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위로의 하나님은 온갖 고난을 겪는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현대인의 성경) “자비의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분은 온갖 고난을 겪는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에게 받는 위로로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 (고린도후서 1장 3-4절)
대장암 4기로 투병중에 있는 사랑하는 사촌 여동생이 얼마전에 문자로 보내준 성경구절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얼마나 고통이 심했으면, 얼마나 힘에 겹도록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으면 그녀가 저에게 이 성경 말씀을 보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라는 말씀,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는 말씀을 읽으면서 저는 제 사촌 여동생이 겪고 있는 큰 고난을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번 주에 내시경과 피와 소변검사 한 후 결과를 듣고 나서 콜레스테롤 수치가 좀 높다는 말을 듣고도 신경이 쓰여서 인터넷을 뒤지는 제 자신을 모습을 보면서 사랑하는 사촌 동생이 생각났습니다. 그녀는 두어달 동안 함암치료 후 결과가 암 크기가 5 cm에서 8cm로 커졌다는 말을 들었는데,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녀가 그리도 사랑하는 다섯 딸들의 신앙을 위해서라도 하나님 아버지께 두 번째 기회를 주시길 간절히 구하고 있는데 그녀의 그 심정은 지금 어떠할까 라는 생각이 지금도 듭니다. 지금 그녀의 온 가족이 사랑하는 딸, 사랑하는 여동생, 사랑하는 언니를 위해 최선을 다하여 희생적으로 돌보며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는 중에 그 가족 분들도 큰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간호하며 돌보는 식구분들의 건강도 큰 위기를 맞이할까봐 염려가 됩니다. 이런 와중에 있는 사랑하는 사촌 여동생과 그녀의 식구를 과연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고린도후서 1장 3-4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내려가면서 하나님을 가리켜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3절). 그리고 그 모든 위로의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으면 좀 더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분은 온갖 고난을 겪는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4절). 왜 바울은 이렇게 편지를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쓴 것일까요? 왜 그는 그들에게 자기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말한 것일까요? 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자기가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자신이 사형 선고 받을 줄 알았다고 편지를 쓴 것일까요?(8-9절) 그 이유는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자기가 당하고 있었던 것과 같은 고난을 겪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6절). 그랬기에 바울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로하고 계시고 또한 자기가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 하나님께서 환난(고난) 중에 있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기에(4절) 이렇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위로하려고 편지를 썼던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두가지 사실을 동시에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두 가지란 저는 온갖 고난을 겪고 있는 제 사촌 여동생과 그녀의 가족 뿐 아니라 교회 식구들이나 인터넷 사역인 제 블로그의 비밀 댓글을 통해 고난을 겪고 있는 이름조차 모는 그 여러 지체들을 위로할 수 없다는 사실과 더불어 오직 모든 위로의 하나님만이 그들을 능히 그리고 충분히 위로해 주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든 생각은 위로의 하나님께서 저를 위로해 주실 때에는 위로 받는 저는 다른 고난 중에 있는 지체들을 위로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해 주실 때에는 우리를 또 다른 형제, 자매들에게 위로의 도구로 사용하시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금년 2019년 마지막 달인 12월 첫주를 맞이하며 금-토요일 1박 2일 기도회 때 고린도후서 1장 3-11절 말씀 중심으로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서 금년 저를 어떻게 위로하셨는지를 나눴습니다. 특히 저는 제 사랑하는 딸아이가 우울증으로 힘겨운 고난을 겪고 있었을 때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인 베드로전서 5장 10절 말씀을 어떻게 성취해 나아가셨는지를 나눴습니다. 비록 제 사랑하는 딸아이가 약 3년이란 기간 동안 우울증으로 시달리고 있었지만 그 고난은 “잠깐 고난”이라는 말씀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아빠의 입장에서 육신의 눈으로 볼 때에는 하루 하루가 참 길게 느껴졌고 자살 충동까지 있었던 딸 아이에게는 고통 당하는 순간 순간이 참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을 텐데 하나님의 말씀은 “잠깐 고난”이라고 말씀하시니까 그 말씀이 저에게는 소망으로 힘을 줬습니다. 그리고 저는 베드로전서 5장 10절 말씀에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신다는 말씀에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영어 성경으로는 “will himself restore you”라고 써 있는 것을 읽었을 때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저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회복의 사랑’을 베풀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위로를 해주셨습니다. 안그래도 약 21년 전에 첫째 아기 주영(뜻: ‘주님의 영광’)이가 제 품 안에서 잠든 후 둘째 아기가 잉태되지 않아서 아내랑 힘들었지만 나중에 잉태된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때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그 둘째 아들 “승관”(뜻: ‘승리의 면류관’)(영어 이름은 ‘Dillon’ – ‘진실하고 신실하다’라는 뜻)이를 통해 저희 부부에게 ‘회복의 사랑’을 베풀어 주셨는데 이렇게 주님께서는 베드로전서 5장 10절 말씀을 통해 우울증으로 시달리는 사랑하는 딸을 회복시켜주시겠다고 약속하시니 얼마나 큰 힘과 위로와 소망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성경 구절에서 “make you strong, firm and steadfast”(“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는 말씀에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제 사랑하는 딸을 반드시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의 말씀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때부터 그 약속 말씀을 붙잡고 아빠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는데 지난 주 추수감사절을 맞이하기에 앞서 사랑하는 딸을 대학교 기숙사에서 집으로 데리고 오면서 차 안에서 대화를 하는데 사랑하는 딸 입에서 자기가 “strong”해 진 것 같다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목요일 추수감사절 날 가족 식사 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주님께서 어떻게 베드로전서 5장 10절의 약속의 말씀을 성취해 나아가지고 계시는지를 나눴습니다. 그런데 나누면서 깨닫게 해주신 것은 그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사랑하는 딸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저를 주님께서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조금이나마 처음으로 인식하고 깨닫게 되었을 때 저는 감탄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제 사랑하는 딸뿐만 아니라 저까지도 그 약속의 말씀을 성취해 주시고 계셨다는 것이 너무나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제 아내나 그 딸의 오빠와 여동생에게도 적용되는 약속의 말씀의 성취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헤요 신실한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주 수요기도회 때 시편 138편 2절 말씀인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께서는 저에게 주신 베드로전서 5장 10절의 약속의 말씀을 성취해 나아기시므로 그 주님의 말씀을 크게 하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For You have magnified Your word according to all Your name” (NASB)]. 그러므로 주님께서 제가 간구할 때 응답하시고 저에게 힘을 주셔서 저를 강하게 하시고 계시기에 저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시138:1-3).
그러면 우리가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 위로받는 자로서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 것일까요? 다시 말하면,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의 도구로 사용하시길 원하시는데 그 위로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저는 고린도후서 1장 6-11절 말씀 중심으로 한 5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위로의 목적은 견디게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6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고난을 받아도 여러분의 위로와 구원을 위한 것이며 우리가 위로를 받아도 여러분의 위로를 위한 것입니다. 이 위로는 여러분이 우리가 당하는 것과 같은 고난을 견뎌내는 데 도움이 됩니다”]. 우리의 본능은 우리가 고난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고난에서 건져주시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본능적인 생각은 고난당하고 있는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을 돕고자 할 때에 우리는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실 때에 우리의 당면한 고통스러운 어려움을 해결해주시기 전에 그 고통스러운 어려움을 견딜 수 있도록 위로해 주십니다. 그리고 위로해 주시되 하나님께서는 그 고통스러운 어려움을 견딜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믿음을 견고케 해주십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고통 중에 있는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그 말씀을 관심을 갖게 하시고 묵상케 하시고 깨닫게 하시사 그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간구케 하시므로 우리로 하여금 그 고통스러운 어려움을 견디게 하십니다. 이렇게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서 온갖 고난을 겪는 우리를 위로해 주실 때에 그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 속에 역사하여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난을 견디게 합니다. 이렇게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하시므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주위에 고통당하고 있는 형제, 자매들을 위로케 하십니다. 위로케 하시되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받는) 위로로 그 형제, 자매들을 위로게 하시는데 특히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그들을 위로케 하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입술로 그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말씀케 하시고 또한 상대방 형제, 자매들의 마음에 역사하시사 그들의 마음에 그 약속의 말씀으로 힘주시고 소망을 주시사 위로하십니다. 그 위로가 그들 속에 역사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당하고 있는 온갖 고난 중에서도 견디케 하십니다.
둘째로, 위로의 목적은 소망을 견고하게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7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여러분에 대한 우리의 희망이 확고한 것은 여러분이 우리와 함께 고난을 당한 것처럼 우리와 함께 위로도 받게 될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가지 끊어”진(8절) 정도로 고난을 당하고 있는 형제, 자매들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습니까? 자기들 자신이 “사형 선고 받은 줄 알”고(9절) 있는 지체들을 우리가 무엇이관대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고린도후서 1장 8-9절 말씀을 문자로 보내온 사랑하는 암투병중에 있는 사촌 여동생을 어떻게 위로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다섯 자녀의 신앙 교육을 위해 하나님께 두 번째 기회를 달라고 부르짖는 그 사촌 여동생의 말을 들으면서 제가 무슨 말로 어떻게 위로를 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저는 그 동생과 그녀의 언니, 동생 등, 가정을 낙심시킬 수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저같은 사람조차도 사용하시사 그 자매를 “능히”(4절) 위로케 하실 수 있으신 줄 믿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하나님만 의지하여 성령님의 인도하심따라 그 동생과 작은 고모님의 식구를 위로하길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계속 생각나게 하시는 것은 온 친척 식구들이 작은 고모님 댁에 모여서 가족 예배를 드릴 때에 저는 그 사촌 여동생에게 ‘당신의 하나님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녀는 말한 고백인 “My Father and my Salvation”(나의 아버지, 나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저 그녀와 대화하든 문자를 주고 받을 때 그녀의 아버지요 그녀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말하므로 우리가 함께 하나님을 바라보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제 친할아버님이 암투병중에 계실 때 저에게 찬송가 82장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를 불러달라고 부탁하신 일이 기억납니다. 그래서 저는 그 찬송가를 부를 때마다 제 친할아버님이 생각납니다. 병원에서 돌아가시기 전날 주일 오전에 찾아뵙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제가 기도했을 때 산소호흡기를 끼고 계셨던 할아버님의 눈가에 흘렸던 눈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분의 기쁨되시고 소망 되신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기신 줄 믿기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지금도 많은 형제, 자매님들이 암이나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특히 제 주위에는 정신질환으로 자살충동 뿐만 시도하는 젊은 지체들이 있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그 고통중에 있는 젊은 지체들의 입장에서는 힙에 겹도록 극심한 고난 속에서 살 소망까지 끊어진 심정일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 귀한 영혼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서 온갖 고난을 겪되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던 사도 바울도 위로하셨다면 충분히 그 형제, 자매들도 위로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혹시나 이 말씀 묵상의 글을 읽고 있는 지체들 중에 바울과 같이 또한 여러 지체들과 같이 살 소망까지 끊어져서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심정이시라면 시편 43편 5절 말씀을 드립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현대인의 성경) “내 영혼아, 어째서 네가 낙심하며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네 희망을 하나님께 두어라. 나는 내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리라”] (참고: 43:5, 11).
셋째로, 위로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9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현대인의 성경) “우리 마음에는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 의지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우리의 본능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할 때(4:8) 우리의 명철을 의지하여(잠3:5) 우리가 당면한 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를 여러분 해보지만 시도를 하면 할 수록 그 큰 문제는 더 꼬이고, 더 해결점이 보이지 않고 망막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심각한 무기력감까지 느끼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고통 중에서 인내의 한계를 경험할 때에 자포 자기 심정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충분히 낙심하며 절망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태에 우리 자신이 놓여있다는 것은 귀한 기회라 생각합니다. 그 위기가 귀한 기회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기력함을 철저히 깨달을 때에서야만 전적으로 구원의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극심한 고난 중에서 소망이 없어보이는 가운데 우리 자신의 무기력함 속에서 낙심이되고 심지어 절망이 될때에 갈급한 심령으로 주님을 갈망하며 또한 주님께 전적으로 소망을 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새찬송가 488장 “이 몸의 소망 무언가” 3절 가사를 좋아합니다: “세상에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날 되어도 구주의 언약 믿사와 내 소망 더욱 크리라.” 제가 세상에 믿고 의지하던 모든 거미줄 기대는 것와 같은 사람이나 것들(욥 8:14)이 하나씩 하나씩 다 끊어질 때 저는 그 때에서야 주님이 저에게 주신 개인의 약속의 말씀인 요한복음 1장 1-15절과 섬기고 있는 교회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인 마태복음 16장 18절 말씀만 붙잡게 되고 그 약속의 말씀을 주신 언약의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신실하셔서 반드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성취하실 것이라는 믿음과 소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새찬송가 370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 4절를 찬양할 때 위로를 받습니다: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하시니 그 나라 가기까지는 늘 보호하시네.” 그런데 이 가사의 영어 의미는 좀 다릅니다: “.When to the throne of grace I flee, I find the promise true; The mighty arms upholding me Will bear my burdens too”[제가 번역을 시도해 봅니다: ‘제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피할 때에 저는 그 약속이 참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강력한 팔이 저를 붙잡아 주시고 저의 짐들도 져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다 같이 새찬송가 543장 “어려운 일 당할 때” 가사를 우리의 기도로 삼고 주님만 의지하십시다:
(1절) 어려운 일 당할 때 나의 믿음 적으나 의지하는 내 주를 더욱 의지합니다
(2절) 성령께서 내 맘에 밝히 비춰 주시네 인도하심 따라서 주만 의지합니다
(3절) 밝을 때에 노래며 어둘 때에 기도와 위태할 때 도움을 주께 간구합니다
(4절) 생명 있을 동안에 예수 의지합니다 천국 올라가도록 의지할 것뿐일세
[후렴] 세월 지나갈수록 의지할 것뿐일세 아무 일을 만나도 예수 의지합니다. 아멘.
넷째로, 위로의 목적은 건지심의 확신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10절을 보십시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이 그처럼 큰 죽음의 위험에서 우리를 건져 주셨으니 앞으로도 건져 주실 것이며 또 건져 주시리라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한 요나 선지자로 하여금 고난을 겪게 하시되 그를 바다 깊은 곳에 던지셨습니다(욘2:2-3, 현대인의 성경). 바다 깊은 곳에 빠진 요나는(5절, 현대인의 성경) 자기 스스로 그 바다 깊은 곳에서 건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요나 선지자는 그 바다 깊은 곳에서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현대인의 성경) “구원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것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요나 선지자로 하여금 구원의 하나님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고백케 하신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불순종의 선택의 결과 고난을 겪게 하시되 바다 깊은 곳처럼 우리 인생의 여정이 깊은 구덩이와 같은 늪에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깊은 구덩이와 같은 늪에 빠지도록 내버려두시는 것일까요? 저는 거기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있다고 믿습니다(롬12:2). 그리고 그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은 어쩌면 우리로 하여금 그 깊은 늪에서 우리 스스로 건져볼라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 깊이 늪에 빠지듯이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건질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하시사 하나님 앞에서 인정케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는 점점더 깊이 늪에 빠져드는 우리로 하여금 오직 구원의 하나님만이 우리를 건지실 수 있다는 사실을 마침내 인정케 만드신다고 생각합니다. 고린도후서 1장 10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건져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비록 그는 그가 겪고 있는 고난으로 인해 살 소망까지 끊어졌지만 그러한 사형 선고 받은 것 같은 상황에서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건져주실 줄 확신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바울처럼 하나님의 건지심의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요? 저는 그 비결이 이 말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이 그처럼 큰 죽음의 위험에서 우리를 건져 주셨으니”]. 즉, 바울은 과거에 구원의 하나님께서 자기를 큰 죽음의 위험에서 건져주신 구원의 은총을 기억했기에 현재에도 그가 당면한 살 소망까지 끊어진 고난에서도 동일하신 구원의 하나님께서 건져주실 줄 믿은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바울은 장차 자기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죽을 위험을 당할지라도(4:11) 또 건져 주시리라 믿었습니다(1:10, 현대인의 성경). 이 하나님의 건지심의 확신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주님에게 근거한 믿음입니다. 변화무쌍한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에수님과 복음을 위해서 살다가(막8:35) 예기치 못한 역경과 고난을 당할 때에 그 고통의 기간이 길어지므로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고 희망도 사라져서 자포자기 하고 싶을 때에라도 우리는 과거에 우리가 겪었던 극심한 고난과 위기 가운데 우리를 건져주신 구원의 하나님의 은총을 되새기면서 그 구원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과거에도 건져주신 구원의 하나님께서 현재에 우리가 당하고 있는 희망이 없어보이는 고난의 상황에서도 우리를 건져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주실 것입니다. 그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믿음입니다(롬4:18). 그 믿음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바라고 믿”는 확신입니다(18, 21절, 현대인의 성경).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이 건지심의 확신을 주시길 기원합니다.
마지막 다섯째로, 위로의 목적은 감사하게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11절을 보십시오: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현대인의 성경) “여러분도 기도로 우리를 도와 주십시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많은 사람이 우리 대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것일까요? 인간의 눈으로 보면 우리가 겪고 있는 온갖 고난 속에서 결코 감사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일까요? (살전5:18) 어떻게 우리의 삶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넘치고 있는데(고후1:5)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일까요? 어떻게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진 상태에서(8절) 감사할 수 있는 것일까요? 과연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는데도(9절)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내려가면서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고 말했습니다(11절). 그는 그들에게 기도로 도와 주실 부탁한 것입니다. 우리도 온갖 고난을 겪고 있을 때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에게 기도 부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저 또한 제 딸 아이가 우울증으로 너무나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인터넷 사역으로 많은 지체들에게 제 딸을 위해서 기도해 주길 부탁했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제 딸이 그 사실을 알고 저에게 왜 아빠는 그리 했습니까?라는 식으로 질문을 했었습니다. 그 이유는 딸 아이는 부모님 외에는 아무도 자기가 우울증에 걸렸다는 것을 알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심지어 자기의 오빠와 여동생두요). 저는 아직도 그 때 그 순간을 잊치 못하고 있습니다. 딸 아이와 함께 차 타고 음식점 drive through에서 있는데 바로 제 옆에 타고 있었던 딸이 저에게 그리 질문했을 때 저는 곧장 “I was desperate”(나는 매우 갈급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저는 많은 이들의 기도가 절실히 필요했었습니다. 그 후 몇주 지나서 차 안에서 집으로 오다가 사랑하는 그 딸하고 또 다시 왜 이 아빠가 많은 이들에게 너를 위해 기도 부탁을 했는지 제 심정을 토해냈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을 할 수 있다면, 저는 제 첫째 아기가 제 품에서 죽었기에 사랑하는 딸에게 또 다시 너를 잃고 싶지 않아서, 너가 살기를 간절히 원해서 이 아빠가 여러 지체들에게 기도 부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제 옆에 앉아 있었던 딸 아이의 얼굴을 보니까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사랑하는 딸이 고등학교도 졸업을 해서(저희 부부 입장에서는 신기할 정도랍니다. 그 이유는 한 과목만 빼고 다른 과목들을 다 관뒀었기에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는 고등학교 졸업이 우선이 결코 아니라 아이가 사는게 우선순위였습니다) 대학교까지 들어갔답니다. 하하. 그 과정을 여기서 다 설명할 수 없지만 한 마디로 너무나 갈급한 상황에서 주님께서는 약속의 말씀 베드로전서 5장 10절을 주시사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가운데 저희 온 가족 친척 식구들과 교회 식구들과 동역자 목사님, 사모님들과 수 많은 인터넷 사역의 형제, 자매들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저희 집 딸 아이를 위해 기도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저희 부부는 하나님께서 그 많은 분들의 기도를 응답해 주심을 엿보며 목격하고 있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형제, 자매님들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고 지금도 응답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저희 가정은 지난 추수감사절 날 다섯 식구가 모여 맛있는 식사를 한 후 하나님께 가족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과 관심으로 기도해 주신 여러분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지난 주 토요일 오후에 저는 사랑하는 암투병 중에 있는 그 사촌 여동생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Keep on praying for you and your family. My father is back!”. 조금이나마 그녀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해서 저는 그녀에게 제 아버님이 (선교지에서) 돌아오셨다고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랬더니 한 30분 있다가 “Thank you Oppa! I know I’m so excited that he’s finally back!!!”라고 답변이 왔습니다. 그녀는 제 아버님이 돌아오셨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제 아버님이 돌아오셨다는 사실이 그녀는 매우 흥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만큼 지금 암투병중에 있는 제 사촌 여동생에게는 제 아버님이 큰 위로와 힘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아버님 뿐만 아니라 작은 아버님은 제 사촌 동생이 암에서 나을 줄 일관성있게 믿고 계시고 두 삼촌분들도 계속해서 기도하시면서 어제 주일에도 예배 후, 가족 기도 모임 후 그 사촌 여동생을 만나러 가셨고 등등 온 가족 친적들이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그 사촌 여동생과 가족을 위하여 기도하며 작은 사랑이마나 표현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 사촌 여동생의 부모님과 자매들(언니와 두 여동생)과 그들의 배우자 및 자녀들도 다 사랑으로 기도하며 엄청나게 희생적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제 아버님이 선교지에서 돌아오셨다는 사실로 인해 흥분하는 그 사촌 여동생에게 저는 이렇게 문자를 다시 보냈습니다: “I am proud of you!!” 제가 그리 보낸 이유는 저는 그 사촌 여동생이 너무나 자랑스럽기 때문입니다. 처음 대장암 4기라는 사실을 알고 온 가족이 작은 고모님 댁에서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저는 그 모든 식구분들 앞에서 그 사촌 여동생에게 ‘Who is your God?’(너의 하나님은 누구이신가?)라고 질문을 했었습니다. 그 때 그녀는 “My Father”(나의 아버지), “My Salvation”(나의 구원)이라고 고백했었는데 지금까지 투병하면서 그녀가 아버지와 구원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병마와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을 엿볼 때에 저는 그녀가 자랑스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녀와 대화를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너무나 힘들텐데, 너무나 고통스러울텐데, 제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롭고 힘들텐데 그 와중에서도 하나님 아버지에 매초마다 필요하다고 말하고, 생각의 영역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믿음과 의문이 드는 싸움을 치열하게 하고 있는 모습을 엿보았습니다. 특히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말로 표현을 했을 때 어떻게 그러한 상황에서도 저렇게 믿음으로 치열하게 싸울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녀에게 ‘나는 너가 자랑스럽다!!’고 문자를 보낸 것입니다. 그랬을 때 그녀는 저에게 “Thank you Oppa!! I’m beginning to see who God is … God who is Good, who loves me beyond what I can imagine … not a God that I have to feel guilty or fearful to show my true self. Thank you for all your prayers and encouragement!!”(‘고마워 오빠!! 저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 내가 죄책감을 느끼면서 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드리기를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당신의 모든 기도와 위로에 감사합니다’)라고 답변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문자를 읽은 후 이렇게 그녀에게 제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Thank you for your encouragement!”(너의 위로에 감사합니다).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9년 12월 9일, 온갖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랑하는 사촌 여동생 수정이와 교회 식구들과 인터넷 사역의 형제, 자매들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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