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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are taught that we must become upright people who, in God’s sight, are blameless and fully keep His commandments.  

We are taught that we must become upright people who, in God’s sight, are blameless and fully keep His commandments.       “In the time of Herod king of Judea there was a priest named Zechariah, who belonged to the priestly division of Abijah; his wife Elizabeth was also a descendant of Aaron. Both of them were righteous in the sight of God, observing all the Lord’s commands and decrees blamelessly” [(Modern Translation: “When Herod was king of Judea, there was a priest named Zechariah of the division of Abijah, and his wife Elizabeth also came from the family of Aaron. They were righteous before God and faithfully kept all the Lord’s commandments and regulations without fault”)] (Luke 1:5–6).   While meditating on this passage, I would like to draw out the lessons given to us:   (1)    The author of Luke’s Gospel, Luke, first wrote to Theophilus about John the Baptist’s parents. The father’s name was “Zechariah” (meaning, “The LORD remembers...

주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교회 (3): 성령의 교제가 있는 교회 (빌립보서 2장 1-4절)

주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교회 (3): 

성령의 교제가 있는 교회

 

[빌립보서 2 1-4  말씀 묵상]

 


       언젠가 교회 영어사역 지도자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제가 그들에게 왜 대학교만 가면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지 그들의 생각을 듣고 싶어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때 한 형제는 교회를 한번 두번 안나오기 시작하다 보면 습관이 되는 것 같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형제는 어쩌면 교회 안에 socializing(사교)가 없어서 그런 것 같다고 말하면서 또 다른 영어 단어를 사용했는데 그 단어가 바로 fellowship(친교/친목)였습니다.  왠지 그 형제는 사교와 친교/친목을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는 것 같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개인적인 생각은 교회 안에서 남용되고 있는 기독교 용어 중에 하나가 바로 “교제”(fellowship)라고 생각합니다.  이 단어가 어떻게 남용되는가 하면 많은 성도님들이 “교제”를 무슨 “활동”(activity)로 오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교제는 활동이 아니라 “관계”(relationship)입니다(Jerry Bridges).  먼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수직적인 교제)를 통하여 관계를 세워나아가는 가운데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형제/자매들과 교제(수평적인 교제)를 통하여 관계를 세워 나아가야 합니다.

 

       성경 사도행전 2 42절을 보면 초대 교회 안에서 “서로 교제하”였다 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교제”란 헬라어 단어인 “코이노니아” 속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함께 나눈다는 것입니다(공유).  둘째 의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준다는 것입니다 (분유).  우리가 다루고 있는 성도간의 교제는 단순히 사람들과 음식을 먹으며 재미있는 대화를 나눈 것이 아닙니다.  무슨 기독교적인 분위 기에서 게임을 한다거나 단지 지난 주에 있었던 일을 서로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것은 거듭나기 이전에도 해왔던 것입니다.  무엇인가 새로운 나눔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배운 것을 서로  나누고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 것” “다른 성도의 어려움을 중보기도하는 것” “자신의 소유물을 서로 나누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도행전 2 4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교제”란 무엇입니까?  헬라어 원어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어 “그 교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교제”란 무엇을 가리킵니까?  바로 “성령의 교제”를 가리킵니다.  오순절 날 성령의 충만한 역사 가운데 약 3000명 새로운 성도들이 함께 공유했던 것은 그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이였습니다.  그러므로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의 교제에 헌신했었음을 우리는 알 수있습니다.  성령의 공동체 안에서 성령의 교제는 당연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단지 사람들이 하나로 뭉쳐서 일치와 단결을 이룬 인본주의적인 공동체가 아니라성령이 중심과 핵심이 되는 성령의 교제 공동체였습니다(유상섭).

 

       셋째로주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교회는 성령의 교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2 1절을 보십시오: “…  성령의 무슨 교제나 …” (if any fellowship with the Spirit).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 내려가면서 그들에게 ‘성령의 교제’를 하라고 간곡히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권면의 목적은 바로 교회의 통일성/일치(unity)입니다.  비록 교회 안에는 다양한 은사가 있고(고전12:4), 다양한 직분이 있으며(5또한 다양한 사역이 있지만(6)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11).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되(18특히 하나님께서는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라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습니다(24-25).  그러므로 우리의 책임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4:3).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성령님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킬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 빌립보서 2 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뜻을 합하”라(united in spirit)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 문자적 의미는 ‘한 영혼’으로서 사람들이 같은 욕구와 같은 열정과  같은 야먕을 가지고 서로 밀접하게 결합되어 조화를 이루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It means “one-souled” and describes people who are knit together in harmony, having the same desires, passions and ambitions(MacArthur)].  우리가 이미 묵상한 빌립보서 1 27절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말하면서 그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란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임을 우리가 배웠습니다.  여기서 “한 뜻”이란 “의지와 욕망”(will and desire)을 가리킵니다(칼빈).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주님의 겸손한 마음으로 한 마음을 품고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림에 있어서 같은 의지와 열정으로 주님의 일을 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어떻게 우리가 “뜻을 합하여” 함께 힘을 합쳐 서로 도우면서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을까요?  만일 우리가 다 각자 자기 생각과 자기 의지대로 행한다면 우리는 한 마음한 뜻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길 수가 없습니다.  그저 각자 자기의 마음과 생각대로각자 자기의 뜻대로 주님의 일을 할 것입니다그러나 만일 우리 모두가 우리 각자의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함께 추구한다면 우리는 한 마음한 뜻으로 주님의 일을 협력하여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우리 각자의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함께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하나님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영적 그레질을 해야 합니다.  영적 그레질이란 무엇입니까?  여러분한옥을 지을때에 일반적으로 가장 먼저 하는 작업은 바로 주추를 놓는 일입니다.  여기서 주추란 기둥 밑에 괴는 돌을 의미합니다.  그 주추를 다 놓으면 그 때서야 기둥을 세우는데 바로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웁니다.  그리고 나서 기둥과 기둥을 잡아는 주는 일(창방)을 하며 집을 세워갑니다.  그런데 주추 위에 기둥을 세울 때에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레질입니다.  여기서 그레질이란 주춧돌은 보통 자연석을 쓰다 보니까 아무리 넓고 평평한 돌을 골랐다 해도 기둥을 바로 세우기가 어렵기에 주추 위에 기둥을 세우려면 주춧돌의 면과 기둥의 면이 잘 맞아 떨어 지도록 하는 선 작업을 해 주어야 하는데그것이 바로 그레질입니다.  그레질의 방법은 간단합니다.  주춧돌 위에 세워지는 기둥의 면을 주춧돌에 맞게 깍고 갈아 내는 것입니다.  기초가 되는 주춧돌에 손을 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 위에 세워지는 기둥의 면을 깍고 다듬어 주추에 맞추는 것입니다.  기준은 기둥이 아니라 항상 주춧돌입니다.  그리고 이 그레질을 잘하면 잘 할 수록 집은 더 안전하고 튼튼하게 세워집니다(인터넷).  저는 여기서 영적 그레질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영적 그레질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반석이 되시는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7:24).   다시 말하면영적 그레질이란 우리가 그저 “주여 주여”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21).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치 집을 지음에 있어서 기준이 기둥이 아니라 주초인 것처럼 우리의 삶에 기준은 바로 주님이요 주님의 뜻입니다.  그 말은 마치 주초가 기둥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기둥이 주초에 맞춰야 하는 것처럼 주님의 뜻을 우리 뜻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뜻을 주님의 뜻에 맞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오직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온 교회 식구들이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의 기쁨을 충만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뜻대로 하소서(새찬송가 549장 후렴),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4 11 16성령님의 교제를 나누는 성령님의 공동체를 사모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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