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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깊은 속에까지 내려가신 예수님 (마12:40)

  처음으로 이리 묵상해 보았습니다. 요나 선지자는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서 깊음 속 바다 가운데서도(into the very heart of the seas)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는데, 혹시 예수님께서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in the heart of the earth) 계셨을 때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 기도를 드리시지 않았을까요? https://youtu.be/lKEkXpXcW8M?si=m0x3B37bcM4hEBnY

순금 같은 신앙

          여러분 생각엔 성경 욥기서에서 제일 잘 알려지고 우리 신자들이 좋아하는 말씀 두 구절을 뽑으라고 한다면 어느 구절을 뽑으시겠습니까?  제 생각엔 그 두 구절 중 하나는 욥기 8 7절이라 생각합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저는 이 성경구절을 어느 회사에 방문해서도 보았지만 또한 어느 식당에 가서도 벽에 이 욥기 8 7절 말씀이 적혀 있는 성구 벽걸이를 걸어놓은 것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왜 회사나 식당에 이 성경 구절이 적힌 성구 벽걸이를 걸어 놓는 것일까요?  제가 정확히 그 회사나 식당 사장님이 왜 그 성구 벽걸이를 걸어놓았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그 성구 벽걸이를 본 저는 이 욥기 8 7절 말씀이 그들에게 희망을 주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비록 이 말씀은 욥의 친구인 수아 사람 빌닷이 말한 내용이지만(1)].  예를 들어식당 주인이 음식점을 차려 개업할 때에 욥기 8 7절 성구 벽걸이를 식당 벽에 걸어놓는 이유는 그 성경 말씀대로 비록 지금 식당을 시작할 때에는 미약하지만 나중에는 주님께서 심히 창대케 해주시길 간절히 사모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업이 창대해지고 나서입니다.  왜 사업이 창대해져야 하는지 분명하고 뚜렷한 성경적인 목적이 식당 주인에게 없다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그 식당 주인은 교만해지고 욕심이 많이질 위험이 참 많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내 나중은 심히 창대해졌지만 내 더 나중은 내 시작보다 더 심히 미약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이 우리는 강하고 위대하신 주님만 바라보며 의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욥기서에서 제일 잘 알려지고 우리 신자들이 좋아하는 말씀은 오늘 본문 욥기 23 10절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아마도 우리가 이 성경 구절 말씀을 좋아하는 이유는 비록 지금 우리가 욥처럼까지는 아닐지라도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이 고난은 주님께서 나를 단련하시는 것이고이 단련이 끝난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는 희망을 주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특히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한 세 부분으로 나눠서 이리 적용해 보았을 때 이 욥기 23 10절 말씀이 더 은혜가 되었고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1) 첫째로,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알고 계신다.’  비록 나 자신조차도 내가 가는 길을 모르겠지만 주님은 알고 계신다고 생각하니 이 말씀이 제 마음에 위로가 되었습니다.  (2) 둘째로, ‘그가 나는 단련하신 후에는 ….’  비록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의 의미나 목적은 내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알고 믿고 있는 것은 주님께서는 이 고통을 통하여 나를 단련하고 계시다는 사실과 단련하신 후가 있다는 사실이 저로 하여금 인내하며 견디게 하며 소망을 품게 한다는 것입니다.  (3) 셋째로주님께서는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주님께서 나를 고통의 용광로로 단련하신 후에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올 것이기에 나는 이 소망을 가지고 감사함과 믿음으로 고통의 통로를 걸어가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제 입장에서의 욥기 23 10절 말씀의 해석이고욥의 입장에서는 해석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저는 제가 좋아하는 욥기 23 10절 말씀만 읽고 묵상할 것이 아니라 그 말씀에서 제일 가까운 성경 구절들인 23 1-17절까지 전체를 읽고 묵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 그리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욥기 23장과 가까운 22장이나 24장 등 점진적으로 욥기서 전체를 읽고 묵상해야 욥이 왜 23 10절을 말했는지 그의 입장에서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 속에 욥기서 여기 저기를 읽어 보았습니다.  그리했을 때 비록 제 스스로가 매우 부족함을 느끼지만 조금이나마 오늘 본문인 욥기 23 10절에서 왜 욥기 그리말했는지 그 의미를 좀 더 알게 된 것 같습니다.  특히 저는 욥기 23 10절에서 욥이 말한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는 말씀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습니다.  한번도 그리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을 이번에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던지게 되었는데 그 던진 질문은 욥이 말한 순금 같이가 무슨 의미일까 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욥이 말한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는 욥 자신과 주님께서 순금 같이 되어 나오게하실 욥과 달랐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욥이 생각하고 있었던 주님께서 자기를 단련하신 후에 순금 같이 나올 자신의 모습과 주님께서 욥을 단련하신 후에 순금 같이 만드실 욥과 달랐다고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주님의 생각은 욥의 생각보다 높았다는 말입니다(55:9).  제 개인적인 적용 해석은 욥이 기대했던 순금 같이 나올 자신의 모습은 욥기 42 12-17절이 아니었을까 란 생각이 듭니다: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니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면욥이 기대했던 순금 같은 자신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주신 처음보다 더 많은 복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이것이 또한 우리가 주로 말하고 기도하며 기대하며 기다리는 회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이 회복은 그저 잃어버린 처음의 복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주시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의 복보다 더 많이 주실 복을 말합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주님께서 욥에게 주시고자 하셨던 순금 같이 되어 나오게 될 욥의 모습이었을까 라는 질문할 때에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주님께서는 욥을 단련하신 후에 그에게 주시길 원하셨던 순금 같이 나올 욥의 모습은 그의 말년에 처음보다 더 많은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그 보다 훨씬 더 큰 복을 주시길 원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욥에게 주시고자 하셨던 그 보다 훨씬 더 큰 복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그것을 순금 같은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순금 같은 신앙의 놀라운 큰 축복이 크게 두 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1) 첫째로주님께서 욥에게 베풀어 주신 놀라운 큰 축복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입니다 다시 말하면주님께서 욥을 단련하신 후에 주셨던 큰 축복은 욥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것입니다.  좀 더 욥기서 말씀 용어로 말한다면주님께서 욥에게 베풀어 주신 큰 축복은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도록(23:3) 하나님께서 자신을 욥에게 말씀으로 계시하신 것입니다(38-41).  (2) 둘째로주님께서 욥에게 베풀어 주신 놀라운 큰 축복은 욥이 나의 증인”, “나의 중보자이시요(16:19) “나의 대속자”(19:25)이신 주님의 공의(His righteousness)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이지 자신이 굽게 잡고 놓지 않았던 내 공의”(my righteousness)(27:6)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깨닫게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 진리가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2 16절에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분명히 성경은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요 또한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은 없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지금도 율법을 지켜 행하므로 의롭다 함을 얻고자 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인들이 교회 안에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분명히 성경 이사야 64 6절은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우리의 의로운 행위는 때묻은 누더기와 같(현대인의 성경)]고 말씀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3:22, 4:5, 9, 11, 13, 9:30, 10:6; 2:16; 3:9; 11:7).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아무 공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주셨습니다 이렇게 우리처럼 행복한 자가 어디 있습니까(33:29; 4:6, 현대인의 성경).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순금에 비할 만큼 보배로운”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4:2).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순금 같은 신앙을 은혜의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순금 같은 신앙은 내 공의”(27:6)가 아닌 오직 나의 중보자시요(16:19) “나의 대속자”(19:25)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진리를 믿는 신앙이요(2:16) 또한 귀로만 들었던 주님을 눈으로 뵈는(42:5), 즉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는 신앙입니다 이러한 보배로운 신앙을 주님께서 우리를 단련하신 후에 주시길 기원합니다.

 

 

고난의 풀무 불에서” 나를 연단하시고(48:10) 단련하시사 순금 같이 되게 나오게 하시는(23:10) 주님의 의만을 의지하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9 6 14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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