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삶을 승리로 마무리하셨듯, 우리의 삶도 반드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완성시켜 주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누가복음 18:31-34).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8장 31-34절 말씀을 한국어 성경으로 읽은 후 헬라어 성경으로 읽고 묵상하였을 때 몇 개의 헬라어 단어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단어들을 하나씩 하나씩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묵상하면서 오늘 본문 누가복음
18장 31-34절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a)
첫째 단어는,
“Παραλαβὼν”(파랄라본)(“따로 데리고 가다”,
“자기 곁으로 맞이하다”)입니다(31절).
1.
단어의 구조와 원형
원형: “παραλαμβάνω” (파라람바노)
어원 결합: “~의 곁으로”라는 뜻의 “παρά”(파라)
+ “취하다, 붙잡다”라는 뜻의 “λαμβάνω”(람바노)가 합쳐진 동사입니다.
문법적 형태: 과거분사, 능동태, 남성, 단수, 주격
직역: “(그가) 자기 곁으로 친히 데리시고
/ 취하시고”
2.
본문(눅 18:31)에서의 영적 의미
이 단어는 단순히
"사람을 인솔했다"는 물리적 이동 이상의 중요한 영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친밀함과 구별하심
(Separation): 예수님은 수많은 군중 중에서 열두 제자(τοὺς δώδεκα)만을 따로 구별하여 곁에 세우셨음을 뜻합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이라는 가장 깊은 구원의 비밀을 공유하기 위해 그들을 친밀한 영적 공간으로 초대하신 것입니다.
보호와 책임
(Adoption & Care):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요셉이 마리아를
'아내로 데려올 때'(마 1:20), 혹은 예수님이 처소를 예비하고 우리를
'영접하여 데려가실 때'(요 14:3)에도 사용됩니다.
즉,
예수님이 제자들을 자신의 소유이자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강력하게 붙드셨음을 의미합니다.
수난의 길로 동행하심:
예수님은 홀로 예루살렘으로 가실 수 있었음에도 제자들을
"곁에 취하여"
함께 올라가십니다.
제자들을 당신의 수난과 영광의 증인으로 삼으시려는 주님의 의지가 이 단어 속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멀리 두고 명령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기 곁으로 가까이 데려오셔서(Παραλαβὼν)" 가장 중요한 구원의 비밀을 들려주시는 분입니다(인터넷).
(i)
여기서 저는 예수님께서 수많은 군중 중에서 12 제자만을 따로 구별하여 곁에 세우시되 그들을 자신의 소유이자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강력하게 붙드셨다는 위로를 받습니다. 특히 저는 이 “Παραλαβὼν”(파랄라본)(눅18:31)이란 헬라어 단어가 예수님이 처소를 예비하고 우리를
'영접하여 데려가실 때'(요 14:3)에도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더 큰 위로를 받고 더욱더 소망에 부풀어 오르게 됩니다.
“요한복음 14장 3절에 사용된 동사
παραλήμψομαι(파랄렙소마이)는 질문하신 파랄라본(Παραλαβὼν)과 완전히 같은 원형(παραλαμβάνω,
파라람바노)을 가집니다.
문법적으로는 단지 시제만 미래형("내가 너희를 내게로 영접할 것이다")으로 바뀐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3절에서 이 단어가 가지는 구체적이고 풍성한 영적 의미
3가지 입니다(인터넷):
a.
유대인 전통 혼인 잔치의
'신부를 데려옴'
(영적 결혼)
당시 유대인의 결혼 관습에서 신랑은 정혼한 후,
아버지의 집에 신부를 맞이할 처소(방)를 마련하러 떠났습니다.
처소가 다 준비되면 신랑은 밤중에 신부의 집으로 찾아가 신부를 친히 데려왔는데,
이때 쓰는 단어가 바로
'파라람바노'입니다.
의미: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이 되십니다.
주님이 다시 오셔서 우리를 영접하시는 것은,
단순히 손님을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내 집에 함께 살 나의 영원한 신부"로 우리를 친히 데려가시는 감격적인 연합을 뜻합니다.
b.
'완전한 소유권'의 이전
(영원한 안전 보장)
누가복음에서 제자들을 곁에 묶어두셨던 주님의 손길은 요한복음에서 영원한 소유권의 선언으로 완성됩니다.
이 단어는
'내 곁으로(παρά)
완전히 취하다(λαμβάνω)'라는 뜻입니다.
의미: "너희는 이제 세상이나 사탄의 소유가 아니라,
내 곁에 영원히 두고 볼 나의 귀한 소유다"라는 선언입니다.
그 어떤 죄나 사망의 권세도 주님이 자기 곁에 꼭 붙드신 우리를 빼앗아 갈 수 없음을 보장합니다.
c.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려는'
목적
예수님은 단지 우리에게 좋은 환경(천국)을 제공하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으십니다.
이어지는 말씀인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와 연결될 때 이 단어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의미: 천국이 천국인 이유는 황금 길 때문이 아니라,
나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공간적 이동을 넘어
"주님과의 단절 없는 영원한 친밀함과 사귐"
속으로 우리를 이끌어 들이시기 위해 우리를 영접(파라람바노)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 31절에서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제자들을 자기 곁에 붙드셨던(파랄라본) 주님은, 요 14장 3절에서 그 고난으로 완성하신 하늘 처소로 우리를 영원히 영접(파랄렙소마이)해 주십니다.
이 약속이 저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삶에 날마다 큰 소망과 능력이 되기를 기원합니다(인터넷).
(b)
둘째 단어는,
“τελεσθήσεται”(텔레스테세타이)(“응하리라”)입니다(눅18:31).
1.
단어의 구조와 원형
원형: “τελέω” (텔레오)
의미: “끝내다, 성취하다, 완성하다, (값을) 지불하다”
문법적 형태: 미래, 수동태, 직설법, 3인칭, 단수
직역: (그것이) 성취될 것이다 / 완성될 것이다
2.
구체적인 영적 의미
이 단어는 단순히 예측된 일이 일어난다는 뜻을 넘어,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 계획이 마침내 마침표를 찍게 된다는 장엄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① 구약 예언의
'완전한 성취'
이 단어의 명사형인
'텔로스(τέλος)'는 '끝, 목표, 완성'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구약 선지자들이 기록한 메시아의 고난과 영광에 관한 모든 말씀이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최종 목적지에 정확하게 도달하여 완전히 성취(텔레오)될 것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② 신적 수동태
(Divine Passive)의 비밀
이 단어는 수동태(될 것이다)로 쓰였습니다.
성경에서 주어가 생략된 채 수동태가 쓰일 때는 대개
'하나님이 주체이심'을 나타내는
'신적 수동태'입니다.
즉, 겉보기에는 로마 군인들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해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구원 계획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는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③ 십자가 위
"다 이루었다"와의 연결
이 단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 외치신 유명한 가상칠언 중 하나인
"다 이루었다"[“τετέλεσται”(테텔레스타이)(요 19:30)]와 같은 동사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응하리라(텔레스테세타이)"고 예고하신 그 고난의 길은,
요한복음 19장에서 "다 이루었다(테텔레스타이)"를 통해 인류의 죄 값을 완벽하게 청산하고 구원을 완성하셨다는 선언으로 최종 응답됩니다.
'텔레스테세타이'(τελεσθήσεται)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은 도중에 결코 흐지부지되지 않으며,
반드시 주님의 뜻대로 완벽하게 마무리된다는 신실함을 보여주는 위로의 단어입니다(인터넷).
(i)
여기서 저는 “누가복음
18장에서 ‘응하리라(텔레스테세타이)’고 예고하신 그 고난의 길은,
요한복음 19장에서 ‘다 이루었다(테텔레스타이)’를 통해 인류의 죄 값을 완벽하게 청산하고 구원을 완성하셨다는 선언으로 최종 응답”되었다는 사실에 이 땅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이 걸어가신 고난의 길을 따라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좀 생겼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위로는 단순히
'힘들어도 참으면 나중에 보상받는다'는 막연한 위로가 아닙니다. 누가복음
18장의 예고[“응하리라”(텔레스테세타이)]가 요
19장의 외침[“다 이루었다”(테텔레스타이)]으로 마침표를 찍었다는 사실은,
이 땅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성도들에게 매우 실제적이고 강력한 세 가지 위로를 줍니다(인터넷):
a.
"실패처럼 보이는 내 삶이,
사실은 완성으로 가는 과정이다"
(의미의 위로)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완벽한
'실패'이자 '끝'이었습니다. 조롱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며 무력하게 죽어가는 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것이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텔레스테세타이)'이라고 말씀하셨고,
결국 '다 이루었다'로 증명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주는 위로: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손해를 보거나,
세상에서 낮아지고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낙심하기 쉽습니다.
내가 잘못 살고 있는 것 같고,
내 삶이 부서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고난이 결코 허무한 낭비나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뜻이 내 삶에 완성되어 가는 필연적인 과정임을 확증해 줍니다.
b.
"이미 이긴 싸움을 싸우는 것이다"
(확신의 위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외치신
"테텔레스타이"(“다 이루었다”)는 당시 상업계에서 영수증에
"완불되었다(Paid
in full)"라고 적을 때 쓰던 단어이기도 합니다.
인류의 죄의 대가,
그리고 사탄이 우리를 정죄할 수 있는 모든 법적 근거가 십자가에서 완전히 청산되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주는 위로:
우리가 지고 가는
'자기 십자가'는 내 죄 값을 치르기 위한 징벌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 무거운 형벌은 주님이 이미
100% 완불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내가 무언가 잘못해서 하나님께 벌을 받나?'라며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패배할까 봐 전전긍긍하며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미 완벽하게 승리해 놓으신(테텔레스타이) 승리를 내 삶에서 확인하며 걷는 영광스러운 걸음입니다.
c.
"예수님이 끝을 아시고 먼저 걸어가신 길이다"
(동행의 위로)
누가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자기 곁에 꼭 붙드시고(파랄라본), 앞으로 당할 고난의 세부 사항(조롱, 능욕, 침 뱉음,
죽음)을 다 말씀하시면서도 결국은
"살아나리라"는 영광의 결말을 알고 걸어가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주는 위로:
주님은 우리가 겪는 고난의 아픔과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끝에 어떤 영광(부활)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정확히 아십니다.
그 주님이 지금도 성도님의 손을 잡고
"내가 이 길의 끝을 안다.
나도 가보았고,
결국 다 이루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나와 함께 가자"고 격려하시는 것입니다.
결말을 아는 대장과 함께 걷기에,
우리의 거친 광야 길은 위로와 소망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자기를 부인하며 흘리는 눈물과 인내의 시간은 결코 흐지부지 사라지지 않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삶을 승리로 마무리하셨듯,
우리의 삶도 반드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완성(테텔레스타이)시켜 주실 것입니다(인터넷).
(c)
셋째 단어는,
“παραδοθήσεται”(파라도테세타이)(“넘겨져”), “ἐμπαιχθήσεται” (엠파이크테세타이)(“희롱을 당하고”),
“ὑβρισθήσεται”(휘브리스테세타이) (“능욕을 당하고”),
“ἐμπτυσθήσεται”(엠프튀스테세타이)(“침 뱉음을 당하겠으며”)입니다(눅18:32).
이 단어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겪으실 구체적인 수난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네 단어들은 모두 미래 시제 수동태로 되어 있어,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 계획 속에서 주님이 이 모든 고난을 친히
'당하셨음'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인터넷):
(i)
“παραδοθήσεται”(파라도테세타이)(“넘겨져”):
구체적인 의미: 원형은 '파라디도미(παραδίδωμι)'로, '손에서 손으로 넘겨주다',
'배반하다'라는 뜻입니다.
영적 의미: 일차적으로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유대인들이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기는 배반을 뜻합니다.
그러나 더 깊은 의미로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내어주신(롬 8:32)' 신적 내어주심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붙잡히신 것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스스로 넘겨짐을 당하셨습니다.
(ii)
“ἐμπαιχθήσεται”
(엠파이크테세타이)(“희롱을 당하고”):
구체적인 의미: 원형은 '엠파이조(ἐμπαίζω)'로, 어린아이를 뜻하는
'파이스'에서 유래하여
'어린아이 다루듯 장난치다',
'조롱하다', '바보로 만들다'라는 뜻입니다.
영적 의미: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에게 자줏빛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씌우며
"유대인의 왕이여"라고 부르며 비웃었던 사건을 가리킵니다.
온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이 피조물들에게 바보 취급을 당하시고 철저히 정신적인 모욕을 겪으셨음을 보여줍니다.
(iii)
“ὑβρισθήσεται”(휘브리스테세타이)
(“능욕을 당하고”):
구체적인 의미: 원형은 '휘브리조(ὑβρίζω)'로, 상대방의 인격을 짓밟는
'난폭한 폭행',
'안하무인 격의 모욕',
'수치심을 주는 행위'를 뜻합니다.
현대어
'오만(Hubris)'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영적 의미: 단순한 말장난을 넘어 주님의 신체와 인격에 가해진 잔인한 폭력과 수치스러운 대우를 의미합니다.
옷이 벗겨지고 뺨을 맞으시는 등,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인격 모독을 주님이 고스란히 감당하셨음을 뜻합니다.
(iv)
“ἐμπτυσθήσεται”(엠프튀스테세타이)(“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구체적인 의미: 원형은 '엠프투오(ἐμπτύω)'로, 말 그대로
'얼굴에 침을 뱉다'라는 뜻입니다.
영적 의미: 고대 유대와 로마 사회에서 누군가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은 상대방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여기는 최악의 멸시와 거절의 표현이었습니다.
창조주이신 주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피조물들의 침 뱉음을 당하시며,
인간이 겪는 가장 밑바닥의 거절감을 대신 겪으셨습니다.
·
여기서 저는 이 네 단어들의 영적 의미를 묵상할 때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 계획 속에서 주님이 이 모든 고난을 친히 당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도 마땅히/당연히 당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마땅히 당해야 할 고난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땅에서 마땅히 당하게 될 고난을 숨기지 않고 분명하게 예고합니다.
눅 18:32의 네 단어(배반, 조롱, 능욕, 거절)를 바탕으로,
오늘날 우리가 삶에서 마땅히 당해야 할 구체적인 고난의 모습을 인공지능이 세 가지로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세상과 다르게 살기 때문에'
당하는 조롱과 거절
(엠파이크테세타이·엠프튀스테세타이)
예수님이 세상의 가치관과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셨기에 바보 취급(희롱)을 당하셨던 것처럼,
제자들도 세상의 방식과 다르게 살 때 고난을 받습니다.
구체적인 모습: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 유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편법을 쓰는데,
나 혼자 정직을 지키려다
"유통성이 없다",
"바보 같다"며 비웃음과 조롱을 당하는 것입니다.
마땅한 고난:
돈과 성공이 전부인 세상에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손해를 감수하고,
세상의 유흥과 죄악된 문화를 거절할 때 집단에서 소외되거나 은근한 따돌림(침 뱉음/거절)을 당하는 삶의 자리입니다.
2.
'복음과 공의를 선택했기 때문에'
당하는 억울함과 인격적 모독
(휘브리스테세타이)
주님은 아무 죄가 없으셨음에도 선을 행하시다 능욕(인격 모독)을 당하셨습니다.
제자의 삶 역시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려 할 때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됩니다.
구체적인 모습:
직장이나 가정,
혹은 관계 속에서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혹은 약자를 보호하고 공의를 선택했다는 이유로 억울한 비난과 오해를 받는 것입니다.
마땅한 고난:
이때 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똑같이 싸우거나 맞대응하지 않고,
주님 때문에 그 억울함과 비난을 묵묵히 견뎌내는 인내의 시간이 바로 우리가 지는 십자가이자 마땅히 당하는 능욕입니다.
3.
'자기를 부인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당하는 자기 깨어짐
(파라도테세타이)
예수님은 인류를 사랑하셨기에 자신을 죽음의 손에 아낌없이
'내어주셨습니다(파라디도미)'. 제자의 고난은 나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나를 내어주는
'사랑의 고난'입니다.
구체적인 모습: 내 뜻,
내 계획,
내 감정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기 위해 내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 내어주는 아픔입니다.
마땅한 고난: 나에게 상처를 주고 배신한 사람을 내 힘으로 복수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의 마음으로 용서하고 품어주기 위해 내 안에서 일어나는 피나는 영적 전투입니다.
내 권리를 포기하고 타인을 섬기는 삶 자체가 육신에는 가장 큰 고난입니다.
그러나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제자의 소망
이 고난들은 우리가 마땅히 당해야 할 것이지만,
주님은 우리를 결코 비참한 패배자로 남겨두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주님 때문에 세상에서 조롱과 거절을 당할 때,
주님은 "내가 그 마음을 다 안다.
나도 똑같이 당해 보았다"
하시며 우리를 당신 곁에 꼭 붙드시고(파랄라본) 위로하십니다. 그리고 이 고난의 끝에는 반드시 주님이 맛보신
'부활의 영광(아나스테세타이)'과 영원한
'하늘 처소의 영접(파랄렙소마이)'이 기다리고 있습니다(인터넷).
(d)
마지막 넷째 단어는,
“μαστιγώσαντες”(마스티고산테스)(“그들은 채찍질하고”)와 “ἀποκτενοῦσιν”(아포크테누신)(“그를 죽일 것이나”)입니다(눅18:33).
이 두 단어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직전 겪으신 로마의 잔혹한 형벌과 육체적 죽음을 생생하게 담고 있는 단어들입니다. 인공지능이 알려준 역사적·문화적 배경을 포함한 구체적인 의미입니다(인터넷):
1.
“μαστιγώσαντες” (마스티고산테스) — "채찍질한 후에"
이 단어의 원형은
'마스티고오(μαστιγόω)'로, 단순히 매를 때리는 것이 아니라 로마식의 잔인한 태형(Flagellation)을 뜻합니다.
역사적 공포:
로마의 채찍(Flagrum)은 여러 가닥의 가죽줄 끝에 날카로운 뼛조각이나 납 덩어리가 달려 있었습니다.
채찍질을 할 때마다 살점이 뜯겨 나가고 뼈가 드러나며,
심한 출혈로 인해 채찍질 단계에서 숨지는 죄수도 많았습니다.
십자가형의 전주곡:
로마법상 십자가형을 집행하기 전,
죄수의 기력을 완전히 꺾고 고통을 극대화하기 위해 반드시 행하던 필수 과정이었습니다.
단어의 뉘앙스:
문법적으로 '과거 분사'입니다. 즉,
"그들이 (예수님을) 살점이 찢기는 처참한 채찍질로 철저히 유린한 후에"라는 행동의 선후 관계를 보여줍니다.
2.
“ἀποκτενοῦσιν” (아포크테누신) —
"그들이 죽일 것이다"
이 단어의 원형은
'아포크테이노(ἀποκτείνω)'로, '분리'를 뜻하는 접두사(ἀπό)와 '죽이다'를 뜻하는 동사(κτείνω)가 합쳐져
"완전히 목숨을 끊어 지상에서 제거하다"라는 강한 의미를 가집니다.
법적·물리적 살해:
사고사나 자연사가 아닌,
타인에 의해 강제로 목숨을 빼앗기는
'살해'를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종교 지도자들의 음모와 로마 권력의 집행이 합쳐져 일어날 사형을 뜻합니다.
32절과의 문법적 대조
(가장 중요):
32절의 동사들(희롱, 능욕, 침 뱉음)은 모두 예수님이 주어가 된 수동태("~을 당하다")였습니다.
반면 33절의 이 단어는 능동태("그들이 죽일 것이다")입니다. 주어는 예수님을 조롱하던
'이방인들(로마 군인과 권력자들)'입니다.
이는 악인들이 주도권을 쥐고 예수님을 완전히 말살(Kill)하려는 죄악의 정점을 드러냅니다.
두 단어의 연결이 주는 메시지
예수님은 자신이 당할 고난을 대충 얼버무리지 않으셨습니다.
"채찍질을 당해 온몸이 찢기고(마스티고산테스), 결국에는 목숨을 빼앗겨 죽게 될 것(아포크테누신)"이라는 가장 참혹한 현실을 제자들에게 구체적으로 미리 경고하신 것입니다(인터넷).
(i)
여기서 저는 예수님의 경고를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떻게 들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생생하고 참혹한 고난 예고를 전혀 깨닫지 못했고,
오히려 외면하거나 다른 정치적 야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성경 본문과 역사적 배경을 통해 본 제자들의 실제 반응과 심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성경이 증언하는 제자들의 반응
(눅 18:34)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직후의 상황을 누가복음은 아주 단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눅 18:34).
영적 소경 상태:
본문은 '하나도 깨닫지 못했다',
'감추어졌다', '알지 못했다'라는 표현을 삼중으로 반복하며 제자들이 영적으로 완전히 무지한 상태였음을 강조합니다.
2.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한 구체적 이유
영광스러운 메시아 관념:
당시 유대인들과 제자들은 메시아가 오면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해방하고 강력한 다윗 왕국을 재건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고난과 죽음의 불일치:
그들의 세계관에서 메시아가 이방인(로마인)에게 '넘겨지고', '채찍질당하고', '죽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치이자 실패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경고를 실제 사건이 아닌 이해할 수 없는 비유나 상징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큽니다.
3.
직후에 일어난 제자들의 부끄러운 행동
(마 20장, 마가 10장)
누가복음과 평행 본문인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이 고난을 예고하신 바로 직후에 제자들은 영광의 자리를 두고 다투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치맛바람:
세베대의 아들들(야고보, 요한)과 그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 ‘주의 나라가 임할 때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혀달라’고 인사청탁을 합니다.
나머지 제자들의 분노:
이 이야기를 들은 다른 열 제자는 두 형제에게 크게 화를 냅니다.
예수님은 목숨을 잃을 고난을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차지할
'권력의 서열'에만 온 정신이 팔려 있었던 것입니다.
요약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경고는
'들리지만 들리지 않는 소리'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고 듣고 싶은
'정치적 승리'라는 필터로만 예수님을 바라보았기에,
십자가라는 참혹한 현실을 완전히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 무지는 훗날 예수님이 잡히실 때 모두가 도망치고 배반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됩니다”(인터넷).
·
여기서 저는 “συνῆκαν”(쉬네칸)(‘깨닫지 못했다’)란 헬라어 단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눅18:34).
1.
단어의 어원과 구조
“συνῆκαν”(쉬네칸)의 원형은
'쉬니에미(συνίημι)'입니다. 이 단어는 두 단어가 합쳐진 말입니다.
“σύν”(신):
“~와 함께”(Together)
“ἵημι”(히에미): “보내다, 던지다”(To
send, throw)
즉, 어원적인 직역은
"여러 조각들을 한데 모아놓다"입니다. 여러 개의 흩어진 단서나 사실들을 모아서 하나의 큰 그림으로 연결하는
'종합적 이해력'을 뜻합니다.
2.
구체적인 의미와 뉘앙스
이 어원을 바탕으로 본문에서 이 단어가 가지는 구체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점들을 연결하지 못함
(퍼즐 맞추기 실패):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간다',
'선지자의 예언',
'채찍질', '죽음', '부활'이라는 각각의 단어(조각)는 귀로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조각들을 하나로 모아(σύν)
연결하는 영적 종합 능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파편화된 정보만 맴돌 뿐,
전체의 의미를 꿰뚫어 보지 못한 상태입니다.
지식(지성)과 삶(가슴)의 단절:
헬라어 문화권에서
'쉬니에미'는 단순히 머리로 지식을 아는 것(Gnosis)을 넘어,
그 지식이 내 삶과 상황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깊이 간파하는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성적으로는 들었으나,
그것이 자신들의 메시아관을 깨뜨리는 실제 사건이라는 진실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통찰)가 전혀 없었습니다.
철저한 불통
(과거시제): 본문에서 이 단어는 과거시제(Aorist)로 쓰여,
그 순간 제자들의 이해력이
'완전한 차단(Block)'
상태였음을 단호하게 보여줍니다.
요약하자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단어들을 들었지만,
"그 조각들을 한데 모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라는 큰 그림으로 읽어내는 눈(συνῆκαν)"이 완전히 닫혀 있었습니다.
머릿속의 고정관념(정치적 메시아)이 너무 강해,
예수님의 말씀을 퍼즐처럼 맞추어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인터넷).
-
여기서 저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라는 큰 그림(퍼즐) 속에서 우리 각자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 하나 하나조차도 마치 퍼즐 하나 하나를 맞추어 나아가시듯이 그리 일하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만드실 계획을 맞추셨고,
다만 그 구원의 계획을 지금 우리 각가의 삶 속에서 이루어 나아가신다고 믿습니다.
a.
하나님의 마스터 플랜:
걸작품(포이에마)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 2:10).
여기서 "만드신 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바로
'포이에마(ποίημα)'입니다. 이 단어에서 영어의 시(Poem)나 예술가의
'걸작품(Masterpiece)'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대충 찍어내는 공장 제품이 아니라,
아주 세밀하고 정교한 예술 작품으로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걸작품의 도안'을 가지고 계십니다.
b.
퍼즐을 맞추시는 하나님의 일:
쉬니에미의 주체
우리는 삶의 한 단면(고난, 아픔, 기다림)이라는 '흩어진 퍼즐 조각'만 보기 때문에 전체 그림을 보지 못하고 제자들처럼
'깨닫지 못할(οὐ συνῆκαν)'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보지 못해도,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 조각들을 하나하나 모아서(σύν)
하나님의 선한 계획 속으로 던져 넣으시는(ἵημι) '쉬니에미(συνίημι)'의 역사를 행하고 계십니다.
내가 겪는 오늘의 고난(마스티고산테스)과 죽음 같은 절망(아포크테누신)마저도, 하나님 손에 붙들리면 결국
3일 만에 살아나는 부활(ἀναστήσεται)의 영광스러운 퍼즐 조각으로 맞물려 들어가게 됩니다.
c.
모든 조각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신비
사도 바울은 이 신비를 로마서
8장 28절에서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기서 '합력하여'는 헬라어로
'순에르게이(συνεργεῖ)'인데, 영어의 시너지(Synergy)의 어원입니다.
좋은 일뿐만 아니라 슬픈 일,
이해되지 않는 일,
심지어 우리의 실수까지도 하나님이라는 위대한 거장이 모두 모아서(σύν)
결국에는 아름다운 선(善)이라는 퍼즐로 완성해 내신다는 뜻입니다.
묵상 나누기:
제자들은 십자가 직전까지 그 퍼즐을 보지 못해 다투고 도망쳤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아, 그 고난의 조각들이 다 구원의 퍼즐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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