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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전도와 공동체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팀 켈러입니다. 이번 시간엔 CTC DNA 백서 열세 번째 주제 즉, 복음 전도와 공동체의 본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목을 왜 복음 전도와 공동체라고 붙였는지는 점차로 알게 될 겁니다. City To City는 세계 도시에 교회를 개척하는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다른 교회를 희생시켜서 교회를 세우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 방법은 더 나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다양한 사람들을 끌어들입니다. 다른 교회에서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매우 빠르게 성장합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세계 도시에서 교회를 개척하고자 하는 방식은 복음 전도를 통해서입니다.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이끌어 그들이 전에 속하지 않았던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백서에 있는 내용의 개요를 말씀드리고 왜 복음 전도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 얘기하고자 하는데요. 이 네 가지 제목 하에 우리의 생각을 정리할 겁니다. 왜 전도해야 하는가? 누구에게 전도해야 하는가? 언제 전도해야 하는가? 어떻게 전도해야 하는가? ‘왜,’ ‘누구에게,’ ‘언제,’ ‘어떻게’에 대해 살펴볼 겁니다.
우선 왜 전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우리의 동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른 요점도 말씀드리고 싶지만 저는 우리의 동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겁니다. 전도하는 주체가 개인이든지 교회이든지 상관없이 가장 중요한 것은 동기입니다. 복음 전도를 막는 네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효과적인 전도를 말이죠. 하나는 교만입니다. 교만은 복음 전도를 막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혹하고 거만하며 다른 사람을 얕잡아 보거나 다른 사람과 얘기할 때 자기 신앙에 대해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면 그것은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식으로든 교만이나 가혹함을 보이면 그것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두 번째, 두려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두려워합니다. 그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지 그들이 우리를 찬성하지 않기에 등돌리지는 않을지 두려워합니다. 세 번째 장벽은 소망의 부족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보며 ‘저 사람들은 결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을 거야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될 사람들이 아니야’라 합니다. 우리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할 만큼의 소망이 없습니다. 무관심은 사랑의 부족에서 비롯됩니다. 절망은 소망의 부족에서 비롯됩니다. 물론이죠. 두려움은 용기의 부족에서 비롯되고 교만은 겸손의 부족에서 비롯됩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이 네 가지를 제공합니다. 보세요 복음은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교만을 제거합니다. 비기독교인에게 얘기하는데 왜 그들에게 우월감을 느껴야 하나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건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이라는 것이고 우리가 말하고 있는 상대방은 도덕적으로 더 우수할 수 있는데요. 그들이 훨씬 더 나을 수 있습니다. 내가 비기독교인에게 얘기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한 아버지일 수 있고 여러 면에서 나보다 덕이 더 많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교만을 제거하고 겸손을 줍니다. 우리는 더 호감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두려움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복음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합니다. 무조건적으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요. 그 의미는 인간에게 인정받아야 할 필요가 줄어든다는 겁니다. 그러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 두려움이 줄어드는 겁니다. 그러므로 복음적 겸손 혹은 복음적 확증이 두려움을 제거하는 뭔가를 주는 겁니다. 세 번째로 소망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사람들을 보며 ‘아, 그들은 결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을 거야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될 사람이 아니야’라 생각하는데 ‘아, 당신은 그리스도인이군요’라는 상황이라면 어떨까요? 아시겠어요?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기적이란 걸 모르겠어요? 그것이 기적인 걸 모르겠어요? 그것은 기적입니다. ‘저 사람들에겐 소망이 없어 저 사람들은 결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을 거야’라는 생각이라면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이 여러 여성들과 얘기하는 부분을 보세요. 그들은 강가에 내려가 기도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보면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역사라는 말입니다. 누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항상 기적입니다. 우리의 언변이나 그런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사람의 유형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 유형이라는 건 없습니다. 아무도 그리스도인이 될 만한 유형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지었고 그것은 장애물이 됩니다. 성령으로 인하지 않는 한 그들은 복음을 듣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든지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교만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제거되고 두려움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제거되며 절망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제거됩니다. 물론 복음은 우리에게 사랑을 줍니다. 주변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합니다. 그래서 무관심을 없앨 수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아마도 제 시간의 거의 절반을 여기에 썼는데요. 저는 실제로 우리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전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떤 핑계를 찾을 겁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글쎄요, 저는 훈련을 받지 않아서 반박에 잘 대답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글쎄요 여러분이 복음으로 충분히 서 있다면 어떤 방법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그것을 찾아낼 겁니다. 책을 읽을 겁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여러 해 전에 존 스토트는 상당히 설득력 있는 걸 저술했는데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입을 닫고 입술을 봉하고 혀를 묶는 것만큼이나 영적 경험의 빈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없다’ 그의 말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복음이 우리의 삶에서 정말로 살아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을 믿을 수는 있지만 복음이 영적으로 활동적이지 않고 활력이 없어 우리를 변화시키지 않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결국 여기서 전도는 전문가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겁니다. 전도는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동기를 얻으면 정말로 전도가 가능하게 됩니다.
그것이 첫 번째 요점이고 두 번째는 어디에서 전도해야 하는지입니다. 여기서 단어 하나를 사용하고자 하는데 헬라어입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단어죠. 전도는 여러분의 오이코스에서 행해집니다. 가정이라는 뜻의 헬라어 단어입니다. 많은 분들이 알고 있듯이 신약 성경에서 흥미 있는 것은 그레코-로만 사회에서 가정은 가까운 가족만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흔히 여러 세대가 함께 살았고 지금처럼 사회가 그다지 유동적이지 않았으며 또한 사업 동료와 친구와 같은 사람들의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이코스는 함께 일하고 늘 만나는 사람들을 의미했습니다. 오늘날은 핵가족이고 사회가 유동적이어서 오이코스의 의미가 예전과 똑같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 지리적 오이코스 직업적 오이코스 문자 그대로 친족 오이코스 그 다음 우정 오이코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리적 오이코스는 가까이 살고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바로 근처에 사는 사람 같은 건물 안에 사는 사람 즉 이웃을 말합니다. 직업적 오이코스는 함께 일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친족 오이코스는 직계 가족만 아니라 친척을 포함합니다. 혈연과 결혼 등으로 맺어진 친척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보통 우리는 이 세 오이코스에서 친구를 선택합니다. 사는 곳에서 마다 친구를 사귀며 그 우정을 유지하게 됩니다. 일하는 곳에서 마다 친구를 사귀며 그 우정을 유지하게 됩니다. 살던 지역을 떠나도 일하던 곳을 떠나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오이코스는 근처에 사는 사람들 함께 일하는 사람들 친척 관계에 있는 사람들 친구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실제로 아마 50-60명이 될 수도 있고 혹은 약 10명 정도로 내려갈 수도 있을 겁니다. 그 사람들이 여러분이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입니다. 신약 시대에도 그 방식을 사용했고 실제로 대부분의 복음 전도에서도 이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보통의 그리스도인이 그들의 오이코이(복수) 안에서 서로 말하는 방식으로 전도했습니다. 이런 일이 오늘날에도 일어나야 합니다. 문제는 오늘날의 교회가 전도를 불신 친구를 교회에 데려와 위대한 전문가의 말씀을 듣게 하거나 누군가의 말씀을 듣게 할 때 일어난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는 겁니다. 그 방식이 서양 문화에서 오랜 세기 동안 효과가 있었지만 적어도 북미와 유럽에서는 이제 그런 방식은 작동하지 않고 대부분의 세계 다른 나라에서는 그 방식은 효과가 없다는 겁니다. 전도는 보통의 그리스도인이 그들의 오이코스에서 전하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언제 전도를 해야 하는지입니다. 저는 이것을 가지고 전도의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저는 프랑스의 위대한 철학자 블레이즈 파스칼의 팡세를 읽어드리려고 합니다. 그는 상당히 젊을 때 세상을 떠났죠. 그는 기독교에 대해 책을 쓰려고 했는데 너무 일찍 죽어서 끝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관한 메모를 했고 그것은 팡세라고 불리며 그건 격언이라는 뜻일 겁니다. 그 중 하나는 매우 흥미 있습니다. 팡세 187번입니다. 거기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파리에 사는 회의적인 친구들을 생각하며 말합니다. “사람들은 종교를 경멸한다 그들은 종교를 혐오하고 그것이 사실일 수 있다고 두려워한다 이에 대한 치료법은 이러하다 첫째, 종교가 이성에 반하지 않고 존경받을 가치가 있음을 보여 주어라 둘째, 다음으로 종교를 매력적으로 만들어서 선한 사람들이 그것이 사실이기를 바라게 하라 그 다음 셋째로는 그것이 사실이라는 걸 보여 주어라” 이것이 올바른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맞는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 각 단계별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요. 그의 말은 기독교가 믿을만한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그것은 변증이죠. 그것은 ‘여기 부활에 대한 증거와 하나님에 대한 증거가 있습니다’고 하는 거죠. 파스칼의 말은 그들에게 종교가 믿을 만하다고 설명하려면 먼저 그들이 그것이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듣지 않을 거라는 거죠. 기독교가 사실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없는데 그들이 여러분의 주장을 들을 이유가 없죠. 하지만 먼저 그것이 존경할 만해야 그들은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 말은 많은 사람들은 그냥 기독교가 그들의 관심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파스칼의 말은 기독교를 존경하고 바람직하게 여길 수 있도록 만들면 그 다음에 그들이 여러분의 말을 경청하여 기독교가 믿을 만하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저는 그 말이 정확히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해 간단하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기독교를 존중할 수 있게 하라는 파스칼의 말은 주로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비기독교인 친구들과 얘기해야 하는데 이건 좀 심각하게 들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들이 기독교를 존경할 만하게 하려면 여러분은 그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들이 여러분의 인격을 존경하고 그들이 여러분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며 그들이 여러분에게 존경심을 갖고 있는데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분은 기독교를 존경할 만하게 만들고 있는 겁니다. 그것은 겁나는 거예요. 정말 겁나는 겁니다. 하지만 기독교를 존경할 만하게 만드는 주된 방법은 우리 자신의 삶만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게 하여 그들이 기독교를 존경할 만한 가치를 발견하게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들을 기독교 공동체에 소개하는 겁니다. 반드시 교회 예배는 아니더라도 가정 그룹, 소그룹 등을 소개하여 그리스도인이 만나서 함께 먹고 성경에 대해 이야기하고 함께 기도하는 걸 보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불신자가 매우 사려 깊은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저 사람이 기독교를 믿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꽤 사려 깊을 거야’라 하겠죠. 그들에게 책을 주며 ‘기독교가 진실하다는 내용이 여기 있습니다’하기도 전에 그들이 알아야 하는 것은 사람들이 삶의 중요 답변을 알아냈고 그들의 삶에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선 사람들이 기독교를 존경하도록 만드는 것은 대체로 관계의 문제입니다.
그 다음엔 기독교가 바람직하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어떤 시점이 되면 그들에게 기독교가 무엇을 제공하는지 보여줘야 합니다. 여기 몇 개의 목록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고난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삶의 의미와 목적을 제공한다’ ‘기독교는 죄책감과 수치심, 정체성 상실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한다’ ‘기독교는 사랑하는 관계가 용서와 화해를 통해 계속 성장하게 하는 방법을 제공한다’ ‘기독교는 아름다움과 초월성에 대한 잠깐의 경험을 강화한다’ 때로 우리는 저 밖에 더 나은 것이 있다는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음악을 듣거나 풍경을 바라보는데 그 뒤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기독교는 때로 잠깐동안 경험하는 그러한 기쁨을 강화하도록 돕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찾고 있는 기쁨이 그분 안에 있습니다’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몸을 진정한 자신의 일부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 ‘기준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억압하지 않는 정체성’ ‘상황의 변화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 지속적인 만족’ ‘미래와 죽음까지도 직면할 수 있게 하는 소망’ 여기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아시겠어요? 기독교가 진실인 이유가 이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대신에 그냥 기독교가 제공하는 것이 이것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기독교가 제공하는 것이 정말로 좋다는 걸 그들이 알아야 그들이 그것이 좋다고 하겠죠. 다시 말하면 기독교가 무엇을 제공하는지 알면 그들은 ‘글쎄요, 그것이 진실이라면 정말 좋겠네요 그런데 그것이 진실인지는 모르겠네요’라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 다음엔 기독교가 믿을 만한가에 대해서 얘기해도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고전적인 변증을 해도 되는 겁니다. 그래서 ‘존경할 만한가?’ ‘바람직한가?’ ‘믿을 만한가?’의 순서입니다.
마지막으로, 전도 방법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설득입니다. 전도 방법에는 설득과 동원이라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설득은 이런 겁니다.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대로 설득당합니다.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 로고스는 훌륭한 주장을 의미하고 파토스는 감정에 대한 호소를 의미하며 에토스는 말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여러분은 그들이 존경하는 사람이어야 하며 여러분은 그들의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호소를 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그들의 머리에 호소해야 합니다. 제가 동원이라 말할 때 그 의미는 이렇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의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전도해야 한다는 걸 알게 하려고 하더라도 회중 가운데 보통 10-20% 정도가 아마도 관계적으로 외향적인 사람들이고 그들은 동네나 도시에서 많은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여러분은 그들을 동원하고 싶을 겁니다. 백서에서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들에게 목회적 지원과 훈련을 많이 제공해야 합니다. 이러한 10-20%의 성도들은 전도에 10배 이상의 결실을 낼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이 그들에게 적절한 전도 훈련과 적절한 목회적 지원을 제공한다면 말입니다. 이 부분도 백서에 나와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전부입니다. 왜, 어디에 있는 누구에게, 언제, 어떻게 전도해야 하나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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