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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cept God’s Invitation to Rest

  https://www.thegospelcoalition.org/article/gods-invitation-rest/ Accept God’s Invitation to Rest August 24, 2025   |    Scott W. Kay © iStock.com/nullplus Share Post Email Advertise on TGC “It feels so nice to finally stop and catch my breath.” Can you remember the last time you had a moment like that? For some of us, it’s been a while. In our hard-working, highly productive culture, we can sometimes feel like exhausted swimmers swept downstream in a fast-moving river, fighting to keep our heads above water, gasping for air. We get up early and stay up late. We never waste a minute. Our schedule is full, running here, running there, running late, running to catch up, running on empty, until we collapse in utter exhaustion. Underneath the satisfaction of being hard-working, hard-playing people is a weariness that’s desperate for the pace to relent so we can rest and recharge. Deep down, we’re  dying  to slow down and take a break. We keep telling ours...

신앙의 성숙함을 추구하십시다(로마서 14장 1-12절).

신앙의 성숙함을 추구하십시다.

 

[로마서 14 1-12절 말씀 묵상]

 

과연 여러분들은 가정이나 직장이나 인간관계에서의 갈등과 분쟁을 어떻게 해결해 나아가십니까?  물론 제일 먼저 갈등과 분쟁을 해결해 나아가기 위해선 그 갈등과 분쟁의 원인을 파악(진단)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정에선 부부 관계나 부자 지간 관계에서의 갈등과 분쟁교회에서도 형제자매들의 관계에서의 갈등과 분쟁왜 갈등과 분쟁이 있는지 그 원인을 먼저 파악해야 존재하고 있는 갈등이나 분쟁을 해결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주 화요일 새벽기도회 때 사무엘하 3 30절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한 사람 다윗 왕의 장군이 요압이 사사로운 개인 감정인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사울 왕의 장군인 아브넬에게 복수하므로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됨에 큰 방해를 한 사건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깨달은 핵심 교훈은 나라나 교회가 가정이나 하나됨(통일성/연합성)을 지켜 나아가기 위해선 사사로운 개인 감정에 치우쳐서는 아니된다는 것이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라 나라나 교회나 가정의 하나됨(통일성)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정이나 교회의 하나됨을 지켜 나아가기 위해선 우리는 서로를 향한 복수심이나 용서하지 않는 마음분노 등에 치우쳐서는 아니됩니다.  서로의 관계에서 아직도 과거의 입는 상처나 아픔 등으로 서로를 향하여 분노의 감정이나 복수의 칼을 갈고 있으면 그 가정과 교회는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갈등과 분쟁 속에서 가정이나 교회가 갈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많은 가정과 교회가 분쟁 속에서 갈라지고 있음.  가정과 교회의 하나님됨을 신실하게 지켜 나아가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의 핵심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전 생각함.  그것은 다름 아닌 “교만”과 “무식”(혹은 무지)입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4 3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나 또한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믿음이 강한 자는 믿음이 연약한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믿음이 강한 자를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신앙이 성숙한 자가 자기의 진리 지식의 우수함을 인하여 형제에게 대해 우월감을 가지고 신앙이 미성숙한 자를 업신여기지 말라는 말씀이요(박윤선) 신앙이 미성숙한 자는 무지함 가운데서 신앙이 성숙한 자를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4 1-12절에서 사도 바울은 기독교의 양심 자유에 관하여 아디아포라(adiaphora문제를 취급합니다.  아디아포라란 무슨 말입니까?  원래 이 단어는 철학적 용어로서 “대수롭지 않은”, “그리 중요치 않은”, “가치중립적인”, “해도 그만안 해도 그만인 것들” 정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철학적 용어가 신학 용어로 사용되었을 때 그 의미는 그리스도인들이 성서에서 확실한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를 만났을 때그 문제를 개인이나 공동체의 문화적 양심과 상황적 특성에 근거하여 해결을 시도한다는 뜻이 담겼습니다.  다시 말하면성경이 명백하게 말하지 않아서사람의 형편에 따라 임의로 결정하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남겨진 영역을 “아디아포라”라고 말합니다(인터넷).  이 아디아포라를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정의를 내리셨습니다: “성경에 금하거나 명령하지 않은 어떤 의식적인 행사를신자의 개인적 양심에 맡김”을 말합니다(박윤윤선).  그 한 예로 한국 교회에서는 요즘 술과 담배 등을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신학교 교수님은 주일 일하는 것도 아디아포라라고 말하는 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아디아포라 문제는 구약 성서에 나와있는 엄격한 음식법(11,  14)을 따르는 문제와 종교적으로 지키는 절일의 날짜 문제와 같은 것이였습니다(박윤선).  로마 교회에 신앙이 성숙한 성도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의 법들이 성취되었다고 믿고 있었기에 구약에서 말씀하고 있는 엄격한 음식법이나 종교적 절일의 날짜를 지키지 않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미성숙한 성도들은 그 구약의 음식법이나 종교적 절일의 날짜를 꼭 지켜야 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서로의 다른 양심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충분히 교회 안에 분쟁의 요소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 분쟁 요소란 신앙이 성숙한 성도들은 그들의 교만함 가운데서 신앙이 미성숙한 성도를 업신여기고 비판할 위험이 있었던 반면에 신앙이 미성숙한 성도들은 그들의 무지함 속에서 신앙이 성숙한 성도들 판단하는 죄를 범할 위험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내려 가면서 신앙이 성숙한 자들에게는 신앙이 미성숙한 자들을 업신여기지 말라고 권면하는 반면에 신앙이 미성숙한 성도들에게는 신앙이 성숙한 형제들을 판단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3).  왜 우리가 교회 안에서 형제자매를 업신여기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의 교만함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다른 형제자매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포용하지 않고 판단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의 무식(무지때문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에 있는 성숙한 성도들에게 교만한 가운데서 그리고 무식으로 믿음이 연약한 형제들즉 미성숙한 형제들을 업신 여기고 비판하지 말라고 권면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통일성을 힘써 지켜 나아가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책임이 모든 교회 성도들에게 있지만 바울은 특히 로마에 있는 믿음이 강한 성도들즉 성숙한 성도들에게 그 책임을 잘 감당하기를 특히 권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신앙이 성숙한 성도들이 교회의 통일성을 지키는 일에 믿음이 연약한 자들보다는 더 책임이 막중하지 않겠습니까.  과연 어떠한 책임이 있습니까?

 

     첫째로신앙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믿음이 연약한 형제들을 업신여기고 비판해서는 아니됩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4 1, 3절을 보십시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 이니라”.  여기서 “믿음이 연약한 자”란 오늘 본문 2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채소”를 먹는 성도들을 가리킴.  이 성도들은 아직도 구약 성서의 엄격한 음식법(1114)을 좇는 자들로서 우상에게 받쳐졌던 고기가 깨끗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 그 고기를 먹기를 회피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레위기 11장에 나와있는 엄격한 음식법을 좇아 주로 채소를 먹었던 것입니다.  그러난 믿음이 강한 자신앙이 성숙한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므로 이방인 고기 마켓에서 파는 제사 드린 후에 파는 값산 고기도 먹었습니다(MacArthur).  바울이 디모데전서4 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신앙이 성숙한 자들은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감사함으로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이 지으신 음식인 고기도 감사함으로 먹는 신앙이 성숙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아직도 옛 언약인 구약 성서에 엄격한 음식법을 좇아 고기를 먹지 않고 채소를 먹는 믿음이 연약한 형제들을 업신여기지 말고 비판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영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교만한 자들은 믿음이 연약한 형제를 업신 여기는 일이 교회란 공동체 안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성경 지식이 많고 신앙생활도 더 오래 했다고 하여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교회 형제와 비교하여 영적 우월감을 가지고 교만한 가운데 그 형제를 얕 볼뿐만 아니라 (look down)(NIV아예 경멸(despise)까지 할 위험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신앙이 성숙해 보이는데 마음은 영적 우월감 속에서 교만이 가득차 있기에 믿음이 연약한 형제를 우습게 보고 깔보고 무시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 사람은 율법주의 자야어떻게 성경 지식도 없어서 아직도 주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껍데기 신앙 생활을 하는지 .. 쯔쯔.  바울은 만일 진정으로 신앙이 성숙한 그리스도인 이라면 믿음이 이렇게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래서도 아니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신앙이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이 연약한 형제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음(1).  무슨 뜻입니까?  신앙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신앙이 미성숙한 형제들과 서로 견해 차이를 문제시하여 논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박윤선).  다시 말하면성숙한 자들은 주님 안에서 고기로 감사로 먹어도 된다는 견해를 가지고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채소만 먹어야 한다는 견해를 문제시하여 논쟁하는 것을 삼가하라고 바울은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신앙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믿음이 연약한 형제들을 용납(accept)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기를 감사함으로 먹는 신앙이 성숙한 자들에게 채소를 먹는 신앙이 미성숙한 자들을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4 1절에서 “받되”라는 단어의 헬라어 의미는 “완전히 받으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숙한 성도들에게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을 의심하지 말고 만족한 회원(교회원)으로 여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박윤선).  맞습니다신앙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미성숙한 그리스도인 형제를 의심하지 않고 만족한 교회 멤버로 여겨야 합니다.  비록 신앙이 미성숙한 성도는 신앙이 성숙한 성도보다 믿음이 부족하여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없고 그저 “채소”를 먹을 수 밖에 없는 믿음일지라도 신앙이 성숙한 성도들은 믿음이 연약한 형제들을 비판하지 말고 그들을 용납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왜 신앙이 성숙한 성도들은 미성숙한 성도들을 용납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3).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이 무엇이관대 하나님께서 받으신 자들을 배척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신앙이 미성숙한 성도의 책임은 무엇입니까?  다시 말하면교회 안에서 교회의 통일성을 지켜 나아가기 위해서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이 믿음이 강한 형제들을 향한 태도(자세)는 어때야 합니까?

 

     첫째로신앙이 미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신앙이 성숙한 형제를 판단해서는 아니됩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4 3절을 보십시오: “…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  여기서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은 “비난(규탄)하다”(condemn)라는 뜻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성도는 믿음이 강한 형제를 비난해서는 아니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당시 로마 교회 안에 있는 믿음이 연약한 유대인 성도들은 아직도 옛 언약인 구약 성서의 음식법(1114)이나 안식일 지키는 종교 의식이나그리고 성전 안에서 제사 드리는 법들을 지켜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였습니다.  이들은 아직도 구약 시대의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  그러니 이러한 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이 볼 때 믿음이 강한 자들은 무책임하게 보였을 것이고 또한 타락했다고 생각되었을 것입니다(MacArthur).  바울 당시 모든 고기는 일단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다가 시장에 유통되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우상에게 받쳐졌던 고기를 시장에서 사서 먹을 수 있는지그리고 안식일도 거룩히 지키지 않고 구약 성경에 나와 있는 절기들도 안지키고(5또한 구약 성경의 제사법도 지키지 않는 참으로 무책임하고 타락한 성도로 보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 이 믿음이 연악한 성도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 믿음이 강한 형제들은 무책임하고 심지어 타락한 성도들로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비난(판단)은 결국 무식(무지)으로 부터 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성경에 대한 바른 지식이 결핍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아직도 옛 언약 시대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열린 새 언약 시대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기에 이렇게 신앙이 성숙한 형제들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둘째로신앙이 미성숙한 그리스도인도 신앙이 성숙한 형제들이 자기들을 용납(accept)하는 것처럼 그들 또한 신앙이 성숙한 형제들을 용납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가 용납해야 합니다.  신앙이 성숙한 자들은 미성숙한 자들을그리고 신앙이 미성숙한 자들은 성숙한 자들을 용납해야 합니다.  서로 의심하지 말고 교회의 만족한 회원(멤버)로 받아들여야 함왜 서로 받아들여야 합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신앙이 성숙한 자들이나 미성숙한 자들이나 다 받으셨기 때문입니다(3).

 

     우리가 교회의 통일성을 잘 지켜 나아가기 위해선 우리가 서로 용납(받아야)해야 합니다.  결코 우리는 서로 업신여기고 비판하며 판단해서는 아니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서로의 다른점을 인정하며 그 다른점들을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축복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지난번 행복한 가정세미나 때 박수웅 장로님이 ‘다르다’는 것은 ‘틀리다’가 아니라 기회요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의 서로 다른점들은 서로를 알아가는 기회요 또한 서로의 다른점들을 존중하므로 교회의 통일성을 지켜 나아갈 수 있는 좋은 축복의 기회라 생각합니다.  신앙이 성숙한 성도는 신앙이 미성숙한 성도의 부족한 성경 지식을 알아가며 존중하므로 그 부족함을 채워주는데 헌신해야 하며 신앙이 미성숙한 성도는 성숙한 형제의 성경지식을 존중하여 더 배우는데 도전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서로의 다른점을 알아가며 존중하는 가운데 세 가지 중요한 핵심 원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1)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이 성숙한 자들이든 미성숙한 자들이던 모두 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4 6절을 보십시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신앙이 성숙한 자는 주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므로 구약에서 말씀하고 있는 절기(“날”)도 더 이상 구약의 규정을 따라 문자적으로 지키지 않고 신앙 시대의 방식으로 지키며 제사에 드렸던 고기도 먹되 감사함으로 먹습니다.  신앙이 미성숙한 자도 그 고기를 먹지 않되 하나님께 감사하므로 먹지 않기에 중요한 것은 신앙이 성숙한 자나 미성숙한 자나 다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믿음이 강한 자들과 연약한 자들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절기를 지키는 일이나 고기를 먹는 일에 관하여 구약의 관점과 신약의 관점이 다를찌라도 중요한 것은 두 그룹이 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면 교회는 교회의 하나됨(통일성)을 지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어떻게 교회 안에 믿음이 다 같겠습니까?  고기를 먹을 수 있는 믿음이 성숙한 자들도 있는가 하면 우유 밖에 먹을 수 없는 성도들도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다 똑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들의 마음 중심이 믿음이 강하던 믿음이 약하던 하나님께 (구원의 은총에감사하는 마음이 있다면 결코 교회는 분쟁 속에 휘말려 갈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란 공동체 안에서 서로 다른점들 조차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게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주님의 몸된 교회의 통일성을 지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2) 서로의 다른점들을 극복해 나아가는 중요한 핵심 원리는 우리 모두 다 마음이 주님을 위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4 7-8절을 보십시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오늘 본문 6절을 보면 “주를 위하여”란 단어가 3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여기 7-8절에서도 2번이나 나옵니다.  다 합쳐서 5번이나 나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기독교인의 양심 자유(adiaphora), 즉 하나님의 명령이나 금령으로 제재 받지 않는 것들에 있어서 신자들이 이렇게 하든지 저렇게 하든지 주님을 위한다면 당연하다는 뜻입니다(박윤선).  그 이유는 성도의 양심 자유란 각자가 자기 양심에 옳게 생각되는대로 행하되 하나님의 영광되는 여부를 표준으로 하기 때문입니다(박윤선).  그래서 신앙이 성숙한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비록 우상에게 바쳐졌다가 시중에 나온 고기를 먹는 것이 하나님이 금하신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만약 그런 고기를 먹음으로 믿음이 약한 다른 사람들을 실족하게 한다면 삼가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한 신학교 교수님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웃의 유익을 고려하여 나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 행사의 출발점이다”(인터넷).  그러나 만일 신앙이 성숙한 성도가 교만하여 자기 영광을 추구한다던지 믿음이 연약한 성도가 율법주의적 신앙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므로 양심의 꺼리끼는 행동을 취하게 된다면 서로의 다른점들을 극복해 나아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결과 교회는 분쟁 속에 휘말려서 교회는 갈라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교회란 공동체 안에서 신앙이 성숙한 자들이나 미성숙한 자들이나 모두 다 마음의 동기가 주님(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라면 서로의 다른점들도 극복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3) 서로의 다른점들을 극복해 나아가는 중요한 핵심 원리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4 10절을 보십시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라고 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우리 각자 자신의 일을 하나님 앞에 보고해야 한다고 바울은 오늘 본문 12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여기서 우리 각자 자신의 일이란 우리 각자 양심에 따라 행한 일들도 포함합니다(MacArthur).  다시 말하면성경에서 금하거나 명령하지 않은 어떤 의식적인 행사를 우리 각자 개인의 양심에 때라 행했는지 여부를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다 보고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형제를 판단하며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는 하나입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는 많은 지체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요 또한 다양합니다.  물론 각자 받은 은사도 다르고 가지고 있는 달란트도 다르지만 믿음 또한 다릅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들도 있지만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도 있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신앙이 성숙해서 “고기”를 먹을 수 있는가 하면 어떤 성도들은 믿음이 연약하여 “우유”를 마실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다른점을 우리는 ‘잘못됬다틀렸다’라고 말하면서 신앙이 성숙한 사람들이 미성숙한 형제들을 업신여기고 비판해서는 아니됩니다.  그리고 신앙이 미성숙한 자들은 성숙한 자들을 판단해서는 아니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서로 용납해야 합니다.  주님이 다 완전히 받으신 성도들인데 우리가 누구관대 누구는 받고 누구는 거부할 수 있습니까?  감히 우리가 누구관데 믿음이 좀 다른 형제자매들을 비판하며 업신여기며 또한 판단합니까?  우리는 주님꼐 감사하며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하여 하며 또한 우리 모두가 주님꼐 각자 자신의 일을 다 보고해야 함을 알고 우리는 서로 사랑하므로 주님의 몸된 교회의 통일성을 겸손히 그리고 신실하게 잘 지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신앙의 성숙함을 추구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0 4 11주일 오후 목양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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