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6)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22절 말씀 묵상]
넷째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입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20절을 보십시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여러분, 혹시 타는 불에
물을 끼얹어 본적이 있으십니까? 왜 우리는 타는 불에 물을 끼얹는 것인가요? 그 이유는 불을 끄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불을 끄지 않고 불을 더 활활타오르게 하려면 우리는 휘발유를 쏟아 붇습니다. 그 좋은 예가, 우리가 캠핑을 가서 밤에 모닥불을 필 때 나무를 모아 놓고 그 나무에
휘발유를 뿌린 후 불을 붙히는 것입니다. 그 휘발유를 뿌린 나무에 불을 붙히며 얼마나
활활 나무가 잘 타오릅니까? 그렇게 모닥불을 피고 놀다가 우리가 잠들기 전에 그 모닥불을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그 모닥불을 끄기 위해서 그 위에 물을 붓습니다. 물을 붓되 우리는 혹시나 작은 불씨가 있을까봐 확실하게 불을 끄기 위해서 충분한 용량의 물을 모닥불 위에 붓습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편지를 써내라면서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그 의미가 뭘까요? 성령님을 소멸한다는 것은 마치 타는 불을 끄듯이 성령의
불을 끄는 것입니다. 새찬송가 184장
“불길 같은 성신여”란 찬양 가사 하시죠? 그 가사 1절과 후렴은 이렇습니다: (1절) “불길 같은
성신여 간구하는 우리게 지금 강림하셔서 영광 보여줍소서”, (후렴) “성신이여 임하사 내 영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합소서 기다리는 우리게 불로 불로 충만하게 하소서.” 이 찬송가 가사를 보면 “불길 같은 성신”이라는 표현과 그 불길 같은
성령님이 우리에게 “불로 불로 충만하게” 하시길 구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왜 그리 표현했을까요? 성경을 보면 성령님을 여러 상징적인 명칭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불”입니다(물, 바람, 기름, 비둘기). 성령님을 불로 묘사한 성경구절 중 마태복음 3장 11절과 사도행전 2장 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3:11),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행2:3). 이 말씀들을 보면 마태복음 3장 11절은 “성령 세례”를 말하고 사도행전 2장 3절은 “성령충만”을 말하는데 그 가운데 성령님을 상징하는 “불”의 역할은 성령
세례에 있어서는 우리의 죄를 다 태우는 역활을 하고 성령충만에 있어서는 성령의 은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 두 성경구절을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인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말씀과 연관해서 생각한다면 먼저 사도행전 2장 3절과 연관할 때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 교회 성도들에게 성령님을 소멸하지 말라고 말한 의미는 성령님의 은사를 존중히 여겨(박윤선) 그 성령의 은사를 억압하거나(억누르거나)(stifle)해서 성령님의 행하시는 일을 제안하거나 저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Believer’s
Bible 주석). 그리고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 말씀을 마태복음 3장 11절과 연관할 때 바울이 성령님을 소멸하지 말라고 말한 의미는 계속해서 죄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예는 데살로니가전서 4장 7절에서
이미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말한 것처럼 더이상 더럽게(부정하게)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인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더 이상 남의 아내를 가로채지 말고(6절,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거룩하게 살라는 말입니다(7절,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한 것입니다(3:13).
우리는 성령님을 소멸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역사인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화의 역사를 소멸하는 죄를 더이상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해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은혜로 주어진 성령님의 은사를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의 은사를 억누루지 말고 성령님의 행하시는 일을 제안하거자 저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성령님의 은사를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데 지혜롭고 절제있게 마음 것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장 20절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먼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말했을 때 드는 생각은 바울은 그 교회 성도들 중 잘못된
종말론적인 소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러한 잘못된 종말론적인 소망 가운데서 열심히 자기 손으로 일을 하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남의 일을 참견하고 문제만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4:11). 왜 그들은 잘못된 종말론적인 소망이 있었을까요? 안그래도 데살로니가전서 1장 10절을 보면 그 교회 성도들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의 소망을 가지고 환난 중에서도 인내하고 견디고 있었습니다(3절, “소망의 인내”). 그런데 그렇게 소망의 인내를 하면서 예수님을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 중에 어떻게 잘못된 종말론적인 소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잘못된 예언을 받아들였기 때문임. 그럼 누가 잘못된 예언을 전했겠습니까?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거짓 예언을 한 것입니까? 거짓 선지자들이나
거짓 예언자들이나 거짓 선생들이 아니었겠습니까?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여기 미국 LA에 1990년대 초반에 마라나타라고 해서 1992년 10월 28일을 휴거의 날로 굳게 믿고 그 시간이 밤 12시 자정이라고 해서 소동아닌 소동이 난 적이 생각납니다(인터넷). 그 때 저는 예수님의 재림의 날은 오직 주님만이 아시는데 어떻게 그런 말도 안되는 거짓 예언을 해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런 거짓 예언에 사람들이 현혹되어서 휴거를 한다고 막 떠들석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생각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언에 대해서 성경 말씀에 견고히 서서 흠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거짓 예언을
매우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어떠한 위험이 있는가하면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예언을 하잖게 여길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비록 잘못된 종말론적인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다할지라도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말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말의 의미는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예언을 가겹게 여기지 말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MacArthur). 특히 바울은 그들이 바울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하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것을 감안하고(2:13)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5:20)고 권면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거짓 예언자(선지자)의 거짓된 예언은 멸시해야 하지만
참된 예언자(선지자)의 참된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 요한계시록 1장 3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여기서 “때”란 바로 장차 일어날 예언의 성취입니다(Believer’s
Bible 주석). 그리고 그 예언이란 주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가리킵니다(1절). 그리고 그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의 초점은 바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4,
8절). 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신 분이십니다(5절하).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6절).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7절). 성경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을
보십시오: “그것은 주님이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내려오실 때 …”(현대인의 성경). 그 때에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볼 것이며 그분을 찌른 사람들도 예수님을 볼 것입니다(계1:7). 그리고 세상에 모든 민족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슬피 울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7절). 그 이유는
그들이 다시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회개의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 아니라 죄책감과 심판의 두려움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MacArthur).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은 이러한 죄책감과 심판의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흘리신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셨기 때문입니다(5절하). 오히려 우리 신부된 교회는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오실 때 충만한
기쁨으로 신랑되신 예수님을 맞이할 것입니다(요3:29). 그러므로 기쁨으로 신랑되신 예수님을 맞이할 우리 교회는 먼저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가까왔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사도 요한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말하였습니다(계22:20). 우리도 사도 요한처럼 예수님의 음성인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믿음으로
말해야 합니다(20절). 또한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가까왔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으로 주님의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켜야 합니다(계1:3).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의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또한 우리 마음에 새겨서 신랑되신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합니다. 준비하되 우리는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함으로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예언의 말씀을 믿고 성령님의 성화 가운데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면서 성령님의 은사를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신실하 사용하며 살아가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8년 10월 22일, 성령충만한 삶과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살길 기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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