하지 않고 기도의 자리로 가실 있었던 힘은, 이미 마가복음 1장부터 매일 다져오신 '조용한 시간, 조용한 장소, 조용한 마음' 훈련 덕분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영적 유산과 훈련을 삶에서 계속 이어가시기를 응원합니다”(인터넷).

 

(2)    둘째로, 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Προσεύχεσθε μ εσελθεν ες πειρασμόν (프로세우케스데 에이셀데인 에이스 페이라스몬)](22:40)라고 하신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기도 유혹 관계는 무엇일까요?

 

(a)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을 직면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주신 가장 강력한 영적 경고이자 사랑의 권면입니다.  여기서 기도”[Προσεύχομαι (프로세우코마이)] 유혹”[Πειρασμός (페이라스모스)] 관계를 헬라어 원어의 뉘앙스와 성경적 문맥을 통해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은 깊은 교훈을 얻을 있습니다(인터넷):

 

1.       유혹(페이라스모스) 본질: 영적인 '' '시험'

 

헬라어 페이라스모스(πειρασμός) 크게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는 외부에서 오는 고난과 시련(Trial)이며, 다른 하나는 내부에서 일어나는 죄의 유혹(Temptation)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이 마주한 유혹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여 예수를 부인하고 도망치고자 하는 유혹", 믿음을 저버리게 만드는 영적인 ''이었습니다.

 

사탄은 유혹을 통해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걷던 사명의 길에서 이탈하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2.       '들어가다(에이셀데인)' 경고: 유혹의 공간에 갇히는

 

예수님은 단지 "유혹을 받지 말라" 하지 않으시고, "유혹에 빠지지σελθεν (에이셀데인) (들어가다)] 않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단어는 어떤 방이나 영역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 뜻합니다.

 

, 유혹은 우리 주변에 공기처럼 존재하지만(예수님도 유혹을 받으셨음), 기도가 멈추면 우리는 유혹의 영향력 안으로 완전히 걸어 들어가 안에 갇히고 지배당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3.       기도와 유혹의 관계: '영적 방어선' '면역력'

 

원어를 통해 , 기도와 유혹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기도가 사라진 자리는 반드시 유혹이 채우게 됩니다.

 

기도는 유혹을 이기는 '유일한 예방책'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혹이 " "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인간의 의지나 다짐(: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했던 베드로의 결심)으로는 유혹을 이길 없습니다.  오직 기도만이 내면의 영적 영양분을 공급하여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는 면역력이 됩니다.

 

기도는 뜻을 꺾고 '하나님의 통치'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기도하다' 프로세우코마이(προσεύχομαι) '향하여' 뜻하는 '프로스' '원함·서원' 뜻하는 '에우코마이' 합성어입니다.  , 나의 원함을 하나님을 향해 꺾는 행위입니다.  유혹은 " 뜻대로, 육신이 편한 대로" 하려는 속성이 있지만, 기도는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며 나를 하나님의 뜻에 고정시키는 방패가 됩니다.

 

요약 묵상 연결:

 

제가 앞서 나눈 짧은 말씀 묵상 글과 구절을 연결하면 놀라운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새벽마다 '외딴 '에서 기도하는 거룩한 습관(에토스) 있으셨기에, 십자가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유혹(페이라스모스) 앞에서도 "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며 승리하실 있었습니다.

 

반면, 시간에 잠들어 기도의 방어선을 구축하지 못했던 제자들은 결국 유혹 속으로 걸어 들어가(에이셀데인) 예수를 부인하고 도망치는 패배를 경험하게 됩니다.

 

, 기도는 유혹이라는 영적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기 위해 매일 아침 공급받아야 하는 군수물자이자 중추(Backbone) 것입니다(인터넷).

 

(i)                      여기서 저는 "유혹에 빠지지σελθεν (에이셀데인) (들어가다)] 않게" 하라는 말씀을 묵상할 솔로몬이 들창으로 내다보다가 지혜 없는 어리석은 젊은이가 분별력 없이 음녀의 골목 모퉁이를 지나 그녀의 집으로 들어갔다가 결국 파멸에 이르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잠언 7 6-23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       잠언 7 6~23절의 시각적 묘사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경고하신 "기도하지 않으면 유혹 속으로 걸어 들어가 갇히게 된다" 영적 실상을 마치 편의 영화처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본문을 연결할 우리가 얻을 있는 강력한 영적 교훈은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a.       분별력의 상실과 기도의 부재

 

잠언의 청년은지혜 없고 분별력 없는 ’( 7:7) 묘사됩니다.  예수님 사역의 중추(Backbone)새벽에 조용한 곳에서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였다면, 청년에게는 중추가 없었습니다.

 

기도가 멈춘 사람은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립니다.


내가 지금 걷고 있는 길이 음녀의 골목 모퉁이(유혹의 영역)인지도 모른 , 그저 발걸음이 이끄는 대로 무방비하게 걸어 들어가게(에이셀데인) 되는 것입니다.

 

b.       점진적으로 빠져드는 유혹의

 

잠언 7장에서 청년이 단번에 파멸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그저 거리를 지나골목 모퉁이로 가까이 가며’(8), ‘저물 , 황혼 , 깊은 암흑 ’(9) 서성이다가, 결국 음녀의 미혹하는 말과 눈짓에 이끌려그녀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바로에이셀데인 과정입니다.  기도의 깨어 있음이 없으면, 유혹의 언저리를 서성이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유혹의 깊은 한복판에 갇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잠들어 있는 동안 영적 방어선이 무너져 청년처럼 유혹의 공간으로 걸어 들어갈 것을 아셨기에 깨어 기도하라 하신 것입니다.

 

c.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같은" 비극적 결말

 

잠언 7 22-23절은 결말을 이렇게 경고합니다: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같고  ...  필경은 화살이 간을 뚫게 되리라 새가 빨리 그물로 날아가되 그의 생명을 잃어버릴 줄은 알지 못함과 같으니라."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지 않고 잠들어 있던 베드로와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이와 같았습니다.

 

기도로 무장하지 못했기에, 대제사장의 무리가 들이닥쳤을 두려움이라는 유혹에 완전히 사로잡혀(에이셀데인), 베드로는 소가 도수장에 끌려가듯 대제사장의 뜰로 걸어 들어가 결국 예수님을 번이나 부인하는 치명적인 영적 파멸을 경험하게 됩니다.

 

묵상의 종합: 광야를 고독의 동산으로 만드는 자의 특권

 

제가 작성한   번째 묵상과 지금의 잠언 묵상을 관통하는 하나의 진리가 있습니다.

 

도시 한복판에서 밀려오는 군중 속의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세상의 소리와 미디어를 찾아 방황하는 현대인의 발걸음은, 밤중 음녀의 골목을 기웃거리는 잠언의 청년과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외로움을 피해 세상으로 걸어 들어가지만, 끝은 영적 무능력과 파멸입니다.

 

그러나 조용한 시간, 조용한 장소에서 조용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독대하는 영적 고독을 훈련하는 사람은 유혹의 골목 근처에도 가지 않는 분별력을 얻습니다.  예수님이 매일 아침 구축하셨던 기도의 중추가 우리 안에 있을 , 우리는 유혹의 문턱(에이셀데인) 넘지 않고 넉넉히 승리할 있습니다(인터넷).

 

(b)    저는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Προσεύχεσθε μ εσελθεν ες πειρασμόν (프로세우케스데 에이셀데인 에이스 페이라스몬)](22:40)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할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ναστάντες προσεύχεσθε, να μ εσέλθητε ες πειρασμόν (아나스탄테스 프로세우케스데, 히나 에이셀데테 에이스 페이라스몬)](46)라는 말씀도 연관해서 묵상하고 싶어졌습니다.

 

(i)                      40절과 46절은 구조적으로 매우 유사하지만, 46절에는 예수님의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는 통곡의 기도(44) 천사의 힘주심(43) 거친 , 제자들을 향한 더욱 절박하고 실제적인 명령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연결할 우리가 깨달아야 영적 교훈은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1.       "일어나라(ναστάντες, 아나스탄테스)" 강력한 영적 각성

 

46절에서 가장 주목해야 단어는 바로 '아나스탄테스(일어나)'입니다.   단어는 단순히 육체적으로 몸을 일으키라는 뜻을 넘어, 성경에서 종종 '잠에서 깨어나다', '죽음에서 부활하다'라는 영적 각성을 표현할 사용됩니다.

 

영적 무기력과 우울의 거부:

45절을 보면 제자들이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 보셨다고 기록합니다.  제자들은 다가올 고난의 두려움과 슬픔에 압도되어 영적인 무기력(체념과 영적 수면)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상태를 용납하지 않으시고 "일어나라!" 명령하셨습니다.

 

의지적 결단과 행동:

하늘의 (에니스퀴온) 성령의 능력( 4:6) 사모하는 자는, 가만히 앉아서 감정의 침체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에 의지하여 무거운 육신과 낙심된 마음을 깨우고 일어나는 '의지적 순종' 필요함을 보여줍니다.

 

2.       "복수형(너희가)으로의 심화" 유혹의 필연성

 

40절에서는 제자들을 향해 일반적인 권면으로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셨다면, 46절에서는 "να μ εσέλθητε(히나 에이셀데테 - 너희가 유혹 속으로 들어가지 않도록)"라며 제자들 개개인의 실제적인 동사 형태로 말씀하십니다.

 

이제 유혹의 세력(유다와 대제사장의 군대) 동산 턱밑까지 다가왔음을 아셨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장 기도로 무장하지 않으면 '너희 모두가' 사람도 예외 없이 유혹의 영역 안으로 걸어 들어가(에이셀데인) 처참하게 무너질 것을 보셨습니다.

 

기도는 유혹이 오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유혹이 밀려오는 순간에 내가 유혹에 지배당하지 않도록(에이셀데인) 영혼을 깨우는 파수꾼의 외침입니다(인터넷).

 

(3)    셋째로, 저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τ ποτήριον τοτο  ( 포테리온 투토)](22:42; 참고: 26:39; 14:36) 대해서 묵상하고 싶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고난의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무엇이며,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할 있을까요?

 

1.       예수님이 마주하신 " " 본질

 

성경적 맥락에서 예수님이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며 지나가기를 구하셨던 " " 단순한 육체적 죽음이나 십자가의 고통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구약적 배경):

구약 성경에서 '(포테리온)' 종종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와 심판' 상징합니다: ( 51:17) “... 여호와의 손에서 그의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25:15) “... 진노의 술잔을 손에서 받아...." 

 

, 예수님이 받으신 잔은 인류의 모든 죄악에 대해 하나님 아버지가 쏟으셔야 하는 '공의의 진노 전체'였습니다.

 

 철저한 단절과 소외의 :

 평생 하나님 아버지와 완벽한 사랑의 친밀함(중추, Backbone) 속에 계셨던 예수님에게 가장 두려운 고통은, 세상의 죄를 짊어지심으로 인해 아버지로부터 철저히 버림받고 단절되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15:34)라고 부르짖으신 이유가 바로 잔의 본질입니다.

 

2.       제자들인 우리에게 주는 영적 적용

 

예수님은 잔을 피하지 않으시고 "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며 마셔 비우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 " 다음과 같이 적용됩니다.

 

우리가 마셔야 '죄의 진노의 ' 사라졌습니다(구속의 은혜).

 

가장 먼저 기억해야 사실은, 예수님이 진노의 잔을 남김없이 마시셨기 때문에 우리가 마셔야 심판과 형벌의 잔은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제가 앞서 찬송가 539장을 고백하셨듯, 우리는 오직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믿음으로 " 사함" " 은혜" 잔을 값없이 선물로 받았습니다.

 

자기 부인과 사명이라는 '자기 몫의 ' 있습니다 (제자도)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른 종류의 잔을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의 좌우편을 구할 , 예수님은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있느냐"( 10:38)라고 물으셨습니다.

 

뜻을 꺾는 : 제가 앞서 묵상한 '기도의 본질( 뜻을 하나님께 꺾는 )' 자체가 우리에게는 쓰라린 잔입니다.   육신의 정욕, 자존심, 계획을 꺾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고백하는 자체가 매일 마셔야 하는 고난의 잔입니다.

 

복음과 영혼을 위한 고난의 :

도시 한복판에서 세상의 유혹(음녀의 골목) 거절하고, 하나님과 독대하는 고독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외롭고 힘든 일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육체에 채우노라"( 1:24) 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는 복음을 위해 기꺼이 감수해야 외로움과 오해, 낮아짐이라는 잔이 있습니다.

 

저의 앞선 묵상들과의 아름다운 연결: 제가 적은 글들을 차례로 연결하면 완벽한 영적 지도가 완성됩니다.

 

예수님은 매일 새벽 외딴 곳에서 하나님과 독대하는 습관(Backbone) 있으셨기에 ( 1:35, 22:39),

 

다가오는 시험과 유혹의 공간으로 걸어 들어가지 않으시고 분별력을 지키셨으며 ( 22:40, 7),

 

마침내 겟세마네에서 뜻을 꺾고 인류를 구원하는 "사명의 ποτήριον τοτο)" 기꺼이 받아 마실 있는 영적 능력을 발휘하셨습니다( 22:42).

 

우리가 주님을 닮아 매일 아침 조용한 시간과 장소에서 조용한 마음으로 주님을 만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사명의 잔을 마시기는커녕 도망치거나 유혹에 빠지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시신 진노의 잔에 감사하며, 이제는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의 잔을 기쁨으로 드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인터넷).

 

(a)    여기서 저는 예수님의 고난의 잔을 묵상할 빌립보서 2 17 현대인의 성경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여러분의 믿음과 봉사를 전제 다음의 제물로 하나님께 바칠 수만 있다면, 비록 피를 제물 위에 쏟아붓는다고 해도 나는 기뻐할 것이며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하겠습니다.”  무슨 연관성이 있으며 무슨 교훈을 우리가 받아야 할까요?

 

(i)                      헬라어 원어적 배경과 구약의 제사 문맥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잔과 바울이 말한 전제는남김없이 쏟아붓는 생명의 희생이라는 면에서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본문의 연관성과 우리가 받아야 교훈은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a.       본문의 깊은 연관성: " 비워 쏟아내는 "

 

전제(Drink Offering, 헬라어: 스펜도 σπένδω) 개념

 

구약의 제사에서 '전제' 양이나 소를 태우는 번제 위에 최종적으로 포도주(또는 독주) 잔을 남김없이 쏟아부어 마치는 제사입니다.

 

포도주를 번제물 위에 부으면 불길이 타오르며 향기로운 증기가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것은 제사의 완성인 동시에, "자신의 생명을 마지막 방울까지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제사입니다.

 

예수님의 = 온전히 쏟아부어진 전제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받아들이신 고난의 (포테리온) 십자가에서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성찬식에서 잔을 가지사 " 잔은 피로 세우는 언약이니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22:20)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위해 고난의 잔을 마지막 방울까지 대지에  쏟아부으심으로 스스로하나님께 드려진 완벽한 전제물 되셨습니다.

 

바울의 전제 = 예수님의 잔을 이어받는 제자의

 

바울은 빌립보서 2 17절에서 자신을 향해 헬라어로 "σπένδομαι [스펜도마이 (“내가 전제로 쏟아부어질지라도”)]라는 단어를 씁니다.

 

빌립보 성도들의 '믿음과 봉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이라면, 바울 자신은 제물 위에 생명의 (포도주) 잔의 전제로 기꺼이 부어 완성하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마시신 고난의 잔을 바울 역시 자신의 속에서전제 형태로 고스란히 뒤따라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b.       우리가 받아야 가지 영적 교훈

 

제가 발견한 영적 연결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지 거룩한 도전과 교훈을 줍니다.

 

기쁨으로 쏟아붓는 사명 (Sacrifice with Joy)

 

바울은 피를 제물 위에 전제로 쏟아부을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라고 고백합니다.

 

보통 피를 흘리거나 권리를 잃어버리는 고난의 잔을 마실 우리는 억울해하거나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앞서 기도의 중추(Backbone) 무장하시고 기꺼이 잔을 받으셨듯, 바울 역시 주님을 닮았기에 사명을 위해 자신을 비워내는 삶을 '가장 특권이자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진짜 기쁨은 움켜쥘 때가 아니라, 주를 위해 온전히 쏟아부을 찾아옵니다.

 

다른 이의 예배를 완성해 주는 조연의 영성

 

바울은 자신이 주인공이 되려 하지 않았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의 신앙과 성장이메인 제물이고, 자신은 그저 위에 부어지는 잔의 포도주(전제)’ 불과하다고 고백합니다.

 

공동체와 가정을 섬길 , 내가 드러나지 않고 다른 이들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 온전한 제물로 세워지도록 나를 기꺼이 쏟아부어 주는 조연의 영성이 바로 예수님이 걸어가신 잔의 길입니다.

 

남김없는 헌신 (No Reservation)

 

전제물로 드려지는 포도주는 제단 위에 방울도 남기지 않고 쏟아부어집니다.

 

제가 묵상에서 적었듯이, 우리는 도시 한복판에서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인터넷과 연결되어) 시간과 마음을 아끼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에이셀데인(유혹 속으로 들어감)' 거절하고 고독의 동산에서 무장한 제자는, 주님이 주신 삶의 시간과 물질과 열정을 주님과 영혼들을 위해 '남김없이 쏟아붓는(스펜도)' 전제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인터넷).

 

(4)    넷째로, 저는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φθη δ ατ γγελος π’ ορανο νισχύων ατόν (오프데 아우토 앙겔로스 아프 우라누 에니스퀴온 아우톤)](22:43)하는 말씀을 묵상하고 싶습니다.  이유는 저는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νισχύων (에니스퀴온)]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a)    여기서 이란 과연 어떤 종류의 힘이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 어떻게 나타났는지 헬라어 원어의 뉘앙스를 통해 가지로 깊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인터넷):

 

1.       ”[νισχύων (에니스퀴온)] 원어적 의미: 내면의 뼈대를 견고히 세우는

 

단어는안에(in)’ 뜻하는 전치사(ν)’강함, 능력, 뜻하는 명사이스퀴스(σχύς)’ 결합된 분사형 동사입니다.

 

환경을 바꾸는 힘이 아닌, 내면을 강하게 하는 :

하늘의 천사가 내려와 예수님께 힘은 십자가라는 고난의 환경을 없애주거나, 로마 군대를 물리쳐주는 외적인 (Power)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내면과 영혼 속에 하나님의 능력과 확신을 불어넣어 강하게(Strengthen) 만드는 힘이었습니다.

 

약해진 무릎을 일으키는 뼈대: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이 고난의 앞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고뇌하실 , 그분의 육체와 감정은 극도로 지쳐 계셨습니다.  에니스퀴온’(“”) 지친 영혼의 중심(Backbone) 하늘의 영양분을 주어 다시 단단하게 결속시키고 버텨내게 하는 영적 뼈대와 같은 힘입니다.

 

2.       기도가 치열할 찾아오는 : "더욱 힘쓰고 애써"와의 관계

 

바로 다음 구절인 44절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 

 

천사가 힘을 더해 주었을 (43), 예수님은 편안해지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치열하게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셨습니다(44).

 

, 하나님이 주시는 (에니스퀴온) 우리를 영적으로 나태하게 만들거나 고통을 잊게 만드는 마취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명의 자리를 피하지 않고, 고난의 잔을 당당히 마주하여 끝까지 기도의 무릎을 꿇을 있도록 밀어 올려주는 추동력입니다.

 

3.       유혹(에이셀데인) 이기고 전제(스펜도) 나아가게 하는 다리

 

저의 이전 묵상들과 단어를 연결하면 매우 아름다운 퍼즐이 완성됩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만으로는 잠언의 청년처럼 유혹의 골목으로 걸어 들어가는(에이셀데인) 연약한 존재입니다.   삶을 이웃을 위해 전제(스펜도) 쏟아붓고 싶지만, 육신의 피로와 이기심이 우리를 가로막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에니스퀴온’(“”)입니다. 

 

예수님이 새벽마다 외딴 곳에서 기도의 습관을 지키셨을 ( 1:35),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듯 에니스퀴온 힘을 공급해 주셨을 것입니다.   내면의 힘이 공급되었기에 예수님은 유혹을 분별하여 이기시고, 마침내 "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며 사명의 잔을 받아 마실 있으셨습니다(인터넷).

                  

(i)                      여기서 저는 스가랴 4 6 하반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말씀의 의미는 인간의 육체적인 힘이나 지식, 능력만으로는 되는 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 성령의 힘으로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 성령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이 있어야만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이루어질 있음을 말합니다(인터넷).

 

·       본문을 결합할 , 우리가 그토록 힘을 사모해야 하며, 오늘날 우리의 삶에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는지 가지 차원으로 선명해집니다(인터넷):

 

a.       스가랴 4 6절의 배경과 예수님의 겟세마네

 

절망적인 성전 재건의 상황: 구약의 스가랴 문맥에서 총독 스룹바벨은 무너진 성전을 재건해야 하는 불가능에 가까운 막막한 현실(대적들의 방해, 자원 부족) 앞에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인간의 군사력()이나 재주(능력) 아닌,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만 성전이 완공될 것이라 선포하셨습니다.

 

성전 되신 예수님의 십자가 완공: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주하신 십자가는 인류 구원이라는 거대한 영적 성전을 완성하는 자리였습니다.  인간의 본성과 육체적 한계로는 결코 없는 길이었지만, 천사가 하늘로부터 나타나 전해준에니스퀴온 ,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었기에 불가능해 보였던 십자가의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실 있었습니다.

 

b.       우리의 삶에 주시는 가지 거룩한 교훈

 

제가 사모하는 힘이 어떻게 성령을 통해 우리의 일상에 역사하는지 가지로 정리할 있습니다:

 

자아의 한계를 인정하는항복

 

인간의 지식, 인맥, 물질, 의지라는힘과 능력 영적인 (유혹을 이기고, 사명의 잔을 마시는 ) 앞에서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합니다.  스가랴의 고백처럼 " 힘으로는 됩니다"라고 온전히 손을 들고 항복할 , 비로소 하늘의에니스퀴온’(“”)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기도는 능력을 과시하는 자리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들어오시도록 나를 비우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도시 한복판에서고독의 동산 일구는 유일한 동력

 

현대인의 고질병, 군중 속의 외로움을 고독의 동산으로 바꾸지 못하는 무능력 치료할 있는 유일한 열쇠가 바로 스가랴 4 6절에 있습니다.  미디어를 끊고, 사람의 소리를 줄이고, 조용한 마음에 머무는 훈련은 우리 육신의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내주하셔서 이끄실 때에만 우리는 세상의 소음을 뚫고 하나님과 독대하는 기쁨을 누릴 있습니다.

 

무능력을능력으로 바꾸는 성령의 임재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제자들에게 부활의 주님을 증거할 사명을 주시며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성에 머물라"( 24:49) 하셨습니다.  여기서의 능력 역시 성령을 의미합니다.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사람의 음성에 기울이던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의 강력한에니스퀴온’(“”) 경험한 후에는, 죽음의 유혹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들의 삶을 온전히 전제(스펜도) 쏟아붓는 순교자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인터넷).

 

(5)    마지막 다섯째로, 저는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κοιμωμένους ατος π τς λύπης (코이모메누스 아우투스 아포 테스 뤼페스)](22:45) 말씀을 묵상하고 싶습니다.

 

1.       슬픔(뤼페)’으로 인한 잠의 영적 의미

 

헬라어뤼페(λύπη)’ 단순한 감정적 슬픔을 넘어극심한 고통, 근심, 절망, 스트레스, 마음의 중압감 뜻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실지 모른다는 두려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그리고 다가올 고난에 대한 중압감에 짓눌려 있었습니다.

 

영적 도피와 마비 (Spiritual Paralysis):인간은 감당할 없는 스트레스나 슬픔(뤼페) 밀려오면, 그것을 직면하기보다 회피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제자들에게(코이모메누스)’ 육체의 피로 때문이기도 했지만, 현실의 쓰라린 슬픔을 잊어버리고자 영혼이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버린영적 도피이자 마비 상태였습니다.

 

무능력의 악순환: 슬프고 두려워서 기도를 하고, 기도를 하니 영적 공급(에니스퀴온) 끊겨 유혹(페이라스모스) 속에 갇히게(에이셀데인) 되는 참담한 악순환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2.       저의 삶의 고백과의 거룩한 연결

 

제자들의슬픔으로 인한 성도님이 번째 묵상 글에서 통찰하신 현대인의 고질병과 완벽하게 매치됩니다.

 

"군중 속의 외로움"이라는 현대판 뤼페(슬픔):

우리는 도시 한복판에서 수많은 사람과 인터넷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극심한 소외감과 외로움, 미래에 대한 불안(뤼페) 느낍니다.

 

"인터넷과 미디어"라는 현대판 :

제자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으로 도피했지만, 오늘날 우리는 내면의 외로움과 공허함을 직면하기 싫어서스마트폰, 미디어, 끊임없는 인간관계의 소음이라는 현대판 속으로 빠져듭니다.  하나님과 독대하는 고독의 동산으로 들어가는 훈련이 없는 우리는, 영적인 마비 상태() 빠져 기도의 능력을 상실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의 5가지 겟세마네 묵상 대장정 총결산:

 

제가 2024 12 26일에 적으신예수님 사역의 중추(Backbone)”라는 글에서 시작하여, 오늘 누가복음 22장의 겟세마네 원어 묵상까지 이어온 여정은 편의 웅장한 영적 교향곡과 같습니다.  5가지 포인트를 하나의 흐름으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거룩한 습관(θος, 39): 예수님 사역의 중추는 새벽 외딴 곳에서 조용한 시간, 장소, 마음으로 하나님과 독대하는 기도의 루틴이었습니다.

 

유혹에 빠짐σελθεν, 40): 기도가 멈추면 분별력을 잃고 잠언 7장의 청년처럼 유혹의 영역 안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 파멸하게 됩니다.

 

고난의 (ποτήριον, 42): 기도는 뜻을 꺾고 내게 주어진 사명의 잔을 받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삶을 기쁨으로 전제(σπένδω) 쏟아붓는 제자도로 나아가게 합니다.

 

하늘의 (νισχύων, 43): 모든 헌신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4:6) 오직 하늘로부터 내면의 뼈대를 견고하게 하시는 성령의 힘으로만 가능합니다.

 

슬픔의 잠을 깨우라(ναστάντες, 45-46): 그러므로 외로움, 불안, 무기력(슬픔, λύπη) 취해 세상의 소음() 속으로 도피하지 말고, 의지적으로일어나(ναστάντες)’ 기도의 자리를 사수해야 합니다.

 

성도님이 귀한 영적 비밀을 깨닫고 갈망하고 계시기에, 비록 우리가 바쁜 도시 한복판에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성도님의 삶은 결코 잠든 제자들의 자리에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슬픔과 외로움을 기도의 동산으로 바꾸시는 성령의 능력이 성도님의 매일의 가운데, 특히 하루를 시작하는 조용한 시간에 날마다 부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하며 응원합니다(인터넷).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