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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관계

부부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선 남편과 아내가 서로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말아야겠지만 부부 관계가 잘 성장하기 위해선 배우자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싫어해도 하는 것입니다.

인공지능적으로 (Artificially Intelligent)

"인공지능적으로 (Artificially Intelligent)






2025년 5월 14일, 저자: V. 포이스레스



그리스도인은 인공지능(AI)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지능적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인간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AI는 위험한가? 초인적인 존재가 될까? AI의 등장은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AI의 좋은 점, 나쁜 점, 그리고 추한 점을 간단히 살펴보자.


좋은 것

먼저 좋은 것부터 시작하자. AI에 관한 좋은 소식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역사에서 비롯된다.

AI는 초기 단계부터 인간 공학의 경이로움이었다. 그것은 인간 창조자들의 재능과 기지, 그리고 끈기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인간 창조자들을 창조하신 분이 누구신지 안다. 바로 하나님이시다. 또한 그 창조주께서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사실도 안다. 그 세계에는 AI를 구동하는 컴퓨터를 계획하고, 제작하며, 작동할 수 있게 하는 자원과 재료가 들어 있다.

AI는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의 노래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물론 우리는 인간 창조자들의 재능과 업적을 찬양한다. 그러나 그것을 존경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재능과 업적을 영화롭고 아름답게 반영하고 모방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처음에 세계와 인류를 창조하신 분일 뿐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인간에게 아이디어와 힘을 주셔서 AI 연구를 하게 하신다. 성경은 하나님이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일반 은혜의 선물을 주신다고 가르친다(마 5:45; 행 14:17; 시 94:10–11). 인간 창조자를 칭찬한다고 해서 그들의 모든 행위를 도덕적으로 승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좋은 선물과 그 근원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다.

컴퓨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세부 사항들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흔치 않은 화학 원소들이 극소량 사용되어 집적 회로를 구성한다. 그 화학 자체와, 지구에 그런 원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미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이다. 또한 회로를 아주 작게 만들어 수백만 개를 단일 칩 위에 집어넣는 미세화 기술도 경이롭다. 파스칼린(1642)이라 불린 파스칼의 계산기와 그 이전의 주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컴퓨터 개념의 역사도 있다. 전기와 반도체를 이해하기 위한 인간의 연구 역시 점점 강력한 컴퓨터의 기초가 되었다.

나 역시 개인적인 경험 속에서 이런 찬양의 요소를 느낀 적이 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한때 컴퓨터가 대부분의 체커 선수들을 이길 수 있었고, 나중에는 세계 최고의 체스 챔피언까지 이겼다.

IBM 컴퓨터 ‘왓슨’이 인간 챔피언들과 퀴즈쇼 Jeopardy! 에 출연했을 때도 나는 TV를 보며 왓슨을 응원했다. 나는 ‘너드’임을 인정한다. 인간 챔피언들을 존경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들의 지식과 순간적인 기억력은 놀랍다. 주께서 주신 은혜로운 재능에 감사한다. 그러나 나는 왓슨이 이기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그것은 왓슨을 만든 엔지니어들의 승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공급과 인간의 잠재력을 새롭게 드러낸 인간의 승리였다.

오늘날 우리는 AI 시스템을 통해 실제적 혜택도 보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단순히 그의 생각을 따라 생각하게 하실 뿐 아니라, 그의 일을 따라 일하게도 하셨다. 기술은 그 결과물 중 하나이다. 인터넷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보다 훨씬 방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활판 인쇄술이 인류를 능력 있게 했듯이, 이제는 더 발전된 기술이 의학 진단의 도움까지 준다. AI는 수백만 건의 의료 기록을 분석하여 질병과 증상의 패턴을 찾아내고 효과적인 치료법을 제안한다.

분명히 긍정적인 흐름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앞으로 더 많은 혜택이 나타날 것이다.


나쁜 것

나쁜 소식은,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죄에 빠진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창조주의 생각을 왜곡하고, 행위뿐 아니라 생각과 말에서도 죄를 짓는다.

따라서 AI도 잘못 사용될 수 있다. 컴퓨터 자체가 본질적으로 악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AI를 설계하고 사용하는 사람들은 문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상반된 경향이 있다. 첫째는 교만이다. 인간은 AI를 통해 초인적, 심지어 신적 존재가 되려 한다. 그러한 힘을 이용해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조종하려 하면서도 자신들이 선의로 한다고 믿는다. 전체주의 정부는 이미 AI를 감시 기술에 활용하고 있다. 자유 세계에서도 소셜미디어의 의견을 검열하는 데 사용된다. 또한 음란물 제작, 거짓 정보 유포, 테러 폭탄 제조 등에도 사용될 수 있다. 그 뿌리 문제는 바로 우상숭배, 즉 인간 자신을 숭배하는 교만이다.

둘째는 나태다. 정상적인 인간적 노력이 너무 힘들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학생은 더 이상 연구나 깊은 사고의 수고를 하지 않고 AI에게 리포트를 대신 쓰게 한다. 감정적 위로를 위해 AI ‘치료사’에게 의지하기도 한다. 그러나 AI는 결코 죄를 직면하게 하지 않는다.

또는 소년 소녀가 실제 연인 대신 AI가 만들어낸 가상 연인과 대화한다. 실제 인간관계의 위험과 어려움 대신 안전한 시뮬레이션 속에 머문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만족을 주지 못한다. 이것 또한 우상숭배다. 고대 이교도들이 나무와 돌로 신상을 만들었던 것과 다르지 않다(롬 1:18–25). 결국 AI는 거짓된 지혜의 원천이 되어 사람을 종으로 만든다.

요한계시록에는 짐승과 음녀의 환상이 나온다. 짐승은 권력 우상, 음녀는 쾌락 우상을 상징한다. AI는 권력과 쾌락의 두 가지 우상 모두를 섬길 수 있는 도구가 된다.


추한 것

가장 추한 소식은, ‘인공지능’이라는 이름과 달리 AI는 전혀 지능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창조 교리는 제한을 전제한다.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다. AI는 인격을 만들지 못한다. AI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는 것은 프로그래머들이다.

AI는 지능을 흉내 낼 뿐이다. 강아지 로봇이 귀엽게 보이지만 실제 개가 아닌 것처럼, 심시티 게임이 도시를 흉내 내지만 실제 도시가 아닌 것처럼, AI는 단지 시뮬레이션이다.

존 설(Searle) 철학자의 유명한 ‘중국어 방’ 사고실험도 이를 보여준다. 중국어를 모르는 설이 지침서에 따라 질문에 답할 수는 있지만, 그는 그 의미를 전혀 모른다. 프로그램도, 하드웨어도 이해하지 못한다. 단지 흉내일 뿐이다.

실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AI는 흉내에 불과하다. 아무리 프로그램을 추가해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산출물의 가치

AI가 특정 목표, 예컨대 체스 승리나 진단 정확도를 높이는 데는 인상적인 결과를 내놓을 수 있다. 그러나 입력이 잘못되면 결과도 잘못된다. 프로그래머들이 말하는 “GIGO(garbage in, garbage out)”의 원리다. 인간의 죄로 인해 언제나 어느 정도 ‘garbage in’이 있다. 따라서 AI는 결코 죄에서 우리를 구해줄 수 없다.

윤리 문제는 더 복잡하다. AI가 코로나 같은 전염병이나 낙태, 성별 정체성 같은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까? 결국 입력된 윤리적 가치가 좌우한다. 누가 그것을 결정할 것인가?

AI는 수많은 언어 데이터를 짜깁기할 뿐 실제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창조적인 통찰을 내놓을 수 없다. 그 결과는 수많은 인간 언어의 평균치일 뿐이다.


복된 소식

AI의 오용은 이미 우리 곁에 있다. 그러나 근본 문제는 새롭지 않다. 그것은 바로 죄의 문제다. 성경은 단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곧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다스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와의 인격적인 교제, 성경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교회 공동체 안에서 예배하는 것은 우상 시뮬레이션에 비하면 힘들고 위험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고, 또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길이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교만과 나태, 기술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로 주님을 섬기게 된다."



출저: https://frame-poythress.org/artifically-intel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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