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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 찬양대 찬양 (2025. 8. 24.)

  https://youtu.be/sQ2wxk6a8MU?si=AZ-4OEU-ZJTVVluc

“당신이 그 사람이라”

 당신이 그 사람이라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 (사무엘하 12 7).

 


            저는 제 자신을 볼 때 종종 늦게나마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그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나고 나서야 늦게나마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과 공급하심 등등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제가 늦게나마 깨닫게 되는 것은 바로 제가 주제 넘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누군가와 이런 저런 대화를 한 후 나중에 대화 내용을 생각해 보면 그 대화 내용이 제 자신에게도 적용이 되는데 저는 다른 사람 얘기하는 것처럼 말을 한 것을 깨닫곤 합니다.  예를 들어 얼마전 노회 모임을 마치고 저녁 식가 때 몇몇 목사님들과 대화한 내용을 봐도 그렇습니다.  저는 마치 목사님들이 새로운 노회를 가입할 때 이명서를 띠어 오는 것처럼 교회를 옮겨서 우리 교회 오는 성도님들에게 전에 다니던 교회 목사님에게 적어도 허락을 받고 와야 한다는 제 개인적인 생각을 확신있게(?) 나눴습니다.  그런 후 제 자신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 한 적이 딱 한번 밖에 없었는데 그 한번 한 것을 가지고 항상 그렇게 했던 것처럼 말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여러 목사님들 앞에서 했을 때 꼭 여러분들도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그렇게 하는게 맞습니다라고 그분들이 들릴정도로 한 것을 꺠닫고 나서 그렇게 말 한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저는 제 자신도 제대로 자아성찰 해보지도 않고 말을 한 것이 후회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말을 한 적이 수 없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 수 없이 말한 내용 중에 아주 조금이나마 늦게 깨닫게 될 때 저는 제 자신을 좀 더 뒤돌아 보고 그 다음에 조심이 말을 하자고 스스로 제 자신에게 말해 보지만 또 동일한 죄를 범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 사무엘하 12 7절 말씀은 우리가 익히 들어 아는 말씀입니다.  다윗이 그의 충성된 군인인 우리아의 처인 밧세바와 동침하고(11:4) 그 간음죄를 죄로 여기지도 않는 듯 밧세바가 잉태했다는 소식을 듣고(5그 죄를 덮고자 그 잉태한 원인을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에게 돌리고자 간교한 계책을 세웁니다(박윤선).  그 간교한 계책은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왕궁으로 불러 들여 그로 하여금 자기 집으로 내려가서 쉬게 하도 음식까지 달려 보냅니다(8).  그러나 충성된 군인 우리아는 자기 집으로 내려가지 않고 왕궁 문에서 그 주의 신복들로 더불어 잡니다(9).  그래서 다윗은 두 번째 간교한 계책을 세웁니다.  다윗은 우리아를 불러서 저고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취하게 한 후 자기 집으로 내려가게 하려고 했습니다(13).  왜 다윗이 이렇게 두 번이나 우리아로 하여금 자기 집으로 내려가게 하려고 했습니까?  그 이유는 밧세바가 잉태된 아기가 다윗과 더불어 동침하여 생긴 아기가 아니라 부부인 우리아와 밧세바가 동침하여 생긴 아기인 줄로 생각하게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그 때야 뭐 DNA 시험도 없었으니 그 아기가 다윗이 아기인지 우리아의 아기인지 어떻게 분별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우리아는 또 집으로 내려가지 않고 주의 신복으로 더불어 침상에 누웠습니다(13).  그래서 결국 다윗은 우리아를 전쟁에서 의도적으로 죽게 만들었습니다(14-25).  그리곤 요압이 보낸 사람을 통하여 전쟁에서 우리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은 그 사람에게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죽이느니라 …”고 요압에게 말을 전하라고 하였습니다(25).  어떻게 충성된 자기 군인을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죽여 놓고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죽이느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자기가 죽여 놓고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다윗의 소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였기에(27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어 한 성에 있는 부한 자와 가난한 자의 비유로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은 다윗의 죄를 면책하셨습니다(12:1-4).  그 때 다윗은 크게 노하여 나단 선지자에게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고 말하였습니다(5).  죄를 덮고 덮으려고 했어서 자기 양심마저 덮어버려서 그랬던 것인지 다윗은 자기가  그 마땅히 죽을 자인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 나단 선지자는 다윗에게 이렇게 직접적으로 면책하였습니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 …”(7).  이 얼마나 충격적인 면책입니까?  다윗 자신은 분명히 자기 자신은 그 마땅히 죽을 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을 텐데 나단 선지자가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면책하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있다가 우리가 행한 일들이 죄라는 것을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들춰내실 때 우리의 양심은 충격을 받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은 나인데 나는 그 죽어야 할 사람이 분명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자기 자신에 대하여 무지한 사람입니까?  자기 죄도 모르고자기 주제도 모르는 사람의 분노 가운데 나온 발언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5월 되면 가정에 대한 설교를 합니다.  언젠가 가정의 달인 5월에 가정 설교를 했을 때 어느 성도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내가 꼭 들어야 하는 말씀인데 ….”  아마 그 때 제가 전파한 말씀의 초점은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이였던 것 같습니다.  종종 제 자신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 말씀은 제 자신에게 들려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기보다 이 말씀을 아무게가 들었으면 좋겠다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말씀하고 계셨을 터인데 저는 하나님께서 다른 형제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인 것처럼 들었던 것입니다.  특히 죄를 면책하는 말씀을 전파할 때 그 성령의 검인 말씀인 제 마음에 비수처럼 꽂혀야 하는데 제 마음 속에서 그 칼날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꽂혀야 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들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제 자신을 영적인 거울인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에 부지런히 비춰보지 않았던 결과입니다.  자아성찰과 자아반성을 게을리할 때 어느 순간에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죄를 죄로 여기지 않으므로 내 죄로소이다라고 고백하기보다 저 사람의 죄입니다라는 자세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내가 그 죄를 범한 자인데 다른 사람이 그 죄를 범한 자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니 이 얼마나 교만한 죄입니까?  이렇게 범죄하여 범한 죄를 덮고자 할 때에는 왠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풍성한 은혜조차 내 마음에 덮어버리므로 말미암아 교만함 가운데서 나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면책의 말씀조자 듣지 못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범한 죄를 덮고자 하면 양심도 덮어지고은혜도 덮어지고귀도 덮어지고 그러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아니될 텐데 ….

 

 


성령의 검을 의지하면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들쳐내시는 죄를 정직하게 자백하며 진정으로 회개할 수 있는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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