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한 관계를 위해… ‘솔직’과 ‘진실’의 다름을 알아야”란 기사를 읽고 또 읽은 후 …
여러모로 공감되는 글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 글을 읽고 또 읽은 후 또 다시 읽어 내려가면서
조목조목 몇 개의 글에 대한 제 생각을 좀 글로나마 적어서 나누고자 합니다:
1. “친구가 많고, 겉보기에는 사람들과 두루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자신은 어느 모임에서도 중심에 있지
못하고 늘 ‘겉도는 사람’으로 느껴진다고 했다.”
이
글에서 “겉도는 사람”에 대해 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겉돈다”란 “공적인 친분을 사적인 친분으로 확장하는 능력 또는 의지의 부족”이라고 내린 정의(인터넷)를 생각할 때 겉도는 사람은 어느 정도 자기 나름대로 공적인 친분은 유지하는 것 같은데
사적인 친분을 좀 더 깊게 하는 의지와 능력이 결핍돼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겉도는 사람은 어느 모임이나 조직이나 단체에서 자신만 소외되는 느낌을 들기에 외로워하면서 그 모임이나
조직이나 단체에 소속감이나 애착도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공적으로 모임을 갖지만 정작 자신은 그 모임에서도 중심에 있지 못하고 항상
겉돌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2.
“사람들과 잘 지내는 편이라는 말은 관계의 ‘넓이’를 말할 뿐, 그 안에 ‘깊이’가 존재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알고 지내는 사람이 많고, 연락할 사람이 있고,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는다고 해서 반드시 친밀함이 느껴지는 건 아니다.”
겉도는
사람은 공적으로 폭 넓은 인관 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적으로는 소수의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깊은
인간관계가 주는 친밀감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외로움을 자주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
“우리는 종종 깊은 관계를 원하면서도, 그 깊이를 만들어줄 중요한 요소 하나를 회피한다.
바로 ‘내 약점을 드러내는 일’이다.
진짜 친밀감은 내가 두려워하는 것, 창피한 면, 상처받았던 기억들을 조금씩 꺼내놓는 데서 시작된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주저한다. ‘혹시 상대가 나를 판단하지 않을까?’ ‘실망하지 않을까?’ ‘내 이야기를 흘려듣거나, 누군가에게
퍼뜨리면 어떡하지?’ 이런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외로움을
자주 느끼는 겉도는 사람은 깊은 인간 관계를 만들어 주는 “내 약점을 드러내는 일”을 거부하여 회피합니다. 다시 말하면, 겉도는 사람은 자신의 취약점을 정직하고 투명하게 상대방에게 나누는 것을 매우
기피합니다. 그 이유는 그/녀는 상대방이 혹여나 자기를 판단하든지 또는 자기에게 실망할까봐 등등 걱정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 겉도는 사람은 이런 저런 불확실성
때문에 어느 정도 무난하고 안전한 대화만 하다보니 깊고 친밀한 인간 관게보다 무난한 인간 관계를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는 깊은 관계를 원한다 할지라도 마음을 열고 자신의 취약점을 나누는 깊은 대화를 할 수가
없기에 친밀한 연결이 없는 얕은 물 위를 맴도는 것처럼 깊어지지 못한 채 맴돌게 되는 인간 관계를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는 “깊은 대화와 친밀한 연결은, 위험을 감수한 진심의 공유 위에 쌓인다”는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4.
“진실성은 내면의 가치관과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일치할
때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태도다. 무언가를
굳이 증명하거나 꾸미려 하지 않아도, 사람은 본능적으로 ‘이 사람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감지할 수 있다.
진실한 사람은 내면에 대한 확신이 있다.
그래서 더 꾸미지 않아도 된다.”
인간
관계에서 불확실성으로 인하여 불안과 걱정과 두려움을 가진 겉도는 사람은 내면의 가치관과 그/녀가 하는 말과 행동이 불일치합니다. 예를 들어, 그/녀는 깊은 인간 관계를 맺기 위해선 자신의
마음 문을 열고 정직하고 투명하게 자신의 취약점까지 상대방과 나눠야 한다는 내면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도 자신의 불안감 속에서 걱정과 두려움이
앞서기에 그녀는 그 상대방 앞에서 말과 행동을 자신의 취약점까지 나눌 정도로 정직하고 투명하게 하지 않습니다(못합니다). 이렇게 겉도는
사람은 내면에 대한 확신이 없기에 진실성보다 꾸밈이 앞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거나 과장하며, 상대방의 말과 행동을 공감하기보다 판단하고, 지지보다
경쟁합니다. 그러기에 겉도는 사람은
꾸밈이 없이 그/녀의 그 모습 그대로 상대방에게 나가가지 못하고 항상 표면적인 겉모습의 말과 행동을 유지하려고
애씁니다.
5. “관계는 ‘적당히 잘 지내는 사람’이 되려 하기보다, ‘편안하게 진심을 꺼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데서 깊어진다. 누군가에게 불편한 이야기를 했을 때에도 그 사람이 내 곁에 남아 있을 때,
관계는 한 걸음 더 깊어진다. 내 약점과 부족한 점들을 보여주었는 데도 그 사람이
등을 돌리지 않았을 때, 우리는 마음의 문을 조금 더 열 수 있게 된다. 그런 작은 순간들이 쌓일 때, 비로소 진짜 친밀감이 생긴다.”
‘나는 편안하게 진심을 꺼낼 수 있는 사람인가?’하는 질문을 먼저 제 자신에게 던져봅니다. 상대방이 저에게 편안하게 진심을 꺼내 나눌 수 있도록 제
내면의 원칙은 제 자신이 먼저 정직하고 투명하게 제 마음을 상대방에서 진솔하게 나누되 꾸밈이 없어 제 취약점까지도 편안하게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함에 있어서 저는 상대방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미리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님 안에서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일하시사 제 마음을 열어 나눌 때 상대방의 마음도 열어주시사 그도 저에게 진솔하고 투명하게 자신의 취약점까지도 나누는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할 때 주님 안에서 형제의 관계의 “진짜 친밀감”이
생깁니다. “진짜 관계는 잘 보이려는
애씀보다는, ‘이 사람이라면 내 마음을 알아줄 거야’라는 신뢰 위에서 피어난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6. “좋은 관계를 위해서는, 좋지 않은 관계를 과감히 정리하는 용기도 필요하다. 이것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성이다.”
저는
개인적으로 진심을 느끼지 못하는 ‘가짜 관계’나 ‘표면적인(superficial) 관계’ 원치 않기에 기피합니다. 저는 그러한 관계에 아무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워낙 저는 인간 관계에서도 “아니오”해야 할 때는 “아니오”를 분명하게 하는 사람인지라 상대방이 저와의 관계를 그저 가볍게, 깊이가 없이,
형식상으로 맺길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저도 더 이상 깊은 진짜 관계를 추구하는 것을 멈추고 상대방이 원하는 데로 저도
그리할 때가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저는 상대방이 가짜 관계나 표면적인 관계를 너무나 지나치게 이기적으로 자기 유익만을 위해 저와 맺으려고 한다고 생각되면 과감히
그 관계를 정리하곤 합니다. 상대방에서
주님의 이타적인 사랑과 진실성을 느낄 수가 없고 오히려 자기 유익만 구하면서 저를 이용만 하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관계는 “No
thank you!”입니다.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명확해진다”는 말과 “관계의 진실성은 말이 아니라 시간 위에 서서히 드러난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7. “진짜 관계는 수많은 사람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놓을 수 있는 단 한 사람에게서
시작된다. 그래서 결국,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더 많은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더 솔직한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두는 일이다.”
과감히
가짜 인간 관계를 거부하고 진짜 인간 관계를 원하는 저는 주님의 뜻이라면 수많은 사람에게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되 주님 안에서 제가 먼저 마음 문을
열고 정직하고 투명하게 제 마음의 이야기를 나누되 제 취약점들까지도 서슴없이 나누므로 상대방도 마음 문을 열어 자신의 마음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누는 성령님의 일하심을 깊이 경험하는 참된 교제를 사모합니다. 그 와중에 주님이 저에게 주시는 마음은 ‘한 영혼 사랑하기’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이 허락하신 ‘인터넷 사역 한국으로’를 통해 온라인으로 정직하고 투명하며 제 취약점까지도 나누는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대화를 추구하다가 매년마다 선교지를 갈 때에 한국에 들려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주님 안에서 즐기고 있습니다. 특히 그 만남들 속에서 저는 주님의 뜻이 계셔서 일대일로
만나게 될 때 성령님께서 주님 안에서 진짜 형제, 자매의 관계의 축복을 경험하곤 합니다. 그 축복된 진짜 관계에서는 꾸밈이 없는 “진짜 나”를 서로를 내어놓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관계 속에서 성령님이 연결시키는 것을 경험할
때 그 관계는 주님 안에서 조금씩 조금씩 더 단단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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