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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 찬양대 찬양 (2025. 8. 24.)

  https://youtu.be/sQ2wxk6a8MU?si=AZ-4OEU-ZJTVVluc

주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교회 (2): 사랑의 위로가 있는 교회 (빌립보서 2장 1-4절)

주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교회 (2): 

사랑의 위로가 있는 교회

  

[빌립보서 2 1-4절 말씀 묵상]

 

여러분여러분이 힘들고 어려울 때 위로가 절실이 필요할 때 어떻게 하십니까?  그 때에 어쩌면 우리는 가까운 가족 식구나 친구들을 의지하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을 나누며 쏟아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그들에게 위로를 받으려고 가까이 다가가도 오히려 그들이 우리에게 낯선 사람들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시편 69:8).  심지어 우리는 그들에게 이해를 받고 위로를 받기보다 오히려 더 낙심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 민수기 32 7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낙심케 한 자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다름 아닌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들입니다.  어떻게 갓 지파와 르우벤 지파 사람들이 나머지 지파 사람들을 낙심시켰습니까?  그들은 그들의 형제들인 다른 10지파들과 함께 요단강 건너 가나안 백성들과 싸우러 가지 않고 목축할 만한 장소(1, 4)인 야셀 땅과 길르앗 땅에(1거주하길 모세에게 요청하였기 때문입니다(5).  그들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그들의 소유로 주시고 우리에게 요단강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5).  그 말을 들은 모세는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에게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아 있고자 하느냐”(6)고 책망하면서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낙심하게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 하느냐”(7)고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은 나머지 10지파 형제들을 낙심케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조상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낙심시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9, 14).  그들의 조상들은 10명의 가나안 땅 정탐꾼들의 악평(13:32, 14:35, 36)하므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낙심시켜(1:28) 그들로 하여금 밤새도록 통곡하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게 만들었습니다(14:1).  결국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의 조상인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은 10명의 정탐꾼들은 자신들만 낙심시킨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불신의 보고(“악평”)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 또한 낙심케 하였습니다.  그리고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은 이스라엘 전 공동체 책임을 망각하고 자기들만 생각한 이기적인 욕구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공동체를 낙심시켰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들의 조상들처럼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낙심시켰는데 그 원인은 한 마디로 말한다면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참고: 24).

 

여러분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으면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 모든 사람들을 낙심케 할 수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지 않고 불신하면 우리는 우리 형제들을 낙심케 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교회란 공동체 안에서 개인의 책임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인 책임을 신실하게 감당하지 않을 때 우리는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 있는 지체들을 낙심케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우리 낙심케 하는 자가 아니라 위로하는 자가 되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로하고 계시듯이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우리도 우리 이웃을 위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로주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교회는 사랑의 위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2 1절을 보십시오: “… 사랑의 무슨 위로나 …”.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 내려가면서 “사랑의 무슨 위로나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 성경에는 “사랑”이라고 써 있지만 영어성경에는 his love(그 분의 사랑), 즉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빌립보 교회 형제자매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위로하라 고 간곡히 권면하고 있습니다.  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그렇게 권면했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빌립보서 1 30절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그 이유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복음 때문에 싸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고난(29)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또한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28고난을 당하고 있었기에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위로하라 고 간곡히 권면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오늘 본문 빌립보서 2 2절에서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라(having the same  love)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 뜻은 빌립보 교회가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에 모든 성도들이 다 같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며 서로 위로하라 는 말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어떻게 다 같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며 서로 위로하라 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빌립보서 2 4절을 보십시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현대인의 성경) “자기 이익만 생각하지 말고 남의 이익도 생각하십시오”].  같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위로하는 방법은 다른 사람의 이익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지금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위로하기 위해선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일보다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라는 권면의 말씀은 우리의 이웃 사랑이 자기 이익만을 구하는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처럼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구하는 이타적인 사랑을 하라는 뜻입니다.  특히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이타적인 사랑으로 다른 형제자매들의 일을 돌보되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구하지 말고 서로의 이익을 구하므로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빌립보서 4 2절을 보면 바울은 빌립보 교회 안에 유오디아란 사람과 순두게란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교회 안에서 우리가 다 각자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자신의 일만 돌본다면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 각자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자기 마음대로 말하며 행동하고다 각자 자기 마음대로 교회를 봉사한다면 그 교회의 모습은 어떠하겠습니까?  결코 그러한 교회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교회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성경은 사랑이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 유명한 사랑장인 고린도전서 13 5절을 보면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한다(it is not self-seeking)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같은 사랑”(2:2)으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위로하라는 것은 곧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어떻게 우리가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할 수 있을까요?  헨리 나우웬은 그의 책 “돌봄의 영성”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돌봄’(care)이란 말의 어원인 kara’라는 단어는 ‘슬퍼하다애통하다고난에 동참하다고통을 나누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돌봄이란병들고 혼란스럽고 외롭고 고립되고 잊힌 사람들과 함께 부르짖는 것이다.  즉 그들의 고통이 내 마음속에도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돌봄이란깨어지고 무력한 사람들의 세상 속에 들어가 그곳에서 연약한 사람들끼리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또한 고통당하는 사람들 곁에 있어주되 상황이 호전될 가능성이 없을지라도 계속 같이 있어주는 것이다."  여러분이러한 돌봄으로 우리가 서로를 돌아본다면 얼마나 서로 위로가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 빌립보서 2 1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사랑의 무슨 위로”(if any comfort from his love)란 말에 대해서 John MacArthur 목사님은 의하면 “위로”(comfort)란 헬라어 단어의 의미가 이렇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신자에게 가까기 다가오셔서 그/녀의 귀에 온화한 응원의 말들을 속삭이시던지 부드러운 조언의 말을 하신다’는 것을 묘사한다(The Greek word translated “comfort” portrays the Lord coming close and whispering words of gentle cheer or tender counsel in a believer’s ear).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형제를 위로하려고 할 때 그 형제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귀에다가 온화한 응원의 말을 하던지 또는 부드러운 조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사도행전 15 35-41절 말씀 중심으로 “위로의 사역”이란 제목 아래 말씀을 묵상한 적이 있엇습니다.  그 때 과연 어떻게 우리가 위로의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가 를 한 3가지로 묵상했엇습니다.  첫째는우리가 위로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선 우리는 주님 안에서 진정한 만남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서로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기 위한 만남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둘째로우리가 위로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선 우리는 서로 다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화목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을 1차 선교지 재방문 여행에 데리고 갈 것인지 말것인지로 인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섰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운 교훈은 주님을 향한 열심도 잘 조절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열심이 통솔되지 못할 정도로 탈선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칼빈).  셋째로우리가 위로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선 우리는 교회를 굳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교회를 굳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이 성장할 때에 교회는 굳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위로의 사역입니다.  이 위로의 사역을 주님 안에서 신실하게 잘 감당할 때 주님의 기쁨을 충만케 할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님의 위로의 도구로 쓰임 받길 기도하고 있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5 11 9그리스도의 사랑과 말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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