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으로 살지 마십시다.
“그것은 우리가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5장 7절, 현대인의 성경).
“그들은 40일 동안 그 땅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바란 광야 가데스에
있는 모세와 아론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기들이 본 것을 이야기하며 가지고 온 과일을 보여 주었다. …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당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강합니다.' 하고 다른 정찰대원들이
반박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탐지한 땅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나쁜 소문을 퍼뜨리며 이렇게 말하였다. '그 땅에는 힘 센 장사들이 수두룩하고
사람들의 키가 모두 컸으며 게다가 우리는 네피림의 후손인 거인 아낙 자손들도 거기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도 우리 자신들이 메뚜기처럼 느껴졌는데 그들의
눈에도 우리가 그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민수기 13:25-26, 31-33, 현대인의 성경).
지난 주일
설교 시간에 “복음을 듣고 믿는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기독교의 핵심이다”이고 말했습니다(피터 아담). 그런 후 수요 예배 설교 시간에 원로 목사님을 통해서 복음을
들으면서 주시는 깨달음이 있어 이렇게 설교 노트를 적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선물로 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 함(칭의)을 얻었으면
그 때부터 우리의 책임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의 성장을 도모해야 합니다(롬10:17). 우리에게는 믿음의 진보가 있어야 합니다(빌1:25).’ 그래서
우리는 믿음이 굳셈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하며(롬1:17, 합2:4 인용), 이렇게 강하고 굳센 믿음으로 사는 자들은
무섭고 심한 환난도 기다리면서(합3:16)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고 믿음으로 결심하고 고백한다(18절)는 교훈을 받았습니다. 이 교훈을 사도 바울의 로마서 5장 3절 말씀으로 말한다면,
우리는 환난(고난) 중에서도 즐거워(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수요 예배 복음 설교를 통해 교훈을 받은 후 목요일
밤 10시 37분에 놀랄 만한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 소식은 바로 선교지에 가 있는 제 조카가 발작(seizure)으로 근처 병원으로 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2시간 후인 어제 금요일 새벽 12시 33분에 또 소식을 접했는데 제 조카가 계속 발작을 하고, 병원 측에서는 아마 뇌수막염(meningitis)인 것 같고, 의식이 없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오전 6시 44분에는 CT 촬영을 했는데 뇌가 많이 부었다는 소식과 그녀가 의식이 없어서 호수를 꽂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오전 8시 12분에는 그녀를 거주하고 있는 선교지에서 싱가폴로 옮기려고 한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런 후 오후 5시
6분에 제 조카의 심박수가 낮아졌고 혈압은 좋다는 소식을 접하고 좀 안심을 놓았었습니다. 그런데 한 5시간 후인
밤 10시 24분에 그녀의 동공에 반응이 없고 그녀가 스스로 호흡을
할 수 없다는 소식과 더불어 그녀의 뇌관(brain stem)이 죽었다(작동이 되지 않는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 소식을 제 조카의 엄마인 제 사촌 여동생이 전하면서 “praying
for miracle …”(기억을 위해 기도합니다)라는 글을 쓴 것을 보았습니다. 과연 이런 충격적인 소식을 들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저는 어제
금요일에 묵상한 민수기13-14장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적은 짧은 말씀 묵상의 글을 다시 묵상하면서
오늘 새벽기도회 설교를 종이에다가 볼펜으로 적어 내려갔습니다.
특히 저는 민수기 13장 32절
현대인의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나쁜 소문”을 퍼뜨린 10명의 정탐꾼들에 대해서 고린도후서 5장 7절과 잠언 3장 5절 말씀에 근거해서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고린도후서 5장
7절을 묵상할 때 가나안 땅을 40일 동안 정탐하고 돌아온(민13:25) 12명의 정탐꾼들 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뺀 10명의 정탐꾼들은 바란 광야 가데스에 있는 모세와 아론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기들이 본
것”을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가 그 곳에 가 보니 정말 기름지고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이것이 거기서
가져온 과일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강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도시들은 아주 크고 성곽으로 둘러싸인 요새였습니다. 게다가 거기에는 거인 아낙 자손까지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땅의 남쪽 지방인 네겝에는 아말렉족이 산간 지방에는
헷족과 여부스족과 아모리족이, 지중해 연안과 요단 강변에는 가나안족이 살고 있었습니다”(27-29절, 현대인의 성경). 그러자 갈렙이 모세 앞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안심시키면서
“자, 올라가서 그 땅을 점령합시다. 우리는 충분히 그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30절, 현대인의 성경)라고 말하자 그 10명의 정탐꾼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당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강합니다”라고 반박했습니다(31절,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탐지한 가나안 땅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나쁜 소문”을 이렇게 퍼뜨렸습니다: “그 땅에는 힘 센 장사들이 수두룩하고 사람들의 키가 모두 컸으며 게다가 우리는 네피림의 후손인 거인 아낙 자손들도 거기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도 우리 자신들이
메뚜기처럼 느껴졌는데 그들의 눈에도 우리가 그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32-33절,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왜 이 10명의 정탐꾼들이 자신들이 탐지한 가나안 땅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할 때 생각난 말씀이 바로 고린도후서 5장 7절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현대인의
성경). 그 10명의 정탐꾼들은 이 말씀과 정반대로 ‘그것은 그들이 믿음을 살지 않고 보이는 것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나쁜 소문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퍼트린 것입니다. 저는 그들이 퍼트린 나쁜 소문을 묵상할 때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자기들 보기에 힘 센 장사들과 키가 큰 모든 사람들과 네피림의 후손인 거인 아낙 자손들을 분명히 보았겠지만(32-33절, 현대인의 성경) 그들은 10명의 정탐꾼들을 못 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만일 그 가나안 땅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10명의 정탐꾼들을 보았으면
그들을 잡아 옥에 가두었던지 아니면 죽였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살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아온 것을 보면 분명히 가나안 땅 사람들은 그 10명의 정탐꾼들을 못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 10명의 정탐꾼들은 “우리가 보기에도 우리
자신들이 메뚜기처럼 느껴졌는데 그들의 눈에도 우리가 그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을까요?
(33절, 현대인의 성경)
만일 우리가
믿음으로 살지 않고 보이는 것으로 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계시다는 믿음의 생각보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있다는 생각과 의식에 사로
잡힐 위험이 많습니다. 특히 우리가
믿음으로 살지 않고 보이는 것으로 살면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크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큰 사람들이나 큰 문제를 더 크게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에 두려움이 가득 차게 되면 우리는 그 큰
사람들이나 큰 문제 앞에서 매우 작아집니다. 그래서 그 10명의 정탐꾼들은 “… 우리가 보기에도 우리 자신들이 메뚜기처럼 느껴졌는데 …”라고 말한 것입니다(33절, 현대인의 성경). 여기서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느낌’(feeling)입니다. 제가 대학교 때 제자훈련을 하면서 배운 교훈이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데 그 교훈이란 ‘Fact (사실, 하나님의 말씀)
à Faith (믿음) à Feeling (느낌)’이란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이 교훈대로 사실인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롬10:17)
제 믿음이 성장하며 성숙하길 기원하며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성장하며 성숙해져 가는 믿음에 근거하여 제 느낌 또는
감정을 절제하길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신앙의 여정을 뒤돌아보면 많은 때에 제가 사실인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림을 받기 보다 느낌(감정)에 이끌림을 더 많이 받아 의문과 의심과 심지어 불신하는 죄까지 범한 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 때 그 때 제 느낌(감정)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에 근거하지 못하고 힘들고 어려운 상황 등에 반응하는 느낌(감정)으로서 우왕좌왕할 때가가 참 많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느낌(감정)을 절제할 능력도 없을 정도로 믿음이 없었기에 저의 신앙 생활은 견고함이 없이 요동함과
흔들림이 참 많았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지금에 와서 고린도후서 5장 7절과 민수기 13장 33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을 묵상할 때 드는 생각은 ‘믿음은 사실(fact)인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만, 불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느낌(feeling)에 근거합니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도 않은 느낌에 끌려 다니게 되면 가나안 땅의 힘이 세고 키가 큰 장사들과 거인 아낙 자손들을 보고 두려움 속에서 자신들이 메뚜기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10명의 정탐꾼들은 “그들의 눈에도 우리가 그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민13:33, 현대인의 성경).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가나안 족속들과 전쟁도 하기 전에
이미 마음에서 패했습니다. 마음이란
전쟁터에서 자신과의 싸움에서 진 사람들이 어떻게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에 나가서 영전 전쟁에서 승리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쁜 소문을
퍼뜨린 10명의 정탐꾼들은 믿음으로 살지 않고 보이는 것으로 살았을 뿐만 아니라(고후5:7) 또한 그들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신의 지식을 의지했습니다(잠3:5, 현대인의 성경). 그 결과 그들의 나쁜 소문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밤새도록
통곡하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민14:1-2상, 현대인의 성경). 저는
그들의 원망을 한 4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우리가 이집트에서나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민14:2하, 현대인의 성경)
이 원망을 묵상할
때 저는 함부로 원망하면 안 되겠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가 이집트에서나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원망하는
소리를 하나님이 다 들이시고 그들이 한 말 대로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27-28절, 현대인의 성경). 29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너희는 이 광야에서 쓰러져 죽을 것이다. 너희가 나에게 불평하였으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제외하고 나를 원망한 20세 이상의 사람들은 내가 약속한 땅에 하나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행하셨습니다: “모세의 지시를 받아 땅을 탐지하고 돌아와 허위 보고로 백성들을 충동하여 모세를 원망하게 만든 그 정찰대원들은 여호와의 재앙을 받아
죽었다”(36절, 현대인의 성경),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광야에서 다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26:65, 현대인의 성경). 야고보서 5장 9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형제 여러분,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심판하실 분이 이미 문 앞에 서 계십니다.”
(2) “무엇 때문에 여호와가 우리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칼날에 죽게 하려는가?”(민 14:3상,
현대인의 성경).
이 원망을 묵상할
때 저는 우리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관하여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러한 난관 또는 위기를 접하도록 인도하셨는지 의문과 의심과 불신 속에서 불만을
표출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셨고(신6:10, 현대인의 성경) 그 약속대로 실행에 옮기고 계셨는데 나쁜 소문을 듣고 밤새도록 통곡하고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인도하셔서 결국에는 가나안 족속들의 칼날에 죽게 하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셨을 때 10가지 재앙을 내리실 정도로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신데 그들을 약속하신 땅인 가나안으로 인도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진실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그 가나안 족속들의 칼날에 죽게 하시겠습니까? 잠언 3장 5-6절 말씀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3) “우리 아내와 자식들이 다
잡혀갈 바에야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민 14:3하, 현대인의 성경).
이 원망을 묵상할
때 현재의 난관을 만났을 때 불신은 차라리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낫다고 말하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전도서 7장
10절 말씀입니다: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니니라”. 우매자,
즉 미련한 자는 현재의 난관과 역경보다 과거의 형통했을 때를 그리워합니다(10절).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현실이 어떠하던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는 현실에 충실합니다. 그는 과거를 그리워하면서 과거에 머물러 있기보다 현재의 난관과
역경 속에서 오히려 과거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므로 현재 그 은혜를 기념합니다. 기념하되 그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현재 그가
당면한 난관과 역경에서도 자기를 건져 주실 줄 믿고 믿음으로 전진해 나아갑니다. 그리할 뿐만 아니라 지혜로운 자는 미래의 소망을 두고 앞으로
전진해 나아갑니다. 그는 결코 과거
지향적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입니다.
(4) “자, 지도자를 뽑아 세우고 이집트로 돌아가자!” (민14:4, 현대인의 성경)
이 원망을 묵상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자신들의 지도자 모세를 거절하고 자기들이 원하는 새 지도자를 뽑아 세우고자 했습니다. 그래야 자신들이 원하는 데로 더 이상 앞으로 전진하여 가나안
땅으로 가지 않고 이집트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보기에는 더 낫다고 생각했기에 그리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사기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인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마다 자기 생각의 좋을 대로 하였다가(삿17:6, 21:25, 현대인의 성경) 사무엘 시대 때 사무엘은 늙었고 그의 아들들은 사무엘의 행위를 본받지 않고
있으니까 “다른 나라들과 같이 우리에게도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십시오”(삼상8:5, 현대인의 성경)라고 요구한 것보다 더 심각한
죄라 생각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왕을 요구했을 때에는 사무엘을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버려 더 이상 하나님께서 그들의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반면에(7절,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이 세우신 모세를 거절하고
다른 새 지도를 뽑아 세우려고 했던 것은 하나님만 거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도 거절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 생활을 했었던 이집트로 다시 돌아가려고 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린
이스라엘 백성들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주께서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부터 지금까지 용서해 주신
것처럼 주의 변함없는 크신 사랑으로 이들을 용서해 주소서”라고 간구하니까 모세의 말 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해 주셨습니다(19-20절, 현대인의 성경). 18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주께서는 쉽게 노하시지 않고 사랑과 자비가 많아서 죄와 잘못을 용서하시지만 그렇다고 범죄한 자를 벌하지 않은 채 그대로 두지는 않을
것이며 그 죄에 대하여 자손 삼사대까지 벌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수아와 갈렙은 옷을 찢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탐지한 땅은 아주 좋은 땅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좋게 여기신다면 우리를 그 곳으로 인도하여
기름지고 비옥한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여호와를 거역하지 마십시오. 그 땅 사람들은 우리 밥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의 보호자는 떠났고 여호와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니 조금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7-9절, 현대인의 성경)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쳐 죽이려고 위협을 했습니다(10절, 현대인의 성경). 어느 정도로 두렵고 원망스러웠길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으로
말한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쳐 죽이려고 위협까지 했을까요?
두려움과 원망이 가득 찬 마음은 어떠한 불신의 위협적인 행동을 할지 예측을 할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언제까지 이 사람들이 나를 멸시할 작정이냐? 내가 그들 가운데 그렇게 많은 기적을 행했는데도 언제까지 그들이 나를 믿지 않을 작정이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11절, 현대인의 성경). 이 말씀 묵상할 때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그렇게 많은
기적을 행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라 생각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또 이집트와 광야에서 행한 기적들을 보고서도 하나님을 열 번이나 시험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약속한 땅을
절대로 보지 못했고 하나님을 멸시한 자도 그 가나안 땅을 보지 못했습니다(22-23절, 현대인의 성경). 우리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또한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보고서도 하나님을 수 없이 시험하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받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이 말씀 묵상의 글을
적어내려 갈 때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제 조카가 선교지에서 싱가폴 병원에 도착하여 중환자실에 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리고 그 조카의 부모님인 제 사촌 여동생 사모님과 남편
목사님이 지금 비행기를 타고 있는데 한 7시간이면 싱가폴에 도착할 것이라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 믿음의 부모님이 싱가폴 병원 중환자실에 의식이 없이 산소호흡기를
끼고 누워있는 모습을 볼 때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저희 부부는 55일 동안 첫째 아기 “주영”(뜻: 주님의 영광)이가 중환자실에 그리 누워있는 모습을
보았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시편 63편 3절 말씀이었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저는 이 번에 제 조카의 소식을 듣고 기도 묵상하는 가운데
요한복음 11장 4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이 말씀의 배경 이야기는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그의 누이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내어 “주여 보십시오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말했을 때(3절)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결린 병이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예수님께서 이미 죽은지 4일이나 된 나사로(17절, 현대인의 성경)를 다시 살리셨다는 기적(43-44절)보다 영적으로 죽었던(엡2:1) 하나님과 원수였던 죄인들인 우리(롬5:8, 10)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중생했다는 사실[첫째 부활(계20:6)]이 더 큰 기적이라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기적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순간)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성도들이 먼저 부활하여(둘째 부활)(살전4:16, 현대인의 성경)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빌3:21, 현대인의
성경) 구름 속으로 끌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살전4:17,
현대인의 성경) 영광스러운 새 하늘과 새 땅(계21:1, 2)에 들어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구원의 노래, 승리의 노래)(15:3)를 부를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 생각할 때 우리가 어찌 찬양 안 할 수 있겠습니까(새 찬송가 303장 “나 위하여 십자가의”).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죽습니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롬14:8, 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살지 않고 보이는 것으로 삶으로 기쁜 소식인 복음을 듣기를 속히 하기보다 불신 속에서 “나쁜
소문”을 듣기를 더 속히 하는 것을 매우 경계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불신은 나쁜 소문을 퍼트리고, 나쁜 소문은 원망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쁜 소문을 듣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불신하면서 원망하기보다 기쁜 소식인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신하므로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기를 기원하는,
제임스 김 나눔
[2022년 10월 29일, “예수 안에 잇는 우리 한량 없이 즐겁고 주 성령의 위로함이 마음속에 차도다 천국 음악
소리 같은 은혜로운 그 말씀 끊임 없이 듣는 우리 어찌 찬양 안할까”(새 찬송가 303장, “날 위하여 십자가의”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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