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치유는 그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것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는 그분이 우리의 고통을 없애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무엇보다도 우리와 함께 고통을 나누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헨리 나우웬, “긍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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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에 우리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어쩔 줄 몰라 할 때가 너무나 많지 않나 생각합니다. “어자피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예요. 할 말도 없다고요. 도대체 제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나우웬).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고통 당하는 사람 앞에서 자신의 무기력함을 솔직히 자신에게 인정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무기력함 뿐만 아니라 무익함 속에서 고통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그저 뒤에서 숨어서
기도할 때가 많치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고 있는 진리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 진리는 로마서 12장15절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우리는 고통 중에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신앙의 미를 잃어버리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저 고통당하는 자와 함께 있어 주는 것 그리고 우는 자의 옆에 잠잠히 있어 주는 것은 참으로 귀한 섬김의 사역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섬김의 사역이 쉽지 않은 이유는 그 일은 우리에게 상대방과 동일하게 상처받기 쉬운 상황으로 들어갈 것을 요구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사람과 함께 유약함 혹은 무력함을 경험하는 장소로 들어가기를 요구하기
때문”인 것입니다(나우웬).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치유의 사역이라고 헨리 나우웬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능은 누군가가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에 그 고통을 없애줘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지 않나 생각합니다. 물론 더 근본적인 본능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을 볼 때 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리스도인으로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 볼 때에 어떻게서든 도와주려고 하는 가운데 상대방의 고통당하는 것을 없애주려고
이런 저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고통을 공감하는 사람, 그래서 자신이 마음의 문을 열고 자신의 고통을 나눌 때에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어주는 사람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당하는 자가 자기의 마음
문을 열고 고통의 자리에 초청할 때에 우리는 겸손히 그리고 온유한 자세로 초청해 응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고통당하는 자와 함께 하는 고통의 자리에서 우리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상대방의 고통의 음성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해서 위로해야 겠다는 강박감을 내려놓고 함께 상처입고자 하는 자세로 귀담아 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내려놓아야 할 것들을 내려놓아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고통당하는 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하는 우리 안에 있는 생각들이나
경험담이나 편견 및 판단하고자 하는 자세 등등을 다 내려놓아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우리 마음에 진정으로 환영하는 것이라 생각에 됩니다.
하나님의 신비한 사랑은 우리와 함께 고통을 나누길 원하신다는 이 헨리 나우웬의 말씀을 귀담아 듣는 가운데 우리는 그 사랑을 실천에
옮겨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히2:18)는 하나님이신즉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고통당하는 자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의 향기를 들어내야 할
것입니다.
고통당하고 있는 자들을 예수 십자가의 고통으로 향하게 하기를 기원하면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07년 2월2일, 고통당하고 있는 사랑하는 지체들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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