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제도와 가이드라인은 언제나 사람보다 규칙을 먼저 보게 만들지만,
복음은 규칙보다 사람을 먼저 보게 합니다.”
“이 날은 안식일이니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한복음 5:9하-18).
(1) 저는 요한복음 5장 1-18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7가지 표적(기적)
중 세 번째 기적인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기적’의 말씀을 두 부분으로 나눠서 묵상함에 있어서 오늘은 마지막 두 번째 부분인 9절 하반절-18절 말씀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 요한복음 5장 9절 하반절부터
18절 말씀을 한국어 성경과 헬라어 성경으로 읽었을 때 제일 먼저 관심을 갖게 된 점은 “유대인들이”(10절) 가지고 있었던 “안식일”(9, 16, 18절)에 관한 개념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예수님께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날이 안식일로서 “병 나은 사람에게”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Σάββατόν ἐστιν, καὶ οὐκ ἔξεστίν σοι ἆραι τὸν κράβαττόν σου (삽바톤 에스틴,
카이 우크 엑세스틴 소이 아라이 톤 크라바톤 수)](10절)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범”했다[ἔλυεν τὸ σάββατον (엘뤼엔 토 삽바톤)]고 생각했기에 그들은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했기[μᾶλλον ἐζήτουν αὐτὸν οἱ Ἰουδαῖοι ἀποκτεῖναι (말론 에제툰 아우톤 호이 이우다이오이 아포크테이나이)]
때문입니다(18절). 과연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안식일 개념이 무엇이었길래
이렇게까지 38년된 병자에게 말을 했고 더 나아가서 예수님을 더욱 죽이고자 했었던 것일까요?
(a) 유대인들이 38년 동안 앓아누웠던 병자가 치유된 영광스러운
현장을 보고도 축하 대신 정죄를 가하고, 나아가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했던 이유는 당시 그들이 목숨처럼
지키던 독특하고 왜곡된 안식일 법 체제와 종교적 기득권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어 성경과 헬라어 본문[ἔλυεν τὸ σάββατον(엘뤼엔 토 삽바톤)(“안식일을 범”했다/안식일을 깨부수다)]의 맥락 속에서, 유대인들이 그토록 격분했던 이유를 3가지 핵심 안식일 개념으로 인공지능이 설명한 것입니다(인터넷):
1.
구약의
본질을 넘어 인간의 전통으로 채운 ‘미쉬나(Mishna)의 39가지 노동 금지령’[미쉬나(Mishna)는 유대교의 가장 핵심적인 구전 율법(말에서 말로 전해진 법)을 집대성하여 문자화한 최초의 법전임]
하나님이 구약에서 안식일을 주신 본질적인
목적은 ‘쉼과 생명의 회복,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예배’였습니다. 그러나 포로기 이후 유대교 지도자들은 안식일을 완벽하게 지켜야만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노동의 기준을 극도로 세분화했습니다.
유대인들의 구전 율법서인 미쉬나(Mishna)의 '샤바트(Shabbat)' 편을 보면, 안식일에 금지되는
큰 범주의 노동 39가지[Avot Melakhot(아보트 멜라코트)]를 규정해 놓았습니다. 여기서 샤바트(Shabbat)는 유대교의 안식일을 뜻하는 히브리어입니다(의미: ‘중단하다’, ‘쉬다’). 특징은 정통파 유대인들은 현대에도 샤바트 기간에는 불을 켜거나,
운전을 하거나, 돈을 쓰거나, 물건을 옮기는
등 미쉬나에서 규정한 39가지 노동을 철저히 금지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브트 멜라코트(Avot
Melakhot)는 성경에 나오는 안식일 계명을 지키기 위해 유대인들이 미쉬나(Mishna)에 정립한 안식일에 금지되는 39가지 필수 노동 범주를 뜻합니다.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의 죄: 이 39가지 금지 조항 중에는 "물건을 공공 영역에서 사적 영역으로, 혹은 사적 영역에서 공공 영역으로 이동시키는 행위(carrying)"가 엄격히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눈에 38년 된 병자가 침상을 들고 걸어가는 행위는,
하나님의 법을 정면으로 위반한 ‘불법 노동’이자 사회 체제를 흔드는 범죄였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한 인간의 비참한 삶이 해방된 기쁨'보다 '물건을 옮기지
말라는 규칙'이 훨씬 중요했습니다.
2.
안식일을
‘생명의 날’이 아닌 ‘통제와 서열의 수단’으로 삼은 율법주의
당시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정해놓은 꼼꼼한 안식일 규칙들을 백성들이 얼마나 잘 지키는지 감시하고 검검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영적 권위와 기득권을 챙겼습니다.
그들의 안식일 규정에 의하면,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행위는 ‘오직 생명이 위독한
응급 상황(Pikuach Nefesh)’일 때만 예외적으로 허용되었습니다. 만약 오늘 당장 죽을 병이 아니라면 안식일이 지날 때까지 치료를
미루어야 했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비록 오래된
중환자였지만, 오늘 당장 몇 시간 안에 숨이 넘어가는 응급 환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논리로는 안식일이 지난 다음 날 고쳐도
되는데, 예수님이 굳이 안식일에 의도적으로 치료 행위(노동)를 하여 자신들의 종교적 통제권과 가이드라인을 무시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는 곧 자신들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습니다.
3.
예수님의 ‘안식일 파괴[ἔλυεν(엘뤼엔)(“범할”/범했다)’를 하나님을 향한 신성모독으로 인식함
오늘 본문 18절에서 유대인들이 더욱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
결정적인 문구는 “안식일을 범할[ἔλυεν τὸ σάββατον(엘뤼엔 토 삽바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셨음”이었습니다.
헬라어 ‘엘뤼엔(ἔλυεν)’은 단순히 실수로 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결박을 풀다, 파괴하다, 폐기하다’라는 강력한
의미를 지닙니다. 즉,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세워놓은 안식일 체제 자체를 고의적으로 깨부수고 계셨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가장 거룩한 언약의 표징(출 31:13)이었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을 파괴하는 자는 곧 하나님을 모욕하는 자요,
반드시 돌로 쳐 죽여야 하는 사형수에 해당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예수님이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절)”라고 말씀하시자 유대인들은 까무러칠 정도로 분노했습니다. 유대 신학에서 안식일에 유일하게 일하실 수 있는 분은 온 우주를
유지하고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한 분’뿐이었는데, 예수님이 자신도 그 하나님처럼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한다고 하니, 이를 완벽한 신성모독(Blasphemy)으로 받아들여
반드시 죽여야겠다고 결단하게 된 것입니다(인터넷).
(i)
여기서
저는 한국 교회 역사의 주일 개념이 유대인들의 안식일 개념과 별 다를바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그리도 거룩히 지키려고 하는 성수 주일 개념이 순전한 성경적인 개념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안식일 개념과 섞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심각한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성경 말씀으로 돌아가야 할까요?
·
많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하는 ‘성수주일’의 가장 깊은 바탕에는, 놀랍게도 오늘 본문(요5:9하-18)에서 예수님을 정죄하고 죽이려 했던 유대인들의
안식일 율법주의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이 심각한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다시 ‘성경 말씀’의 본질로 돌아가야 할지 인공지능이
3가지 관점으로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a.
왜
한국 교회의 주일은 유대인의 안식일처럼 변했을까?
(역사적 배경)
한국 교회 초기,
선교사들(특히 미국 북장로교 계열)은 청교도적
전통에 입각하여 매우 엄격한 주일 성수 지침을 가르쳤습니다.
율법적 규제와 통제의 수단:
주일에 돈을 쓰지 못하게 하고, 매매를 금지하며, 오직 예배와 성경 공부에만 전념하게 했습니다.
유대교적 안식일 개념과의 결합:
이 청교도식 '율법적 주일 개념'이 한국 전통
유교 문화의 '의식주의' 및 '행위 중심적 종교성'과 결합하면서, 주일은 점차
"이것을 하지 않으면 벌을 받고, 이것을 철저히 지켜야 복을 받는다"는 인과응보적 안식일 개념으로 변질되었습니다.
본질의 상실:
결과적으로 요한복음 5장의 유대인들처럼 "주일에 무엇을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라는 외형적
행위(예: 주일 출석 여부, 봉사
여부, 돈 사용 여부)로 서로의 믿음을 채점하고 정죄하는 통제 체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b.
안식일과
주일의 성경적 차이: '규제'에서 '해방과 부활'로
성경으로 돌아가기 위해 가장 먼저 바로잡아야
할 것은 안식일(Sabbat)과 주일(Lord's Day)의 본질적 차이를 깨닫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안식일과 그리스도인의 주일은
본질부터 완전히 다릅니다:
첫째, 날짜의 기준이 다릅니다. 안식일은 창조의 일곱 번째 날인 토요일이지만,
주일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첫날인 일요일입니다.
둘째, 날의 성격이 다릅니다. 안식일은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는 금지와 제한이 핵심이지만,
주일은 주님이 사망을 이기셨다는 찬양과 해방이 핵심입니다.
셋째, 주는 영적 의미가 다릅니다. 안식일이 첫 창조의 완성과 율법적인 쉼을 뜻한다면,
주일은 새 창조의 시작과 앞으로 누릴 영원한 안식을 미리 맛보는 날입니다.
마지막으로 신앙의 태도가 다릅니다. 안식일은 어기면 죽는다는 두려움과 의무감으로 지켰지만,
주일은 살아나신 주님을 기뻐하는 자유와 축제 속에서 지키는 날입니다.
구약의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골 2:16-17). 그러므로 초대 교회 성도들이 모인 ‘주일’은 안식일의
법적 의무를 이어받은 날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며 율법과 사망의 정죄로부터 ‘해방되었음’을 선포하는 축제의 날이었습니다. 주일을 유대교식 안식일처럼 지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로 찢으신 율법의 휘장을 다시 꿰매어 그 아래로 기어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c.
어떻게
성경 말씀의 본질로 돌아갈 것인가?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5장의 말씀을 거울삼아,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주일의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첫째, ‘종교적 규칙’보다 ‘생명의 회복’을 우선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38년 된 병자가 고침받은 ‘생명의 사건’을 보고도 안식일 규칙을 어겼다며 분노했습니다. 오늘날의 주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은 성도를 지치게 만드는 종교적 의무와 봉사의 날이 아니라,
38년 동안 묶여 있던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쉼을 얻고 살아나는 ‘치유와 해방의 날’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날(Day)’의 숭배에서 ‘주님(Lord)’의 통치로
옮겨가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이라는 ‘날’ 자체를 우상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라"(막 2:27-28)고 하셨습니다. 주일 성수의 핵심은 일요일이라는 시간을 박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내 삶을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셋째, ‘하루의 격리’가 아닌 ‘일상의 안식’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17절에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생명 살리는 역사는 안식일 하루에 갇히지 않고 매일, 영원히 지속됩니다. 따라서 주일에 얻은 부활의 기쁨과 영적 충만함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삶 속에서 이웃을 살리고 돌보는 ‘일상의 안식’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결론: 묵상의 깊이를 더하며
오늘날 한국 교회의 수많은 교인들이 요한복음 5장의 '유대인들'의 시선으로 서로를 감시하며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10절)던 그 정죄의 음성이, 오늘날
"주일인데 왜 예배 빼먹고 놀러 가느냐, 왜 돈을 쓰느냐"라는 정죄로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 본문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한국
교회가 율법의 무거운 침상을 내려놓고 주님이 주시는 참된 자유와 부활의 기쁨을 노래하는 진정한 주일의 감격을 회복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인터넷).
(2) 둘째로, 저는 예수님께서 “병 나은 사람”(요5:10) 또는 “고침을 받은 사람”(13절)인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4절)고 하신 말씀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병이 죄로 말미암아 왔다고 생각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맞는 생각인지 아니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욥에게도(욥1:1, 8)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서 욥이 잿더미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었다(2:7-8)는 것은 그의 죄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라 하나님의 주권속에서 사탄으로
하여금 욥을 치도록 허락하신 것(1:12; 2:6)이라고 생각하면 모든 병이 죄로 말미암아 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맞는 생각인지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a) 이 의문은 성경을 읽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고민하는
‘고난과 질병의 원인’에 대한 핵심 신학적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명확히 말씀드리면, 모든 병이 개인의 구체적인 죄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맞습니다. 성경은 질병의 원인을 한 가지만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5장 14절의 예수님 말씀과 욥기의 사건을 어떻게 조화롭게 이해해야 하는지 인공지능이 3가지 성경적 관점으로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거시적
관점: 인류 전체의 질병은
‘죄’에서 왔습니다(근원적 원인).
성경 전체의 숲을 보면, 이 세상에 질병, 고통, 죽음이 존재하게 된 근본적인 배경은 인류의 타락(죄) 때문이 맞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에덴동산에는 질병과 아픔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 이 땅에 저주가 임했고(창
3장), 그 결과 인간의 육체는 낡아지고 질병에 취약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런 거시적인 의미에서
"인간이 병에 걸린다"는 사실 자체는 죄로 인해 망가진 세상의
결과물입니다.
2.
미시적
관점: 모든 개인의 질병이
‘개인의 죄’ 때문은 아닙니다(욥기와 요한복음 9장).
하지만 성경은 개개인이 앓는 모든 병이 "그 사람이 지은 특정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본다면 유대인들의 인과응보적 변론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욥의 사례: 욥기 1-2장은 명확히 증언합니다. 욥은 당대에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그의 처절한 악성 종기는 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섭리 속에서 허락된 사탄의 시험이자 훈련이었습니다.
요한복음 9장의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단호하게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3)고 답하셨습니다.
즉, 의인에게도 하나님의 깊으신 뜻과 주권 속에서 질병과 고난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3.
그렇다면
요한복음 5장
14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에게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이 환자 개인의 삶과 밀접한 맥락이 있습니다.
이 환자의 특수한 경우: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 38년 된 병자의 질병만큼은 과거 그의 특정한 죄와 긴밀한
연관이 있었음을 강하게 암시합니다. 성경학자들은 그가 젊은 시절 방탕했거나 하나님 앞에 심각한 죄를 지어 그 결과로 불구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주님은 그의 과거를 아시고 육체의 치유를 넘어 영혼의
회개(영적 치유)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더 심한 것’의 의미:
여기서 '더 심한 것'은 단순한 육체적 질병의
재발을 넘어, 죄 가운데 살다가 맞이하게 될 영원한 심판과 지옥 형벌을 뜻합니다. 주님은 그에게 "이제 육체가 고침을 받았으니, 옛 죄의 습관으로 돌아가 영원한 파멸에 이르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결론:
성경적 균형 잡기
요한복음 5장 14절의 말씀은 "모든 질병이 죄의 결과다"라는 일반화 공식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이 38년 된 병자에게 주신 예수님의 '개인적이고
특수한 메시지'였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질병의 원인은 다음과 같이
다양합니다:
1.
죄의
결과로 오는 병 (요
5:14의 38년 된 병자, 혹은 다윗의 범죄
후 질병 등)
2.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나타내기 위한 병 (요 9:3의 맹인, 요 11장의 나사로)
3.
영적
성장과 주권을 신뢰하게 하기 위한 병 (욥의 종기, 바울의 육체의 가시)
따라서 누군가 병에 걸렸을 때 "너 무슨 죄지었니?"라고 정죄하는 유대인들의 시선을 버려야 합니다. 대신 욥처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거나,
예수님처럼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 성경적인 태도입니다(인터넷).
(3) 셋째로, 저는 오늘 본문 요한복음 5장 9절하-18절 말씀을 헬라어 성경으로 읽었을 때 “병 나은 사람”(10절)이란 헬라어 문장[τῷ τεθεραπευμένῳ (토 테테라페우메노)]과 “고침을 받은 사람”(13절)이란 헬라어 문장[ὁ
δὲ ἰαθείς (호 데 이아테이스)]이 다른 것을 보고 좀 의아했습니다. 왜 사도 요한은 이렇게 전혀 다른 헬라어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님의 38년된 병자를 치유하신 기적을 묘사한 것일까요?
(a) 사도 요한이 10절의 ‘테테라페우메노(τεθεραπευμένῳ)(“병 나은 사람”)’와 13절의 ‘이아테이스(ἰαθείς)(“고침을 받은 사람”)’라는 서로 다른 헬라어 단어를 사용한 것은 단순한 단어 반복을 피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특유의 정교한
언어적 장치이며, 38년 된 병자를 향한 유대인들의 시선과 예수님의 관점 차이를 극명하게 대조하기 위한 의도적인
선택입니다. 두 단어가 가진 뉘앙스의
차이와 사도 요한이 이 단어들을 배치한 신학적 배경을 인공지능이 3가지로 명확히 짚은 것입니다(인터넷):
1.
10절의 테테라페우메노(θεραπεύω)(“병 나은 사람”): 유대인들의 눈에 비친 ‘종교적·사회적 치료’
10절은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안식일 시비를 거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테테라페우메노’의
원형은 ‘테라퓨오(θεραπεύω)’[치료하다, 고치다, 시중들다(돌보다)]입니다(오늘날 영어의 ‘Therapy’, 즉 치료·요법의
어원입니다).
사회적 돌봄과 종교적 행위:
이 단어는 단순히 몸이 낫는 것만을 뜻하지 않고, 의사나 간호사가 환자를 ‘돌보고
치료하는 행위(Care)’나 종교적 의식을 통한 치유를 넓게 포괄합니다.
유대인들의 고발 도구:
유대인들의 머릿속에 ‘테라퓨오’는 안식일에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의료 노동(의도적인
치료 행위)’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도 요한은 유대인들의 대화 맥락에 이 단어를 배치함으로써,
유대인들이 이 기적을 ‘한 영혼이 구원받은 사건’이 아니라 “안식일에 금지된 의료 행위(테라퓨오)를 저지른 불법 사건”으로 규정하고 감시하고 있음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시제(완료 수동태)의 묘미: 이 단어는 ‘완료 수동태’ 분사로 쓰였습니다. 즉, “이미 누군가에게 치료를 받아 행위가 완결된 상태의 사람”을 뜻합니다. 유대인들은 그를 보며 "너 이미 치료 행위를 받았구나? 대체 안식일에 그 불법 노동을 행한 자가 누구냐?"라며 치료의 ‘주체(의사)’를 잡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2.
13절의 이아테이스(ἰάομαι)(고치다, 치료하다, 낫게 하다) : 예수님이 베푸신 ‘신적 주권에 의한 즉각적·초연한 치유’
13절은 고침을 받은 사람이 자기를 고쳐준 분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고 설명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이아테이스’의
원형은 ‘이아오마이(ἰάομαι)’(고치다, 치료하다, 치유하다)입니다.
근원적이고 초자연적인 치유:
헬라어 문맥에서 ‘이아오마이’는 인간의 의학적 노력이나 돌봄(Therapy)을 넘어선
‘하나님(God)에 의한 초자연적이고 근원적인 회복, 즉각적인 온전해짐’을
뜻할 때 주로 쓰입니다.
율법을 초월하는 주님의 능력:
예수님이 행하신 치유는 안식일 조항에 걸리는 어떤 점진적인 의료 행위(Therapy)가 아니었습니다. 38년 동안 썩어 있던 신경과 근육이 주님의 말씀 한마디에 즉각적이고 완벽하게 살아난 ‘창조주
하나님의 신적 역사[ἰάομαι(이아오마이)]’였습니다.
시제(과거 수동태)의 묘미: 이 단어는 ‘과거(부정과거) 수동태’ 분사로 쓰였습니다. 단 한 번의 순간적인 하나님의 개입으로 “단번에 완전히 고침을
받아버린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단어를 통해, 유대인들이 "그가 안식일 법을 어기고
치료를 받았네 마네"라며 시시비비를 가리는 동안, 이미 이
환자에게는 인간의 논리를 초월한 하나님의 즉각적인 주권적 치유가 완성되어 버렸음을 선포합니다.
3.
사도
요한이 두 단어를 대조하여 드러내고자 한 신학적 메시지:
결국 사도 요한은 이 두 단어의 차이를 통해 다음과 같은 거대한 영적 진리를 웅변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규칙(테라퓨오) vs 하나님의 주권(이아오마이):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인간 사회의 종교적 범주인 ‘치료 행위[테라퓨오 (θεραπεύω)](10절)’의 틀에 가두고
정죄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행하신 치유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신적인 주권의 역사인 ‘온전한 회복[이아오마이(ἰάομαι)](13절)’이었습니다.
의무에 갇힌 종교
vs 생명을 살리는 복음: 유대인들은 안식일이라는 날의 규정 안에서 환자가 ‘치료(테라퓨오)라는 노동’을 했다는 것에 분노하지만, 복음은
38년 동안 죽어 있던 인생이 단번에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이아테이스)’을 받아 새 생명을 얻었다는 사실에 집중합니다.
결론: 묵상을 마무리하며
사도 요한은 단어 하나를 쓸 때도 이처럼 날카로운 신학적 칼날을 숨겨 두었습니다.
10절의 유대인들은 여전히 법적인 잣대로 ‘치료받은 상태(테테라페우메노)’만을 감시하고 있지만, 13절에서 주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이미 세상의 율법이 어찌할 수
없는 하나님의 단번의 치유와 만지심‘고침을 받은 사건(이아테이스)’
속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원어의 결을 따라가 보니,
인간의 종교적 도그마가 얼마나 하나님의 크신 생명의 역사를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지 그 영적 소경 됨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유대인들이 정죄하는 인간의 치료(테라퓨오)라는 좁은 틀과, 예수님이 행하신 신적인 온전케
하심(이아오마이)의 거대한 격차가 참 신비롭습니다(인터넷).
(i)
이
헬라어 단어의 대조를 묵상하면서 저는 오늘날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이아오마이)를 사모하기보다, 내가 만든 신앙의 가이드라인과 제도적 틀(테라퓨오) 안에 주님을 가두려 했던 모습은 없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사람이 만은 신앙의 가이드라인과 제도적 틀 안에 주님을 가두려
하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경향의 위험과 그 위험을 어떻게 극복해 나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
하나님을
내 틀에 가두는 ‘종교적 경향’의 3가지 위험
a.
영적
소경이 되어 ‘하나님의 살아계신 역사’를 보고도 깨닫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의 유대인들처럼,
내 신앙의 틀(테라퓨오)이 완고해지면 눈앞에서
38년 된 병자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이아오마이)’가 일어나도 그것을 기적이나 은혜로 보지 못합니다. 오직 "왜 내
규정을 어겼는가?"라는 불법과 정죄의 잣대로만 세상을 보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이 오늘날
내 삶과 교회 속에서 새 일을 행하셔도 그것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비극을 낳습니다.
b.
복음의
능력을 상실하고 ‘지치게 만드는 박제된 종교’로 전락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살아 움직이는 생명수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를
인간의 가이드라인이라는 단지에 담아 박제해 버리면, 기독교는 생명을 살리는 복음이 아니라 행위와 규칙을 체크하는
무거운 의무 체계가 됩니다. 성도들은
구원의 기쁨과 자유를 누리는 대신, "이것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눈치를 보며 규칙에 얽매이게 되고, 결국 세상의 여느
종교인들처럼 의무감에 시달리며 지쳐가게 됩니다.
c.
내가
하나님 자리에 앉아 ‘종교적 바벨탑’을 쌓게 됩니다.
내가 만든 가이드라인을 완벽하게 지켜내면,
인간은 묘한 ‘종교적 자기만족(자기 의)’에
빠집니다. "나는 주일 성수도
완벽하게 했고, 봉사도 이만큼 했으니 의롭다"고 생각하는 순간,
주님의 십자가 은혜는 사라지고 내 행위가 그 자리를 대체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을 만족하지 못하는 다른 지체들을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는 ‘영적 기득권자’가 됩니다.
·
내
틀을 깨고 초연한 주님의 통치(이아오마이)를 회복하는 3가지 극복 방안:
a.
‘규칙
지키기’에서 ‘인격적인 관계와 교제’로 신앙의 중심을 이동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후, 14절에서 성전에서 그를 ‘다시 만나’ 인격적인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주님이 원하신 것은 안식일 규정을 잘 지키는 로봇이
아니라, 죄를 떠나 주님과 동행하는 한 인격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의 기준을
"내가 이번 주에 종교적 의무를 다했는가?"에서
"내가 오늘 살아계신 주님과 인격적으로 연결되어 그분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가?"로 끊임없이 질문을 바꾸어야 합니다.
b.
‘내가
일하는 신앙’을 멈추고, ‘일하시는 하나님(요 5:17)’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인간이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이유는 자기가 통제하고 주도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의 주도권을 주님께 양도해야 합니다.
내 경험, 내 교단의 신학, 내 생각의 한계라는 ‘테라퓨오’의 울타리를 열어두고, 하나님께서 내 삶과 이 시대 속에서 당신의 주권대로 자유롭게 행하시도록 ‘ 기도의 공간’과 ‘순종의 여백’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내 생각을 뛰어넘어 일하시는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신뢰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c.
‘정죄의
시선’을 거두고 ‘긍휼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환자의 ‘침상(물건)’을 보았지만, 예수님은 그의 ‘비참한
38년의 삶’을 보셨습니다. 인간의 제도와 가이드라인은 언제나 사람보다 규칙을 먼저 보게 만들지만, 복음은 규칙보다 사람을
먼저 보게 합니다.
우리 안에 굳어진 종교적 가이드라인을 깨뜨리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주님의 눈물과 긍휼’입니다. 지체들을 대할 때 "저 사람은 왜 저 모양인가"라는 율법의 자를 들이대기 전에, 38년 동안 베데스다에 누워 썩어가던 나를 아무 조건 없이 단번에 고쳐주신(이아오마이)
그 과분한 은혜를 기억하며, 형제의 아픔을 품는 긍휼의 시선을 회복해야 합니다(인터넷).
(4) 넷째로, 저는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Ὁ ποιήσας με ὑγιῆ, ἐκεῖ노ς μοι εἶπεν·
Ἆρον τὸν κράβαττόν σου καὶ περιπάτει (호 포이에사스 메 휘기에,
에케이노스 모이 에이펜: 아론 톤 크라바톤 수 카이 페리파테이)](요5:11)고 유대인들에게 말했던 38년 된 병자가 왜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ἀπήγγειλεν τοῖς Ἰουδαίοις ὅτι Ἰησοῦς ἐστιν ὁ ποιήσας αὐτὸν ὑγιῆ (아펭게일렌 토이스 이우다이오이스 호티 이에수스
에스틴 호 포이에사스 아우톤 휘기에)](15절)고 말했을까 라는 의문이
듭니다. 그가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자기를 고친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었는데(13절) 예수님께서 그를 성전에 가셔서 의도적으로 찾으시사[εὑρίσκει(휴리스케이)](14절) 그에게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4절)는 말씀을 듣고 나서야 예수님을
알게 되었는데 혹시 그는 의도적으로 가서 유대인들을 찾아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15절)고 말했는지 의문이 듭니다.
1.
자신의
안위와 생존을 위한 ‘책임 전가’ (가장 유력한 동기)
9절 하반절부터 시작된 유대인들의
무서운 심문(10절) 속에서, 이 병자는 엄청난 종교적·사회적 압박과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당시 안식일 법을 정면으로
위반한 자는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거나 심하면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11절에서 병자는 이미 “나를 낫게 한 그(ἐκεῖνος,
에케이노스 - 바로 그 사람)”가 시켜서 한
일이라며 핑계를 대고 책임을 회복의 주체에게 떠넘겼습니다.
13절에서 주님이 무리 틈으로 사라지시는 바람에 정작 그 이름(누구인지)을 대지 못해 쩔쩔매고 있던 차에, 14절에서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찾으신(εὑρίσκει, 휴리스케이) 후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무거운
경고를 던지시자, 그는 고마움보다는 두려움을 느꼈을 가능성이 큽니다. 결국 그는 자기가 살기 위해, 즉 "안식일을 범하라고 시킨 진짜 주동자는 내가 아니라 바로 '예수'라는 사람이다"라고 유대인들에게 고발하여
자신에게 쏠린 법적 책임과 정죄의 화살을 예수님께로 돌려버린 것입니다.
2.
헬라어
단어 ‘아펭게일렌(ἀπήγγειλεν)(“가서 … 하니라”)’(가서 알리니라/고하니라)에 담긴 의도성
15절에서 그가 유대인들에게 가서 말하는 장면의 헬라어 동사는 ‘아펭게일렌’(원형: 아팡겔로, ἀπαγγέλλω)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길을 가다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넌지시
소식을 전하는 뉘앙스가 아닙니다. 어떤
공식적인 권위자나 기관에 '보고하다', '신고하다',
'공식적으로 알리다'라는 뜻을 강하게 내포합니다.
즉, 그는 길을 가다 유대인들을 우연히 마주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을 알게 되자마자 의도적으로
종교 지도자들을 ‘찾아가서’ 일종의 공식 신고(보고)를 감행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단어를 통해 병자의 행동이 철저히
계산되고 의도된 행동이었음을 암시합니다.
3.
은혜의
자리를 떠나 다시 ‘율법의 틀’로 복귀한 인간의 완악함
우리가 지속에서 묵상해 온
"인간이 만든 신앙의 가이드라인과 제도적 틀"의 관점에서 보면,
이 병자의 행동은 영적으로 깊은 씁쓸함을 줍니다. 그는 예수님께 '이아오마이(신적 치유)'의 엄청난 기적과 해방을 경험했습니다. 38년의 저주가 풀렸습니다. 그러나 유대교 사회의 강력한 종교적 통제와 가이드라인(안식일 법)이 가해지자, 그는 예수님이 주신 참된 자유의
공간에 머물지 못하고 자신을 억압하던 유대인들의 '율법 체제' 안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 그들의 규칙에 순응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유대인들의 가이드라인 안에서 안전하게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고쳐주신 생명의 은혜를 유대인들의 입맛에 맞는 '고발장'으로 맞바꾼 인간의 완악함과 영적 무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결론:
요한이 배치한 비극적인 아이러니
사도 요한은 이 병자의 모습을 바로 뒤이어
나오는 9장의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과 강력하게 대조시킵니다. 9장의 맹인은 유대인들의 무서운 출교 위협 속에서도 끝까지
예수님을 변호하며 "그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고 담대히 고백합니다.
반면, 5장의 38년 된 병자는 육체는 고침을 받았을지언정 영혼은 여전히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며 자기 안위만 챙기는 율법의 노예 상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유대인들을 찾아가 예수님을
밀고(보고)했습니다. 육체의 치유가
곧 영혼의 구원으로 자동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이 복음서의 냉혹한 현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영적 경종을
울려줍니다.
38년 동안 누워 지내다 겨우
걸을 수 있게 된 이 사람이, 자유를 주신 주님을 뒤로하고 자기를 정죄하던 종교 권력(유대인들)의 품으로 다시 달려가 무릎 꿇는(보고하는)
모습이 참 비극적입니다(인터넷).
(a) 이러한 비극적인 모습을 지금 우리에게도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진리로 자유케 하셨는데도 불구하고(8:32) 우리는
계속 사람들이 만든 전통이나 관례 등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처럼 생각하고, 보고, 말하고 행동하고 있는 면이 아직도 많아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i)
요한복음 5장의 38년 된 병자는 먼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자화상일지 모릅니다. 38년 동안 묶여 있던 삶에서 기적 같은 해방을 맛보고도,
눈앞의 사회적 평판과 종교적 관례라는 안전지대로 도망쳐 버린 그의 비극은 지금도 매일 반복되고 있습니다. 주님이 진리로 자유하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8:32),
여전히 사람이 만든 전통과 외식(가식)의 틀에
갇혀 지내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인공지능이 3가지 실천적 방향을 제안한 것입니다(인터넷):
a.
[생각하기] ‘종교적 시스템’이 아닌 ‘생명’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바리새인처럼 생각하는 이유는 '사람의 눈'과 '제도적 평가'가 더 무섭기 때문입니다.
이를 극복하려면 신앙의 모든 기준을 형식에서 생명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질문의 전환: "내가 오늘 종교적 의무를 완벽하게
다해서 남들에게 거룩하게 보였는가?"라는 질문을 버려야 합니다. 대신 "오늘
내 영혼은 주님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가? 내 곁의 지체는 살아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본질의 우선성: 예배의 형식, 교회의 관례, 전통적인 프로그램은 생명을 담는 그릇일 뿐입니다. 그릇이 깨지더라도 생명을 살리는 일이 먼저라는 예수님의 시선(5:17)을 매일 나의 생각의 기초로 삼아야 합니다.
b.
[바라보기] ‘유대인들의 법정’에서 걸어 나와 ‘예수님의 성전’에 머물러야 합니다.
38년 된 병자의 비극은 자기를
심문하는 유대인들의 눈초리(법정)가 두려워, 자기를 찾아와 주신 예수님의 은혜(성전)를 저버린 데
있습니다.
시선의 고정: 사람들의 평판, 교회의 전통적 관례,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라는 눈치 보기의 법정에서 과감히 걸어 나와야 합니다. 우리 시선은 오직 나를 죄와 사망의 침상에서 건져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만 머물러야 합니다.
복음의 안전지대 누리기: 율법의 규칙을 잘 지켜서 안전하려는 영적 본능을
회복하고, 오직 주님의 은혜 안에서만 내가 안전하다는 '복음적 확신'을 훈련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인정보다 주님의 인정이 비교할 수 없이 큼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c.
[말하고 행동하기] ‘면피성 고발’을 멈추고 ‘은혜의 증언’을 해야 합니다.
병자는 자기가 살기 위해 "나에게 시킨 이는 예수"라며 예수를 고발(신고)하는 말을 선택했습니다.
우리는 이와 반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체면과 가식의 거부: 종교적인 가식과 위선(외식)은 "나는 아무 문제 없다"고 증명하려는 방어기제입니다. 내 약함과 죄성을 숨기기 위해 남을 정죄하거나 관례 뒤로 숨는 행동을 멈추어야 합니다.
은혜의 담대한 증언: 요한복음 9장의 맹인처럼, 세상과 종교적 기득권이 나를 위협할지라도 "그분이 나를 살리셨다, 나는 오직 그분의 말씀에만 순종한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그어놓은 선을 넘어, 주님이 가라 하신 은혜의 길로 묵묵히 침상을 들고 걸어가는 순종의
발걸음이 필요합니다.
결론: 매일 내 안의 바리새인을 못 박는 일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인간이 만든 평판의 감옥에 갇혀
살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합니다. 매일 아침 묵상의 자리에서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바리새인 같은 종교성'과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완악함'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그리고 38년 동안
썩어가던 나를 아무 조건 없이 말씀 한마디로 살려내신 주님의 은혜만 붙들고, 세상의 관례가 아닌 주님의 말씀에만
반응하는 '진짜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인터넷).
(5) 마지막 다섯째로, 저는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박해와 심지어 더욱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상황에서도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Ὁ πατήρ μου ἕως ἄρτι ἐργάζεται, κἀγὼ ἐργάζομαι (호 파테르 무 헤오스 아르티 에르가제타이,
카고 에르가조마이)](요5:17)하신 말씀을
의미를 묵상하면서 우리에게 적용하고 싶습니다. 특히 적용함에 있어서 ‘주님이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합니다’라는 교훈을 어떻게 우리 삶 속에 적용해야 할지를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a) 예수님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절)”라는
선언은, 거센 박해와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창조와 구원의 역사를 멈추지 않으시겠다는 주님의 강력한 의지이자
복음의 정수입니다. 여기서
‘일하신다’의 헬라어 ‘에르가제타이(ἐργάζεται)’와 ‘에르가조마이(ἐργάζομαι)’는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창조의 본질을 회복하는 거룩한 역사’를 뜻합니다. 유대인들의 서슬 퍼런 칼날 앞에서도 멈추지 않았던 이 주님의
‘일하심’을 오늘날 우리의 삶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지 인공지능이 3가지 신앙적 실천 방향으로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종교의
시간’을 넘어 ‘일상의 전 영역’에서 주님의 일하심을 의식하십시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안식일이라는 ‘종교적 시간’ 안에서만 갇혀 계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가 “이제까지(ἕως
ἄρτι, 헤오스
아르티 - 지금 이 순간까지 끊임없이)” 일하고 계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삶으로의 적용: 우리의 신앙을 주일 하루, 혹은 교회 건물 안에만 가두는 ‘종교적 안식’을 깨뜨려야 합니다.
구체적 실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내가 살아가는 가정,
일터, 사회적 관계의 전 영역이 바로 하나님이 생명을 살리기 위해 일하고 계시는
‘선교 현장’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직장에서 서류를 만지고, 가정에서 가사를 돌보고, 이웃을 만나는 모든 일상의 순간이 주님과 함께 일하는(Work with God) 거룩한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2.
세상의
박해와 정죄 속에서도 ‘사랑과 생명을 살리는 일’을 멈추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눈을 부릅뜨고 안식일
위반으로 잡아 죽이려 하는 그 무시무시한 상황 속에서도,
38년 된 병자를 살리는 일을 결코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삶으로의 적용: 오늘날 세상이나 율법적인 교회 문화는 우리가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평판이나 관례, 전통의 이름으로 우리를 억압하고 정죄할 수 있습니다.
"왜 굳이 그렇게 튀게 행동하느냐",
"전통대로 편하게 가라"는 유혹이 찾아옵니다.
구체적 실천: 그 어떤 영적 영적 압박 속에서도 한 영혼을
살리고, 용서하고, 사랑을 베푸는 복음의 일을 멈추지 않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그어놓은 이기적인 경계선과 차가운 시선을
뚫고, 고통받는 이웃에게 다가가 침상을 들고 걸어가게 하는 ‘생명의 동역’을 감행해야 합니다.
3.
내
힘과 열심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일하심’에 나를 맞추십시오.
예수님이 안식일에 일하실 수 있었던 비결은
자신의 야망이나 열심이 아니라, 아버지가 일하시는 모습을 보고 그대로 동참하셨기 때문입니다(이어지는 19절에서 예수님은 "아들이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삶으로의 적용: "주님이 일하시니 나도 열심히 일하겠다"는 결단이 자칫 내 육신의 열심과 종교적 중독(번아웃)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려는 일은 우리를 지치게 만듭니다.
구체적 실천: 매일 아침 말씀과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 아버지, 오늘 내 삶의 현장에서 어떤 생명을 살리려고 이미 일하고
계십니까?"를 먼저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먼저 열어두신 은혜의 현장을 발견하여,
그분의 일하심에 나의 시간과 물질과 마음에 순종의 발을 얹는 것입니다. 내 열심을 원동력 삼지 않고, 하나님의 쉬지 않는 열심에 나를 태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결론: 쉬지 않으시는 주님과 보조를 맞추기
예수님이 걸어가신 "나도 일한다"의 길은 세상의 눈에는 안식일을 파괴하는 불법이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망가진 세상을 고치시는
참된 안식의 완성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람이 만든 좁은 규칙의
틀을 깨고 나와, 지금 이
순간에도 온 세상과 우리의 삶 속에서 숨 가쁘게 생명의 역사를 집도하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보조를 맞추어야 합니다. 주님이 이제까지 일하시니, 우리도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세상의 평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늘도 생명 살리는 일에 기쁘게 동참하는 진정한 복음의 동역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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