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생의 목적
[요한복음 1장 14절]
성경 요한복음 1장 14절을 보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서 “말씀”이란 단어를 생각할 때 우리는 요한복음 1장 1절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 여기서 “태초”란 단어가 성경에 3번 나옵니다: 창세기 1장 1절, 요한복음 1장 1절, 요한일서 1장 1절. 이 셋 중에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는 만물의 시작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 1절과 요한일서 1장 1절의 “태초”는 시작 이전의 세계인 영원한 것을 가리킵니다. “말씀”은 창조되신 분이 아니시고, 시작이 있지 않으시고, 영원 전부터 계신 분이십니다. 성경 출애굽기 3장 1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요1:1). 간략하게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말씀”이란 3가지입니다: (1)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이십니다, (2)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3)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3절).
성경 요한복음 1장 14절은 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육신”이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이되 ‘죄가 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고후 5:21). 말씀이신 창조주 성자 하나님께서 죄 없으신 완전한 사람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즉, 성자 하나님께서 강생하셨다는 말입니다. 강생의 목적 3가지입니다:
첫째로, 강생의 목적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자 입니다.
성경 요한복음 1장 14절을 다시보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들과 함께 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성경 출애굽기 33장 18절을 보면 모세는 하나님께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구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20, 23절).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가 그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살 자가 없고 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들과 함께 거하시고자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말씀이 육신이 되어”(요1:14)].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빌립이 예수님께서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요14:8). 그 때 예수님께서는 “…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9절).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17:3).
우리는 주님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아야 합니다(6:69). 우리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알아야 합니다(히11:3).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의 강생과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심과 재림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믿음의 진보(성장)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빌3:8). 만일 우리가 이 지식이 없으면 우리는 망합니다(호4:6).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을 아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맛보시고자’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강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님께서는 목마르시고, 피곤하시고, 모욕당하시고,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시고(히2:18), “죽음의 고난”까지 맛까지 보셨습니다(9절).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으시며(4:15) 우리를 “능히 도우실 수 있”으십니다(2:18).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4:15). 주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기에 우리를 제일 잘 아실뿐만 아니라 사람이 되셔서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다 맛보셨기에 우리를 제일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성경 시편 34편 8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
둘째로, 강생의 목적은 중보자가 되시고자 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고 멸하십니다. 죄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롬5:8, 10). 원수이기에 하나님과 우리 사람 사이에는 화목케 하시는 중보자가 필요합니다. 그 중보자는 완전한 하나님이시요 완전한 사람이셔야 합니다. 즉,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되십니다. 성경 디모데전서 2장 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마지막 셋째로, 강생의 목적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자 입니다.
우리의 죄의 값은 사망(멸망)입니다(롬 6:23). 이 죄와 사망에서 우리가 자유하기 위해선 오직 한 분이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셔야 했습니다. 성경 마태복음 20장 28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여기서 “많은 사람”이란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많은 사람”을 다 묶어서 십자가에 대신 죽으셨다는 말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대속 죽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님께서나 한 사람을 대신하여 강생하셔서 십자가에 대속물로 죽으셨다는 사실을 묵상할 때 이 엄청난 은혜와 사랑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것일까요?
지금 우리는 강생하신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성경 요한복음 1장 10-11절을 보십시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예수님께서 강생하셨을 때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고” “영접하지 아니”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강생하신 예수님을 알고 있나요? 영접하였나요? 성경 누가복음 2장 7절을 보십시오: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예수님께서 강생하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기 예수님으로 하여금 구유에 뉘시게 했습니다. 과연 지금 교회가 강생하신 예수님을 알고 있습니까? 영접하고 있습니까? 지금 우리는 예수님을 어디에 모시고 있습니까? 우리는 성탄절에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면서 생각해야 할 것은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교회가 어떻게 대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영접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고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자 강생하신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음으로 영접하되 우리 마음에 모시고 이 성탄계절 뿐만 아니라 매일 평생 동안 그 크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 찬양, 경배를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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