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
[사도행전 16장 1-34절]
새해 2022년을 맞이하여 우리 승리장로교회의 목표는 더욱더 예수님의 증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사도행전 1장 8절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 중심으로 우리는 1월 2일 주일 신년 예배 때 “내 증인이 되리라”는 제목 아래 5가지 교훈을 받았습니다: (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힘써 알아가야 합니다(호6:3; 빌3:8),
(2)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열심히 들어야 합니다(롬10:17),
(3)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을 신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빌1:27),
(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입술로도 전해야 합니다(행16:10),
(5)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내 생명보다 더 귀하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여 교회 안에서 및 교회 밖에 직장이나 사회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이웃을 사랑하면서 그 이웃과 함께하는
동안 그 이웃에게 선한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20:24). 그리고 우리는 1월 8일 토요일 새벽기도회 때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란 제목 아래 4가지 교훈을 받았습니다: (1)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은 예수님을 힘입어
죄 사함을 사람들에게 전합니다(행13:38-39), (2)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습니다(43절), (3)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고 언제나 믿음에서
살라고 격려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고 말합니다(14:21-22, 현대인의 성경), (4)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다가 죽습니다(13:36, 현대인의 성경). 저는
오늘 1월 11일 화요일 저희 가족 선교 기도회 때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이란 제목 아래 2가지 교훈을 받았습니다:
첫 번째
교훈은,
우리는 신자들에게 존경 받는 사람과 함께 팀 사역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6장 1-3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십시오:
“바울은 더베에 들렸다가 루스드라로 갔다. 거기에 디모데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주님을 믿는 유대인이었고 아버지는 그리이스 사람이었다.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신자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를 데리고 다니려 했으나 그의 아버지가
그리이스 사람인 것을 아는 그 지방 유대인들 때문에 그를 먼저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였다.” 사도 바울은 복음 전도 선교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 그의
선교팀 사역자로 루스드라에 있는 디모데라는 제자를 택했습니다.
디모데라는 제자는 자기 고향인 루스드라 뿐만 아니라 이고니온에 있는 신자들에게도 존경을 받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개역개정: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2절). 그의 어머니는 주님을 믿는 유대인이었지만 아버지는 그리이스
사람(헬라인)이었습니다(1절). 그래서 바울은 신자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던 디모데를 데리고
선교 여행을 떠나고자 했지만 그의 아버지가 그리이스 사람인 것을 아는 그 지방 유대인들 때문에 그를 먼저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였습니다(3절, 현대인의 성경). 비록 바울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닌 것을 알고 있었지만(15:1, 현대인의 성경) 그의 복음 전도
선교 사역의 원리대로 유대인들을 얻기 위해서 그리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내가 유대인처럼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기 위해서이며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그들처럼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얻기 위해서입니다"(고전9:20, 현대인의 성경). 우리도 한 영혼을 얻기 위해서 이 사도 바울의 복음 전도
선교 사역의 원리를 배워서 실제 복음 전도 선교 사역에 적용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한 후 바울과 그 일행은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이 결정한 규정을 신자들에게 전하여 지키게 하였습니다(행16:4,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교회는 믿음이 강해지고 그 수가 날마다 늘어났습니다(5절,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부분의 말씀을 묵상할 때 교회에 이렇게 적용해보았습니다:
“교회 안에서 목사님과 장로님들(당회)이 결정한
규정을 신자들에게 전하여 지키게 하는 목적은 교회가 믿음이 강해지고 그 수가 날마다 늘어나기 위해서여야 합니다.”
마지막
두 번째 교훈은,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6장 6-10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십시오: “성령님이 아시아에서 말씀 전하는 것을 막으시므로 그들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 지나 무시아에
이른 후에 비두니아로 가려고 하였으나 성령님이 그것을 허락하시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다. 그 날 밤 바울이 환상을 보았는데 어떤 마케도니아 사람이
서서 그에게 '마케도니아로 건너와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바울이 그 환상을 본 후에 우리는 하나님이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으로 판단하고 곧 떠날 준비를 하였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가 아무리 주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바른 목적을 가지고 복음 전도 선교 사역을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복종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이요 둘째로는
성령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사(롬8:26-27) 우리가 어디로 가서
어떻게 복음 전도 선교 사역을 해야 할지 모를 때에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시고 또한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행16:6-10, 현대인의 성경). 그러면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복종하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 4가지 하위 교훈을 받습니다:
(1) 우리는 바른 지식에 근거하지 않은 복음 전도 선교 사역의
열심을 경계해야 합니다.
성경 잠언 19장 2절과 로마서 10장 2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십시오:
“지식 없는 열심은 좋지 못하고 성급한 사람은 잘못이 많다”(잠19:2,
현대인의 성경), “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열심은
바른 지식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롬10:2, 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로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사역을 감당할 때 이 3가지가 함께 우리에게 있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a) 성급한 성격, (b) 바른 지식에서 나오지 않는 열심, (c) 결핍된 바른 지식. 그
이유는 이 3가지가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는 복음 전도 선교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드리기보다
복음 전도 선교 사역을 잘못할 위험이 참 많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사역을 감당할 때에 자신이 생각하기에 주님을 위하여 바른 목적을 가지고 열심을 내지만 그 열심히 바른 지식에 근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절제가 되지 않은 열심으로 성급하게 봉사하는 사람은 목사님과 장로님들(당회)의 결정한 규정을 지키기를 거부할 정도로 분수에 넘치는 생각과 열심을 낼 위험이 많습니다(행
16:4; 민16:3, 7, 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로서 바른 지식에
근거하지 않은 복음 전도 선교 사역의 열심을 경계하는 가운데서 오히려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바른 지식에 근거한 열심을 가지고 복음 전도
선교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2) 우리는 성령 충만하여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도 선교 사역에 있어서 성령님께서 우리가 가고자 하는 사역지를 막으시고 또 허락지 않으실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성령님께서 우리의 길을 막으실 때에는 분명히 열어주시는 길이 있다고 믿고 있는데 과연 우리는 성령님의
막으심과 여심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과연 성령님이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을 막으실 때 우리가 아무리 복음 전도 선교라는 바른 목적을 가지고 있다할지라도 성령님의 막으심에
겸손히 복종하지 않고 우리의 바른 목적을 관찰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교만이 아닌가요? 또한 성령님이 우리에게 가야 할 길을 열어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계속 길을 열어주시길 기도하고 있다면 그것 또한 우리의 미련함이 아닌가요? 바른 목적과 바른 마음의 동기만 가지고 있다고 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성령님의 바른
인도하심을 따르기 위한 성령 충만함과 영적 분별력이 필요합니다(참고: 행16:6-10, 현대인의 성경).
(3)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알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6장 9-10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십시오: “그 날 밤 바울이 환상을 보았는데 어떤 마케도니아 사람이 서서
그에게 '마케도니아로 건너와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바울이 그 환상을 본 후에 우리는 하나님이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으로 판단하고 곧 떠날 준비를 하였다.” 성령님께서는 바울과 그 일행이 아시아에서 말씀 전하는 것을
막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비두니아로 가려고 애썼을 때에도 그것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6-7절). 그래서 그들은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그 날 밤
바울이 환상을 보았는데 어떤 마케도니아 사람이 서서 바울에게 “마케도니아로 건너와 우리를 도와주십시오”하고 간정하였습니다(8-9절, 현대인의 선경). 바울이 그 환상을 본 후에 그 일행과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이성으로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판단”(현대인의 성경)]하고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썼습니다(10절). 이렇게 성령님께서는 바울과 그 일행을 아시아에서 말씀 전하는
것을 막으셨지만 유럽 선교를 위해 마게도냐로 인도하셨습니다.
인도하시되 성령님은 환상을 통해 그 마게도냐 사람으로 하여금 바울에게 도움을 청하게 하시므로 바울과 그 일행을
인도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알게 하심으로도 우리는 인도하신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그 사람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임을 명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빌1:8) 그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행16:10).
(4) 복음 전파자는 기도하는 사람이요,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만남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6장 13-14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십시오: “안식일에 우리는 유대인의 기도처가 있음직한 성문 밖 강가로
나가 거기 모여 있는 여자들에게 말씀을 전하였다. 그 자리에는 두아디라에서 온 루디아라는 자색 옷감 장수도 있었다. 그녀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다.
주님은 그 여자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하셨다.”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결국에는 빌립보에
이르렀는데 빌립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11-12절). 그들은 거기서 며칠 동안 머물렀다가 안식일에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성문 밖 강가로 나갔다가 모여 있는 여자들을 만나 그녀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13절, 현대인의 성경). 그 자리에 두아디라에서 온 루디아라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색
옷감 장수가 있었는데 주님께서는 그 여자의 마음을 열어 바울이 전하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하셨고 마침내 그녀와 그녀의 온 집안 식구들이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14-15절, 현대인의 성경).
흥미로운 점은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은 이렇게 “기도할 곳”을 찾다가 루디아만 만난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 16장 16절을 보면 그들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만남의 결과는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그녀에게서 나오게 하는 바람에 그녀의 주인들은 그녀가 점을 쳐서 그 주인들에게 많은 돈을 벌어주고 있었는데 더 이상 돈을 벌 희망이
사라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로마 관리들에게 끌고 가서 결국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가둔바 되어 그 감옥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16-25절, 현대인의 성경). 분명히 사도 바울과 실라가 찾던 "기도하는 곳"은 "감옥"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엔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자신들이 원했던 원치 않았던 사람들의 인도함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감옥"을 "기도하는 곳"["기도처"(현대인의
성경)](16절)으로 삼고 기도했다는 그 사실이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지금 우리가 동서남북으로 갇힌바 된 것처럼 문제의 해결점이 망막하게 보이고 있다면 어쩌면 그 "감옥"같은 상황이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기도처"일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는 깊은 감옥에 가둔바 되어 발이 쇠고랑에
든든하게 채워 놓은바 되었을 때 그들은 한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24-25절). 그때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옥터가 움직이고 감옥 문이
모든 열렸습니다(26절). 깊은 감옥에 가둔바 되어 발이 쇠고랑을 든든하게 채워 놓은바
된 것처럼 만일 지금 우리가 여러 종류의 쇠고랑이들이 우리의 손과 발과 몸 등을 다 든든하게 채워 놓아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깊은 침체 가운데
허덕이고 있다면 우리는 바울과 실라처럼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할 때에 갑자기 큰 지진이 우리의 인생에도 일어나 우리를 묶었던 모든 쇠고랑이 다
풀리고 아무리 깊은 감옥이라 할지라도 그 감옥의 문이 다 열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으로 구원의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을 해야 합니다. 그 때 또 다른 놀라운 일은 하나님께서는 한밤중에 깨어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던 바울과 실라를 그 깊은 감옥에서 자유케하시사 자다가 깨어 감옥 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살하려던 간수를 육신적으로만 살려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죽었던 영혼도 살려주시사 주 예수님을 믿어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간수의 온 가족도
다 하나님을 믿게하시사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25-34절). 자살하려고 했던 사람이 살린바 된 것도 감사하고 기쁜데,
주 예수님을 믿어 영적으로 죽었던 자가 살아나 구원을 받게 된 것도 감사하고 기쁜데, 온 가족까지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세례를 받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함께 기뻐하고 함께 감사한 일입니까!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입니다(1:8).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입니다(16:6-10).
그러므로 우리는 신자들에게 존경 받는 사람과 함께
복음 전도 선교 팀 사역을 해야 합니다. 우리도 한 영혼을 얻기 위해서 사도 바울의 복음 전도 선교 사역의 원리인 “유대인에게는 내가
유대인처럼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기 위해서이며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그들처럼” 돼야 합니다(고전9:20, 현대인의 성경). 또한 우리는 복음 전도 선교 사역을 함에 있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복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바른 지식에 근거하지 않은 복음 전도 선교 사역의 열심을 경계해야 하며, 성령 충만하여 영적 분별력을 가져
성령님께서 막으시는 문과 열어주시는 문을 분별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음 전도 선교 사역의 문을 열어주실 때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알게 하십니다. 그 때에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그 사람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임을 명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그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명심하십시다. 복음 전파자는 기도하는 사람이요,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만남을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만남 속에서 그 만난 한 사람 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족에게도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 주님께서 이러한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을 통해 계속해서 이루시길 기원합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세움 받기를 기원하는,
제임스 김 나눔
(2022년 1월 12일, 주님께서 주님의 몸 된 승리장로교회를 세워나가심에 있어서 팀 사역을 감당케 하심과 더불어
그리스도 중심된 일꾼들을 세워 파송하시사 복음 전도 선교 사역을 감당케 하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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