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한 가지 일만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4)
[빌립보서 3장 10-14절 말씀 묵상]
성서 이후의 종교 입문서들 제일선의 자리를 차지하는 책 3권이 있습니다. 그 3권은 바로 어거스틴의 “참회록”과 죤 번연의 “천로역정” 그리고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란 책입니다.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란 책의 제 23장 “죽음을 명상하는 것에 대해”를 보면 저자는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하루하루를 오늘 죽음을 피하는 것보다 죄를 피하는 것이 더 쉽다. 또한
불행하게도 오래 살수록 우리의 죄는 더 늘어나기 쉽다. 죽는 것이 두렵다면,
오래 사는 것이 더 두려운 일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항상 죽음을 준비하라
(눅21:36). 죽음의 날에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고자 노력했던 사람은 지혜롭고
축복받은 자이다. 자신의 영혼을 구제하는 일을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친구들
이나 이웃들에게 의존하지 말라. 영원한 삶을 얻을 수 있는데도 최선을 다해
살지 않는 것은 너무도 유감스러운 일이다. 죽음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려면
회개함으로 육신을 복종시켜라. 죽을 때 누가 그대를 기억할 것이며, 누가
기도해 주겠는가? 그러므로 나의 친구여, 지금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하라.
시간이 있을 때 자신을 위해 영원한 부를 축적하라(눅12:33). 오로지 구원에
관해 생각하고, 하나님의 것들에 대해서만 관심을 쏟으라. 죽은 후에 그대의
혼이 기쁘게 하나님께로 합일될 수 있도록 나아가라”(인터넷).
셋째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길 원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10절을 보십시오: “내가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며 그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분의 죽음을 본받아”(현대인의 성경).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길 원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한 2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Walvoord,): (1) 첫째는, 그리스도가 죄를 위하여(for sin) 죽으신 것처럼 바울은 죄에 대하여(to sin) 죽은 자로서(롬6:2, 6-7, 골3:3) 예수님을 믿기 전에 옛 사람의 죄악 된 삶으로부터 잘라내되 매일 삶 속에서 죄의 삶에 분리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롬6:1-4, 11-14). (2) 둘째는, 그리스도가 복음을 전하시다가 죽으신 것처럼 바울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죽겠다는 것입니다. 즉, 그는 유익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20-21절을 보십시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이 유익한 죽음은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처럼(2:8) 바울 또한 주님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고 싶다고 말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고 싶다고 말한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의 합당한 삶을 살면서 순교까지 하길 원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미 빌립보서 2장 17절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의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 생명의 피를 제사 술처럼 따라 붓는다고 해도 나는 기뻐하고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여기서 “전제”(a drink offering)란 “재물 위에 붓는 술”로서 바울은 지금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자기 자신의 피를 제물로 부은바 될지라도 자기는 기뻐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박윤선). 그 말은 한 마디로, 바울은 자기가 순교한다 할지라도 기뻐하겠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을 본받은 사람이 바로 에바브로디도라 생각합니다(25절).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에바브로디도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30절). 달리 말한다면,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기를 원했다는 말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싶었다는 말입니다. 이미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하나님을 만났을 때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의롭다하심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온전한 의로운 상태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 이미-아직도 사이에 살아가고 있었던 바울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었습니다(MacArthur). 즉, 그는 성령 하나님의 성화의 역사를 간절히 사모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3장 9절에서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에 대해서 말한 것입니다. 즉, 그는 예수님을 믿어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는 “칭의”(justification)에 대해서 9절에서 말한 후 오늘 본문 10절에 와서는 “성화”(sanctification)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화”란 무엇입니까?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제 35문을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화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역사인신데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온 사람이 새로워짐을 얻고 죄에 대하여는 점점 죽고 의에 대하여서는 점점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성화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식과 의와 거룩으로 새롭게 됩니다(골3:10, 엡4:24). 우리의 성화는 우리가 죄에서 완전히 놓여 자유하게 될 때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도달할 때 즉 우리의 영화의 단계에서 완성합니다. 이 성화의 요소는 두 가지입니다: (1) 죽임: 우리가 점차로 죄를 죽여 나간다(롬6:11), 그리고 (2) 살림: 우리는 의를 향해 살아나간다(롬6:13)(인터넷). 그러면 왜 바울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 칭함을 얻은 자로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를 사모하였습니까? 그 이유는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길 원했기 때문입니다(빌3:11).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이미 의롭다 함을 얻은 바울이 성화를 사모한 이유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길 간절히 원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는 것’이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한 2가지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실제로 육신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 (2)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 그런데 바울은 이미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믿음으로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다시 살아났기에 그가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11절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였다는 말은 육신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육신의 죽음에서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 그 순간에 자기의 죽은 몸이 부활하여 영광스러운 몸을 입되 완전한 의로운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도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간절히 사모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 닮아가기를 더욱더 간절히 사모할 수 있길 기원합니다.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예수를 닮기 원함이라
예수의 형상 나 입기 위해 세상의 보화 아끼쟎네
예수를 닮기 내가 원하네 날 구속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 속에 지금 곧 오사 주님의 형상 인치소서“
[찬송가 505장,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1절과 후렴)]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를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5년 10월 19일,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으로 세움 받기를 기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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