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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세례 요한의 부모님): 종교적으로 타락한 시대에 희망적이고 거룩한 결합(AI)

  https://youtu.be/-fN2iHjWH9w?si=z5B8XM8m09sgirTu

대성 통곡

 대성 통곡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족장들 중에 여러 노인은 첫 성전을 보았던고로 이제 이 전 지대 놓임을 보고 대성 통곡하며 여러 사람은 기뻐하여 즐거이 부르니” (에스라 312).

 

 

            예루살렘에는 통곡의 벽”(the Wailing Wall)이 있습니다.  이 통곡의 벽이라 불리는 성벽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성전 서쪽벽을 일컫습니다.  이 성벽은 헤롯 대왕 때의 것으로  그가 왕위에 오른 이후 건축이 시작되어 약 60여년 동안이나 걸려 지은 것들로서 주후 70년 경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제2성전의 다른 부분은 모두 파괴하고 유독 이 벽만을 남겨 놓았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유태인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비잔틴 시대에는 일 년에 단 한번 성전 파괴 기념일에 방문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습니다 유태인들은 그날 이곳에 와서 그들 민족이 분산됨을 슬퍼하고 그들 성전이 폐허됨을 통곡하였기 때문에 이 벽을 통곡의 벽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이곳은 유대인의 최고의 기도처가되고 있어 많은 유대인들이 기도하러 모이는 곳입니다 2천년 동안의 방랑생활 가운데서도 예루살렘에로의 귀향이라는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신앙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특히 안식일이나 절기 때가 되면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기도하는 모습이 장관을 이룹니다.

(인터넷).  왠지 오늘 본문 에스라312절을 다시금 묵상하면서 이 통곡의 벽이 생각났습니다.  단 한번 성전 파괴 기념일에 방문할 수 있게되어 민족이 분산됨과 성전이 페허됨을 통곡하였던 유대인들오늘 본문에서도 통곡하는 유대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통곡하는 유대인들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족장들 중에 여려 노인들로서 이들은 예루살렘 첫 성전을 보았던 자들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연로한 자들로서 예루살렘 성전이 바벨론 사람들로 인하여 페허가 되기 전에 모습을 보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1:1) 저로 하여금 조사를 내리게 하시므로 말미암아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재 건축하게 하셨던 것입니다(2).  결국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을 건축코자 하는 자들이 다 일어나(5예루살렘과 유다 도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2:1).  이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와 칠월에 이르러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3:1) “이스라엘 하나님의 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2하나님께 드렸지만(3) “그 때에 여호와의 전 지대는 오히려 놓치 못했습니다(6).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에 이른지 이 년 이월에”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다른 형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사로잡혔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자들이 예루살렘 성전 재건축 일을 시작하였습니다(8).  그리고는 건축자가 여호와의 전 지대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과 아삽 자손 레위인들이 나팔과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하나님을 찬송하였고(10서로 찬송가를 화답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을 때(11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족장들 중에 첫 성전을 보았던 노인들은 성전 재건에 있어서 기초(foundation)만 놓아졌음을 보면서도 크게 울었던 것입니다.  왜 이 노인들은 대성 통곡한 것입니까?  그 이유는 이들은 첫 성전을 보았고 또한 그 성전의 페허된 모습도 보았을 터인데 이렇게 바벨론에서의 70년 포로 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의 기초가 다시 세워진 것을 보았기 때문에 너무나 감사해서 크게 울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감개무량하였기에 이 노인들은 대성 통곡했겠습니까? 

 

너무나 하나님께 감사한 나머지 크게 울었던 이 노인들을 생각해 볼 때 저는 고국 한국에 노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인하여 서글프게 울고 또한 대성 통곡하는 사람들이 생각났습니다.  TV와 인터넷 동영상과 사진들을 통하여 크게 우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들을 대성 통곡과 에스라 시대 때 대성 통곡한 노인들과 비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드는 생각은 왜 우리는 크게 울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리할 때 저는 수요기도회 때 설교한 시편137 1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 가운데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던 유다 백성들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값주고 산 교회를 생각하며 크게 울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번 주 새벽기도회 때 묵상한 히스기야 왕의 종교 개혁과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대하29, 34)을 다시금 생각해 볼 때 교회를 성결(정결)케 하는 개혁을 위하여 울며 기도해한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현실은 눈물이 매말랐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는 회개의 눈물을 흘릴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변질을 보고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하며 교회의 변화를 위하여 간절한 기도의 눈물을 흘려야 하거만 눈물과 마음이 매말라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답답한 것은 이러한 눈물을 매말라 있는데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접하면서는 눈물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나 자신과 사랑하는 이들의 어려움과 고통을 생각할 때에는 눈물이 나오는 것 같지만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를 생각할 때는 눈물이 너무 매말라 있는 것입니다.  과연 무엇을 위하여 또한 누구를 위하여 우리는 울어야 하는 것입니까?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대성 통곡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까? 

 

제 평생에 제일 크게 울었던 순간은 첫째 아기 주영이가 제 품 앉에 처음이자 마지막 앉겨 숨을 거뒀을 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물론 대학교 1학년 때 교회 대학부 수련회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통곡했을 때도 생각이 나지만 주영이가 죽은 순간에 통곡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참 크게 울었습니다.  너무 크게 울어 통곡의 소리도 막힐 정도로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참 숨막히는 줄 알았습니다.  그 정도로 대성 통곡한 기억이 납니다.  그 이후로 그렇게 크게 울었던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과연 나는 주님의 피로 사신 교회를 위하여 이렇게 대성 통곡한 적이 있는가 생각해 볼 때 참 부끄럽습니다.  언제 회개의 눈물을 흘렸었는지?  언제 교회를 위하여 간절히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는지?  또한 오늘 본문에 대성 통곡하였던 노인들처럼 과연 언제 나는 감사의 눈물을 흘렸는지 생각해 볼 때 참 할말이 없습니다.  마치 수도꼭지를 켰을 때 물이 줄줄 나오듯이 그리고 떠 쌔게 틀면 꽐꽐하고 물이 나오듯이 주님께서 제 마음의 수도꼭지를 켜 주시사 제 마음의 눈물이 눈가에서 줄줄 흘러나오길 원합니다.  물론 제 자신을 위해서도 울어야 겠지만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기억하며 울고 싶습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주님이 세우시는 교회의 기초가 반석이 되시는 예수님과 그의 말씀에 견고히 세워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감사의 눈물을 마음 것 흘리고 싶습니다.  그 날이 속히 오길 기원합니다.

 

 

 

마음의 통곡의 벽을 세워주시길 하나님께 기원하는 마음으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09 530슬픈 고국의 현실을 짧게 나마 바라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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