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하여도” 신앙
[시편 31편 9-14절 말씀 묵상]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다니엘의 세 친구 이야기를 보면 느부갓네살왕이 세운 금 신상에 절하지 않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보고 분노에 찬 왕이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그들을 던져 넣게다고 위협했을 때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 느 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3:16-18). 여기서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신앙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때 한 3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신앙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신앙입니다[(단3:28) "... 자기를 의뢰하고 ..."]. 둘째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신앙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신앙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십계명의 제 1, 2 계명을 순종하였습니다. 마지막 셋째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신앙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희생하는 신앙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구원의 확신이 있었지만 구원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지 아니할지라도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하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주님의 뜻이 구원이 아니라도 주님의 말씀을 순종함에 있어서 생명을 내놓은 결심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31편 14절을 보면 우리는 “그러하여도”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다윗은 자기가 어떠한 상황에 쳐해 있어도 주님만을 의지하겠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다윗의 “그러하여도” 신앙을 묵상하면서 그의 “그러하여도” 신앙을 본받길 원합니다. 과연 그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을 의지하였는지 한 다섯 가지 상황을 묵상하면서 우리 삶 속에 적용하길 원합니다.
첫째로, “그러하여도” 신앙은 내가 고통과 근심 가운데 있어도(even when I am in distress and grief) 주님을 의지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 31편 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내 고통을 인하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시편 기자 다윗은 여기 9절부터 자기가 당면한 극심한 고통스러운 상황을 진술해 나아가고 있는데 그 첫번째 진술이 바로 “내 고통”과 “근심”입니다. 즉, 다윗이 자기만이 격고 느끼고 있는 “내 고통”과 이 “근심”이 있었습니다. 그 원인은 무엇이였습니까? 바로 그의 “모든 대적” 때문입니다(11절). 그러나 이것은 외적 원인입니다. 좀 더 깊은 내면적 원인은 다윗은 자기의 범죄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10절). 마치 죄를 범한 후 회개치 아니하므로 공의로우시고 사랑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징계하시듯이 다윗은 죄로 말미암아 근심하였고 또한 하나님의 징계로 대적들에게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근심하며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에 이것이 우리의 범죄로 말미암은 것이지 깨달고 있습니까? 아니면 무지한 가운데서 다른 이와 또한 환경을 원망하므로 더 큰 죄를 하나님께 범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다윗은 죄로 말미암아 근심하였고 근심으로 말미암아 눈과 혼과 몸이 다 쇠하여져 있었습니다(9절). 즉, 그는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근심으로 말미암아 점점 더 쇠약해지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고통과 근심 중에서도 주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찾았습니다 -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우리는 우리 각자만이 느끼며 경험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내 고통”이지 “우리의 고통”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 “내 고통”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근심하며 결국 근심으로 말미암아 영육간에 쇠하여지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 있을 때 과연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더욱더 의지해야 합니까? 오늘 새벽기도회 때 주신 이사야 38장17절 말씀이 우리에게 이 고통의 문제에 대한 일관된 성경적 관점을 제시해 줍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고통은 나(우리)에게 유익이라는 사실입니다(“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 고통의 유익은 히스기야 왕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즉,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건지심)의 은총과 그의 “모든 죄”를 사함받는 기회가 되었습니다[(17절) “…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근심”에 대한 성경적 관점은 고린도후서 7장10절에서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우리가 근심된 일이 많을 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되야지 세상 근심이 되어서는 아니됩니다. 즉, 근심 가운데서 우리는 회개를 해야 합니다. 영육간에 연약한 가운데서 오히려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둘째로, “그러하여도” 신앙은 내가 슬픔과 탄식 속에 있어도(even when I am in sorrow and sighing) 주님을 의지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31편 10절을 보십시오: “내 생명은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해는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으로 약하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다윗의 “슬픔”과 “탄식”은 유익한 슬픔이요 탄식이였습니다. 즉, 다윗은 “나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온 고통스러운 일(대적자들의 핍박) 가운데서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면서 슬퍼하였기에 그에게는 유익한 슬픔이였던 것입니다(10절). 이 슬픔은 결국 다윗으로 하여금 탄식 가운데서 자기의 죄를 토설케 되는 열매를 맺게 하였습니다[(32:3)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회개치 않을 때에 그의 손으로 우리를 주야로 누르십니다[(4절)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과 근심 가운데서도 슬퍼하면 탄식하는 가운데서도 주님의 긍휼하심을 의지하므로 나의 모든 죄까지도 주님께 다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슬픔”에 대하여 이미 시편 30편 11절에서 묵상한 말씀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합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 우리는 우리가 슬픔 가운데서 탄식하고 있을 때에도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기쁨)이 되게 하실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시편 30편 5절 말씀처럼 주님의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을 평생”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주님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올 것입니다(5절).
셋째로, “그러하여도” 신앙은 내가 욕을 당해도(even when I am in reproach) 주님을 의지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 31편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시편 기자 다윗은 그 대적들보다 의로움으로 그들이 그를 미워하고 대적하였습니다(박윤선). 그러한 가운데서 다윗은 이웃과 친구들에게까지도 소외(alienation)를 당하였습니다. 대적들뿐만 아니라 이웃들, 더 나아가서 친구들까지도 다윗을 외면하였습니다. 길에서 다윗을 만나 자들도 그를 피하였습니다. 다윗에게는 아무도 주위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윗은 주님만을 의지하였습니다. 마치 사회에서 매장을 당한 상황에서도 다윗은 주님만을 의지하였습니다 [(시25:16)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롭사오니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이 여기소서”].
우리는 홀로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좀 다르게 말한다면, 우리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은 본능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에게 소외를 당하고 싶은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가 주위 사람들에게 소외를 당하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은 철저히 소외를 당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좀 소외 당할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소외당하는 상황에서 과연 다윗처럼 주님만을 의지하는지 우리 자신의 신앙을 좀 시험해 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사람 앞에서 신앙생활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된 신앙생활 이 아니라 사람 중심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박윤선 박사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 성도는 이 세상 사람들의 칭찬이나 훼방을 중대시할 필요가 없다. 성도는 하나님의 칭찬과 판단만을 중대시하고 그 표준에서 살아야 한다.”
넷째로, “그러하여도” 신앙은 내가 잊어버린바 되어도(even when I am forgotten) 주님을 의지 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 31편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잊어버린바 됨이 사망한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파기와 같으니이다”. 다윗은 인간 사회에서 버림을 당하였습니다. 그는 “파기와 같이” 버림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파기”란 깨진 그릇을 가리킵니다. 즉, 다윗은 깨진 그릇처럼 쓸모없는 사람이 된 느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사회적으로 전혀 무익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오늘 본문에서 “forgotten man”, 즉 잊어버린바 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도 다윗은 주님만을 의지하였습니다. 다들 그를 소외시키므로 다윗은 잊어버린바 된 사람이 되었을때에도 그는 주님 만을 의지하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때에 우리는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면서 ‘나는 가정에도, 사회에서도, 교회에서도 등등 쓸모없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때에 우리는 ‘사람들이 이젠 나를 잊어버렸어. 나의 전성기는 이미 지나갔으니 빨리 죽어야 해’라는 식으로 생각하며 말을 합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박춘희 권사님(치매로 고생하시다가 소천하셨음)을 바라볼 때에 아무 기억도 없으시고 어느 면으로 보면 사회로부터 또한 우리 사람들로부터 소외되었을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권사님을 잊지 않으시고 분명히 기억하고 계시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외면하고 소외시키며 우리가 사회로부터 잊어버린바 되었을지라도 우리 주님은 분명히 우리를 잊지 않고 계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사야 49장15절 말씀을 붙잡으십시다: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참조: 시27:10).
마지막 다섯째로, “그러하여도” 신앙은 내가 두려움 가운데 있어도(even when I am in terror) 주님을 의지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 31편 13절을 보십시오: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으오며 사방에 두려움이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치려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다윗이 당하고 있었던 핍박은 그의 원수들이 첫째로, 언론으로 다윗을 매장하려 하였고, 둘째로는, 협박으로 그를 질겁하게 하려하였으며, 셋째로, 다윗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박윤선). 이러한 두려운 상황에 쳐해 있으면서도 다윗은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였습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사방에 두려움이 있을 때에도 주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한 때에 우리 이사야 41장10절 말씀을 붙잡으십시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시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그러하여도” 신앙, 어떠한 상황에 우리가 쳐해있을찌라도 주님만을 의지하겠다는 다윗은 결국 오늘 본문 14절에서 이러한 고백을 합니다: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You are my God). 비록 고통과 근심이 있을찌라도, 슬픔과 탄식이 있을찌라도, 우리가 욕을 당해도, 우리가 잊어버린바 되었을지라도 그리고 우리가 두려움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우리가 주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우리가 주님의 뜻 안에 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러하여도” 신앙의 소유자들입니다. 이러한 “그러하여도” 신앙의 소유자들이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그러하여도” 주님 만을 의지하길 기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06년 7월 21일 연약한 가운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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