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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관계

부부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선 남편과 아내가 서로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말아야겠지만 부부 관계가 잘 성장하기 위해선 배우자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싫어해도 하는 것입니다.

주간 짧은 말씀 묵상 (2025년 9월 22-26일)

주간 짧은 말씀 묵상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호적하라 하였으니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거기 있을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누가복음 2:1-7)하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여기서 호적하다이란 헬라어 동사 단어 πογράφεσθαι”(to register) 공적 장부나 기록에 기재하다; 특히 남자의 이름, 재산, 소득 등을 공적 기록부에 등재하다, 등록하다 의미로서 호적하다라는 동사는 신약성경에서 단지 번만 나타나며, 항상 결정적인 공적 기록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세상 권세자들이 인구 조사를 하는 경우이든, 하나님께서 친히 구속받은 자들을 하늘에 기록하시는 경우이든 마찬가지입니다(인터넷).

 

(a)   단어의 역사적-문화적 배경은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정부는 시민, 재산, 과세 대상자들의 체계적인 명부를 관리했는데 등록은 보통 황제의 칙령에 의해 명령되었으며 법적 효력을 가졌습니다.  누가복음의 서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아우구스투스 황제 치하의 그러한 등록 사건 속에 위치시키며, 복음서의 기록을 검증 가능한 역사 속에 뿌리내리게 하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 권세를 이끌어 예언적 목적을 이루시는지를 보여줍니다(인터넷).

 

(i)                  호적하다라는 단어가 신약 성경에 단지 번만 나타나는데 오늘 본문 누가복음 2 1-5절에 번이나 나옵니다(1, 3, 5).  말씀의 배경은 가이사 아구스도로마 황제(B.C. 27 – A.D. 14) 로마 제국 전역에 호적하라 명령을 내렸으므로(1)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갔을 (3) 요셉도 다윗의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이미 임신 중인 그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갔다는 것입니다(4-5).  이것은 세상 권세자인 가이사 아구스도 로마 황제가 인구 조사를 하는 경우입니다.

 

·         그러면 나머지 호적하다라는 단어가 나오는 히브리서 12 23절은 하나님께서 친히 구속받은 자들을 하늘에 기록하시는 경우일 수밖에 없겠지요: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온전하게 의인의 영들과”[(현대인의 성경) “하늘에 등록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 그리고 모든 사람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완전하게 의로운 사람들의 영이 있는 곳입니다”].

 

-          여기서 기록되었다’(현대인의 성경으로는 등록되었다’)라는 헬라어 동사 πογεγραμμένων” 누가복음 2 1, 3, 5절에 나오는 호적하다라는 동사와 같은 헬라어 단어로서 예수님 안에서[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참고: 12:24)] 하나의 완전한 공동체를 이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 하늘[“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인 하늘의 예루살렘”(22, 현대인의 성경)]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하늘에 등록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현대인의 성경)](23)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참고: 인터넷)[여기서 기록된또는 등록된이란 말은 호적된’(2:1, 3, 5)이란 말임].

 

n  결론적으로 히브리서 12 23절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신자들의 모임이 이미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총회에 속해 있으며, 이들을 통해 예수님 안에서 모든 신자들이 하나의 완전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음을 강조하는 말씀으로서 신자들이 세상의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하늘의 영원한 시민으로서 완전한 공동체를 이루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늘의 영광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선언하는 중요한 말씀입니다(인터넷).

 

(2)   이렇게 저는 호적한다라는 헬라어 단어가 신약 성경에 번만 나오는 성경 말씀인 누가복음 2 1, 3, 5( ) 말씀과 히브리서 12 23( ) 말씀을 연관해서 묵상할 마치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로마 제국 전역에 호적하라”[“인구 조사를 하라”(현대인의 성경)] 명령을 내린 것처럼(2:1) “ 중의 이시요(19:16)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신(22:13) 만주의 주님께서 세상이 창조된 이후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사랑하사 선택하여(1:4) 구원하신 모든 신자들의 이름을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미 기록하셨다(참고: 13:8; 4:3, 현대인의 성경)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a)   그리고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2:3-5)라는 말씀을 히브리서 12 23절의 문맥인 22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이 다다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이란 말씀과 연관해서 묵상할 때에 히브리서 11 13-16 현대인의 성경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된 것을 받지 못했으나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에서 잠시 머무는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찾고 있는 고향이 따로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들이 떠나온 고향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은 하늘에 있는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시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 성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i)                  여기서 나은 하늘에 있는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16, 현대인의 성경)하는 말씀을 묵상할 (저도 믿음의 조상들처럼 같은 그리움/사모함이 있기에) 찬송가 479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가사가 생각났습니다:

 

(1절)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평안히 곳이 아주 없네 걱정과 고생이 어디들 없으리 돌아갈 고향 하늘나라

(2절)       광야에 찬바람 불더라도 앞으로 남은 멀지 않네 넘어 눈보라 세차게 불어도 돌아갈 고향 하늘나라

(3절)       구원하신 모시옵고 영원한 영광을 누리리라 그리던 성도들 한자리 만나리 돌아갈 고향 하늘나라 아멘.

 

(3)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2 6-7 말씀을 3 단어 중심으로 묵상하였습니다:

 

(a)   첫째 단어는, “베들레헴”입니다(2:6, 현대인의 성경).

 

(i)                  개역개정 성경은 “거기”라고 번역을 했고, 현대인의 성경은 “베들레헴”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개역개정에서 말씀하고 있는 “거기”는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4) 말씀하기에 현대인의 성경이 “베들레헴”이라고 번역한 것을 타당합니다.

 

·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베들레헴”은 아기 예수 그리스도(메시아)께서 탄생하신 곳입니다.  이것을 미가 선지자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700 전에 메시아(그리스도)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에서 가장 작은 마을 중의 하나이지만 너에게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나올 것이다.  그는 영원 전부터 있는 자이다'](5:2).

 

-          미가 5 2 말씀은 마태가 마태복음 2 6절에 인용하였는데 배경은 “헤롯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2:1-2)하고 말하였을 “헤롯 왕과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하였습니다.  그리고 헤롯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었을 (3-4) “그러자 그들이 “유대 베들레헴입니다.  그것은 예언서에 이와 같이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5, 현대인의 성경)하고 말한 미가 5 2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n  미가 선지자의 예언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고 마태복음 2 1-6절과 누가복음 2 4, 15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ii)                저는 말씀들을 묵상할 특히 마태복음 2 6 말씀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 유대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아마도 이유는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베들레헴”은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하고 한국 개역개정은 번역하였는데 원어 헬라어 의미를 영어 성경 NASB 번역을 했습니다: LAND OF JUDAH, ARE BY NO MEANS LEAST AMONG THE LEADERS OF JUDAH(‘유다 땅아, 네가 유다의 지도자들 중에서 결코 가장 작은 자가 아니로다’).

 

·         저는 번역을 생각할 “유다의 지도자들 중에서”란 말씀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개역개정은 “유대 고을 중에서”하고 번역을 했지만).  그리고 관심 속에서 “유다의 지도자들”을 묵상할 사무엘상 16장에서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왕을 보았느니라”(1)하는 말씀 속에서 “한 왕”이 바로 “베들레헴 사람” 다윗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13).

 

-          그리고 저는 다윗을 생각할 사무엘상 17장에서 다윗이 “키가 거의 3미터나 되는 거인인 데다가 놋으로 만든 투구를 쓰고 무게가 57킬로그램이나 되는 놋갑옷을 입고 다리에는 놋으로 만든 각반을 대고 놋창까지 들고 나”온 “블레셋 장군” “가드 사람 골리앗”(삼상17:4-6, 현대인의 성경)에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알게 하겠고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45-47)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물매와 돌로 골리앗을(50) 죽이고 돌아올 때에 아브넬이 다윗을 사울 앞으로 인도하니 사울이 다윗에게 “소년이여 누구의 아들이냐”하고 물으니 다윗이 “나는 주의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이니이다”(57-58)하는 말씀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n  이렇게 유다 베들레헴은 미가 선지자의 예언대로 “유다에서 가장 작은 마을 중의 하나이지만”(5:2, 현대인의 성경) 유다의 지도자들 중에서 결코 가장 작은 자가 아닌(2:6) 다윗 왕이 태어난 곳으로서 다윗 왕의 혈통을 통해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2:6, 15-16, 현대인의 성경).

 

(b)   둘째 단어는, “구유”입니다(2:7).

 

(i)                  1세기 유대에서구유”(φάτνη), 여물통은 대개 거칠게 다듬은 돌로 만든 상자이거나, 집이나 동굴 외양간의 낮은 층에 만들어진 진흙을 바른 움푹한 곳으로, 밤에 가축을 두는 장소에 설치되었습니다.  이는 가축의 높이에 맞춰 놓였으며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축의 먹이를 담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습니다.  흔함 때문에 구유에 대한 언급은 즉시 농민들의 일상생활을 떠올리게 합니다(인터넷).

 

·         이렇게 농민들의 일상생활을 떠올리게 하는 흔한 구유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축의 먹이를 담기 위해 고안된 구유에 유다의 지도자들 중에서 결코 가장 작은 자가 아닌(2:6) 다윗 왕의 혈통을 통해 오신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뉘었습니다(2:7). 

 

-          물론 이유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지만[현대인의 성경으로 말한다면, “여관에는 사람이 차서 있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지만](7)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독생성자 예수님을 땅에 보내실 없이 많고 많은 장소들 중에 하필이면 “마구간”(7, 현대인의 성경) 안에 있는 “구유”[“마소이 먹이를 담는 그릇”(인터넷)] 아기 예수님을 뉘이도록 하신 것일까요?  이유는 성부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메시아에 관하여 예언하신 이사야 53 2 말씀을 성취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n  여기서연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다는 말씀은메시아의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시작을 나타냅니다.  화려한 배경이나 화려한 모습 없이, 평범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시작한다는 의미입니다”(인터넷).

 

n  또한 여기서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하는 말씀은세상의 관점에서 , 흠모할 만한 외적인 아름다움이나 풍채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는 메시아가 화려한 왕의 모습이 아니라 고난받는 모습으로 것이라는 예언입니다”(인터넷).

 

-          이렇게 메시아(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화려한 영광이 아닌, 고난과 멸시를 통해 구원을 이루시고자 땅에서 “구유”에서 시작하시고 결국에 가서는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신 (2:8, 현대인의 성경) 보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진정한 아름다움은 겉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입니다(참고: 인터넷).

 

(ii)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님에게는 “풍채나 위엄이 없고 우리의 시선을 만한 매력이나 아름다움도 없”습니다(53:2, 현대인의 성경).  그러기에 아기 예수님이 뉘이신 마구간 안에 있는 “구유”도 우리의 관심을 만한 매력이나 아름다움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관심은 결코 “구유”같은 교회 건물이 아닙니다.  우리가 매력을 느끼는 것은 “화려한” 교회 건물입니다. 

 

·         에스겔 16 14-15 말씀이 생각나 다시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네 화려함으로 말미암아 명성이 이방인 중에 퍼졌음은 내가 네게 입힌 영화로 화려함이 온전함이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나 네가 화려함을 믿고 명성을 가지고 행음하되 지나가는 모든 자와 더불어 음란을 많이 행하므로 몸이 그들의 것이 되도다.

 

-          분명히 이스라엘의 아름다움과 영광스러운 명성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영화로움 덕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화려함이 자신들의 능력이라고 착각하고 하나님이 주신 부와 명성을 믿고 교만해졌습니다.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을 버리고, 여러 우상을 섬기며(영적 음행) 세상을 따라가는 죄에 빠졌습니다(인터넷).  그들은 세상의 속한 자들과 짝지어 살면서 자기 자신을 좋게 하려고 세상을 즐겼던 것입니다(박윤선).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은혜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n  지금 교회는 어떠합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와 축복들을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지금 교회는 모든 은혜와 축복들을 교회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고 있습니까?  교회가 너무 화려해 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화려함이 하나님께 영광을 들어내기보다 교회 자체의 영광을 들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보다 교회의 이름이 들어나고 있습니다.  교회 이름도 브랜드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교회 이름이 세상 사람들에게도 명성을 얻고 있습니다.  결과 명성으로 인하여 교만해진 교회는 자기의 화려함을 믿고 있습니다.

 

n  지금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화려함을 내적화하지 못하고 외면화하여 세상과 짝지어 다를 없이 살아가면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기보다 교회 자신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선물인 자녀들을 하나님께 받치기보다 세상에 받치고 있습니다.  교회 직분 자들 조차도 자녀들을 주님과 그의 복음과 그의 교회와 나라를 위하여 받치기보다 세상의 성공의 사닥다리를 올라가게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낳은 자녀들인데(20) 자기 자신과 세상을 위하여 받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문제는 지금 우리는 죄를 작은 일로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지금 교회는 죄를 죄로 여길 있는 능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n  교회의 화려함?  주님이 주님의 교회에게 입힌 영화로 교회의 화려함이 온전해져야 하는데 사람들이 교회에 치장한 화려함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명성이 세상 사람들 중에 퍼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 ( 16:14)

 

n  교회의 화려함을 믿고 교회의 명성을 이용하는 목사들과 교인들?  사람들이 치장한 교회의 화려함을 믿고 교회의 명성을 이용하여 세상에 나가서 돈을 우상화하여 "창녀짓" 하는 목사들과 교인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16:15, 23, 현대인의 성경).

 

(iii)              아기 예수님이 뉘이신구유”(2:7, 12 16) 계속해서 묵상할 아기 모세가 담겨졌던갈대 상자”(2:3) 생각났습니다.  비록구유”와갈대 상자”가 직접적인 관계가 없지만, 성경에서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구원과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물건이며, 특히 히브리어로 '테바(תֵּבָה)'라는 단어로 불린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인터넷).

 

·         흥미로운 점은 모세의 갈대 상자는 히브리어로 '테바(תֵּבָה)'라고 불리는데, 노아의 방주도 히브리어로 '테바(תֵּבָה)'로서 단어는 물속에서 생명을 보전하는 상자를 통한 구원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구약에서 ‘'테바(תֵּבָה)'라는 단어가 사용된 스물여덟 번의 모든 경우는 노아가 만든 방주( 6–9) 아기 모세를 보호한 갈대 상자( 2:3-5) 이야기 속에만 나타납니다(참고: 인터넷).

 

-          여기서 노아의 “방주”는 인류의 남은 자들을 보존한 것과 달리, 모세의 방주(“갈대 상자”) 하나님께서 언약의 민족을 애굽(이집트)에서 해방시킬 모세를 보존하였습니다(인터넷). 

 

n  아기 예수님의 방주(“구유”) 하나님께서 사랑하사 창세 전에 택하신 교회를 죄에서 자유를 누리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구원자 아기 그리스도 예수님을 보전하였습니다.

 

n  히브리어테바’((תֵּבָה) 성경에서 스물여덟 등장하는데, 언제나 하나님이 설계하신 피난처를 가리키며, 그분의 백성을 심판의 가운데서 생명과 사명으로 인도합니다.  홍수에서부터(노아의 방주) 나일 (모세의 갈대 상자) 이르기까지 주제는 동일합니다.   , 구원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며, 그분이 정하신 방주 안에서 안전히 보장됩니다.  그리고 이는 궁극적으로 크신 방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안에서 믿는 자들이 영원한 안전을 누리게 됩니다(인터넷).

 

(c)   마지막 셋째 단어는, “강보”[“포대기”(현대인의 성경)입니다(2:7).

 

(i)                  “강보”라는 단어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2 7절뿐만 아니라 12절에도 나오는데 구절 모두에서 마리아가 “그(아기 예수님) 강보에 싸서”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동사는 태어난 예수님을 향한 그녀의 의도적이고 세심한 돌봄을 나타냅니다(인터넷).

 

(ii)                아기를 강보로 싸는 것은 고대 근동에서 보편적인 관습이었습니다.  길고 좁은 조각을 어깨부터 발까지 단단히 감아 주어 따뜻함과 안전을 제공하고, 사지가 곧게 유지되도록 했습니다.  유대 전통에서는 모든 아이가 반드시 씻겨지고, 소금이나 기름으로 문질러진 ( 16:4), 강보에 싸여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이는 환영과 정결, 언약 공동체에의 포함을 상징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가가 기록한 강보 언급은, 비록 가난과 정상적인 숙소에서의 배제로 인해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예수님이 신실한 유대인 어머니로부터 평범한 사랑과 언약적 돌봄을 받으셨음을 보여줍니다(인터넷).

 

(iii)              저는 “강보”[“포대기”(현대인의 성경)](7, 12) 묵상할 요한복음 19 4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세마포”가 생각났습니다: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         아기 예수님이 “강보”에 싸여져 있었다(2:7, 12) 말씀은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말씀이라면, 예수님의 시체가 세마포에 싸여졌다(19:40)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          결국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과 관련된 “강보”와 “세마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입히신 “구원의 옷”(61:10) 장차 구속받은 우리들에게 주어질 ‘흰옷’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내가 말하기를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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