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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깊은 속에까지 내려가신 예수님 (마12:40)

  처음으로 이리 묵상해 보았습니다. 요나 선지자는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서 깊음 속 바다 가운데서도(into the very heart of the seas)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는데, 혹시 예수님께서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in the heart of the earth) 계셨을 때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 기도를 드리시지 않았을까요? https://youtu.be/lKEkXpXcW8M?si=m0x3B37bcM4hEBnY

우리의 길을 막으시는 하나님 (4) (민수기 22장 21-34절)

우리의 길을 막으시는 하나님 (4)

 

  

 

 

[민수기 22 21-34]

 

  

 

          “102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 행복론담은 신간 출간: ‘저는 행복했습니다, 여러분도 행복을 포기하지 마세요’”라는 기사 제목을 보고 읽어보았습니다.  읽으면서 이 두 가지 내용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1) “젊었을 때는 ‘즐거움’이 행복이라고 보통 생각하죠.  그러나 지금은, 사람의 인격이야말로 행복의 필수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흔히 젊었을 때는 돈과 사랑을, 중년이 되면 사회적 성공을, 노년에는 건강과 보람을 행복의 척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김 교수는 행복의 ‘조건’으로 개인의 인격, 그중에서도 성실함을 꼽았다.  “동서양 마찬가지로 성실함이 행복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성실하게 되면 교만하지 않고, 정직하게 되고, 항상 더 높은 것을 추구하는 마음을 갖게 되죠. 행복은 이러한 삶의 태도에서 나오게 됩니다. (2) “그의 ‘건강 비결’에 대한 질문을 받자 김 교수는 두 가지 마음가짐을 강조했다.  100살 넘도록 사는 사람 가운데 내가 아는 사람이 7명이 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같이 욕심이 많지 않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남 욕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서적으로 아름답게 사는 것이 건강 비결이 아닌가 해요.”  저는 이 두 가지 내용 중 두 번째 내용에서 김형석 교수님이 아시는 100살 넘도록 사는 일곱 분들의 공통점 중 하나가 바로 하나같이 욕심이 많지 않다는 것을 생각할 때 오늘 본문 민수기 2221-34절에 나오는 거짓 선지자 발람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저의 생각에 근거는 베드로후서 215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현대인의 성경) “그들은 바른 길을 버리고 잘못된 길에 빠져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고 있습니다. 발람은 악한 방법으로 얻은 재물을 사랑하다가”].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사악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22:32).  그는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32,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시고 진노하시므로 하나님의 천사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23) 발람의 길을 막아선 것입니다(22, 현대인의 성경).  그것을 발람을 보지 못했지만 그가 타고 있었던 나귀는 보고 세 번을 돌이켜 하나님의 천사 앞에서 피하였습니다(33).  그 과정에서 발람은 자신이 타고 있던 나귀를 두 번이나 채찍질하고(23, 25) 또한 한번 자기 지팡이로 때렸습니다(27).  흥미로운 점은 그 때 여호와께서 나귀의 입을 열어 말할 수 있게하셨다는 사실입니다(28, 현대인의 성경).

 

          저는 하나님께서 발람이 타고 있던 나귀의 입을 열어 말할 수 있게 하셨다는 사실을 묵상할 때 창세기 3장에 나오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동물 중에서 가장 교활한 뱀이 생각났습니다(3:1, 현대인의 성경).  그 이유는 그 뱀이 아담의 아내에게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너희에게 동산에 있는 모든 과일을 먹지 말라고 하셨느냐?”(1, 현대인의 성경),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너희가 그것을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되어 선악을 분별하게 될 것을 하나님이 아셨기 때문이다”(4-5, 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뱀이나 발람의 나귀나 말을 했지만 다른 점은 뱀은 결국 여자와 아담으로 하여금 언약의 하나님의 명령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2:17)는 말씀에 불순종하게 하므로 범죄케 하여 사망[“불순종과 죄 때문에 영적으로 죽었을 뿐만 아니라(2:1, 현대인의 성경)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음(6:21, 현대인의 성경)]에 이르게 하였지만(5:12), 발람의 나귀는 자기의 주인을 육신적으로 세 번이나 죽을 뻔한데서 살렸습니다(22:33).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자기를 거역했다고 생각했던 발람(29)은 자신의 나귀를 세 번이나 채찍질 및 지팡이로 때린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나귀의 입을 열어 말할 수 있게 하시사 나귀는 발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이렇게 세 번씩이나 나를 때리십니까?”(28,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나귀의 말을 묵상할 때 나귀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22, 현대인의 성경) 나귀도 여호와의 천사가 칼을 빼 들고 길에 서 있는 것을 보고”(23, 현대인의 성경) 자기 주인인 발람을 살리려고 세 번이나 애쓴 죄 밖에 없는데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다고 자기 주인이 이렇게 세 번씩이나 때렸는지 충분히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귀의 입을 열어주시지 않았다면 나귀는 죽을 때까지 자기의 억울함을 주인 발람에게 호소할 수가 없었겠지요.  그런데 발람은 그 나귀의 말을 듣고 왜 자신이 나귀를 세 번씩이나 때렸는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나를 놀렸기 때문이다.  내 손에 칼만 있었더라면 벌써 너를 죽여 버렸을 것이다”(29,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발람의 말을 묵상할 때 흥미로웠던 점은 발람은 하나님이 보시고 자기 나귀도 보고 있었던 여호와의 천사가 칼을 빼 들고 길에 서 있는 것”(23, 현대인의 성경)을 보지 못하고 있었기에 만일 자기 손에 칼만 있었더라면 벌써 자기의 충성된 나귀를 죽여 버렸을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실제로는 칼을 빼 들고 길에 서 있었던 하나님의 천사가 만일 나귀가 피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만 살려 두었을 것인데 말입니다(33, 현대인의 성경).  나귀의 답변을 보십시오: “나는 오늘까지 당신이 평생 타고 다니는 나귀가 아닙니까?  내가 당신에게 이렇게 한 적이 있었습니까?”(30, 현대인의 성경).  발람의 대답은 없었다였습니다(30, 현대인의 성경).  이 대화를 보면 발람은 하나님의 불충성하였고 불성실하였지만(참고: 벧후 2:15; 2:14) 발람의 나귀는 자기 주인인 발람에게 충성하였고 성실했습니다.  분명히 나귀는 평생 발람이 자기를 타고 다녔지만 한 번도 이렇게 한 적이없었다면 적어도 발람은 왜 나귀가 자기를 세 번이나 거역했는지 의문을 던졌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무슨 이유로 나귀가 자기의 말을 듣지 않고 가고자 하는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갔는지(23, 현대인의 성경), 왜 나귀가 좁을 길에서 몸을 담에 대고 버티며 발람의 발을 비벼 상하게 하였는지(25, 현대인의 성경), 왜 나귀가 땅에 엎드렸는지(27, 현대인의 성경) 좀 이상하게 여겨야 하지 않았나요?  나귀는 칼을 빼 들고 서 있는 하나님의 천사를 세 번이나 피해가고 있었을 때 어떻게 발람은 한 번도 자신의 충실한 나귀가 이렇게 자신을 거역했는지 의문조차도 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결국 그 때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자 그는 여호와의 천사가 칼을 빼 들고 길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머리를 숙이며 땅에 엎드렸습니다(31, 현대인의 성경).  그러자 하나님의 천사가 발람에게 세 가지를 말씀했습니다:

 

(1)  너는 왜 나귀를 이와 같이 세 번씩이나 때렸느냐?” (32,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천사가 발람에게 너는 왜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고 있느냐?’(참고: 32, 현대인의 성경)라고 책망하기보다 너는 왜 나귀를 이와 같이 세 번씩이나 때렸느냐?”(32, 현대인의 성경)라고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의 천사는 발람의 범죄를 책망하기보다 그의 충실한 나귀의 억울함을 더 배려한 것일까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사악한 길을 가고 있었던(32) 발람을 세 번씩이나 징계하시는 것이 더 적합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발람은 아무 죄도 없는 자신의 나귀를 세 번씩이나 때렸기에 하나님의 천사는 발람에게 너는 왜 나귀를 이와 같이 세 번씩이나 때렸느냐?”라고 말한 것이 아닐까요?

 

(2)  네가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기 때문에 내가 너를 막으려고 왔으나 나귀가 나를 보고 세 번이나 피해갔다”(32-33,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발람은 하나님의 천사가 자기를 막으려고 길에 서 있는 것을 몰랐었습니다(34, 현대인의 성경).  그랬기에 그는 자신의 충실한 나귀가 처음으로 자기를 거역했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손에 칼만 있었더라면 벌써 자신의 나귀를 죽여 버렸을 것이라고 나귀에게 말한 것입니다(29,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하나님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셔서 하나님의 천사가 칼을 빼 들고 길에 서 있는 것을 보고(31, 현대인의 성경) 또한 하나님의 천사가 자기에게 네가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기 때문에 내가 너를 막으려고 왔(32, 현대인의 성경)고 말씀했을 때에서야 발람은 왜 자신의 나귀가 자기를 세 번이나 거역을 했는지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나귀를 세 번씩이나 때린 것이 잘못했음을 인식했을 것입니다.  그제서야 발람은 나귀가 하나님의 천사를 보고 자기를 구하려고(살리려고) 세 번이나 피해갔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께만 잘못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나귀에게도 잘못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3)  만일 나귀가 피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만 살려 두었을 것이다”(33, 현대인의 성경).

 

이 하나님의 천사의 말씀을 들었던 발람은 어떠한 생각을 했었을까요?  자신이 손에 칼만 있었더라면 벌써 자신의 나귀를 죽여 버렸을 것이었는데(29, 현대인의 성경) 오히려 하나님의 천사가 칼을 손에 들고 자신을 죽이려고 했었던 사실을 알고 자신의 나귀가 세 번이나 피했으므로(발람은 자신을 거역하는 것으로 오해했음) 자신이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얼마나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었을까요?  얼마나 자신의 나귀에게 고마웠을까요?  과연 발람이 그리 생각했었을까요?  발람은 하나님의 천사의 말씀을 듣고 내가 죄를 범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34, 현대인의 성경).  그런데 과연 발람이 진정으로 회개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저의 생각의 근거는 베드로후서 215절 말씀과 요한계시록 214절 말씀입니다: “그들은 바른 길을 버리고 잘못된 길에 빠져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고 있습니다. 발람은 악한 방법으로 얻은 재물을 사랑하다가”(벧후2:15, 현대인의 성경), “발람은 발락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꾀어 우상의 제물을 먹고 음란한 짓을 하도록 가르쳤다”(2:14, 현대인의 성경).  결코 발람은 하나님을 기뻐하지 아니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의의 삯을 사랑[악한 방법으로 얻은 재물을 사랑(현대인의 성경)]했던 거짓 선지자 발람(벧후2:15)이 사악한 길(22:32) 또는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고 있는 것(32, 현대인의 성경)을 보시고 몹시 분노하시사 하나님의 천사로 하여금 발람의 길을 막아서게 하셨습니다(22, 현대인의 성경).  막아선 하나님의 천사를 발람의 나귀가 보고 세 번씩이나 피해가므로 발람은 죽임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33, 현대인의 성경).  그것도 모르고 오해하여 자신의 충실한 나귀를 세 번씩이나 때린 발람(32)은 하나님께서 입을 열어 말할 수 있게 하신 나귀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평생 타고 다니는 나귀가 전에 이렇게 자기의 말을 세 번이나 거역한 적이 없었음을 나귀에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에도 발람은 자기가 가고 있는 길이 하나님 보시기에 사악한 길이요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셔서 하나님의 천사가 칼을 빼 들고 길에 서 있는 것을 보게 하시고 또한 그가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책망했을 때에야 자신이 죄를 범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적으로 발람은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았습니다(벧후2:15-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은 발람은 모압 왕 발락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꾀어 우상의 제물을 먹고 음란한 짓을 하도록 가르쳤습니다(2:14, 현대인의 성경).  그 결과 결국 브올의 아들 점술가 발람도 칼날에 죽임을 당합니다(13:22).  야고보서 115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욕심이 생기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4:22-24)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제임스 김 나눔

(2022123, 우리의 길을 막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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