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그런 사람이 변화되었다면?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사도행전 9장 23, 29절).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고들 말합니다. 아니, 사람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고까지 말합니다. 본래 그 성격이 어디로 가겠냐고들 말합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도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까지들 말합니다. 만일 그런 사람을 주님께서 변화시키셨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
사도행전 9장 23, 29절에 나오는 인물은 사울이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길리기아의 다소 출신으로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행22:3) 청결한 양심으로 선조 때부터 섬기던 하나님을 섬기고(딤후1:3) 할례를 받았고 자랑할 만한 베냐민 지파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던 자였습니다(빌3:6). 그랬던 그가 주님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여 예수님의 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잘아오려다가(행9:1-2)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께 결박되고 붙잡힌바 되고 사명을 받아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바울로 변화되었습니다(3-16절). 그런 사람이 변화되었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한 3가지 반응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사람들이 다 놀랐고 또한 당혹하였습니다.
성경 사도행전 9장 21-22절을 보십시오: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사울은 변화 받은 후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있으면서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였습니다(19-20절). 그 말을 들은 다메섹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22절) 바울의 말을 듣고 모두 놀랐습니다(21절). 그 이유는 그들이 알고 있었던 사울은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로서 다메섹에 온 것도 그리스도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에게 끌어가고자 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21절). 그런데 그 사울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고(20절) 또한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니 어찌 놀라지 않겠습니까(21절).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은 당혹(어리둥절)하”였습니다(22절).
저는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충분히 놀라고 충분히 당혹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만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열심히 박해하던 핍박
자가 갑자기 변화 받았다고 말하면서 돌아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간증하고 다니면서 그 사람의 말을 듣고 놀라며 당혹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놀람과 이러한 당혹감이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사람들이 생각하가에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도 주님께서는 충분히 변하시키실 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습니다(마19:26).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6).
둘째로, 사람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였습니다.
성경 사도행전 9장 23절과 29절을 보십시오: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사울이 변화 받은 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니까 다메섹에 사는 당혹한 유대인들은(22절)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였습니다(23절). 그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켰습니다(24절). 그래서 사울의 제자들은 밤에 그를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내렸습니다(25절). 그렇게 건짐을 받은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였습니다(29절). 그러나 그 헬라파 유대인들도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처럼 사울을 죽이려고 힘썼습니다(29절).
저는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참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향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1절) 그들을 죽이던 사울이(21절, 현대인의 성경)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는 이젠 자기가 죽임을 당하는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23, 29절). 이것은 사울이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의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16절). 이것은 바울의 간절한 소원이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는 과정의 시작이었습니다(빌3:10). 실제로 그는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고후11:23). 어차피 사울(바울)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였고(행20:24) 또한 그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한 사람이었습니다(21:13). 그리고 그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한 줄 알았기에(빌1:21) 그는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받는 고난뿐만 아니라 심지어 죽음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 여겼습니다(29절).
마지막 셋째로, 제자들은 그의 변화를 믿지 않고
그를 두려워하였습니다.
성경 사도행전 9장 26절을 보십시오: "사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제자들과 사귀려고 했으나
그들은 사울이 제자가 된 것을 믿지 않고 모두 그를 두려워하였다"(현대인의 성경). 사울이 변화 받은 후 다메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리스도이심을 전파하다가 자기를 죽이려는 계획을 알고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피신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이유는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과 사귀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26절). 그러나 예루살렘의 제자들은 사울이 자기들처럼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을 믿지 않고 모두 그를 두려워했습니다(26절). 그러나 “위로의 아들”인 바나바(4:36)는 사울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는 주님께서 사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변화시켜주셨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9:27). 그래서 그는 사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다메섹 길에서 어떻게 주님을 보았으며 주님이 그에게 하신 말씀과 또 다메섹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담대히 전한 일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27절, 현대인의 성경). 그 결과 사울은 제자들과 함께 지내며 자유롭게 예루살렘을
드나들면서 주님의 이름을 담대히 전하였습니다(27절,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가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도 문제지만 주님께서 변화시키시는 역사를 믿지 않는 것도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우리 사람들이 보기엔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도
주님께서는 그를 변하시키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다는 진리를 믿어야 하는데 우리는 자꾸만 믿음의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지 않고(못하고?) 의심과 심지어 불신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14:31).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변하시키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나 같은
죄인도 변하시켜주셨다는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 주님께서 다른 사람을 못 변하시키시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 사람들이 놀랄만한 사람의 변화를 충분히 일으키실 수 있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될 것을 믿는(고전15:51),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5년 11월 14일, 나 같은 죄인에게도
변화의 은총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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