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우리를 통해 주님의 새창조의 역사를 이루소서.’
[사도행전 9장 1-19절]
새해 2022년을 맞이하여 1월 1일 새벽기도회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된 것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영혼 구원의 은총과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이 섬기는 교회 위에 충만한 이 한 해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저는 오늘 새해 초하루를 맞이하여 사도행전 9장 1-19절 말씀 중심으로 묵상하다가 신학교 때 배운 ‘우리 하나님은 새창조의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교훈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이 교훈을 묵상하다가 저는 창세기 1장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현대인의 성경) “태초에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다”]라는 말씀이 생각나면서 이 하나님의 천지창조보다 더 놀랍고 굉장한 창조의 역사는 성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새창조의 역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새창조의 역사란 “불순종과 죄 때문에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들”(엡2:1, 현대인의 성경)이요 하나님과 영원하고 완전하게
분리되어 영원한 사망에 처하게 된 영원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과 원수 된(롬5:10)
우리를 다시 살리시사(거듭남/중생)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하여 주시사 새 피조물로 만드시고(고후5:17)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는 역사를 말합니다(요일3:1; 5:1, 현대인의 성경). 이러한 생각이 든 계기는 오늘 본문 사도행전 9장에 새창조의 역사를 이루시는 주님께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박해하던 사울의 삶에 역사하시사 그를 구원(conversion)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를 이방인의 사도(롬11:13)로 사명(commission)을 주셨다는 사실을 묵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 사도행전 9장 1-19절 말씀 중심으로 새창조의 역사를 이루시는 주님께서 사울의 삶에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묵상하면서 주님이 주시는 지각(깨달음)(요일5:20)으로 교훈을 받아 말씀에 우리 각자 자신을 반영하면서 우리 삶 속에 주님의 가르침을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첫째
교훈은,
주님께서는 불신과 무지함 속에서 주님과 주님의 교회와 주님의 제자들을 박해하는 사울과 같은 사람도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사명을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박해자 사울은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에 알지 못하고 주님의 제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면 남녀를
가리지 않고 보는 대로 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고 했었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9장 1-2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십시오: “한편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위협하고 죽일 기세로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마스커스의 여러 회당에 보낼 공문을 요구하였다. 그것은 믿는 사람이면 남녀를 가리지 않고 보는 대로 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기 위해서였다.” 그러한 사울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사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4절). 그 때 사울은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물었고, 주님께서는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5-6절). 사도 바울의 디모데전서 1장 13절과 16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내가 전에는 하나님을 모독하고 성도들을 핍박하던 난폭한 사람이었으나 믿지 않을 때에 모르고 한 짓이므로 하나님께서는 나를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 그런데도 하나님은 나를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철저하게 참으시는 인내를 보이심으로 후에 주님을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삼기 위한 것입니다”(현대인의 성경). 이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자기가 하나님을 모독하고 성도들을 핍박한 이유는 자신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때에 모르고 한 짓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불신과 무지함
속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박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현대인의 성경) “나는 죄인 중에서도 두목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15절). 이러한 죄인 중에서도 두목인 사울도 주님께서 새창조의 역사를 이루시사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사명을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생명을 버리는 자(막8:35, 현대인의 성경)로 변화시켜주셔서 “후에 주님을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삼”으셨다면(딤전1:16, 현대인의 성경) 어찌 동일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전도 대상자들에게도 이러한 놀라운 새창조의 역사를 이루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둘째
교훈은,
우리에게는 사울과 같은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깊은 암흑의 기간이요 광야의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9장 9절을 보십시오: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주님께서 사울에게 "시내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고(6절, 현대인의 성경) 또한 다마스커스에 있는 아나니아라는
제자에게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너는 어서 '곧은 거리'에 있는 유다의 집에 가서 다소 사람 사울을 찾아라.
지금 그가 기도하고 있다.
그는 환상 가운데서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들어와 자기에게 손을 얹어 다시 보게 해 주는 것을 보았다"라고 말씀하셨는데(10-12절, 현대인의 성경)
그 두 사이에 사울은 사흘(3일) 동안 보지
못한 채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것입니다. 아마 사울이 그 사흘 동안 금식 기도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사흘" 동안 그가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저로 하여금 마태복음 12장 40절 말씀이
생각나게 하였습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어쩌면 우리에게는 "사흘"(문자적으로
말고) 동안 "큰 물고기"와 같은 상황이든 "땅 속"과 같은
상황이든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상황이든 인생의 깊은 암흑 기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깊은 암흑 기간 동안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 것도 보지
말고,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도 없는 인간의 무능력함과 무기력함을 뼈저리게 경험하면서 자아가 철저히
부서지고 깨지고 무너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그때서야 우리는 구원의 주님만 전적으로 또한 전심으로 의지하고 신뢰하게 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우리는 주님께 부르심과 사명을 받은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우리 생명을 버리는 사람으로 거듭나지 않나 생각되기 때문입니다(막8:35). 저에게도 개인적으로 이러한 암흑 기간이 있었습니다.
1987년 5월 제가 지금 담임 목사로 섬기고 있는 승리장로교회에서 대학부 수련회가 있어 참석하여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놀라운 새창조의 역사를
받아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과 사명을 받은 후 약 1년인가 얼마 기간 동안
금요일마다인지 금, 토요일인지 교회에서 자면서 금요일 밤마다 교회 정문 밖에서 하늘을 쳐다보면서 고등학교
때 같이 방황하던 친구들을 생각한 기억이 납니다. 제 기억으로는 그 때 저는 친구들이 그리웠고 외로웠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배우게 된 게 바로 기타를 치는 거였습니다. 복음성가집 뒤에 있는 기타 코드를 보고 스스로 기타 치는
법을 배워서 “좋으신 하나님”이란 복음성가를 시작으로 해서 여러 복음성가
곡을 기타를 치면서 찬양한 기억이 납니다. 저는 그 때 그 시간을 ‘암흑의 기간’이라는 표현보다
‘광야의 기간’이는 표현을 더 선호합니다. 그 이유는 비록 암흑처럼 어두운 밤에 교회에서 큰 바퀴벌레들이
많아서 흔들리는 식탁 위에 침낭을 깔고 잤으면서도 광야의 축복처럼 잠들기 전에 본당 의자에 앉아 기타를 치면서 하나님께 찬양과 기도를 드리면서
주님하고만 일대일 교제를 나누는 귀하고 큰 은혜를 받아 누렸기 때문입니다. 광야의 기간은 세상으로부터 떠나 고독의 자리에서 주님하고만
일대일로 교제하는 시간이요, 잠잠히 주님을 바라보면서 침묵 가운데 주님의 부드러운 말씀을 듣는 기간이요(호2:14, 현대인의 성경), 주님이 다윗을 광야로 인도하셔서
빚으셨던 것처럼 저를 빚으셨던 시간이었습니다. 이러한 육신의 눈으로 보기에는 깊은 암흑의 기간이지만 믿음의 눈으로 볼 때에는 광야의 기간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교훈을 받는 것입니다.
셋째
교훈은,
주님께서는 부르실 때에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하는 아나니아와 같은 제자를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묻는 사울과 같은 사람에게 "가서 ... 찾으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면서(9절) “기도하는 중”에 있었을 때(11절) 주님께서는 환상중에 다메섹에 있는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를 부르사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10-11절).
그리고 주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그는 환상 가운데서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들어와 자기에게 손을 얹어 다시 보게 해 주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12절, 현대인의 성경).
그러자 아나니아는 “주님, 그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을 몹시 괴롭혔다는 말을 많은 사람들에게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갈 권리를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이리로 왔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13-14절, 현대인의 성경). 그 때 주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현대인의 성경) “가거라. 그는 내 이름을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널리 전하도록 내가 선택한 사람이다. 그가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인가를 내가
그에게 보이겠다”](15-16절).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2가지 사실이 흥미로워서 관심을 갖고 더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1) 주님께서는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10절)라고 주님의 말씀에 대답한 아나니아를 “주여 누구시니이까”(5절)라고 물었던 “기도하는 중”(11절)에 있는 사울을 ‘가서 찾으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만일 아나니아가 사울에 대해서 들었던 그의 과거에 모습을 생각하고 그 기억에 근거한 사울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관을 뛰어넘지(극복하지) 못했다면 그는 주님의 ‘가서 (사울을) 찾으라’는 말씀에 순종하지 가서 사울을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저는 이 사실을 묵상하면서 주님께서 충분히 변화시킬 수
있는 "사울"과 같은 사람을 우리가 그
"사울"은 절대 "바울"로 변하지 않을 꺼야 라고 단정 짓고 변화의 기회를 우리 마음에서 차단하는 것은
주님을 마음을 다하여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잠3:5). 또 한 가지 든 생각은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지만 절대자 주님은
절대 변하지 않는 저 같은 사람조차도 변화시켜주셔서 목사로 세우사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고백은 이것입니다: “사울을 바울로 변화시켜 주신 주님께서 이 놀라운 변화의 역사를 저에게 이루셨습니다.” 이 놀라운 변화의 역사를 시작하신 주님께서는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 저를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시키시되(고전15:51) 저의 낮은
몸이 주님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실 것을 확신합니다(빌1:6; 3:21).
(2) 주님께서는 “기도하는 중”(11절)에 있는 사울로 하여금 아나니아를 만나게 하시사 사울을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복음 전파자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15-16절).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사도행전 16장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성문 밖 강가로 나갔을 때 루디아를 만나게 되었고 주님께서는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하시사 주님이
뜻대로 그녀와 온 집안 식구들이 다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게 하셨습니다(16:13-15). 저는 이 말씀을 연관해서 묵상할 때 이렇게
"기도하는 중"에 주님은 주님이 계획하신 만남을 통해 주님의 뜻인
놀라운 구원의 역사와 사명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생명을 버리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막8:35, 현대인의 성경).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새해 2022년 1월 1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사도행전 9자아 1-19절 말씀
중심으로 3가지 교훈을 받았습니다: (1) 주님께서는 불신과 무지함
속에서 주님과 주님의 교회와 주님의 제자들을 박해하는 사울과 같은 사람도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사명을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2) 우리에게는 사울과 같은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행9:9) 깊은 암흑의 기간이요 광야의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 주님께서는 부르실 때에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10절)라고 대답하는 아나니아와 같은
제자를 "주여 누구시니이까"(5절)라고 묻는 “기도하는 중”(11절)에 있는 사울과 같은 사람에게 "가서 ... 찾으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11절).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각을 주시사 우리로 하여금 이 교훈들을 깨닫게 하시어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사 ‘가서 그 사람을 찾으라’고 말씀하실 때에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10절) “나를 보내소서”(사6:8)하고 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새창조의 역사를 이루시는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음으로 기도하며 기대하며
기다리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22년 1월 1일,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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